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역사
김한수
목 차
시작하는 말
최근 작고한 스칸디나비아 학파의 알스트룀(Gösta W. Alström)은 그리이스의 역사가 헥카토우스(Hecataeus)의 말을 인용하면서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의 네가지 사항을 말한다. 첫째, 무엇이 일어났는가?(What happened?) 둘째, 그 사건이 고대 역사가들에게 어떻한 모습으로 이해되었는가?(how the events were understood by the ancient writers?) 세째, 이러한 저자들의 목적은 무엇인가?(how these writers wanted it to have happened, that is, the purpose of the writing?) 네째, 그들은 누구를 위해 글을 썼을까?(the audience for whom they wrote?) .. 이러한 내용들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는 영원히 지나간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을 이용해서 그것의 일부를 재건해 볼 수 있다. 그러한 일이야말로 역사학의 의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본 소고에서 이스라엘의 역사 전반에 대한 내용을 검토하고자 한다. 한 나라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검토해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다른 어떤 구체적인 증거나 객관적인 사료보다는 신앙고백서인 성서를 기초로해서 그들의 역사를 재건해 본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나라의 역사를 기술하는데 있어서 객관적인 사료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구전되어 내려온 자료들의 신빙성도 우리는 무시 할 수 없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투스도 그의 역사의 전부가 바로 그 시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던 내용을 일일이 들은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서에 기록된 자료들도 때때로는 훌륭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전재해 나가는데는 여러가지의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선 밀러와 헤이즈(J. Maxwell Miller and John Hayes), 그리고 알스트룀(Gösta W. Alström)의 이스라엘 역사 서술 방식을 따라서 진행을 하고자 한다. 이들은 최근에 가장 고고학적이며 객관적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저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그때에 따라서 다른 학자들의 의견이나 자료들을 병행하고자 한다.
I.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의 사용은 그리이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헤로도투스 자신도 이 말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으며 이것은 그 당시 이미 사용되고 있는 말이었다. 대다수 학자들의 의견은 이 말이 블레셋인들(Phillistines)을 지칭 할 때 쓰는 말이었다는데 일치되고 있다. 즉 아카드어의 '팔라스투', 혹은 필리스투, 히브리어의 '블레셋', 아람어의 '펠리스타인', 이집트어의 '프르스트' 등이 이 블레셋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1.지정학적 위치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는 지중해 연안의 조그마한 나라지만 그 역사는 중동 전 지역과 지중해 연안 지역 및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이집트/이디오피아와도 연관되어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왕국의 이름은 남북으로 분열될 때 북 왕국을 이스라엘이라 부르고 남 왕국을 유다라 부른데서 연유한다. 그러나 보통 이스라엘이라 한꺼번에 부르는 이유는 왕국 시대 이전부터 에브라임 산지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던 집단 이름이 이스라엘이었고, 왕국 초기의 명칭이 이스라엘이었으며, 포로기 이후에는 종교적으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스라엘 백성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지중해 연안 지역은 보통 "비옥한 초승달"(The Fertile Crescent)이라 불리는 지역에 속해 있으며 이 지역은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데스 강 하류 평야 지대에서 출발하여 양강을 따라 올라가 지중해가 바라 보이면 왼쪽으로 굽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으로 이어진다.
2.지형과 도로
레바논 산맥(Lebanon)과 안티 레바논 산맥(Anti-Lebanon Mts.)에서 발원한 오론테스 강(Orontes)은 산맥 사이의 협곡을 따라 북쪽으로 흘러 알레포의 서쪽 알라라크(Alalakh)까지 뻗어 있고 동일하게 레바논 산맥 동쪽에서 발원한 리타니 강(Litani)은 협곡을 따라 남쪽으로 흘러 두로 근방에서 지중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 협곡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갈릴리 호수, 요단강, 사해 등으로 이어지며 아카바 만까지 연결되는데 이 협곡은 아프리카까지 펼쳐져 있는 대 협곡의 일부분이다.
팔레스틴의 대부분의 바위와 토양은 바다의 침전물로 형성된 석회암이다. 석회암은 물을 간직하기보다 물을 쉽게 통과 시켜버린다. 이러한 석회암은 부서져 이룩된 토양인 팔레스틴의 토양은 가뭄이 심할 수 밖에 없다. 이 토양은 농사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우기에도 건조하기 때문에 무역로로는 가장 통행하기 편리한 도로가 될 수 있다.
한편 지중해 연안 기슭과 요단 동편의 중부에는 단단한 암석들이 풍화되어 형성된 비옥한 붉은 땅(Terra Rossa)이 덮여 있어서 농사짓기에 알맞은 옥토를 이루고 있다. 유대 산지 남쪽에 펼쳐져 있는 네게브는 사막의 바람이 날라온 황각색의 먼지(황토)로 덮여 있으며 비가 조금만 와도 지각이 굳어져 버리기 때문에 비물은 스며들지 못하고 미끄러져 흘러가 버린다. 팔레스틴의 지형은 화산 폭발로 인한 지각 활동에 의해서 주로 형성되었는데, 화산 폭발의 흔적은 바산 지역과 갈릴리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산암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지각 활동에 의해 생겨난 대표적 예는 바로 요단협곡으로서 이 협곡에는 지진이 빈번하다.
가장 중요한 도로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있는 해안도로(via maris,사 9:1)인데 이 도로는 북쪽으로 페니키아 지역(두로와 시돈)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북쪽으로는 갈릴리 호수의 북편에 있는 하솔을 거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케소포타미아 까지 연결되어 있다. 해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므깃도,아스돗,가사 등을 거쳐 이집트로 연결되어 있다.
이 도로는 팔레스틴의 가장 중요한 도로일 뿐아니라 이집트에게도 북쪽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도로였기에 도로 선상에는 요새들이 줄지어 서 있었으며 이집트인들은 이 길을 "호루스의 길"(the ways of Hours)즉 "파라오의 길"이라 불렀다. 그리고 대상들과 군대의 통행을 돕기 위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우물들과 역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해안도로에 대한 고대의 상세한 상황은 아나스타시 1세의 문서(Papyrus Anastasi I,ANET476-8) 에 나타나 있으며 더둑 상세한 것은 세티1세 (seti I)와 투트모세 3세(Thut-mose III)의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3.팔레스틴의 지역 구분
팔레스틴을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면서 크게 네 지역으로 나누어 보면, ⑴ 지중해 연안의 해안지역 ⑵갈릴리와 에브라임 산지 및 유다 산지로 연결되는 중앙산지 지역 ⑶갈릴리 바다-요단강-사해로 연격되는 요단 협곡 ⑷요단 동편의 고원지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1)지중해 연안의 해안 지역
팔레스틴 지역중 가장 비옥하고 기후가 좋은 곳이다. 남북으로 뻗어 있는 해안도로는 국제적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는데 갈멜산 줄기에 있는 므깃도를 통과해야 한다. 따라서 므깃도는 진격해 오는 적군을 차단하는 중요한 요새로 치열한 싸움터가 되곤하였다.
