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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방사(方士=서불)일생일대와 ,,,,,불로초의 비밀을 밝힌다, 남해 상주리 석각(서불과차 : 徐市過此) 관광자원화 시급

은바리라이프 2012. 4. 2. 12:59


 

진시황의 방사(方士=서불)일생일대와

                      ,,,,,불로초의 비밀을 밝힌다,남해 상주리 석각(서불과차 : 徐市過此) 관광자원화 시급 

<특별기고 : 장대우>

 남해군, 신비를 밝히고자 12일 현지답사.. 설명회도
2009년 08월 13일 (목) 13:19:52장대우  jdw410@daum.net

오랜 세월동안 
전설속에서만이 묻혀 내려오던 남해 서불과차에 대한 논란이 계속 되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선 유일하게 남아 있는 흔적이라든가 유적등 고귀한 문화재를 가지고 있음에도 제대로 개발을 않는 등 지켜보기만 하고 있어 관광자원화 추진사업이 보다 시급한 실정에 있다.

  
8월 12일 정현태군수/이호균문화원장/장대우 본지 칼럼리스트.....현지답사

이에따라서 남해군은 12일 상주면 양아리 두모고개와 금산-부소대로 이어지는 중간지점 거북바위라 불리는 서불과차 석각 현지에서 정현태 군수를 비롯한 남해에서 많은 연구와 관련이 있는 남해서복회원을 비롯한 문화원과 역사연구회등 유관단체와 지역주민등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설명회와 아울려 미래지향적 관광개발에 대한 토론회를 갖기도 했다.

이날 모인 자리에서 오랫동안 지역에서 연구해온 李금수씨는 앞으로 관광산업으로 부상시키기 위한 재평가를 시도해 뒤늦게나마 가치 있는 관광자원으로 활용되어야 한다며 시급한 대책을 촉구 했으며 참석한 이호균 문화원장등 각 분야 단체임원들 역시 서불진위 논란보다 관광자원화가 우선돼야 한다며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으기도 했다.

 

  

정현태군수도 내년에 15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노도 문학의 섬 개발계획과 함께 금산으로 이어지는 관광 연계사업으로 재검토하여 추진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남해군은지난 2006년 10월20일 서불과차에 대한 고대수수깨끼를 풀기위한 학술 심포지엄도 개최한바 있으나 크다란 실마리를 찿지 못한체 학자들은 서불과차 입증보다 암각화 자체연구에 중점을 둬야 할것리고 밝혔다 ,그러나 계속 각국나라들의 관심 있는 학자들의 현장조사가 끊이질 않고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암각화는 오로지 전설로만이 이어 갈뿐이다. 그런데 이 서불각자는임서(臨書)로서 위창 吳세창선생이 임서 한 것으로 선친 吳경석부친이 이 암각의 탁본을 1860년에 중국으로 가져가 당시 중국에서 금석학 전문가에게 감식을 의뢰한 결과 “서불과차”라고 한데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서불과차는 2,200여년전 중국 진시황의 방사(方士)서복(서불)이 장생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불로초 탐사에 나셨으나 첫 출항에는 실패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2번째 의도적으로 탈출한 출항지와 상륙지 그리고 정착지가 뒤늦게 밝혀져 큰 관심을 모우기도 했다.

 

따라서 남해서복회(회장 ;박창종)은 지난2007년4월에 3박4일의 일정으로 진시황의 방사 서복의 유적을 찿아서 중국의 서복촌을 비롯한 각곳을 탐방 다녀온봐도 있다.

또한 지난해12월7일 남해서복회에서 년말 임시총회를 하면서 제주도방송국에서 기획제작한 다큐멘터리 "진시황 불초를 찿아서" 라는DVD영상물을 구입 관람하면서 서불과차에 대한 갖가지 의문점 과 비밀의 수수께끼를 풀게 되었다.

서복(徐福)=서불(徐巿)은 고대중국 제(齊)나라 출신이며 진시황(秦始皇)28년 진나라에서 방사노릇을 했던 사람으로 중국 산동반도 낭야(浪耶)군에서 태어나 진나라 말기쯤 낭야띠에서 동남동녀 500여명을 거느리고 목숨을 건 신비의 불로초 탐사에 나셨으나 첫 출항에서는 실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2차 대규모 선단을 거느리고 의도적으로 장쑤성 연후항에서 두 번째로 탈출을 시도 나무뗐목으로 거친파도와 싸우며 망망대해를 헤쳐온 서복선단은 망경창파 해상에 일점선도로 보이는 이곳 남해의 영악인 보타산, 지금의 금산 산하 앵강만과 조용한 포구 벽련포와 두모포에 기착, 일시 상륙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수년간 사냥을 즐기는등 생활하다가 그당시 상륙한 지점에 표지를 한 암각문이 단군세기의 가림다문자와 유사한 상형문자를 남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문자는 고대 역사를 밝히는데 귀중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중요한 유적이다. 바위가 거북 모양을 하고 있어 '거북바위'라고도 부른다.

