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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철학] 엔소니 A. 롱 저 이경직 역 서광사(서울:2006)

은바리라이프 2012. 2. 24. 01:47


[헬레니즘 철학] 

2010-05-05 13:27:40   이름 : 이근호  
  
  
엔소니 A. 롱 저 이경직 역 서광사(서울:2006) 

  

Ⅰ 

‘인생철학’, 참으로 매력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을 귀찮아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인생철학’ 하나쯤은 정리해서 간직하고 싶을 것이다. “나, 인생 막사는 것 아닙니다. 나름대로 인생철학 갖고 있습니다”로 버티고 싶을 것이다. 하나님 이야기가 진저리나서 설교시간에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보는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목사도 다음과 같은 마음이 들 게 된다. “이럴 같으면 차라리 성경구절을 빙자해서 고객들이 원하는 인생철학 강좌로 설교를 때우면 사람들을 계속 붙잡아 둘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심보는 유명한 칼빈이라는 신학자도 갖고 있었다. 신학적으로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거부감을 가졌던 에라스무스라는 학자는 노골적으로 ‘건전한 인생철학’을 전도하는데 진력했다. 그쪽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에 탐닉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자신을 건전한 인간으로 유지시켜 줄 ‘인생철학’을 그는 스토아철학에서 찾아내었던 것이다. 

“내가 필요한 철학은 내가 선택한다”는 원칙 속에는 십자가 복음이 들어갈 여지는 전혀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예레미야의 눈물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구나 내 쓴 잔을 마시라”는 예수님의 권면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막 10:38) 예수님의 쓴 잔이나 마시겠다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신이시여. 나도 우수한 인간이라고 간주하셔서 제발 복주세요”이다. 그들의 안중에 자기 자신과 자기 혈육적 가족 이외는 아무 것도 없다. 남들로부터 비난 받지 않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인생을 무사히 지나고 나서는 죽어서 좋은 나라에 가고 싶어 한다. 신과 인간과 자신을 다 같이 만족시키는 그런 인생철학을 찾고자 한다. 

본 책은, 복음이 없던 시절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느냐?’를 말해주는 책이다. 
  

Ⅱ 

1. 헬레니즘 

헬레니즘이란 기원전 4세기 말, 그리스 세계에서 전개되었던 새로운 사상 운동을 말한다. 곧 그리스라는 나라의 문명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알렉산더 대왕의 사망(기원전 323년)에서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1년에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시기에 이르는 그리스·로마 문명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3세기에 걸친 이 시간 동안 고대 철학의 중심부를 차지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소요학파의 전통이나 플라톤주의가 아니라, 에피쿠로스주의와 회의주의와 스토아주의다. 이 모든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발전된 사상이다. 

에피쿠로스가 시민의 생황을 거부하는 입장과, 스토아 철학자가 세계 자체를 일종의 도시로 이해하는 입장 사이에는 다소 차이가 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자기 정체감과 도덕적 지침이 필요 하다는 점에는 이러한 새로운 사상에 대해 선택의 손길을 보낸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외부 세계를 정복하려 나섰다면,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는 두려움과 욕구를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말해주었다. 디오게네스 관심사는 본성적 자질만으로 이룰 수 있는 개별 인간의 행복 성취성에 있었다. 개인을 크게 강조하고 그 본성을 부각하는 것이 헬레니즘 철학의 특징이다. 

그러니 오늘날 출셋길에서 뒤쳐지고 패배했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이런 헬레니즘 철학으로 무장하는 것이 자신의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혹은 돈벌이 너무 매진하다보니 자신의 영혼이 그 와중에서 세속화되었다고 간주되는 자라면 다소 금욕적이고 고상함을 보이는 헬레니즘 인생철학으로 무장함으로서 자신의 천박스러움을 가리는데 유용하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어느 듯 노인층에 들어섰기에 젊은 자식들이나 젊은이들에게 노숙하고 품위 있는 교양을 드러내고 싶은 늙은이들에게는 이 헬레니즘 인생철학이 자신의 영광을 빛내게 해줄 것이다. 어쨌든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있어 복음이요 구원을 제공하는 철학이 헬레니즘 철학인데 특히 스토아학파의 철학이 교회 안팎으로 인기가 오늘날까지 대단하다. 신을 인정하고 인간도 같이 인정하고 자유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2. 에피쿠로스주의 

에피쿠로스는 기원전 314년 사모스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중의 환호보다 소수의 친밀한 무리를 더 좋아했다. “고요하게 살아라!”는 것이 그의 구호다. 이 구호는 당시 사회에 대한 혁명적 비난이 아니라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한 지침으로 제공된다. 