2)중앙산지 지역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중심지역으로 북쪽에서 보면 갈릴리 고원지역,이스라엘 계곡,에브라임 산지,유다 산지로 이어진다. 사마리아와 세겜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으며 예루살렘은 유다지역에 있지만 거의 유다 산지와 에브라임 중간 지역에 위치해 있다. 팔레스틴의 등뼈와 같은 역할을 하는 중앙산지는 보통 해발1,000m정도의 높이에 까지 이르고 있으며 겨울에는 눈이 올때도 있다. 예루살렘은 해발830m의 높은 곳에 있는 산성으로 자연적인 요새지로 되어 있다. 연간 강우량도 적은 편이지만 그것도 며칠 동안에 오는 것으로 비가 올 때면 계곡에는 홍수가 지게 된다. 그러나 비가 그치면 계곡은 말라 버리고마는 와디(wadi,乾川)가 대부분이다.결국 이 산지에 정착해 살 수 있는 선결 조건은 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다.그들은 빗물을 모아서 바위를 깎아 만든 물 탱크에 저장해 놓고 쓰기도 하고 수십 길 되는 바위층을 뚫고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길어서 쓰기도 하였다. 이 지역은 돌과 바위로 덮인 지역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것도 힘들지만 뿌린 씨앗도 자주 반복되는 가뭄과 홍충이떼로 인해 추수할 것이 없는 흉년이 될때가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농업과 목축을 겸하여 어려운 삶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를 "약속의 땅","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불렀다.
3)요단 협곡
헤르몬 산(Mt.Hermon)기슭에서 흘러나온 물이 갈릴리 호수에서 모이고,다시 요단강을 따라 내려가 사해에 도착하게 된다. 언제나 흘러 내리는 강물은 물이 귀한 팔레스틴 지역의 젖줄이 되었으며 주변에는 푸른 나무들이 자랄 수 있었다. 갈릴리 호수 주변과 요단 강 북쪽 지역은 주변에 비옥한 토지가 연이어 있으나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삭막해지며 사해 주위에는 광야만 펼쳐져 있다. 사해 입구에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도시인 여리고(해저250m)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발달해 있고 "소금바다"로 불리는 사해는 각종 공물질이 농도 짙게 녹아 있어 (약25%는 광물질) 오늘날 천연자원의 보고로 인정 받고 있다. 사해는 수면이 해저 약430m로 낮게 위치해 있으며 주변에 늘어선 절벽에는 박해 받은 사람들이 피신했던 동굴들이 군데군데 보이는데 이러한 동굴속에서 사해 사본(Dead Sea Scrolls)이 발견되기도 했다.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37km의 거리이지만 고도 차이는 1,080m(해발830m에서 해저 250m까지)에 달하는 급경사를 이루는 길이다. 예루살렘에서 사해까지는 직선거리로 20km에 불과하지만 고도 차이는 1,250m에 달하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4)요단 동편의 고원지대
아라비아 사막으로 연결되는 지역으로 남북으로 고원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갈릴리 북동쪽은 바산이라 부르는데 현재 골란 고원(Golan Heights)지역이다. 옛날부터 목축지로 이름이 나 있는 이곳은 1967년 6일전쟁 때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세력 다툼을 하면서 싸우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얍복강을 건너 남쪽으로는 암몬,모압,에돔 등의 나라가 차례로 위치해 있다. 암몬과 모압은 포도주 생산이 많았으나 에돔 이하는 광야로 연결되어 있던 주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요단 동편은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르우벤,갓 그리고 므낫세의 일부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스라엘과 유다가 국력이 강할때만 통치가 가능한 지역이 요단 동편지역이다. 요단 동편지역을 관통하는 왕의 대로는 지세가 단순하지 않았으므로 굽이도는 곳,오르락 내리락 하는 곳이 많은 험한 도로이다.
4.팔레스타인 지역의 기후
기후는 아열대성이며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 10월경부터 3월까지 겨울에는 비가 내리고 4월부터 9월까지 여름에는 아주 메마른 날들이 계속된다. 우기가 시작되는 10월에 내리는 비는 씨앗이 발육하기 좋은 비로 "이른 비"라 하고,이듬해 3월에 내리는 비는 열매의 성숙을 돕는 "늦은 비"라 하였다. 곡식농사는 가을에 씨뿌려 봄에 추수하게 되고,과일 추수는 가을에 하게 되는데 봄,가을 추수기에 축제도 함께 거행하게 된다. 봄 추수기에는 유월절/무교절, 오순절이, 가을 추수기에는 장막절이 거행된다. 강우량은 지역마다 차이가 심한데 갈릴리 지역은 연간 약1,000mm지만 사해 부근에는 50mm도 채 안되는 비가 내릴 뿐이다.
기후 문제의 심각성은 강우량에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짧은 시간 내에 한꺼번에 비가 쏟아져 내린다는 사실이다. 우기인 6개월기간 중 비가 내리는 기간은 불과 두 달 정도이며 비가 올때는 한꺼번에 쏟아져 경작할 수 있는 토양을 씻어내려가 버린다. 그리고 물도 역시 계곡으로 쏜살같이 흘러가 버린다.
5.경제생활
고대 중동의 여러 국가들의 경제가 그러하였듯이 농업과 목축은 팔레스틴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틴의 농업은 관개에 의존하지 않고 하늘의 비와 이슬에 의존하는 지역적 영농이었다. 따라서 가뭄에 대한 근본적 대책이 없었고 대책을 세울 수도 없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풍요한 땅"을 의미하는가? 분명 팔레스틴 땅, 특히 중앙 산지 지역은 척박한 땅으로 "풍요한 땅"은 아니었다. 그러면 채 여물지 않은 햇곡식에서 흘러나오는 우유빛 액체와 산지의 바위 틈에 흐르는 야생꿀이 있는 땅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목축으로 얻을 수 있는 "젖"과 수목재배로 얻을 수 있는 "꿀"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은 그 땅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기에 그들은 그 땅을 그렇게 불렀는가?-"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분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로다!"
II.역사 이전의 팔레스타인
1.주전 2000년 경 이전의 고대 오리엔트
성경에 묘사되어있는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히브리인의 족장들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본향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존 브라이트(John Bright)는 여기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해서 이것은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이스라엘 전사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 말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이 시대에 대한 오리엔트 역사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이미 주전 6000년 대에 메소포타미아 강 하류에서는 하수나(Hassuna)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이미 어느 정도의 동석기 병요시대로 옮겨가는 시점에서 이 문화에서는 이미 사마라(Samara) 토기라는 훌륭한 문화가 있었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고루 퍼져있었다.
주전 4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수메르인에 의한 찬란한 문명이 꽃을 피우게 된다.그들이 하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문명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나 그들이 어떠한 인종이었으며,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어쨌던 이 시대의 문화들이 수메르어로 기록되었으며,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문자이다.
