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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속의 악마] 장-디디에 뱅상 저 류복렬 역 푸른숲(서울:1997)

은바리라이프 2012. 2. 24. 00:17


[인간 속의 악마] 

장-디디에 뱅상 저 류복렬 역 푸른숲(서울:1997) 

2010-06-03 10:37:31  이름 : 이근호  


 

저자는 특이하게 ‘악마에게 부치는 글’로부터 시작한다. 악마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먼저 악마에게 말을 건넨다. “너 악마를 나의 동맹자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고 더구나 악마의 노예도 되지 않은 가운데서 악마를 자기 글을 쓰는데 중개인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의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악마가 어디 있는가를 알리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마는 어디에 있는가? 

악마는 인간 뇌 속에 있다. 뇌를 만드는데 이미 관여했으며 뇌는 악마의 작품이며 따라서 그 뇌의 활동을 장악하고 있다는 저자의 생각이다. 따라서 악마의 활동성을 알려면 뇌의 기능을 알면 된다. 이 말은 뇌의 기능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악마의 진면목을 모른다는 말이 된다. 

인간의 뇌는 자율성을 열망한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상반되는 성질로 인하여 이 자율성이 훼방 받는다. 삶/죽음, 기쁨/고통, 남성/여성 이런 것의 대립쌍들로 인해 인간은 늘 주체할 수 없는 혼돈상태에 놓여있다. 이것은 모두 악마의 저질은 짓이다. 대립상황을 유발되는 그 현장이 곧 악마가 존재하는 현장이다. 

악마는 삶·성(性)·죽음을 인간 사회의 중심 요소로 자리 잡게 만들어 놓고서 그 어떤 이론으로도 대책이 없게 만들고 말았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악마를 분석해야 만이 그 실상이 보인다. 저자는 ‘악마생물학’을 터무니없다고 여기지 않는다. 자연법칙 전부를 악마가 만들었다고 저자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연법칙 과정에서 발휘하는 악마의 힘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이런 시도를 제쳐놓고 진리를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창조란 파괴를 통해서 진행된다. 이 파괴와 창조 작업이란 곧 번식작업을 말한다. 악마는 당연히 성(性)이란 이름으로 여기에도 관여한다. 창조 작업이란 곧 차이를 낳는 작업이다. 차이를 낳으려면 매우 연약해야 한다. 분자는 ‘공유결합’이라는 원자들의 강한 응집력으로 결합되어 있다. 하지만 분자들 상호간의 결합력은 원자들의 공유결합과는 달리 약하고 불안정해서 이중분자를 구성한 여지를 갖는다. 

이렇듯 생명체는 가변성·다양성·나약성, 그리고 적응성으로 대변되는데 이는 ‘온순한 과격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체로 하여금 진화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무생물체이 존재와는 달리, 생명체는 진화하면서 뭔가를 숨긴다. 바로 ‘대칭성’이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단백질은 오직 L형을 이루는 아미노산으로만 구성된다. 그리고 핵산은 D형의 당만이 함유하고 있다. (여기서 L형이나 D형이니 하는 것은, 빛을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굴절시킬 수 있는 비대칭 구조를 나타낸다. D형은 오른쪽, L형은 왼쪽이다) 이러한 구조상의 특징은 단순히 자연 섭리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식별 현상’을 남기겠다는 것인데 바로 악마가 이런 작업을 하면서 자신을 생명체 속에 숨어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식별현상’으로 인해 생명체는 자신의 닮은꼴을 거울 속에 아닌 자기가 서 있는 쪽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성(異性)이 식별은 오직 거울의 한쪽 면에서만 가능하다. 성(性), 곧 번식활동이 이런데서 동기를 갖는다. 자기를 일체화 시킬 수 있는 짝을 찾아서 자기만의 삶의 의미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물을 거울처럼 사용했던 나르시스는 그만 물 속에 빠져 죽어서 진화를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전자 DNA의 기능은 ‘나와 닮은 형(形)’을 이어나갈 ‘다른 생명체’를 생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즉 타인을 매개로 받아들여서 궁극적으로 자기 창조를 지속시켜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가까운 혈족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전수시키는 것이 자기희생으로 인한 혜택이 더 많이 돌아가는 원칙이 나타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주변 상황이 원활치 못할 때는, 유전자는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까지 다른 것들과의 경쟁을 통해 삶에 유리하도록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종족이 보존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진보해야 한다. 성(性)이란 곧 두 유전체(게놈)의 배합이다. 이 만남에서 각각 고유한 특성이 대립되는데 이 대립의 현장이 곧 악마가 개입해서 설치는 현장이다. 

생명체의 진화는 결국 큰 두뇌를 가진 존재를 낳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악마는 그곳에 자리를 잡는데 본인이 그런 식으로 이끌어왔기 때문이다. 인간이 큰 두뇌를 가졌다는 이 진화의 산물은 곧 대립과 경쟁의 결과물이다. 악마가 그렇게 유도해온 것이다. 