이곳 상주양아리 암각화는 관심있는 학자들의 현장조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서불이라는 사람이 이곳 금산에 왔다가 사냥을 즐기다가 갔다"라고 쓴 글이라고 해석하지만, 그들도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고대문자라고 하는 사람, 고대 거란족의 문자라고 하는 사람, 훈민정음 이전의 한국 고대문자라는 사람, 산스크리트 계통의 글자라고 주장하는 사람, '귀인의 사냥터'라는 그림 표지라고 주장하는 사람 등등 아주 많은 학설이 있지만, 아직까지 그 정답은 '알 수 없다'

 

서불 일행은 불로초를 구하려 온 것이 아니라 망명자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진나라의 혹정을 피해 망명한 자들이 한반도에 건너와 일부는 일본으로, 일부는 남해안에 그대로 정착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 중 일부가 서불 일행이라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부산을 비롯해 경남·제주 일원에는 신선사상이나 서불과 관련된 전설이 숱하다. 
이처럼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거북바위 옆에는 거대한 바위벼랑이 있다.

또 그들은 남해을 떠남에 앞서서 미조면 설리 해변 암석에 떠난다는 표지를 남겼다는 것, 
이설리를 서리고적(徐吏古跡)이라고도하며 서리가 떠남곳이라 하여 서리곶이 즉徐離곶이라 불려저 왔다는설도 있다.

기원전 (255년)3세기에 진시황제의 명을 받아 삼신산에 있는 불로 불사약을 찿아나선 서불 일행선단은 세월이 갈수록 선약을 구하지 못해 마음이 초조 해졌다, 수척의 주선으로 삼신산 즉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등 불로초를 탐색하던중 바다 한가운데 있는 지금의 제주도를 발견하고 그곳이 삼신산인 듯 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다가 높이 솟은 신성한 영산 한라산을 찿게되었으리라, 한라산은 영산인지라 많은 영약초가 있을것으로보고 찿았지만 불로 불사 약초는제대로 찿지 못하고 시로미와 영지버섯의 불로초만 찿았다는 것으로 한라산을 중심으로 한 제주에는 약용식물만도 10여종의 약초가 있음을 확인했다는것.

따라서 이들은 서귀포 정방폭포에 암벽에다 서불과지 또는 서불차라는 각서만을 남겼다는 애기,... 따라서 서불일행은 서귀포에서 다시 현해탄을 도항할 것을 결심하고 운명을 하늘에 맡긴체 선단을 분산하여 출항했다.

서귀포를 떠난 각 선단은 풍랑을만나 표류를 하는등 구사 일생으로 끝내는 일본 큐슈 사가현 부바이 해안 에 상륙 ,사가현 모르토미에서 정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서도 결국 불로초는 못찿고 천태오양이란 약초와 더불어 10여종의 약용식물이 자라고 있음을 확인했다.

기나긴 항해를 마치고 상륙한 이들은 이마을에서 벼농사와 고기잡이등을 주민들에게 가르쳐 주고 해서,,,, 그후 와카아마 신구시에서 돌아 가신곳이라 서복공원과 야스키신사엔 서복궁 사당을 건립 서복등 후손과 더불어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신앙 숭배처럼 시조.조상신으로 모시고 있다는것이다.

동아시아의 획을 끊는 불로초의 신비로 서복전설은 이렇게 역사로만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이바위에 새겨진 문자 또는 문양은 일반적으로 2~3천여년전 동방 서불이 이곳을 지나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로 해석되었다.

옛날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시종 서불에게 동남동녀 500여명을주며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하여 서불이 이곳 금산에까지 오게되었다.

서불은 세상이 늙지도 않은 풀을 구해가지고 오라는 명령에따라 이곳 금산에서 한동안 수렵등으로 즐기다가 떠나면서 자기들의 발자취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이문자 또는 그림(상형문자)을 새겼다고 한다 
이곳 남해에는 양이리을 비롯한 두모리등 여려곳에 이들과 비슷한 유사한 문자를 또는 문양을 새긴 화상문자 바위가 발견된바 있다.

따라서 중국과 일본. 인도등 등 각국나라의 고고 학자라 든가 고대문자를 확인차 다녀간 것을 비롯해 국내 사학자 연구가등 수많은 교수들도 사실여부를 확인차 다녀간바 있으나 아직도 확실한 고증과 판독을 못한체  수수깨끼로만 베일에 묻혀 수많은 세월만 보내고 있을뿐이다,,

 

한편 이같이 널리 알려진 중국과 일본 등에선 역사상 전설의 인물로 사회적 문화적 의미가 크다는데 착안한 제주도의 경우, 사실상 남해와 같은  유적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 전설 하나만으로 국제적 명승지화 하고 있기도 하다. 제주도는 지난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정방폭포 일대에 100억원의 예산을 투입, 서복전시관을  건립하고 서불과차에 대한  유적정비 사업을 실시하는 등 다양한  관광자원화를 위하여 크게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는 중국과 일본 등 국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으나 사실상 서불과차에 대한 역사적 유적을 갖지 못해 한계에 부딪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에 존재하는 남해 상주의 서불과차는 유일하게 흔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정작 제대로 개발 보존되지 못하고 있어 앞으로 다양한 관광자원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며, 후대에 길이 보존하여 물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남해 서불과차. 현주소를 보면 

◆관리번호제1번,--상주면 양아리 84~1번지 
백련다리봉산언저리(바닥가로부터약30미터)-상륙지로알려짐(추상) 
◆관리번호제2번--백련리 105~5번지 입구도로변(묘소옆) 

◆관리번호제3호--상주면 양아리 151번지(양아두모고개) 
도로변의 거북등그림으로 암각화 
◆관리번호4호--상주면 양아리 산18-3번지 

◆관리번호제5호--상주면 상주리 180번지 

◆관리번호 제6호(도지정문화재=1974,2/16)--양아리 산 4-3번 지 

                   글 ; 장대우 (본지 .칼럼니스트) 
                                  (신문.방송 전 언론인) = (전 남해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