주전 24세기에 셈족 지배자들로 이루어진 한 왕조가 세계를 장악하고 세계역사에 최초의 본격적인 제국을 창건하였다.창건자는 사르곤(Sargon)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그 츨생 내력은 베일에가려져있다. 그는 키쉬(Kish)에서 정권을 잡은 뒤 페르시아만에까지 이르는 수메르 전 지역을 복속시켰다.이러한 아카드의 왕들은 수메르 문화에 도시국가의 테두리를 훨씬 뛰어넘는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최근에 에블라(Ebla,알레포의 남쪽 북부 수리아에 있는 텔 마르디크)에서 발견된 문서들이 간행되고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되면서 이 시기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의 세력은 주전 2200년 경에 구티(Guti) 족의 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되는데 이러한 가운데 제 3 우르(2060-1950년 경) 왕조의 문명이 꽃피게 된다.이 모든 것들이 다 수메르 문명에 속한 것이다.그러나 이 모든 부흥은 마지막이었으며 수메르 문명도 1500여 년간 진행되다가 마지막을 고하게 된다.
2.초기 청동기 시대의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에서 주전 3000년대의 대부분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초기 청동기 시대로 알려진 새대에 해당된다. 이 시대- 또는 이 시대로 접어드는 과도기적 단계- 는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원시 문자시대의 문화가, 이집트에서는 게르제 문화가 번성했던 주전 4000년대 후반에 시작해서 주전 3000년대의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의 기간이다.
비록 메소포타미아의 문명과는 비교될 수 없지만 이 곳에서도 주목할 만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대체로 에블라의 전성기와 일치하였기 때문에 이 둘 사이의 연관성은 모든 점에서 발견된다. 이 시기는 도시가 크게 발전했고 인구가 증가하던 시기였다. 고고학적인 자료에서도 성경에 나오는 도시들 중 다수의 도시가 이미 이 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II.이스라엘의 기원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해 직접 이야기 해 주는 자료는 성서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간접적인 자료들만이 고고학과 성서외의 문헌에서 발견될 뿐이다.한편 성서는 신학적 의도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역사를 재 구성하기 위한 자료로 사용하기에는 문제점이 많으며 역사비평학(Historical Criticism)을 동원하여 검토한 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1.성서
이스라엘의 기원에 관한 부분은 주로 창세기로 부터 여호수아에 이르는 여섯권의 책(Hexateuch)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대기에는 아담부터 기록되어 있지만 족보로 간단히 제시할 뿐이다 (대상 1:1- 2:8). 창세기-여호수아에 펼쳐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창세기 1-11장은 원시역사(元始歷史)라 하여 천지가 창조될때 부터 아브라함 이전까지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해와 달과 별,나무와 동물 및 물고기 그리고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였다. 에덴("즐거운곳") 동산을 만들어 아담과 하와가 거기서 살도록 하였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사건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 당했다.
고대 세계에 살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장수하였으며(므두셀라는969년) 영웅들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죄가 많아 홍수로 인류가 멸망 당하게 되었는데 노아의 가족과 선택된 동물들만이 살아 남게 된다.노아의 아들인 셈,함,야벳이 각 종족의 조상이 되었으며 시날 평지에 함께 살았으나 바벨탑을 쌓은 까닭으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언어가 달라지고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창세기 11장 27절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아브라함은 셈의 9대손으로 갈대아 우르지역에서 하란으로 이주하였고 아버지가 죽은 후에 다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후처와 첩들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은 아랍족들의 조상이 되었다.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하여 브엘세바 부근에 살았는데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얻었다. 에서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빼앗기고 결국 에돔족의 조상이 되었다. 야곱은 레아와 라헬 및 두 첩들에게서 열두 아들을 얻었는데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들이 되었다.
출애굽기는"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 왕이 히브리인들을 강제 노동시키며 남자 아기를 학살하는등 박해받는 히브리인들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된다.히브리인이면서도 이집트 공주에게서 양육받은 모세를 하나님은 불러서 이집트 왕을 굴복시킨후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떠났다.
모세의 지위권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널 때 법궤(언약궤 또는 하나님의 궤)를 맨 제사장을 앞세웠는데 그들이 강물에 들어서자 강물이 갈라지고 모두들 요단강을 육지 같이 건넜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부터 시작해서 가나안 땅을 차례로 정복했는데 군사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지해서 정복 사업을 수행했다. 정복한 가난안 땅을 지파들이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갖게 되었는데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이므로 땅을 분배받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지파에 소속된 성들을 분배 받았다. 이리하여 요단강 동편의 일부는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땅이 되었으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땅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1)성서 자료의 문제점
⑴ 연대기
성서의 연대
창조 주전 4164 +-2666 -+
출애굽 주전 1498 -+ 480년-+ |
솔로몬 성전 주전 1118 -+ | | 4000년
바벨론 포로 귀환 주전 538/9-+ 480년-+ |
마카비 성전 주전 164 +-1334 -+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서의 연대기는 다분히 성서 저자의 의도를 반영하는 신학적 연대기로 보이며 실제 역사의 연대기로 취급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볼 수 있다.
2)족보
아담과 하와로 부터 아브라함 및 온 이스라엘 백성이 일련의 족보로 설명되고 이웃나라들도 족보로 연결되는 모습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사사기 1장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 때까지도 정복되지 않은 많은 지역들이 있었으며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다른 민족들이 함께 섞여 사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더구나 잦은 전쟁과 국제적 통로에 위치해 있는 점 등은 혈연으로 연결된 하나의 민족이라 주장하는 데에 의구심을 던져준다. 족보는 여러 이야기들을 연결시키는 접속점으로 사용되었으며 긴 역사를 간단히 줄여 이야기할 수 있는 방편으로도 사용되었다. 때로는 나라간의 위상 문제,민족간의 갈등 문제,땅의 소유권 문제 등의 기원과 해결점을 제시해 주는 수단으로 족보가 사용되기도 했다.
3)모순과 충돌
창세기-열왕기의 기록과 역대기의 기록은 충동을 일으키며 차이가 있다. 때로는 예언서들이 다른 이야기로 충돌을 일으킬 때도 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라 말하며 생명을 보존하려했던 이야기가 두 번씩이나 반복되고(창12:10-20;20장),이삭이 비슷한 경우를 당하는 것(창26:1-11)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다.
4)기타
다양한 민간 전승들이 신학적인 의도하에 수정되고 배열되어 있는 모습이라든다 이야기에 흔히 나타나는 "신데렐라 모티프",즉 버림받은 아이,혹은 보잘것없는 시골 아이가 장성하여 큰 인물이 되는 주제가 자주 나타남을 볼 수 있다.노예인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고 나일강에 떠내려오던 히브리인의 갓난아기 모세가 바로 왕궁의 왕자가 되는 이야기 등이다.