모든 사람에게는 감각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의 철학은 출발한다. 감각만큼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 일변에 입각에서 그는 우주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어떤 것도 없는 것에서 나올 수 없다.(2)어떤 것도 없는 것으로 사라질 수도 없다.(3)우주는 현재의 우주와 다른 상태에 있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곧 ‘우주 밖에 있으면서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신은 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성경의 다음의 말씀과 대비가 된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3-5)}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우주가 운동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만을 실재로 간주한다. 그것은 곧 물체와 허공이다. 허공이 있어 물체가 움직일 여지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와 운동은 보다 작은 크기로 분할이 되었다가 다시 뭉쳤다가 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아무리 분할해도 분할되지 않는 최소의 것을 상정해야 하는데 그것은 ‘원자’라고 말한다. 곧 경험의 대상이 모두 원자와 허공으로 이루어진 복합 물체라는 것이다. 사물의 한없는 다양성과 연속적인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원자는 분할 불가능한 딱딱한 입체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 속에 허공이 없다면 운동이 가능한 물체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에피쿠로스 및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최소경계점으로 원리라는 개념을 규정한다. 즉 분할이 가능하지만 (허공이 있어서)그 경계선을 넘어서면 그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서기에 ‘최소 원자’의 의미 자체가 소멸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시간도 연속적인 ‘최소 시간’으로 분할될 수 있는데, 최소 기간 자체는 사고(사유) 속에서만 구분될 수 있는 시간인 분할 불가능한 시간 단위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즉 공간의 최소 물체인 원자가 최소 거리, 다시 말해 최소 연장을 움직여 가는데 걸리는 시간을 최소 단위로 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단위 시간 안에서는 원자로서의 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즉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움직여서 지금은 멈춰진’ 그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 원자가 위치를 바꾸고자 한다면 이때부터 새로운 시간 단위가 개시되는 것이다. 최소 시간이란 시간 자체를 척도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원자와 최소시간으로 조성되고 움직이는 이러한 원자론적 체계에 입각한 우주론을 주창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신의 분노를 의식하는 대중적 종교의 중압감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내었다고 칭송을 받게 된다. 그는 대중적 종교뿐만 아니라 세련된 신학으로부터도 벗어났는데 그것은 신적 인과관계나 모든 형태의 목적론을 일체 배격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사물이란, ‘어떤 것을 위해 좋은’ 것이 아니다 는 것이다. 전체 세계나 개별 사물을 완성시키는 그 어떤 설계된 목적은 없다고 보았다. 곧 신이 자연적 사건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자연적 존재가 있어 자연현상을 통해 인간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생각을 거부한 것이다. 또한 사후에 신의 처벌이나 영원한 형벌이 있을 것이라는 대중 종교의 근심을 근원적으로 없애고자 했다. 인간의 행복과 역경이 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사상을 참고로 해서 스토아학파 계통의 철학자 세네카는 (기원전 4년∼기원후 65)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신은 어떠한 이로움도 나누어주지 못한다. 그는 냉정하며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리지 않는다. 그는 세계를 중요하게 ㄷ여기지 않으며 인간들의 이로움이나 잘못된 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에게 무엇이 진리인가? ‘콘세수스 옴니움consensus omnium, 즉 모든 이가 동의하면 그것이 곧 진리다 는 것이다. 물론 신의 주장은 여기에 끼어주지 않는다. 신의 생각을 배제하면 남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해체된 것에는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감각이 없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될 이유가 없다.” 그는 인간이 죽은 후에도 인격이 살아남는다는 생각을 배격했다. 사후의 보상과 처벌의 체계를 지상의 삶에 대한 보답으로 믿는 것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는 사후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서 돈을 받고 죄를 사면해준다는 사기꾼들을 비난한다.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도 신체 자극을 통해서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는 영혼마저 공기와 같은 물질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원자의 움직임이다. 

