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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란 무엇인가] 엔서니 엘리엇 저 김정훈 역 삼인(서울:2007)

은바리라이프 2012. 2. 24. 00:27


[자아란 무엇인가] 

엔서니 엘리엇 저 김정훈 역 삼인(서울:2007) 

2010-05-26 06:58:39      이름 : 이근호     


자아에 대한 이론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회학적 이론이요 다른 하나는 정신분석학적 이론이다. 

사회학적 이론이란, 우리의 자아 감각이 더 큰 사회 속에서 이런저런 제도나 문화적 형식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어떤 사회적 구성물로서 자리 잡는지, 그리고 다른 자아들에 대한 인상을 어떻게 구축하는지, 그리고 사회조직망의 구축과 재생산에서 이 자아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지를 조사한다. 여기에 비해서 정신분석학적인 이론은, 자아성의 내적·상징적 구성의 조직화에 주목하며, 정체성의 정서적인 갈등에 주목한다. 또한 자아와 사회 사이에 연결을 시도하는 개인의 적응 능력을 살핀다. 

이 두 이론의, 차이는 쉽게 말해서 사회적 경험을 우선시하는지 아니면 개인적 경험을 우선시 하는지로 갈린다. 개인적 경험론에 의하면, 인간의 무의식은 동기에 따라 자기 분열로 찢겨지게 되어 있다. 이 찢겨짐이 그대로 사회관계에 반영된다. 곧 사회 분석에 있어 분열된 무의식을 품고 살아가는 그 자아들의 이해와 해석들이 상호 교류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정체성 이론에 입각해야 오늘날 이 인간 사회에 왜 규범적이고 도덕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지 이유가 밝혀진다. 


1 사회학적 이론 

(1) 조지 허버트 이드(1863∼1931)의 상징적 상호작용론 

자아는 개인과 사회가 만나는 지점에서 형성된다. 자아 구성의 핵심 기제는 언어, 곧 상징이다. 상징을 통해서 개인은 자아를 빚어내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한다. 상징, 곧 언어란 공용 화폐인 셈이다. 자아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어딴 속성을 공유하는 것인데 사고와 감정과 태도는 이 언어를 통해서 담아낸다. 

따라서 타인이 없으면 자아의 통일된 구조를 형성할 수가 없다. 자아를 구축하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의 반응과 관련되어서 수행된다. 예를 들면, 친구의 가족이 별세했다면, 자신이 그 친구의 입장이 되어 그 슬픔이 어떤 것인지 애써 상상하려한다. 바로 이러한 작업을 통해 친구와 공통 속성을 자아 속에 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자아란 사회적인 생산물이고 사회적인 상징적 상호작용의 결과다. 자아 속에는 타인들의 태도가 북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미드는 이러한 자아 정체성이 어릴 때부터 ‘놀이’를 통해서 숙달되어 왔다고 믿는다. 바로 미드가 ‘남의 역할 떠맡기’라고 부르는 방식으로서 자아가 사회의 요구와 압력에 맞추어 나가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릴 때 놀면서 목사 역할이 마음에 들면 목사를 숙달해보고, 의사 역할이 마음이 들면 의사 쪽으로 직업을 생각해 본다. 

미드는 이러한 자아를 다음과 같이 개념화 한다. 즉 ‘나는(I)'과 ’나를(Me)‘ 사이에 결정적인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를‘은 사회화된 자아를 뜻하고, ’나는‘는 사회화되지 않는 자아로서, 사적인 욕망과 요구와 성향의 모둠이다. 자이 인식의 성취는 자아가 ’나를‘을 ’나는‘에서 구별 할 때 생겨난다고 한다. 인격이 지니게 되는 태도란 집단으로부터 얻어 온 것이지만 개인 속에서 조직화 된 것이다. 이로서 미드는 자아이론에 있어 사회적 결정론을 부인한다. 