다세포동물의 배태과정은 수정란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 과정에서 장차 두뇌가 되는 것은 유전자가 몸체의 여타의 유전들과는 달리 하나의 염색체 위에 일렬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게놈(유전체) 안에 분산되어 있다. 척추동물의 뇌의 진화과정은 마치 몇몇 유전자들의 절대적인 독점력이 후천적 요소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밀려나버리는 것처럼 진행된다.

이 말은 곧 초기부터 신체를 통제하는 기능이 뇌가 될 조직에 집중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점차적으로 유전적 요인과 후천적 환경 요인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말도 된다. 이로서 뇌를 제외한 나머지 신체들은 뇌에서 작용하는 선과 악의 구별하는 사고력에 예속되게 된다. 인간이 땅으로부터 직립 보행하므로 서 우선 머리가 땅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손은 자유로워졌다. 이것은 인간의 머리는 몸체의 일부로 존재해야 하는 한계를 벗어난 것이 된다. 

프랑스의 생물학자 에델만(G.M.Edelman)은 뇌가 바로 확인과 식별의 시스템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곧 대립되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 그것을 식별하는 능력에 따라 두뇌 내부와 안면근육의 체형이 윤곽 잡히게 된다는 말이다. 악마가 이처럼 인간을 자꾸만 자체적으로 대립적 상황에 묶어두려는 것이다. 끊임없는 분별과 식별 속에서 인간을 지치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인간의 두뇌는 갈수록 예민해지고 발달하게 된다. 

두뇌가 신체의 윗부분에 장착되면서 신체는 드디어 언어에 예속되게 된다. 언어란 최고의 악마적 재능이요 모방력을 표출한다. 언어는 한 개인의 사고를 다른 개인에게 전달해주는 경이로운 도구다. 이로서 모든 인류는 언어 속에 같이 탑승하고 있다. 성인의 경우에는 언어중추라는 기관이 죄 속에 존재하지만 어린아이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어린아이가 비록 좌측 대뇌반구에 뇌 손상이 있어도 나중에 정상적인 언어 능력을 지니는 데 지장을 주진 않는다. 성인의 경우에는 해부적 표준 단위가 존재하는 데 비해 상대적으로 어린아이에게는 이러한 단위가 없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언어자리를 구축하는가? 언어 능력을 구축하는 진정한 메커니즘은 바로 선천성과 후천성의 구분을 초월하는 교류 때문이다. 이 교류는 어린아이가 자라나면서 주변에서 만나는 사물들과 성인들의 언어와 행위를 모방해서 형성한 것들이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것은 자기가 모방하고 싶은 단어들을 만들기 위해 그 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것은 감정과 열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이성(理性)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정과 열정은 기쁨/고통이라는 대립 영역 안에서 얻어진다. 모든 언어가 이성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고 모두 은유적 의미를 지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간이 항상 의미성을 포기하지 않고 행위에 나서는 이유는 자신의 모든 행위의 원천이 자신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과 열정의 대립성향 때문이다. 두뇌신경생물학은 기쁨과 증오라는 대립 상태에 그 기저에 존재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전제 조건들을 제공해준다. 

기쁨과 고뇌를 관장하는 장소는 자극과 운동이 일어나는 일차원적 수준의 근육이 아니라 두뇌이다. 그 절차를 익히는 것이 악마의 작업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대립절차는 감정적 반응의 폭을 줄이고(적응), 반복이 계속되면 그 폭을 아예 없애버린다.(습관화). 그리고 비슷한 반응을 얻기 위해서 점점 더 큰 자극을 요구하게 되고(내성耐性), 자극이 끝나면 오로지 다시 대립절차만 남아 감정적 대립과 결핍 증세를 가져온다. 이 이론은 모든 자극에 가 적용된다. 자극은 행복감을 주는 흥분과 커다란 기쁨(육체, 사랑, 돈, 권력)의 원천이다. 주체는 이 절차 속에서 머물면서 계속 더 큰 자극을 탐하게 되면서 결국 그것들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살다가 번식하다가 죽는다. 천국과 지옥을 번갈아가며 사는 삶, 그것이 곧 지옥이다. 

신경외과 의사들은 사람을 시술하는 과정에서 시상하부(두뇌 밑쪽에 숨어있는 지역) 측면 부위 전기자극을 가하면 미소를 짓는 쾌감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현상을 성취감이나 어떤 욕망에다 적용시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필요치 않는 필요, 그리고 대상이 없는 욕구에 해당하는 것이다. 기쁨과 불쾌감을 관정하는 대표적인 신경전도체는 도파민 및 세로토닌이 있다. 도파민이 과다하면 과도한 흥분 상태에 돌입하고 세로토닌이 과다하면 과도한 침울에 빠진다. 충동적 방화범의 뇌에는 세로토닌의 함량 비율이 낮다. 즉흥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약중독이란 인위적인 방법으로 대립절차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아편은 몰핀 수용체 위에 고정되면서 신경원들의 흥분을 감소시킨다. 몰핀은 나트륨이온(잠재적 행동 유발요인을 발휘하는 기능)과 칼륨이온(잠재적 행동 유발 요인을 저해하는 기능)을 활성화 하는 효소의 작용을 저해함으로 신경원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이다. 