그렇다면 차후에 에피쿠로스학파에서 관심이 된 것은 우연적으로 새롭고 돌발적인 사태는 어떻게 출몰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원자의 일탈로 보았다. 정노선으로만 원자가 움직인다면 ‘자유의지’ 나 ‘새로운 사건’이 생길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도 전부 원자의 움직임에서 발생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일진데 인간이 이 사실을 알면 ‘고통의 부재’ 상태에 놓여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고 보았다. 

이것은 에피쿠로스는 ‘쾌락’이라고 보았다. 모든 고통의 제거가 쾌락의 양을 정한다고 했다. 이 쾌락에는 ‘운동 중의 쾌락’과 ‘정지 중의 쾌락’으로 구분했다. 고통을 제거하는 과정(운동)이 결과적으로 즐거움을 준다고 했다. 이것을 ‘운동 중의 쾌락’으로 보았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배고 고픈데 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마음껏 먹는다면 이 먹는 과정이 곧 ‘동적 쾌락’이요, 더 이상 먹을 필요로 없어 배고품의 고통이 가라앉은 상태를 ‘정적 쾌락’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만족 이상의 것에 탐닉한다면 이것은 결코 쾌락이라고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적극적 쾌락이 아니라 소극적 쾌락을 두고 말한다. 즉 고통이 왔을 때, 그 고통을 제거하는 식으로만 쾌락을 결과적으로 가져야 하는 정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술을 마시고, 좋은 음식을 골라 찾아다니고 성교를 하는 일이 일시적으로 쾌락을 주기는 하지만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신체와 마음의 평정을 깨기 때문에 이런 쾌락을 목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런 방탕한 사람을 비난하기에 바빠서 정작 본인의 마음이 심란해진다면 이것 또한 평정심이 깨어지는 것이기에 청교도적 비난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제 덕분에 더 큰 고통을 수반하는 쾌락에 빠지지 않기에 절제가 최대의 쾌락을 얻는 수단이라고 했다. 이처럼 그의 쾌락주의는 철저하게 자기 중심주의다. 


2. 회의주의 

회의주의(=퓌론주의)도 일부 확산되었는데, 어떠한 현상이나 판단에 대해서도 반대되는 논리를 끌어낼 수 있기에 스토아 철학자나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의 주장처럼, 세상의 실재 모습을 탐구해 낼 수 있다는 주장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회의주의는 도리어 우리 인간들에게 근심으로부터 해방을 낳게 한다는 것이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즉 모든 판단을 일시 중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본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우리에게 이러한 특정의 생각이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희다고 긍정하지 말고 희게 나타났다는 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회의주의들의 마음이다. 

아무것도 진리에 대해서 독단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점을 깨달음으로서 우리 인간들은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퓌론(기원전 385∼275)이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누군가 좋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가 좋다고 말하거나 모두가 좋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같은 것을 놓고서도 어떤 이들은 좋다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나쁘다고 주장하기에 우리는 실제로 좋은 것을 알 수 없다” 이러한 회의주의는 스토아학파의 사람들을 비난하기 위함이다. 스토아학파에 속한 사람들은 사람을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둘로 나누기 때문이다. 그 건방짐에 도전하는 것이다. 


3. 스토아주의 

스토아주의 학자들은 정합적인 철학으로 우주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사람이 생각하고 계획하고 말하게 해주는 것은 사람 안에 ‘로고스 logos'라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고스는 곧 이성(理性)을 의미한다. 18세기에 들어선 유럽에서 이 스토아주의를 반긴 것은 이신론(理神論)과 자연신론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이신론이란, 세상의 초기조건이 후대 우주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보는 생각이다. 우주란 마치 시계에 태엽을 감아놓기만 하면 또다시 손대지 않더라도 시계가 저절로 돌아가는 원리처럼 처음에는 신이 만들었지만 그 다음에 우주가 자발적인 내장된 원리가 작동하여 저절로 움직인다는 사상이다. 

