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폭력, 왕따, 자살 충동, 자살 행위 등이 사회 문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예전 같지 않다며 너도나도 담임 맡기를 꺼릴 정도다. 사실, 10대 청소년의 자살 수가 일 년에 250명에서 300명에 이른다는 보도는 오래되었다. 현재도 전국의 각급 학교에서는 왕따 피해자 수가 3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선진국 클럽이라고 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여러 나라 중 한국의 청소년들이 보이는 행복 지수가 꼴찌 수준이 아니던가? 즐겁고 행복하게 친구들과 어울리며 하루하루 배움의 기쁨을 누려야 할 아이들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문제는 결코 청소년 개인의 탓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크게는 사회 흐름의 반영이요, 작게는 가정 상황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모 자녀 관계조차도 사회를 반영하기 때문에, 결국은 온 사회의 문제가 가정으로, 학교로, 개인으로 투영되어 드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회의 어떤 문제가 핵심적 문제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가 먹고사는 방식의 문제, 살아가는 방식의 문제라 하겠다. 온갖 어려운 말들을 쓰는 학문 세계의 결론을 아주 쉬운 말로 풀자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곧 돈과 권력이다. 돈 많은 자는 거의 모든 걸 할 수 있고, 설사 죄를 지어도 곧잘 풀려나거나 죄가 없는 것으로 판결나기도 한다. 또 돈이 많은 자는 권력도 쉽게 거머쥔다. 권력을 가진 자는 안 될 것도 되게 만들 수 있으며, 자기에게 불리한 것도 유리한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 설사 권력의 비리나 부당함이 드러난다 해도 그 권력의 힘을 빌려 처벌을 거의 받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현실이 그러하니, 대다수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강자 동일시'를 한다. 즉, 어릴 적부터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논리를 신념화하고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강자 숭배' 심리가 사회적으로 퍼진다.
바로 이런 논리가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분야에 작동한다. 정치인들은 강한 권력자의 '수하'로 들어가야 공천이라도 받는다. 경제인들은 재벌급 독점 자본에 빌붙거나 그 하수인이 되지 않으면 발을 붙이기 힘들다. 교육에서는 어떤 학생이 이른바 일류 대학에 들어갈 정도의 성적을 내면 제대로 사람 취급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받기 어렵다. 사실, 한국의 2000만 이상의 부모들이 그 자녀 교육 걱정을 하는 것도, 결국은 이런 논리 위에서다. 우리의 교육열이란 것도 실은 이 아이가 나름의 꿈을 키우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열심히 실력을 갈고 닦아 나중에 자신은 물론 온 사회를 위해 뜻 깊게 봉사하라는 취지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부모는 우리 아이가 남보다 더 잘해서 나중에 남부럽지 않게 돈과 권력을 누리며 떵떵거리고 살기를 바란다. 바로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서 청소년들도 돈과 권력이 최고이고 강한 자가 최고인 그런 가치관을 내면화하기 때문에 오늘날 폭력, 왕따, 자살 같은 불행한 일들이 계속 반복된다.
아프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 <학교 가는 길>을 보면, 어린 여자아이 박타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배우고 싶어 한사코 학교에 가려 한다. 한편, 이웃집 남자 아이 압바스는 꿈을 배우러 학교에 간다고 한다. 그러나 박타이와 압바스가 학교를 오가는 길에 만난 '전쟁놀이' 아이들은 전혀 아이들답지 않다. 탈레반이건 미군이건 '전쟁놀이' 자체가 이미 돈과 권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은 한편으론 이유도 모른 채 미 제국주의를 증오하고, 다른 편으로는 근거도 없는 여성 억압을 재현한다. 그 어느 것도 아이들 정서가 아니다.
상황이나 조건은 다르지만, 우리 청소년들도 까닭을 모른 채 전국 경쟁자들과 점수 전쟁을 하고, 근거도 없는데 나약한 아이나 얄미운 아이를 따돌림 한다. 결국, 해법은 아이들이 꿈을 갖도록, 서로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사회와 역사를 배우면서 더 큰 뜻을 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죽어가는 학교를 되살리는 길이다. 학교는 배움의 기쁨, 만남의 기쁨, 자아 발견의 기쁨이 넘치는 행복한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이 사회에도 희망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