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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6:13 - 유혹의 시련 - 윌리암 버클리

은바리라이프 2012. 2. 15. 03:06


마6:13 - 유혹의 시련 - 윌리암 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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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시련(THE ORDEAL OR TEMPTATION)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3).

 

 

 

이 기원의 의미를 연구하기 전에 번역에 있어서의 차이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기원은 두 개의 절로 되어 있는데 먼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Lead us not into temptation)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이 번역은 꽤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으로서 위클리프 역, 틴데일 역, Great bible, Bishops' Bible 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한편 라임스 역과 Geneva Bibles 등에는 단지 ‘temptation’이 ‘tentation’으로 나타나 있는 것만이 다를 뿐입니다.

 


떠 머펫 역, 녹스 역, 킹슬리 윌리엄스 역 등에도 똑같은 번역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기원에 있어서 번역상의 차이가 나타나는 구절은 ‘Lead'와 ‘temptation'으로서 The Revised Version 에는 “Bring us not into temptation"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류(Rieu)역, 위이마우스 역, New English Bible 등에도 ‘Lead' 대신 ‘Bring'을 쓰고 있습니다.

 


한편 훼라 펜톤 역에는 “Let us not be led into temptation"으로, E. J. 굿스피드 역에는 “Do not subject us to temptation"으로, 아람어 원문에 기초해서 번역했다고 하는 C. C. 토레이 역에는 “Let us not yield to temptation"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또 ‘temptation'을 다른 단어로 바꾸어 번역한 현대 역본이 두 개 있는데 E. V. 류 역, 훼라 펜톤 역, 모펫 역, 녹스 역 등에는 ‘evil'을 사용하고 있으며 The Revised Version, 웨이마우스 역, 킹슬리 윌리엄스 역, E. J. 굿스피드 역, New English Bible 등에는 'The Evil one'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번역상의 차이는 이 기원의 근본 의미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기도문 중에서 이 기원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본능적으로 나오게 되는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소톰은 말하기를 이것은 인간의 연약성과 위험성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자연스러운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또한 이상하게도 이 기원은 그 의미의 해석에 있어 여러 가지 주장과 논쟁이 따르고 있습니다. 이 기원은 그 의미의 해석에 있어 많은 어려움이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를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우리 인간에게 있어 유혹(시험)은 피할 수 없을 만큼 실존적이고도 숙명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리겐이 지적한대로 욥기 7:1을 70인역(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리는 것이 이 세상의 인생이 아니냐?” 또한 오리겐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이성을 갖게 된 이래로 한 시라도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었는가?" 인간이 전혀 아무런 유혹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가정조차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시험’(trial)과 ‘유혹’(temptation)은 헬라어로는 둘 다 ‘페이라스모스’(peirasmos)로 나타내집니다. 그런데 성경은 ‘시험’(trial)의 중요성을, 가치를 높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기23:19)라는 고백을 하였으며,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야고보서1:2,3)라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도 이러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6). 이 구절들에 있어서 ‘단련’이나 ‘시험'(trial) 등은 모두 '페이라스모스’로서 이 단어가 바로 이 기원의 시험(temptation)을 나타내기 위해서도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삶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유혹을 받지 않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며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은 만일 인생에 시험이 없다면 그것은 무언가 중요한 것이 결여된 삶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2) 이 기원의 표면에 나타난 의미를 살펴볼 때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는 분인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의 유혹에 빠지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무슨 책임이 있단 말입니까?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시험에 빠지도록 유혹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영역된 성경으로는 규명하기가 어려운 의미를 조사하기 위해 이 기원에 나타나는 헬라어에 대해 좀 더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험’(temptation)으로 번역된 원래의 단어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페이라스모스’입니다. ‘피이라스모스’는 명사로서 흔히 헬라어 명사의 어미가 ‘-asmos'로 끝나게 되면 그것은 계속되는 과정을 뜻하게 됩니다. 이 단어는 성서에는 자주 등장하지만 일반 문학에는 잘 쓰이지 않는 명사로서 우리가 이 단어의 동사형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이 단어와 이 기원의 뒤에 숨어있는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단어의 동사형은 ‘페이라제인’(peirazein)으로서, 그 뜻은 영어의 ‘to try' 보다 훨씬 다양하고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a) '페이라제인‘은 단순히 어떤 일을 한 번 시도해 본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6:7에 보면 “They attempted to go into Bithynia"라는 구절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으나 이것은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b) 이 단어는 ‘시험하다’(to test), ‘증명하다’(to prove)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도키마제인’(dokimazein)과 같은 뜻을 가진 것으로서 어떤 금속의 재질, 순수성 등을 시험하거나 어떤 약의 효능을 시험해보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 속에서는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왕상10:1)했던 것과 계시록 2:2에 나오는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라는 구절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고린도후서 13:5에서 좋은 용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perrazein)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dokimazein)하라.” 이처럼 ‘페이라제인’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순수성 여부를 시험하는 과정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c) 성경 속에서 ‘페이라제인’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신앙이 충성되고 신실한 것인가 여부를 시험해 보시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뜻으로 쓰인 용례를 성경 속에서 찾아보면 신명기 13:3에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하는 구절과, 창22:1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을 요구하신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01:13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감당할만한 시험밖에는 허락지 아니하신다고 하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페이라제인’이 가지고 있는 이 3번째 뜻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어 사용 방식대로 흠정역 성경에는 ‘test'와 ‘tempt'가 같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창22:1을 흠정역 성경으로 보면 “God did tempt Abraham"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범죄하도록 유혹하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tempt'의 의미는 곧 'test'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실제로 RSV성경에는 흠정역에 ‘tempt'로 되어 있는 것을 ‘test'로 고친 곳이 20군데 이상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서 ‘페이라제인’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되 인간이 그 시험을 이겨내면 이전보다 더욱 영적으로 강해지고 성숙해질 수 있는 그런 시험으로써 사실 ‘유혹’(temptation)이 아닌 ‘시험’(test)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d) 신약 성경에 보면 ‘페이라제인’이 악의를 가지고 상대방을 힐문하거나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 시도를 나타내는데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책잡으려고 계속 교묘한 질문을 던지는 행동 속에서 이러한 용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16:1; 19:3; 12:18).