대자연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이성(로고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우주적 자연, 혹은 신과 사람은 존재의 본질이 이성적 행위자라는 점에 있어서 서로 연결된다. 이러한 관계에 담긴 함축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좋은 상태에서 인간의 합리성과 완전히 일치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것인데, 인간의 합리성이 자연과 기꺼이 일치하려고 할 때 그러한 합리성이 탁월하다는 것이 보장된다. 이런 인간만이 모든 인간의 목표가 될 수 있는 탁월한 사람이요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 반대쪽에 머뭇거리고 있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힘든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 스토아주의이다. 

스토아철학은 논리학 자연철학과 윤리학으로 구성되는데 그 내부에 흐르는 사상은 자연과의 일치성, 곧 로고스적인 삶이라는 점에서 일관적이다. 사람이라면 (짐승이 아니라면) 자연과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 어떤 사실이 참인지, 그러한 진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하나의 진리 명제가 다른 진리 명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아야 한다. 자연의 사건이 인과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람이 자연과 또는 신과 전적으로 일치되는 삶을 계획할 수 있게 해줄 일련의 명제를 그러한 사건이 뒷받침할 수 있다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철학자는 제논이다. 그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아테네 주랑(스토아)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사람들에게 외치기 시작했다. 철학이란 이론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고 ‘지혜의 실천’ 혹은 ‘옳은 학문의 실천’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에피쿠로스가 주장하는 “고요하게 살아라!”가 아니라 “잘 살아라!”이다. 

안다는 것은 대상을 ‘움켜잡는 것(파악)’이다. 이는 곧 마음이 대상에서 나오는 인상에 동의한다는 말이다. 그 인상(印象)은 자신과 자신의 원인을 드러낸다.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 대상이 대상으로 있게끔 한 그 원인에 대해서 내가 동의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보편적 로고스, 즉 이성이 작용해서 연결된다. 이로서 스토아철학에서는 지식이 없는 상태와 지식 사이의 중간 단계가 실제로 없다. 이로서 지식이 곧 믿음으로 이어진다. ‘약간 동의’를 용납해서는 진정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가 되면 로고스가 결정하는 우주를 아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로고스에 맞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로고스가 의미라면, 퓌시스(자연)는 지시체다. 따라서 지시체 없는 로고스는 없는 것이다. 이 눈에 보이는 자연과 조화롭게 맞추어서 사는 자가 신의 뜻대로 사는 자가 되는데 그것은 로고스가 곧 신의 이성이기 때문이다. 

자연 자체는 철저하게 이성적이지만, 식물이나 비이성적 동물을 통치하는 자연은 개별생물에 관한 한 이성적이지 못한다. 단지 성숙한 사람들에게만 자연의 합리성은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으로서 그들에게 나타난다.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식물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다. 즉 대자연 가운데 일부 생물에게만 자연은 그 이성적 본성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이 세상은 모든 가능한 세게 중 가장 좋은 세계이며, 세계 속에 내주하면서 이성적 존재의 이로움을 위해 일하는 신적 목적이 이 세계에 있다. 이러한 낙관적 신학은 신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에피쿠로스 태도와 정반대된다. 우리는 연속적이고 목적이 있다는 면에서 에피쿠로스주의와 다르다. 

우주의 모든 물체는 프뉴마로 되어 있다. 일종의 기체다. 이 기체로 인해 우주는 에피쿠로스학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원자라는 불연속적 입자로 구성된 ‘불연속적 우주관’이 아니라 ‘연속적 우주관’을 내세운다. 프뉴마는 물질의 구석구석에 퍼져있다. 이 프뉴마는 로고스라는 지성적 통치에 의해서 움직인다. 따라서 인간이 행위를 하는 것은 두 가지 원인이 상호 작용해서 움직이게 되는데 예를 들면, 한 평면 위에 드럼통이 있다면, 이 드럼통은 외부에서 밀어주지 아니하면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드럼통 구조가 둥글지 아니하면 밀어주어도 구르지 않는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외부적 요인뿐만 아니라 그 대상의 자체적인 속성에서 비롯된 요인과 적절하게 만나서 가능한 것이다. 