2.성서 외 자료들
1)아모리인 가설(The amorite Hypohesis)
1930년대 학자들이 만든 가설로서 청동기중기가 시작될 무렵(MBD.2000-1800)고대 중동의 도시 문명이 파괴된 것은 아모리인의 이동 때문이며 이 시대가 족장들의 이동 시기였다는 가설이다. 그 당시 이러한 궤멸 현상은 시리아-팔레스틴뿐아니라 이집트(제1중간기)와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볼 수 있었다.아모리인의 가설의 문제점은 심각하다. ① 아모리인 가설은 성서의 연대기에 근거하고 있는데 성서 연대기 자체를 역사적 연대기로 보기 어려우며 MT와 LXX 그리고 사마리아 오경이 서로 다른 연대기를 제시하고 있다. 이집트 체류기간에 대해서 MT안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출애굽기12:40에는 430년 동안이라 하였지만 창세기 15:16에는 4세대 동안 (레위-고핫-아므람-모세)이라 하였다. 고핫은 이집트로 내려 갔을때 이미 태어났는데 133년을 살았고 아므람은 137년,그리고 출애굽 할 때 모세가 80세였으니 아무리 길게 잡아도 300년 미만이다.(창46:8-11,출5:16-20 참조;민3:17-19;26:58-59;대상6:1-3).
② 아모리인의 이동에 의해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이 붕괴되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일뿐이며 성서에서도 족장들을 아모리인과 연관시키지 않고 아람 사람(시리아인)과 연관시키고 있다("나의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었다."신26:5)
③ 청동기 시대의 메소포타미아 문헌에 나오는 사람 이름과 풍습이 족장들의 것과 비슷하다고 하지만 철기 시대의 메소포타미아 이름과 풍습도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있어서 이것만으로는 족장들의 배경이 청동기 시대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④ 아모리라는 말은"서쪽"이란 뜻의 아카디아어 amurrum과 수메르어 martu에서 왔으며 따라서 아모리에는 "서쪽 지역"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서쪽 지역은 보통 메소포타미아에서 볼 때 유프라테스 강에서 지중해에이르는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성서에서는 가나안 원주민 중의 한 족속을 말하며(창15:16) 요단강 동편에도 아모리라는 이름이 너무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므로 아모리인을 특정한 민족으로 보거나 언어의 통일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2)창세기14장의 이름 및 지명들
창세기14장1절에 나오는 "시날 왕 아므라벨"이 바로 함무라비왕이라는 가설은 언어학적으로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함무라비왕이 팔레스틴 지역으로 군사 원정을 하였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에블라에서 발견된 토판은 주전2600-2300년경으로 보이며 창세기14장에 나오는 5성의 이름과 유사한 단어들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소돔(sedom)과 si-da-mu라는 단어, 아드마('admah)와ad-ma라는 단어는 너무도 닮았다. 그러나 에블라인들의 언어는 히브리어와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으며 "비슷한 발음"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3)아마르나 편지와 하비루/아피루 가설
이집트의 엘아마르나(el-Amarna)지역에서 1887년부터 발굴된 아마르나 편지들은 350개의 토판에다 쐐기형 문자인 아카디아어로 쓰여졌으며 주전15세기 말엽에서 주전14세기 초에 걸쳐 기록된 서신들이다. 주로 아메노피스4세(Amenoph-is IV;약 주전 1379-1362)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아마르나 편지 가운데는 이집트의 세력하에 봉신으로 있었던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의 통치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며 보낸 편지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당시 예루살렘 왕 압두헤바(Abdu-Heba)가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이 편지에 나타나는 아피루(Apiru)는 성서에 나오는 히브리(ibri)와 비슷하고 연대도 성서의 연대와 일치하여 많은 학자들이 아마르나 편지에 나오는 아피루가 바로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가 이끄는 히브리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① 언어학적 문제점:아피루(Apiru)의 두번째와 세번째 자음 사이에 있는 장모음발음이 히브리인이라는 단어('ibri)에는 없는 점을 설명하 기 어렵다.
② 사회학적 문제점:아피루는 지리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고 (수메르에서 이집트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나타나므로 (주전2000년부터 주전1300년대까지)아피루의 정체를 규명하기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아피루를 주전 14세기의 어느한 민족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며,고대 중동의 한 사회 계층을 일컫는 단어로 이해 된다.아피루는 기존 사회 체제에서 밀려난 개인이나 집단을 말하며 그들은기존 사회 구성원이 누리는 법의 보호를 받을 없는 소외 계층을 일컫는 말이다.그들은 주로 고용된 외국 노동자들,용병,반역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에 헤이스(J.H.Hayes)는 히브리인의 기원을 아피루에서 찾기보다 사회-제의적(Socio-Cultic)측면에서 찾아보려고 했다. 즉 히브리인('ibri)은 건너가다('br)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지리적으로 건너가든지(pass over)혹은 제의적으로 건너간 사람들을 의미한다. 제의적으로 경계선을 넘어간다는 뜻은 초태생을 성전에 바치는 제의를 말한다. 또 성전에 바친 자녀들(장자들)을 위해 속전을 바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성전에서 봉사하게 되고 그 아이들을 성서에서는" 히브리인 종"혹은 느티님/나실인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4)힉소스 시대와 출애굽
이집트의 힉소스 왕조는 MBII의 시기 즉 제15-16왕조(주전 약1800-1500)때 외국인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셈족이 이집트로 이주하기 좋은 상황이었고 외국인이 고위직으로 출세하기도 쉬운 형편들에 의해 주전 16세기 후반에 쫓겨나게 되었다. 힉소스의 이집트 장악과 축출 연도는 성서에 나오는 근접하고 있다.성서의 연대기가 실제 역사의 연대개와 거리가 멀고,다른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를 살펴 볼때 출애굽 연대는 적어도 주전13세기 이후일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힉소스의 축출을 출애굽의 사건과 관련 시킬 수는 없다.
5)라메시드(Ramesid)시대와 출애굽
성서에 보면 비돔과 라암세스 성들의 이름이 히브리인들이 강제노동 당하는 이집트에 나타나 있다(출1:11).라암세스라는 이름은 이비트 제19-20왕조(주전 약1320-1085)에 자주 나타나는 왕의 명칭이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이 비돔과 라암세스를 건설할때 강제노동 당한 것을 역사적인 사실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레드포드(D.B.Redford)는 비돔,아람세스,숙곳이라는 도시 이름들이 후기에 즉 주전 7-6세기 경에도 나타남을 지적했으며 셈족들이 계속 이집트에 왕래하고 체류하였음을 주장했다.