이와 같은 ‘상호작용론’의 단점은 정신분석가들로부터 다음과 같이 비판을 받는다. 즉 정서적인 영역을 희생하고 인지적인 영역만으로 자아를 분석하다보니 마치 육체를 갖지 않는 자아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개인과 사회 사이에는 갈등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미드의 자아는 주로 생각하는 자아의 모습이지, 감정과 정념을 가진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2) 어빙 고프먼(1922∼1982)의 자아 연출 이론 

그는, 개인이 타인들에게 자아의 인상을 만들어 내느라 몰두하고 있는 와중에서 나오는 연극적 효과가 곧 자아라고 본다. 자아란 특정 장소에 자리 잡고서는 거기서 태어나서 자라고 죽는 유기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란 다양한 상황이 설정된 맥락 속에서 타인들에게 풍기고 싶은 배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연기를 벌리는 과정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이것은 자아가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존중과 신뢰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사회적제도가 인준하고 사회적 역할을 기꺼이 수용하고 그 역에 충실하려고 하지만 자신을 연기를 창조적으로 연출하는 것은 아디까지나 자아의 몫이라고 본다. 


(3) 기든스 (1938∼ )의 성찰성 이론 

영국의 사회학자 기든스가 말하는 자이이론의 핵심은 ‘성찰성’이라는 개념이다. 성찰성이란 자기 규정하는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실천 관행에 대해서 생겨나는 정보에 비추어 끊임없이 검토되고 개정되고 그에 따라서 그 실천 관행의 성격을 바꾸어나가는 주체로서의 자아다. 예를 들면, 도시의 인구통계학적인 특징들을 도표로 만드는 일에서부터 항공기 비행경로의 변경을 조사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전문가의 성찰적 체계가 일상생활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 근대성의 세계에 중심축이 되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에 맞추어서 이런 경향을 검토하고 스타일을 그때마다 바꾸어 나가면서 형성되는 것이 자아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통적으로 결혼 유대는 남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공적 세계의 활동을 준비하는 장소로 이용했고, 반면에 아내는 자녀들과 가정에 집중했다. 여기서 가장이 되는 남성은 경제적인 뒷받침을 제공하므로 서 가부장적 직위를 확고히 다졌다. 하지만 경제구조의 발전은 이런 혼인 제도 안에서 마저 자아의 심리적인 발달과 변화를 초래했다. 

즉 혼인 유대를 통해서 달성하고자 했던 남녀 간의 애정, 존중, 사랑, 평등, 자율, 자아 보전 성취는 이제 이혼과 재혼을 통해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찰성이다. 사회적, 문화적 흐름을 자아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성찰성 있게 읽고 있었던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논의되는 정보들이 사적 가정 유대까지 파고들어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자아들이 변화를 쉴 새 없이 요구하고 있다는 증거다. 성실한 혼인 생활 안에서는 낭만적 사랑을 성취할 수 있다고 알던 시절에서 이제는 결혼 생활 밖에서도 얼마든지 낭만적인 사랑을 얻을 있다는 성찰성 있는 안목이 자아의 모습을 날마다 바꾸게 하는 것이다. 

보수적인 도덕주의자들은 이런 현상을 성적인 타락과 도덕적 결핍으로 보고 있지만 기든스는 오히려 자아의 건설적인 쇄신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와 사회 사이에서 끊임없는 성찰의 결과가 미래 사회를 역동적으로 이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 전통적인 방식을 뒤엎게 된다. 


2. 정신분석적 이론 

개인이 아무리 능동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고 해도, 형성된 자아는 문화적 자극과 사회적 현상으로부터 끊임없이 폭격을 맞는다. 이것은 자아를 위한 그 어떠한 통일성도 구축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이 자아성 구축의 곤란을 정치사가 복잡해서가 아니라 심적 쾌락과 그 억압, 정서적인 충족의 문제에 있다고 보고 탐구를 하는 것이 정신분석적 이론이다. 이 이론에 끝은, 개인이 사회 세계에 적응하는 방식은 오직 곤란에 처하고 문제를 유발하는 방식이 된다는데 도달된다. 


(1)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자신의 자아는 자신의 자아로부터 잘 숨겨져 있다”고 니체가 말했다. 여기에 대해서 프로이트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자, 이것 하나라도 배워 두어라. 너의 마음속에 있는 것은 네가 의식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렇듯 프로이트는 개인적 주체가 언제나 자신과 어긋나 있다는 발상을 다듬어 놓았다. 

이렇게 되면, 개인은 독립적인 자기의식을 지닐 수 있다는 그동안의 사회통념이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에고(자아)가 자기 집의 주인일 수가 없고, 에고는 숨어 있는 무의식적 욕망의 하인에 불과한 것이다. ‘결코 제어되지 않는 힘!’, 이 무의식적인 힘에 프로이트는 주목한다. 