신과 인간의 만남도 이와 같다. 일방적으로 신이 로고스적으로 움직이게 한다고 이성적인 삶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내부적으로 이성적(로고스적)이 태도를 보이야지만 이성적인 삶을 꽃 피울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개별 사람이나 사물의 성격은 속에 들어있는 능력과 외부의 사건이 서로 작용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로고스는 모든 곳에 퍼져 있기 때문에 결국 모두 것이 하나의 로고스 작용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인간 속에 들어있는 로고스를 개발하기 위해서 7년 내지는 14년이 걸리기 때문에 스토아주의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유아(어린아이)는 아직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어릴 때는 마치 동물과 같아서 충동이 지배한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이성 또는 로고스가 점차적으로 인간의 통치 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이것이 바로 스토아주의 윤리관이다. 

충동이란 ‘잘못된 이성’이다. 따라서 교육을 통해서 ‘옳은 이성’으로 바뀌어야 한다. 나쁜 이성은 인간이 나빠서가 아니라 무지에서 비롯된다. 외부 환경의 힘을 빌려서 교육하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합리성에 담긴 함축은 “아는 자만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코 스토아철학의 윤리의 목적인 ‘행복’이다. 본성에 따라 자연에 순응하면 탁월한 지혜자의 덕목을 갖출 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지혜와 정의와 절제와 용기’이다. 이로서 인간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Ⅲ 

  
복음적인 평 


사도 바울의 편지나 베드로나 야고보 편지에 나오는 권면이나 명령이나 교훈을 스토아주의의 윤리와 연결시켜서 해석하려는 꾸준함이 교회역사의 대세를 차지해오고 있다. 이런 사상의 배경에는, 인간의 힘으로 천국에 들어갈 ‘새 사람’ 만들어보겠다는 강한 긍정적 의지가 만발해있다. 즉 “새사람 만들어 천국 들어가게 해 줄 테니 교회 와서 목사 시킨 대로 교육 받으세요”라는 영업 전략이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와서 교육 받으면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새 사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인들이 본인들의 변화를 스스로 확인해 볼 수도 있다는 독려한다. 제자훈련 및 각종 교인들 상대로 하는 성경 및 신학 및 신앙고백서 강좌를 통해 자력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는 성과를 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애초에 죄인이었다.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죄였던 것이다. 현재 인간으로는 왜 선악을 안다는 것이 죄가 되는지를 수긍하지 않게 되어 있다. 도리어 현 인간의 본성으로는 로고스 되시는 예수님을 미워하고 배척하게 되어있다. 성경 공부를 통해서 배척하고, 교회 생활을 통해서 예수님을 싫어하게 되어 있다. 단지 인간은 자기를 새 사람 만들어 주리라는 그 신을 원하고 신을 믿고 싶어 하지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지신 내력에 들어갈 의사가 없는 자들이다. 그 죽음과 그 저주와 그 심판 속으로 들어갈 마음을 갖지 않는다. 

“왜 내가 죽어야 하고 저주받아야 하고 심판받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알고 싶지도 않고 알려 주어도 얼굴을 십자가 피에서 돌려버린다. 줄곧 지상의 교회들은 스토아철학으로 중무장했다. 천국 가지도 않으면서,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할 자들이 교회를 설립해서 천국의 문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 피가 묻히지 않는 성경 말씀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말씀이 인간을 정죄하시는 말씀이다. 성경을 교육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란, 새 사람됨이란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 죽음에서 나온 피의 능력으로 구원된다. 이 사랑은 결코 ‘지혜와 정의와 절제와 용기’와 다르다. 인간들이 목표로 하는 이상적인 거룩한 삶, 즉 ‘지혜와 정의와 절제와 용기’가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게 했다. 성령님이 오시게 되면 바로 인간들이 저질러 잘못된 전제에 대해서 고발하신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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