6)샤수(Shasu) 와 이스라엘
헤르만(S.Herrmann)은 이스라엘인들을 샤수라고 보았다. 샤수는 라메시드 시대의 이집트 문헌에 나타나며 이집트 국경을 넘나드는 유목민이다. 헤르만은 샤수 유목민이 아라비아 북쪽에서 아람인들의 일부분으로 에돔,가데스를 거쳐 팔레스틴에 들어갔으며 또 한 부류는 에돔에서 이집트로 갔다가 다시 탈출하여 가데스와 요단 동편을 거쳐 팔레스틴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람인들이 남쪽 지역에 있었다거나 샤수와 관련이 있다는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더구나 샤수가 청동기 시대 때 가데스나 시나이 반도에 있었다는 흔적도 없다. 이집트 문헌에 나타나는 샤수는 어떤 특정한 민족으로 나타나지 않고 광범위한 유목민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또 헤르만(S.Herrmann)은 야웨 종교의 기원을 아라비아에 있었던 샤수에서 찾아보았다. 그는 아베노피스3세 (주전1403-1364)와 라마세스2세(주전1290-1224)때의 지명을 언급하는 중에 "야웨의 샤수인들의 땅"(land of the sh'sw ybw')이란 구절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러한 주장을 했다. 그러나 이 지명은 아카디아어 에서 발견되는 인명인 Yahwi-ilu와 비슷한 사용법인 애칭(hypo coristic form)으로 볼 수 있다.
7)주전13세기의 파괴 흔적
주전13세기 즉 청동기 말기(I.B)에 요단강 서부지역에 있었던 도시들이 광범위하게 파괴되었다. 학자들은 이 도시들이 바로 여호수아가 이끌었던 히브리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고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다.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신랄하게 비판받고 있는데 그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파괴된 도시들이 전쟁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는냐 하는 점을 고고학적으로 밝힐수 없고 더구나 동일한 적군에 의해 함락되고 파괴되었느냐 하는 점을 알 수 없다. ② 청동기 말기에 파괴된 도시들은 몇몇 도시를 제외하고 (라기스,하솔)대부분이 성서에 나오는 도시와는 다르다.③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된 도시들을 점검해 본 결과 많은 도시들이 주전14-15세기 때는 전혀 사람이 살지 않았거나 희소하게 살고 있었으며 주전13세기에 파괴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도시들임이 밝혀졌다.이러한 도시들은 헤스본(Tell-Hisban),여리고(Telles-Sultan),아랏(Tell Arad),아이(et-Tell)기브온(el-Jib)등이다.
8)메르넵타 스텔라 (Merneptah Stela)
고대 중동 문헌에 이스라엘"이란 단어가 최초로 나타나는 문헌이기에 일명 "이스라엘 스텔라"(Israel Stela)라고 불리기도 한다. 메르넵타 스텔라는 이집트왕 메르넵타의 승전비로서 주전1230년경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비명(碑名)을 둘러싼 논쟁점은 "이스라엘"이 지역 명칭이냐 집단 명칭이냐에 있다. "이스라엘"이란 단어는 가나안과 후루 사이에 있으며 블레셋의 도시들인 아스겔론,게제로 그리고 그 도시라 짐작되는 야노암 등이 앞에 있다. 언뜻 보기에 이스라엘도 지역 명칭 같아 보이지만 이 단어 앞에는 상형 문자로 된 표시가 있다. 이 표시는 보통 집단 명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마도 지파로 추정되는 이스라엘이 적어도 주전 1230년경에는 팔레스틴에 거주했음이 확인된 것이다.
3.이스라엘의 기원
1)올브라이트 (W.F.Albright)
올브라이트는 아브라함 등 족장들을 역사적 인물로 보았으며 아브라함을 노새 무역상인(Donky Caravancer)으로 보았다.창세기 14장13절의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서 올브라이트는 아브라함을 아피루로 보았고 주전 19-18세기에 "먼지"('aphar-'아피루'와 비슷)를 일으키며 노새를 몰로 다니는 무역 상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히브리"와 "아피루" 는 동일한 것이 아니며 이에 기초한 "노새 무역 상인"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주전 13세기에 파괴된 도시들은 고고학 발굴 결과 성서의 도시들과 맞지 않을 뿐더러 이스라엘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증거도 없다. 올브라이트는 이스라엘 특유의 문명이 있었다고 보았는데 그는 칼라 토가 (Collared-rim jar)를 이스라엘 고유의 토기로 보았다 그러나 하솔(Tell ei-kedah)을 발굴한 결과 주전 13세기에 파괴된 흔적이 있었는데 파괴 이전에 살던 사람이 채색 토기를 사용 했음을 발견했다.
2)외부 유입 혹은 정복설을 주장하는 학자들
⑴ 빔슨(J.J.Bimson)은 주전15세기 후반 (약1470)에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팔레스타인에 들어왔으나 원주민과 쉽게 동화하여 살았으며 주전13세기에 파괴된 도시들은 오히려 이스라엘 도시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빔슨은 주로 13세기설의 결점을 보완하려고 노력했지만 외부 유입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제시 하지 못했고 아랏,헤스본,아이 들의 도시들에는 MB(청동기 중기)층과 LB(후기청동기)층이 없는 점을 설명하지 못했다.
⑵ 바룩 할펀(Baruch Halpern)은,주전14-13세기에 히브리인들이 요단강을 건너 중앙산지에 진입했는데 전통적으로 이집트에 반란을 자주 일으켰던 가나안인들을 합류시켜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주전12세기" 드보라의 노래"(삿5:13-18) 시대에는 지파 동맹체를 결성했다고 주장했다.
⑶ 말라마트(A.Malamat)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도시들을 점령할 수 있었던이유는 심리전과 기습전을 병행했고 정탐꾼을 보내어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으며(민13; 수2; 7:1-3; 삿18:2-10)가나안 도시들이 이집트에 의해 착취당하고 분열되어 있었던 약점을 십분 활용했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3)점진적이며 평화적인 유입
알트(A.Alt)는 유목민이 건기와 우기가 변화됨에 따라 끊임없이 왕래하다 인구밀도가 낮은 산지에 정착했는데 대체로 평화적이었고 약간의 충돌만 있었을 따름이라 주장했다. 노트(M.Noth)는 알트의 이론에다 12지파 동맹설(Amphhhh hictyony)을 결합시켜 발전시켰다. 창세기 49장의 12지파(레위포함)는 초기의 것이며 민수기 26장의 12지파(레위제외)는 후기의 것이라 했고 여호수아 24장은 12지파 동맹의 헌장이라 했다. 노트는 이스라엘이 정착하는 모습을 2단계로 구분했는데 첫 단계는 레아와 첩들의 자손 지파들이 들어 온 것이며 두번째 단계는 라헬 자손지파들인 요셉 지파(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베냐민 지파가 진입한 것으로 보았다. 요셉 지파가 들어올 때는 벌써 부분적인 지파동맹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야웨종교를 소개한 지파가 바로 요셉지파라고 노트는 주장했다.
야곱 이주를 에돔에서 유목민이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넘어간 역사적 사건으로 보았다.또한 노트는 주전13세기에 히브리인들("아피루")이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탈출한 것으로보았다. 알트/노트 이론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① 성서의 가나안 정복설을 신명기 학파의 작품으로 보아 완전히 거부한 점:노트는 그의 양식사 비평에 너무 의존하여 때로는 역사적 자료를 내포하기도 하는 기원 설화(aetiology)를 제외 시켰다.