담배의 니코틴은 신경전도체를 자유롭게 해줌으로써 도파민 전달을 활성화시킨다. 즉 니코틴은 대립절차에 한가운데 개입하는 것이다. 신경흥분제는 내성을 유발하여 마약의 투입량을 늘리게끔 한다. 특히 어린 시절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건을 접하면 마약이나 술이나 담배에 중독될 가능이 크다. 그 이유는 주체란, 그의 세상, 그의 과거를 반드시 함께 포함하기 때문이다. 담배뿐만 아니라, 커피, 파, 코코아도 마약이다. 

노름꾼은, 쥐에다 암페타민을 투입한 후에 보여주는 예민한 행동을 보인다. 노름꾼의 손이 비정상적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뇌의 측좌핵이 흥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 욕망을 빠른 시간 내에 불태움으로서 그 결핍을 되풀이해서 즐기고 싶은 것이다. 대립절차 중의 ‘내성’부분의 늪에 걸려든 꼴이다. 그에게 있어 삶 자체가 중독이다. 이점에 있어 폭식가도 마찬가지다. 

뇌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 감각들을 받아들인다. 이 정보 감각들은,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하는 대립적 특성 시스템에 의해서 분류된다. 이 대립 감정을 근거로 뇌는 근육에다 대처 할 수 있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뇌가 세상에 대하 갖는 표상들은 현실을 직접 그대로 반영되어 하나의 화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분위에서 그 반응을 나타낸다. 이로서 인간의 두뇌는 어릴 적부터 인지지도가 그려지는 것이다. 

인지(認知)지도(地圖)란 바로 뇌의 유연한 대처성에 힘입어 만들어진 그 개인만의 표상이다. 연애 지도(地圖)라는 것도 있다. 어릴 적 연애지도가 손상되면 성인이 되어 동성애자나 변태성욕자자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뇌는 그냥 고정된 그림엽서가 아니다. 뇌는 계절과 일기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기분에 따라 매순간 변화하는 살아 숨 쉬는 특이한 풍경 속의 세계와 같다. 권태로움을 단순히 도파민의 결핍만으로 압축할 수는 없다. 도리어 죽음을 막연한 기다리면서 권태라는 고통을 당하느니보다 차라리 죽음을 앞당겨 당기려는 목적으로 도파민이 줄어들 수가 있다. 

이는 우리 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즉 늙었기 때문에 신체가 말을 안 듣는 것이 아니라 신체는 더 이상 쓸 일이 없기 때문에 늙는 것이다. 뼈가 약해지는 것은 근육이 사그라지면서 줄어든 체중을 지탱하는 데 적응하기 때문이다. 관절이 뻣뻣해지는 것은 움직이지 않아서다. 동맥이 경화되는 것은 혈액 유출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뇌의 기능이 저하는 것ㅎ은 더 이상 뇌의 지도에 그려져 있는 길을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기능 저하는 육체 외적 공간의 감퇴를 가져온다. 욕구가 약해짐으로써 축소되고 움츠러들며 자신의 결함에 적합한 환경을 찾게 된다. 노인의 경우에는 더 이상 심심해 할 수 없기 때문에 죽는다. 이러면 악마는 인간에게 승리하는 것이다. 

인간이 악마와 대면하면서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전략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복종과 대결과 타협이 바로 그것이다. 복종하면 ‘대립절차’라는 지옥에 빠지는 격이라고 한다. 대결이란 곧 악마와 투쟁하는 방식인데 이 방식의 약점은 자신이 만든 틀 속에서 평생을 갇혀 지내야 한다는 점이다. 세 번째 전략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권한다. 이기적인 인식에 충실하면서 외부에 적당하게 타협해서 살면 결국에는 악마의 전략을 이미 눈치 채는 자이기에 최후의 건배를 들 수 있다고 말한다. 



Ⅲ 

(평) 

저자가 보는 인간에 대한 이상형이 성경에서 나와 있는 것과는 다르다. 악마에 물들지 않는 인간의 순수함을 인간의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구성의 완전함으로 표현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치아가 건강하고 두뇌가 안정적이기에 메시아 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말씀에 순종하고 완성했기에 구원의 주가 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육신 역시 모든 남성의 표준적 신체성을 지닌 것이 아니다. 그저 죄로 인하여 허물어져야 될 연약한 육신일 뿐이다. 

이런 육신성과 영적인 존재인 악마성을 결부하는 아이디어 자체가 육에서 나와서 육으로 좇아가는 육적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악마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들통 난다. 복음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악마의 본래 목적이다. 십자가 피 사건을 가릴 수만 있다면 악마는 무슨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행복한 가정되기, 내 교회 부흥시키기, 웃음 속에서 지내기 운동, 건전한 정신 하에 건강한 신체 단련시키기 등등이다. 이런 시도를 한 마디로 말해서 ‘어쨌든 내 것 갖기’ 정신이다. 이 정신은 예수님의 대속물로 ‘드리기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막 10:36-38) 

예수님이 마신 그 쓴 잔을 마시게 않더라도 기어이 천국 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모든 교회가 다 악마의 처소다.

 첨부파일 : 인간 속의 악마.hwp (32.0K), Down: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