무의식은 자아가 망각을 통해 제거했던 욕망, 소망, 충동,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한 망각 때문에 우리의 정신적 활동의 커다란 부분이 자기 인식으로 조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쁜 감정은 억압을 통해서 자아세서 내몰려 차단된다. 아로서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 사이에는 철저한 단절이 있다. 자아는 억압 행위를 통해서 감정으로 뭉쳐진 무의식적 세계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억압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만족과 쾌락을 얻으려는 욕망은 억압과 망각의 욕망만큼이나 강하다. 여기서 발생되는 갈등이 꿈, 증후, 말실수, 왜곡된 기억으로 나타난다. 믿음, 욕망, 소망, 충동은 모순 없이 무의식 속에 존재한다. 사람은 부모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할 수 있고, 형제를 욕망하면서 혐오할 수 있고, 친구를 받아들이면서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본디 무의식적인 형태로 생겨난 것이다. 유아기 후반부에 가서야 비로소 마음이 자아의 의식으로 올라오고 타인들이 기다리는 더 큰 세상으로 열린다. 하지만 그때도 오직 고통과 상처를 동반하면서 세상으로 열리는 것이다. 그것은 성적 쾌락으로부터 자아가 발생하기 때문에 기존 세계에서 쉽게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생아는 자기 몸의 모든 부분에서 쾌락을 얻을 뿐만 아니라 엄마의 몸에서도 쾌락을 얻는다. 이를 프로이트는 ‘자기 성애’라고 부른다. 이때 정신이란 본래 그 자신 속에 닫혀 있는 상태며, 도리어 광대한 쾌락으로 가득한 희열의 세상 속에서 나르시시즘 상태를 유지한다. 유아는 태어나서는 자신의 생물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타인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세계로 들어온다. 

물론 삶의 처음 몇 달 동안 유아의 첫째가는 욕구의 대상은 음식이다. 어머니의 젖가슴은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나 모두에게 갈망의 원초적 대상인 동시에 성적 욕망의 밑그림이 되는 원형이다. 이것이 만족할 때 유아는 자족감을 느끼는데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성적 쾌락이다. 이러한 성적 갈망과 만족은 성인이 되어서도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들의 욕망을 분석하면서도 언제는 유년기의 기억이 되불러 낼 필요가 있다. 

유년기들의 기억들이 환상을 통해 성인들 시절에서 수시로 복원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어떻게 심리적인 성적 차이를 드러내는지 그 과정에 파헤친다. 처음에 남자아이나 여자아이나 모두 ‘능동적인’ 남성 지향적인 성경향성을 보인다. 그런데 어느새 음경의 유무로 인하여 ‘남성성’과 ‘여성성’ 획득을 놓고 심판 불안 상태에 접어든다. 

소년인 경우에는 이미 자기를 둘러싼 환경에 같은 남성인 아버지부터 지배당한 것에 대해서 좌절하면서 자신의 성적 쾌락이 마음껏 발휘되지 못하고 위협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좌절하고 억압된다. 반면에 소녀의 경우는 음경이 이미 자기에게는 거세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거세 위협과 억압 위협은 자아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여성에게는 이 거세의 환상이 처음 가졌던 남성적인 성경행성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곧 나르시시즘의 손상으로 이어지고 동시에 그 결핍에 메우기 위해 여성은 ‘남근 선망’, 곧 ‘남성 선망’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보았다. 이것이 여성의 무의식적 차원에서의 특징이다. 

이처럼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은 어릴 적부터 자아에 깊은 분열성을 갖고 있다. 도덕적 금지에 대한 저항과 굴복, 투쟁과 거부로 이루어진 세계상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이 사회에 나서더라도 항상 좌절과 갈등과 구속당하는 경험을 겁내야 하는 식으로 살아가게 만든다. 


(2) 라캉의 정신분석학 

프랑스의 프로이트 해석자 자크 라캉(1901∼1981)이 보기에는, 개인적 주체는 거울 속에 나타난 자신의 이미지와 자신을 시각적으로 동일시하면서 자아 감각이 정립되는 것으로 보았다. 라캉에 의하면 어린아이가 거울의 반사면 속에서 자신을 볼 때 환희에 속하는 근본적인 느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아이는 거울이 완전하고 단일하며 통일된 신체의 이미지를 제공한다고 믿는 것이다. 