② 유목민이 평화롭게 정착했다는 것은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다. 마리문서(mari -texta)를 보면 유목민과 정착민 간의 이동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③ 12지파 동맹설은 하나의 가설일 뿐 학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이 가설에 대한 비판은 다음장을 보라)
4)혁명에 의한 변화
앞서 지적한 대로 아피루와 히브리인은 언어학적,사회학적으로 직접 연결시킬 수 없으며 "농민혁명"이란 구상은 현대적 개념으로 고대 사회에 적용될 수있을지 의문이다. "농민혁명"을 뒷받침해 줄 만한 성서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등이 지적됨에 따라 아피루의 "농민혁명"이란 모델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5)사회-정치-경제적 내부 변화
알스트룀(G.Ahlström) 은 고고학 자료와 아마르와 서신에 비추어 볼 때 군사적 정복이나 농민혁명 가능성은 없다고 보았다. 주전13-12세기에 중앙산지에인구가 증가하였는데 그는 "사회적 불안과 불만" 그리고 해양족속(sea people)의침입 때문에 해안평지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이 산지로 이동한 대규모 집단과 요단 동편의 유리하는 "아람 사람들"인 야곱 족속이 합류한 것으로 보았다."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중앙 산지에 정착할 당시에는 그 지역 이름이었으며 남북 분열 왕국시대에는 북왕국의 명칭이었고 포로 후기에는 종교적으로 야웨의 백성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고 알스트륌은 주장했다.
쿠트(R.C.Coote)와 휘틀램(K.W.Whitelam)은 성서를 신앙 고백적인 문서로 취금하여 일단 제의해 두고 신고고학(New Archseology)적 방법으로 발견된 사실에 기초하였는데 주고 지리적 연구와 팔레스틴에 장기간 거주한 생활 양식에 근거하여 사회학적 모델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을 피력했다. 따라서 외부 유입설을 반대하고 내부적 변화로 보았으며 이스라엘의 독특성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이스라엘을 가나안과 연속된 집단으로 보았다.그들은 반 상업적 (anti-commercial), 반 도시적(anti-uran),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다른 집단과 지역및 지파들이 산간지대에 모여서 이룩된"이스라엘"이 그들의 이름이 되었다.
쿠트와 휘틀렘이 신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여러다양한 인접학문들(예:사회학,경제학,인류고고학,지리학,생태학,심리-생리학 등)을 동원한 것은 큰 공헌이었으나 아직도 신고고학이 방대한 정보를 처리하는데 성공하지 못한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가장 큰 공헌은 역시 알스트룀이 제공하지 못했던"왜"(why)라는 질문을 경제-사회-정치적 이유를 들면서 답변해 주었다는데 있다. 물론 그 답변이 아주 정확하다는 것은 아니나 상당히 설득력 있는 답변을 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큰 약점은 중요한 자료인 성서를 완전히 제외한 점이다.
핑겔슈타인(Israel Finkelstein)은 이스라엘이 정착한 곳이라 여겨지는 곳들을 발굴한 결과를 토대로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원래 가나안 사람이었던 이스라엘은 주전16세기에 사회-경제-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떠나 사막부근에서 목축/유목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다가 주전 13세기에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주전12-11세기에 대부분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정착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소위 가나안인들과 이스라엘이 구별되고 마찰이 일어나기시작한 것은 이스라엘이 서쪽으로 확장을 시도할 때 부터였다.핑겔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고고학적 발견을 기초로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다분히 주관적 견해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예를들면 특정 발굴 장소들이이스라엘 정착지"인지 아닌지를 판명할 수 있는 기준이 모호하다. 전체의 지표들을 종합하여 귀납적으로 결론을 도출했다기보다 자신의 견해를 연역적으로 피력한 것이 그의 약점이다. 밀러(J.M.Miller)는 절충적인 입자으로 성서의기록과 고고학 및 고대 중동의문헌들을 모두 고려했다. 그는 이 모든 자료들이 이스라엘의 기원을 밝히기에는 너무도 불충분하여 역사가는 추수만 할뿐 이스라엘의 기원을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성서는 신학적으로 채색된 문학작품이지만 비평적으로 검토해 볼때 이스라엘이 태어나던 시기의 팔레스틴,즉 청동기 말기와 초기철기 시대의 팔레스틴은 다양한 것들이 모두 녹아 융화되는 용광로 (meiting)로 밀러는비유하였다. 밀러는 이시대를 사사 시대와 초기 사울 왕 시대와 비숫하다고 보았으며 사사시대직전의 단계도 이와 비슷한 상황으로 보았다. 밀러는 사사기를 시바럼으로 하여 거꾸로 이스라엘의 기원을 살펴보았다. 밀러는 이스라엘을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 원ㄹ해 가나인 땅에 살았던 사람들.,즉 유목민으로 정착한 사람들,이주한 아람인들,해양족속들,해양족속에 쫓겨온 안지역 주민들 등 모두가 섞여서 이루어진 집단으로 보았다. 결론적으로 밀러는 우리앞에 놓여진 자료들이 너무 불충분함을 지적하며 이스라엘의 기원을 밝히는 작업이 불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사사 시대를 기술하는 장에서 어느정도이스라엘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했다.
6)결론
성서에는 서로 다른 전승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신학적인 의도아래 그들이 배역되고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수직적인 족보 체계는 성서의 신학적 의도로 된것이요,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한핏줄로 한꺼번에 출애굽하여 모두가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으나 이 족보 체계는 역사적 정보이기보다는 신학적 족보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그 내용 가운데 일부분이 역사적 사건들의 기억을 담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제나 고대 중동의 국제사회의 한 부분으로 전개되었고 고대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영향을 민감하게 받는 나라였다.
에돔왕국도 이때 태어났다. 이 변화 이전에는 이집트가 오랫동안 팔레스틴 지역의 도시들을 장악하여 주종관계를 형성하여 왔는데 주전 13세기 후반에 지중헤로 부터 해양족속이 밀려오면서 이집트는 약화되었고 북쪽의 히타리트도 붕괴되었다. 청동기 문명이 있었떤 곳에 철기문명이 도입되면서 도처에 정복과 몰락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었다. 지중해 연안 지역에는 해양족속들이 밀려들어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이미 거기에 살던 원주민들은 내륙산지로 밀려올라가게 되었다. 이집트로 더이상 이들을 보호할 능력을 상실한 상황이었다.국제사회의 세력균형이 깨어지면서 번성했던 국제무역도 쇠퇴해 갔고 상업에 의존하던 지중해 연안의도시들은 경제적으로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상업이 쇠퇴해진 상황에서 그때까지 눈여겨 보지 않았던 팔레스틴 산지는 이제 농업과 목축지재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괴었고 철기 문명의 도입으로 농긱구와 농업기술의 발전은 해안지역에서 내륙 산지로의 인구이동를 가속화시켰다. 팔레스틴 산지로의 인구이동은 서쪽 해안뿐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도 있었다. 그 당시 중동 지역의 민족이동으;螡 물결을 따라 아랍 사람들,사막 지대에 살던 유목민들,이집트 지역에서 유입된 사람들 등 각 방면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들어와 산지에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성서가 말해주는 족장들,광야로 부터의 유입,출애굽한 사람들의 유입 등은 이러한 민족 이동의 물결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개척지로 가는 행렬 속에 아피루같이 소외되고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주 야훼께서 예루살렘에 대하여 말씀하시리를 네 근본과 태어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 사람이다. (겔16:3,34)
이스라엘은 결코 단일 민족으로 출발하기 않았다. 경제-사회-정치적인 이유에서 여러 다양한 집단이 모여서 이룩되었으며 이것은 고대중동의 국제사회가 만들어 낸 작품 중의 하나였다. 후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웨 하나님 앞에서 야웨께서 자신들을 낳으셨다고 고백하며 찬양했다.