 


(e) 또 ‘페이라제인’은 영어의 ‘tempt'에 해당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용례는 고린도전서 7:5의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동안은 하되 다시 합라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라는 구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탄은 ‘호페이라존’(ho peirazon), 즉 ‘유혹하는 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던 자도 바로 이 사탄이었습니다(마태복음 4:1-11).

 


(f) 지금 우리가 연구하고자 하는 이 기원의 의미 규명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신약과 구약에 걸쳐 나타나는 ‘페이라제인’의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나타냅니다(출애굽기 17:2; 민수기14:22; 이사야 7:12; 마태복음 4:7; 사도행전 15:10). 이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을 한번 시험해 보고자 하는 것으로서 흔히 하나님의 진노와 벌을 받지 않고 얼마나 자기 뜻대로 행할 수 있는가 시도해보는 것을 뜻합니다.

 


이 ‘페이라스모스’를 번역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 속에는 최소한 3가지의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특성을 시험해본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어떤 사람을 연단하기 위해 시험을 거치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또한 죄에 빠지도록 유혹한다는 3중의 의미가 이 단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페이라스모스’를 영어로 옮기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이런 다양한 뜻을 포괄하는 하나의 단어를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들은 이 기원을 번역함에 있어서 주로 ‘유혹’(temptation)의 관점에다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한편 E. V. 류 역은 이것을 ‘ordeal'로 옮겼고 New English Bible은 'test'옮김으로써 주로 ‘시험’(test)의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temptation'과 'test'의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를 찾아본다면 그것이 ‘trial'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RSV성경은 8군데 이상 AV 성경에서 ‘temptation'으로 표현한 것을 ‘trial’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22:28, 사도행전 20:19, 야고보서 1:2, 베드로전서 1:6, 갈라디아서 4:14, 야고보서 1:12, 베드로후서 2:9, 요한계시록 3:10 등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페이라스모스’는 어떤 사람을 시험하는 사건이나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와 반응에 따라 그의 사람 됨됨이가 나타나게 되는 그런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유혹’(temptation)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를 가늠해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유혹’에 대해 3가지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 유혹은 보편적이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런 기원을 드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 유혹은 하나님의 계획이나 섭리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뜻과 섭리의 일부분으로 작용하며 인간의 삶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3) 유혹에는 늘 연단의 의미가 들어 있으며 따라서 일종의 시험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죄악에로의 유혹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인간의 저항력과 인내에 대한 시험의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유혹을 너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벌로서 생각하기보다는 인간에게 영광의 기회를 주신 것으로 보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됩니다.

 