문제는 그 거룩 속에 비친 통일성의 모습은 보이기에만 그렇지 실제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거울은 사실상 근본적으로 상상적인 것이다. 게다가 자꾸만 통일적인 이미지라고 우기기까지 하게 만든다. 그렇게들 상상하고 싶은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거울은 거짓을 보여 준다. 반사하는 거울은 주체의 바깥에 있는 타자이기 때문에, 자아성에 대한 오인된 느낌을 가지고 한다. 

이 거울에는 아무런 깊이도 속도 없음을 주목해야 한다. 거저 순수한 표면만 있는 것이 거울이다. 그런데 그 얇은 순수한 표면을 타자들이 다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거울 뒤편은 없다. 라캉이 거울 비추기 과정의 타자성을 강조하는 것이, 인간 본성과 내적인 욕망에 대한 통상적인 관념과 진정한 자아성을 영글어낼 수 있다는 망상을 다 뒤엎기 때문이다. 

그저 인간이란 계속해서 거짓만 구성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거울 단계 이론은 에고(자아)가 안쪽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구성된다는 것은 시사한다. 그러니까 자아의 자각은 외적인 이미지에 따라서 구조화되는 것이다. 거울 비추기라는 라캉의 발상은 정서 발달, 자기 통제, 자율성에 대한 그동안의 모든 지배적인 이론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자아의 모든 이미지들은 본디 거짓이었다. 그리고 생산된 망상이다. 일시적인 통일성만을 가질 뿐이다. 라캉에 따르면, 거울 단계가 불러일으킨 원초적인 오인 경험은 그 이후의 모든 개인 간의 관계나 가족 유대나 친구 관계나 사회적·공동체적 결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애정과 사랑조차도 모두 당연히 거짓된 것으로 들통 나게 만들어버렸다. 즉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통일적 자아성을 일시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관계였을 뿐이다. 즉 타인들을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상상한 이미지를 붙잡기 위함이다. 

거울 단계에서 세워지는 자아는 이상적인 상상의 투사물이다. 이러한 심리상태에서는 사적 정체성이 완전하고 통일되고 전능한 것으로 경험될 것이 뻔하다. 유아들의 이러한 환상적인 고집은 예상보다 단단하고 강하다. 그 어떠한 사회적 차이나 문화적 차이에도 구애받지 않고 버티게 된다. 

이 어린아이가 자라서 세상에 나설 때 이 상상계도 같이 나아간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징계다. 자아성에 대해서 대체로 고립된 것으로 보았던 프로이트와는 달리 라캉은 애초부터 유아는 타인들과의 소통 속에 위치시킨다. 정체성을 틀 짓는 소통 과정은 거울 단계(착란과 상상의 도피)와 함께 시작해서 상징 질서 속에서 성신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예행연습에 돌입하게 되는데 언어와 더불어 감행된다. 

상징 질서 속에서는 언어를 통한 자아의 구축은 그 결과로 사회로부터 성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개인은 자기만의 내적인 욕망의 세계의 창조자가 아니라 언어와 상징적 구조 안에서 하나이 위치를 배정받는 것이다. 라캉의 자아 개념화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공정(process), 즉 과정이다. 언어 습득 이전의 경험(거울, 왜곡, 환영, 오인의 세계)을 통과하면서 맞이하게 되는 언어의 구조 사이에는 주요한 차이가 있다. 이 차이가 아이의 심적 구조를 형성한다. 

즉 한계, 불일치, 타자성, 좌절, 그리고 구속에 맞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는 언어로 짜여진 사회 규범과 법적 의무로부터 명령과 지시를 받게 된다. 선생님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국가의 이름으로! 이런 관점에서 개인적 소망과 환상적 생각으로 인해 바깥 사회에서 요구하는 규범에 부응하지 못할 때 죄책감과 불안을 느끼면서도 곧잘 균형을 맞추어나간다. 이렇게 해서 상징질서에 자아성을 새롭게 정립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상상계는 그를 떠나지 않고 있다. 상상계와 상징계로 분열된 주체성은 부인할 수 없다. 


(3) 지젝의 정신분석학 

라캉주의 문화 비평가인 슬라보예 지젝(1949∼ )은 정체성과 자아가 정치적·이데올르기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정치적 이념 속에서 불충분성과 상실과 결핍으로 인해 심리적 균열을 야기시켜 놓고 있다고 보았다. 자아의 정체성이 심리적 불충분, 결핍, 부재(不在), 외상(外傷)의 근본적인 감각들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자아와 타인들 사이의 소통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상충하는 정념들과 상호 균열된 감정을 타인의 공간쪽으로 ‘투사(project)한다’는 사실 때문이란다. 