IV.사사시대
1.자료
1)성서자료-사사기
사사기 1장에는 가나안 정복을 마무리하면서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지녁들이 열거되어 있다. 또 사사기에는 각 지파들의 생활상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는 지파들을 이끄는 지도자들 즉 사사들이 출현하였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으 신이 함께할때 큰 능력을 발휘하여 지파들을 어려움에서 구했다.때로는 주위의 다른 나라들과의 마찰 관계가 기록되어 있는 등 사사기는 사사 시재 당시으 정치적,사회적,종교적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중요한 책이다. 물론 사사기도 역사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책이다.
출애굼과 솔로몬 성전 사이의 기간을 480년으로 보는 성서 연대기 구조 속에서 각 지파의 사사들의 활동기간을 20년,40년,80년으 숫자을 반복사용하여 사사들을 일려로 정렬시켜 놓았다. 그러나 사사들을 자세히 보면 사사들은 각 지파의지도자였고 영웅들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사사들은 지파들 전체의 지도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고 활동 시기도 지파 나름이었기 때문에 사사들을 연대적으로 앞뒤로 나란히 세울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각 사사들의 소속 지파,활동시기,활동내용등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웃니엘(유다출신으로 짐작):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웃니엘이 아람나하라임(상부 메소포타미아)의 왕 구산리사다임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40년 동안의 평화가 있었다.(삿3:7-11)
에훗(베냐민 지파):모압 왕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군사들을 연합하여 종려나무 도시(여리고)를 점령하고 18년 동안 압제 하였다. 에훗이 이들을 물리친후 80년 동안의 평화가 있었다. (삿3:12-30)
삼갈:아낫의 아들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600명을 죽여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삿3:31)
드보라(에브라임 지파):하솔에 수도를 둔 가나안 왕 야빈이 철병거를 이용하여 20년동안 압제했다. "라마와 벧엘 사이의 종려 나무 아래 앉아서 " 사사일을 보던 여 예언자 드보라는 납달리 출신 바락과 함께 출전하였는데 스불론,납달리,잇사갈,에브라임,베냐민 등의 지파들과 겐 족속 헤벨이 참전하여 야빈을 물리쳤다. 40년 동안 평화가 있었다. (삿4-5장)
기드온(므낫세):오브라출신 기드온(여룹바알)은 7년간 압제한 미디안인들을 격파하였다. 기드온은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와 므낫세 지파들을 동원하여 그 중 300명을 엄선한 후 싸워 승리하였는데 40년간 평화가 있었다.(삿6-8장)
아비멜렉:기드온 의 아들인 아비멜렉은 70명의 형제들을 죽이고 세겜에서 왕이되어 이스라엘을 3년간 다스렸다(삿9:22).그는 여인이 던지 멧돌 윗짝에 맞아 부상한 후 죽었다(삿9장).
돌라(에브라임 산지):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는 23년동안 사사로 있었다(삿10:1-2).
야일(길르앗 사람):22년 동안 사사로 있었다. "그에게 아들30명이 있어 어린나귀 30을 탔고 길르앗 땅에 30성읍을 두었다"(삿10:3-5).
입 다(길르앗 사람):기생의 아들이며 잡류들의 두목인 입다는 길르앗의 장로들과 협상한 후 그들의 "장관"(leader)과 "머리"가 되는 조건으로 암몬과 싸워 이겼다. 암몬은 18년동안 압제했는데 입다는 암몬을 격퇴한 후 6년간 사사로 있었다. 또한 불평하는 에브라임사람들을 쫓아 버렸다(삿 10:6-12:7).
입산(베들레헴 사람):베들레헴 사람 입산은 7년 동안 사사로 있었다. 그는 아들 30명과 딸 30명을 두었는데 타국 사람들과 결혼시켰다(삿12:8-10).
엘 론(스불론):10년동안 사사로 있었다(삿12:11-12).
압 돈(에브라임):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 출신인 압돈은 8년 동안 사사로 있었다. 그는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이 있었으며 그들은 70필의 어린 나귀를 탔다. (삿12:13)
삼 손(단 지파):소라 땅 단 지파 출신인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블레셋을 물리치고 20년간 사사로 있었다. 두 눈이 뽑힌 삼손은 다곤 신전을 무너뜨려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도 함께 죽었다. (삿13-16장)
사사들의 활동 내용을 살펴볼때 사사들은 지파 혹은 지역의 지도지들이었으며 각 사사는 특정 지역에 국한되어 활동하였고 특별한 경우에는 주변으 지파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메르넵타 비문에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원래의 이스라멜은 에브라임 산지를 중시므로 형성되었으며 사사들도 에브라임 산지와 관련된 활동을 많이 하였다. (드보라,돌라,압돈)
①하나님을 배역함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야웨을 잊어버리고..."
②징계:"야웨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포타미아와 ?수산리사다임 손에 파셨으며..."
③회개(부르짖음):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께 부르짖으며..."
④사사를 보내어 구원함:"야웨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웃니엘이라."
⑤평화:"그 땅이 태평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웃니엘이 죽었더라."
2)성서 외 자료
성서외의 자료로는 이집트-앗수르 문헌들과 팔레스틴 고고학탐사 결과 들이 있다. 청동기 말엽(LB,주전 1550-1200)팔레스틴 지역의 도시들은 이집트의 봉신으로 지내왔으나 해양족속의 침입으로 파괴되기도 하고 (므깃도,벳산,하솔,아벡,게셀,아스돗,벳세메스)정치-경제적 혼란기를 맞아 인구가 해안에서 산지로 이동하는 현상도 일어났다. 팔레스틴에 살았던 다양한 족속 중의 일부일 뿐이다.주전 15세기의 이집트 문헌(파라오 아메노피스 2세의 문헌)에 보면 이집트 왕이 팔레스틴에서 사로잡아온 폴들 가운데는 아피루,샤수,카루(정착인?)등의 집단들이 섞여 있었다. 이 다양한 족속들이 섞여 살던 팔레스틴 땅은 철리시대로 바뀌면서 종족들이 단일화하기보다 더 많은 종류의 종족들이 유입되어 팔레스틴 땅은 각종 종족들의 전시장을 방불케 하였다.