4) 이외에 한가지 사실을 더 첨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기원을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유혹을 이길 수가 없으며 이 유혹으로부터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유혹’에 대한 이러한 성서적인 이해를 갖게 될 때에 우리가 살펴보고자 했던 문제의 해결에 매우 많은 도움을 얻게 됩니다. 즉 ‘유혹’(temptation)이 하나님의 행위와 관련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기원의 의미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의 의미부터 살펴봅시다. 지금까지 우리가 ‘페이라스모스’에 대해 살펴본 내용들이 모두가 사실이고 신약의 기자들은 이런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라스모스’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다분히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원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고의로 시험에 빠뜨리거나 유혹에 빠지도록 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쪽으로 해석을 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원에 나타나 있는 단어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러한 해석에 도움을 얻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1) 먼저 전치사 ‘into'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로는 ‘에이스’(eis), 히브리어로는 ‘리드헤’(lidhe)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그 의미는 ‘~의 손안에’ 또는 ‘~의 세력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원의 의미를 좀 확대해서 설명해 보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기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이 세상에 유혹을 받지 않는 인간이 없으며 내게도 유혹이 찾아 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나를 버려두지 마소서. 그 유혹의 순간에 악의 세력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지켜 주소서.”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허기를 위함이니이다”(요한복음 17:15). 즉 이 기도는 유혹의 세력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것을 간청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기원은 곧 유혹의 세력에 빠지지 않고 피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으로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어거스틴은 또한 이런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혹을 받는 것’(being tempted)과 그 ‘유혹에 빠지는 것’(being brought into temptation)의 의미를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유혹에 빠지게 되는 사람은 그를 유혹하는 악의 세력에 굴복하여 정복당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것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기원은 근본적으로 유혹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라기 보다는 유혹과 싸워 이길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오리겐은 욥기 7:1을 헬라어 성경을 통해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혹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리겐은 욥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욥이 유혹에 빠지지 않고 유혹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사탄이 그를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요 사탄이 그를 어떠한 방법으로 공격해 오는지 간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찾기 보다는 그 유혹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루터도 이와같은 입장에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3) 초대교회 시대부터 받아들여졌던 이 기원에 대한 해석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라틴어판 성경 속에서 이 기원이 이렇게 나타나 있다고 주장합니다. “Do mot allow us to be into temptation"(Ne nos induci patiaris in temptationem). 사실 터툴리안, 키프리안, 어거스틴도 모두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편 시리아 역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Do not make us to enter into temptation." 히브리어 동사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이 기원에 쓰인 동사는 ‘힙필’형 동사로서 이것은 사역이나 허락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원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유혹 받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본성과 이웃의 유혹으로부터 일어나는 시험에 빠져들지 않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육정과 세상의 유혹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여 주소서.” 즉, 이 기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과 순결,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지금까지의 해설들은 유혹과 시험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하기엔 뭔가 주저되는 입장에 선 사람들에 의해 내려진 것들로서 실제 이 기원의 의미 해석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 외에 두 가지 사실을 더 밝혀두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 첫째는, 실제 히브리인들은 이 기원을 드리는데 있어서 그다지 어떤 어려움이나 해결하기에 곤란한 문제점들을 느끼지 않았으리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야고보서 1:13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라는 구절이 나오기는 하지만, 히브리인들의 신앙과 사상 속에는 심지어 유혹하는 시험마저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아래 들어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자기의 