타인이나 사회나 공동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환상의 침입, 특히 환상이 심리적 삶의 심장부에 있는 공허나 결핍이나 부재를 덮어서 가린다는 사실이다. 지젝에 따르면 자아는 ‘근본적 적대관계’로 특징지어진다. 자아란 언제나 어긋나고 조각나고 흩어지고 시들며, 정체성이란 어떤 상상된 변형을 따라 구성하지만 항상 실패하고 만다. 

이러한 사실은 지젝이 반(反)유대주의를 분석하면서 가장 시사적으로 잘 보여준다. 지젝에 따르면, 유태인들은 오랫동안 근대 사회 자체의 근본적인 적대관계의 증후로 봉사해 오면서, 투사된 부정적인 정체성을 표상해 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적 정체성들은 이러한 부정적 정체성을 통해서 응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인들은 자기들과 함께 오랫동안 살아온 이 유태인들에게 타자성을 투사함으로써 사회가 겉보기에 갈등이 없는 조화로운 세계를 수립해온 것이다. 즉 공동의 적을 같이 바라보면서 내부적으로 화해한 것처럼 위장해놓은 그런 자아 정체성을 유지해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장한다. “유태인의 진짜 비밀은 우리 안에 있는 적개심이다”고. 이러한 해석을 내리면서 지젝은 욕망의 외상을 자아 정체성 속에 있는 터진 자리와 틈, 자아에 대한 증오로 간주하면서 그 외상의 핵심부분을 열어젖히려고 시도한다. 

유태인의 형상은 자아의 근본적 적대관계가 빚어낸 특별한 사회정치적 창조물이다. 지젝은 이처럼 라캉의 프로이트 해석을 정치적 비판을 위해서 정비했다. 결국 자아란, 우리 정체성의 중심부에 놓인 뭔가 낯선 어떤 것, 즉 외래적인 것이 있는데 이것을 바깥으로 되돌려놓으려는 목적으로 시도하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 내부에서 추방하려도 도저히 추방할 수 없는 환상의 유동성, 현실과 맞지 않는 상상계에서 오는 무리한 통일성 갖추기 시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개별적 정신들이 스스로 창조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젝은 알려주고 있다. 매일같이 솟구쳐 오르는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위협을 애매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3. 정신분석학 이후의 자아이론 

정신분석학은, 비열하고 타락한 자본주의 사회 질서 속에서 개인의 해방과 행복을 약속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의미에서 비판을 받게 된다. 시장 지행적인 사회적 상황에서 정신 치료가 타인에 대한 돌봄은 도외시한 채 자아에 대한 돌봄과 너무도 쉽게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이 사회라는 것이 개인에게 그렇게 구속적이고 억압적이냐 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표현을 과연 어느 실체가 나서서 억압하는가? 개인과 대립관계에 있다는 그 권력의 실체를 분해 해체시켜버린다면 자아의 능동적인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는 믿는 학자가 있다. 그 사람이 바로 미셀 푸코이다. 


(1) 미셸 푸코의 권력 분석과 자기 다루기 기술 

인간 주체들은 창조적이고 지식을 가질 수 있는 행위자들이지, 그저 권력과 지배의 사회적 실천 관행의 수동적인 희생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는 의미, 다시 말해 자기 안쪽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잘못을 시인하고, 유혹을 알아보고, 욕망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억압가설이라고 부르는 가면을 벗기려고 착수한다. 

그 한 예로서, 성이 억압되었다는 통상적인 견해를 파헤치려고 한다. 권력이라는 것이 성적 금기 사상을 조절하는데 봉사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성적 쾌락을 생산하게 했다는 것이다. 권력이 개입되는 경우가 개인이 ‘자기 단속’을 하는 계기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개인은 어디까지나 사적이고 정서적 수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성욕을 다룬다. 성욕이라는 본능에 대해서 자체적인 교화에 몰두한다. 

개인들은 자신의 성적 감정과 환상, 기분, 성향, 활동을 자진해서 감시하고 낱낱이 조사하려 한다. 이런 자기 단속이 과거에는 가톨릭의 고해소를 찾게 했다. 성당의 고해서는 성에 관해서 이야기하도록 인가하고 장려한다는 점에서 그 사회는 사적 고백을 통해 성의 위험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이러한 종교적 분위기는 탈피되어 고백은 본격적으로 조사와 질의라는 형태로 변형되었다. 성이 갈수록 지식과 권력의 네트워크와 결부되었으며, 개인의 태도를 스스로 훈육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른바 지식과 교육의 문제들과 연결된 것이다. 심리치료와 정신분석학이 그러한 자기 단속의 주요한 예가 된다. 

심리 치료에서 개인은 성적 실천이나 성애적 환상에 관해 강제로 고백한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오히려 환자가 누설하는 정보는 자유를 얻는 수단으로, 혹은 억압에서 해당되는 것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다루어진다. 

그러니까 있지도 않는 자기 억압에서 스스로 해방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인해 객관적인 권력의 구속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들은 자기 감금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자아 규정과 자기 조절을 실험할 수 있는 잠재적인 공간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새로운 질서 시대에 맞는 자아상이다. 


(2) 들뢰즈(1930∼1995), 가타리(1930∼1992)의 탈근대적 자아상 

감각에 따라 조각조각 파편화되어 버리는 현대인의 허약한 자아의 분열증에 대해서 도리어 창조적이고 긍정적이고 해방적일 수 있다는 보는 철학자들이다. 어떤 의미로도 자아의 통일적 구조를 제시하는 것은 전제적(專制的)인 발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반대로 이들 철학자는 다중화, 불연속성을 찬양한다. 그들은 정신분열증이 임의성, 탈중심화, 끊어진 정체성을 통해서 우리의 선형(線型)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세계를 와해시키는 급전적인 정치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한다. 

  

( 평 ) 

폴란드 사회학자 바우만에 따르면 탈근대적 자아를 이끄는 충동은 주인이 되려는 충동이다. 주인이 되려는 욕망은 자꾸만 자아를 표류하게 만든다. 게임은 짧게 끝내고 장기적인 일에 말려들지 않기. 고정되기를 거부하기. 삶을 오직 한 가지 작업에만 매어 놓지 않기. 어느 누구에게도 일관성과 충성을 맹세하지 않기. 미래를 제어하려고 하지 말고 장래에게 미리 저장 잡히지 않기. 게임의 결과를 게임 밖에 끌고 나가지 않기. 결과에 책임지지 않기. 현재의 양쪽 끝을 잘라 내고, 현재를 역사에서 끊어놓기. 이러한 전략으로 살기이다. 

그의 책 『액체 근대성』(2000)에 의하면 오늘날 경험되는 정체성들은 끝이 열려 있고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적인 감정이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가벼운 가변성이 사람, 조직, 기구, 고용, 오락, 이미지, 메시지, 돈 같은 그 어떤 영역에서도 경험되지 않을 영역이 없으며, 국가적·사회적 경계를 무너뜨리는 전(全)지구적인 흐름 속에서 같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자아의 창조적인 활동이 어느새 고립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흐름에 또 대비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긴장감을 안겨주게 된다. 남은 것은 자살의 보편화인가? 

‘흩어진 자아’ 곧 현대인의 자아는 상황에 따라 밀려왔다가 다시 썰물처럼 쓸려 내려가는 가치관에 시달리는 버려진 포구와 같은 폐허의 양상이다. 조각된 자아상을 끌어안고 안락을 찾아 숨어들어 갈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뒤죽박죽이 된 사태들이 쌓여서 만들어낸 침전물이 곧 우리 이웃의 얼굴들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믿을 것도 못된다. 하지만 뭔가 믿고 의지하지 아니하면 본인이 못 견딘다. 

거부하지 못한 채 매일 다가오는 미래는 입을 크게 벌린 짐승의 아가리마냥 어둡다. 그 어두움이 자아를 삼키기 전에 현대인들은 단잠을 청해 자신을 잊고자 한다. “어쩔 수 없는 몸”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나서는 이제는 그 몸을 갖다 버릴 적당한 곳을 찾아다닌다. 더 이상 주인 노릇하는 것도 부담이다. 

아무도 나의 이름을 불러 주지 말았으면…, 
아무도 나를 의미 있게 주시하지 말았으면…,. 
그래서 잊혀진 존재가 되어 몸체가 없는 유령처럼 훌훌 공간을 날아다녔으면…. 

지옥이 따로 없다. 

사랑의 예수님으로부터 호출당하지 않아 그 어떤 사명감도 없이 살아야 하는 자가 곧 저주받은 자다. 

“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요 15: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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