삶을 회고하면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이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으니”(창50:20)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심지어 악한 일까지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들어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 세상에 어떤 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다는 철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로, 지금까지의 모든 설명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실제 이 기원을 통해 느끼는 순수한 감정과 관계없이 너무 신학적이고 논리적인 사변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손쉬운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지도하는 트레이너의 순수한 의도와 좋은 동기 또한 그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운동선수라 하더라도 너무 훈련이 고되고 힘들게 되면 “제발 그만 좀 하세요. 날 좀 내버려두세요!”라고 외치게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 기원 속에도 그러한 인간적이고도 본능적인 요소가 들어있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약함과 이 세상의 험난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 하나님께 본능적으로 호소하고 매달리게 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 이 속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2) 이제 이 기원의 후반부인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Deliver us from evil)에 대해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구절에 대한 번역은 ‘evil'가 'The Evil one' 두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자체가 이 두 가지로 다 번역될 수 있으며 또한 이 두 가지 번역으로 인한 차이는 그 의미에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한편 성경 속에는 ‘The Evil one'에 대한 명칭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a) 먼저 이것을 ‘사탄’(Satan)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사탄’(Satan)이란 단어는 그 자체가 고유명사는 아니며 ‘적’, ‘원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도 ‘사탄’이 이런 뜻으로 쓰이고 있는 곳이 7군데나 있습니다. 그것은 민수가 22:22, 사무엘상 29:4, 열왕기상 5:4, 11:14, 23, 25 등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탄’(Satan)이란 말은 단순히 ‘적’, ‘원수’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한편, 우리가 알고 있는 ‘사탄’(Satan)은 하나님의 아들들 중의 하나였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욥 1:6).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은 인간을 대적해서 하나님 앞에 인간을 고소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욥 1:6~12). 그래서 그는 인간의 ‘적’이며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b) 또한 이것을 ‘마귀’(Devil)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에 대한 헬라어는 ‘디아블로스’(diabolos)인데 이 단어 역시 원래 고유명사나 어떤 호칭은 아니었으며 단지 ‘참소하는 자’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습니다. 실제 신약성경에 ‘디아블로스’가 ‘참소하는 자’의 의미로 Tm인 용례는 디모데전서 3:11, 디모데후서 3:3, 디도서 2:3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과 ‘마귀’는 그 의미에 있어서 그다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어쨌든 ‘악한 자’(the Evil one)의 목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불화 하게 하고 그 관계를 깨뜨리고자 하는 데에 있습니다. ‘악한 자’란 곧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간을 파멸로 이끌려고 하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인격화시킨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죄악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힘일 수도 있고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나는 악한 생각과 행동, 모든 악한 결정들을 누적된 힘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원은 그러한 악의 세력에 빠지지 않게 무장하고 방어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18에서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루터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기원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모든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평안하고 행복한 인생의 종말을 맞을 수 있도록, 또한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떠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다.”

 


루터가 말한 것처럼 이 기원은 이 세상 삶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얻기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주기도문을 마무리하는 이 기원은 그 속에 3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이 처해있는 상황의 위함과 어려움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으며 둘째로,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는데 있어서의 인간의 무력성을 고백하고 셋째로, 이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원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키프리안의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실 것을 간구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악한 세력과 싸워 이기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니 우리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