2.지파별 상황
성서에서는 야곱의 12아들들이 조상이 된 12지파의 가나안 정착을 이야기하고 있고 12지파가 모두 함께 모이는 회합을 (여호수아24장의 세겜모임)전제로 사사시대를 시작하고 있지만 정작 사사기에 나타나 있는 상황은 지파들의 개별 활동이 있을 뿐이다. 때로는 지파들 간에 갈등도 있었고,싸움도 있었다. 길르앗 지파를 이끄는 입다는 에브라임 지파와 싸워 에브라임 지파를 패배시켰으며 (삿12:1-6)이스라엘으 지파들과 베냐민 지파가 서로 싸워 베냐민 지파가 크게 학살당하였다(삿20:1-48). 드보라의 경우(삿5장)10개의 지파가 언급되고 있지만 그 명칭들은 야곱의 12아들과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불일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트(M.Noth)는 지파 동맹체(amphictyony)가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주장은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얻어내었다.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그의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지파동맹체으 근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⑴ 그가 사용한 언어는 팔레스타인이 아닌 고대 그리스 델피신정에서 사용한 언어(헬라어)이며 인도-유럽(Indo-European) 문화권에 속한 개념이다. 문제는 팔레스틴을 비롯한 고대 중동지역에서 이러한 지파동맹체제를 발견할 수 업소 그리스와 시탈리아 등지에서 주전 10세기 이후에야 나타난다는 점이다.
⑵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의 앰픽티오니는 그것을 구성하는집단의 수가 7혹은 11또는23개의 집단들로 되어 있으며 언제나 12개의 집단으로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성서에서 12하는 숫자는 실제적인 숫자라기 보다는 "완전한 전체"라는 개념으로 쓰여지는 신학적 혹은 문학적인 숫자일 경우가 많다.
⑶ 노트의 이론을 뒷받침한 민수기 26장은 제사장 문서로서 후기에 첨가된 것이며 민수기26장은 민수기1:20-43;2:3-31;1:5-15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유다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수정된 것이다.
⑷ 사사기와 사무엘상·하에는 지파들이 모이는 중앙성소가 나타나지 않는다.법궤가 안치된 성소로서 12지파 모인 성소를 성서에서 찾을 수 없다. 아마도 12지파에서 하나의 중앙 성소를 관리하고 유지했다기 보다 각 지파 혹은 ?遁락별로 각기 다른 성소를 유지하고 관리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12지파의 대표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함께 모였는지도 모호하다.
⑸ 지파동맹의 상징인 법궤를 메고 가지 않는 모습이 사울시대에 나타나는 점,그리고 20여 년 동안 법궤를 개인집에 버려둔 점(삼상7:1-2)등은 지파 공동체가 있었을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든다.
1)에브라임/이스라엘 지파들
에브라임은 세겜과 벧엘 사이에 위치한 중앙산지 지역으로 에브라임 지파 북쪽에는 므낫세 지파 그리고 남쪽에는 베냐민 지파가 있다. 또한 요단강 동쪽에는 길르앗이 자리잡고 있다.
베냐민("남쪽 사람들"이란 뜻)은 기브아를 중심으로 에브라인 남쪽에 위치해 있고 그 명칭의 의미에도 에브라임에서 보는 관점이 들어있다.
므낫세지파는 북쪽 중앙 산지에 위치해 있으며 이스르엘 계곡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요단 동편에는 마이르 족속이 있었으며 바산지역에 거주했다. 므낫세 지파는 도시 외곽에 거주하였고 도시들을 장악하지 못했다.
메르넵타 비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은 어느 지파를 가리키는 것일까? 밀러(J.M.Miller)는 에브라임,므낫세,베냐민,그리고 요단 동편으 마히르,길르앗 등으로 군데군데 거주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2)갈릴리-이스르엘 지파들
이 지파들은 아셀,스불론,잇사갈,납달리 등을 말하며 이들은 벳산에서 단 이남까지 그리고 갈릴리에서 지중헤 연안까지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스불론과 잇사갈(창49:13;신33:18-19)그리고 아셀(삿5:17b)지파들은 원래 지중해 연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해양족속들에 밀려내륙으로 이동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잇사갈 지파는 이름 자체가"고용하다"(sbakar)란 뜻을 포함하고 있으며 창세기49장14-15절을 참고해 볼 때 잇사갈 지파는 비옥한 이스라엘 지역에 노동자로 고용되어 생계를 꾸려간 것으로 짐작된다.
3)단,르우벤,갓
르우벤과 갓 지파들은 요단 동편에 거주하였는데 그 경계선은 모호하다.모압 왕 메사의 비문에는 "갓 사람들"이라는 용어가 있으며 "갓 사람들"이 살던 땅은 "아타롯 땅"이라 하였다(ANET 320-21). 아타롯은 오늘날 디본으로부터 북북서쪽으로 13km에 잇는 지역이다. 여호수아22장에는 르우벤,갓,므낫세 반지파들이 요단 동편에 제단을 만들었다고 여호수아(에브라임 지파)가 항의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에 이 지파들은 그 제단은 제사를 드리려고 만든 것이 아니가 다만"증거의 단"일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수22:13-34). 아마도 이 제단은 "르우벤 자손 보한의 돌"(수15:6)과 동일한 것으로 짐작된다.
4)유다와 남쪽 지파들
유다 산지와 쉐펠라,네게브,유다 광야에 걸쳐 거주한 집단들은 유다. 갈렙,고라,그나스,예라멜,겐,시몬 등이었다. 유다지파는 사사시대에 별로 중심되는 지파가 아니었으며 그 영역도 헤브론과 예루살렘 사이에 있었던 작은 지파였다. 아마도 겐 족속은 유랑하는 대장장이일 것으로 짐작된다.
3.사사 시대의 종교
여호수아에서는 11지파가 야웨를 섬기는 레위지파의 지도아래 세겜(수8:30-33;24장)과 실로 (수 21:1-2;22:12)에 함께 모였으며 세겜과 실로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사사 시대의 전체 상황과 맞지 않다. 왜냐하면 사사시대의 종교는 각 부족이 서로 상이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틋히 사사기 6-9장과 17-18장의 여룹바알과 미가의 이야기를 보면 서로 상이한 종교를 그들이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사사 시대의 실로 성소는 이스라엘의 성소가 아니었따는 점이다(삿19-21장). 따라서 여호수아에 묘사된 이러한 모습은 후대의 편집자가 신학적 의도 아래 수정 내지 첨가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성서의 사사기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여러 종교가 섞여 있으며, 여러 제사장 계열들이 각기 다른 성고에서 제단을 쌓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예가 바로 기드온 (삿6-9장)과 에브라임 사람 미가 (삿17-18장)의 이야기인데, 기드온의 아버지는 요아스로서 그 이름은 "야웨께서 주신다"는 뜻으로 야웨를 섬기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기드온이 야웨의 사자를 만난 곳은 아버지 요아스 집에 있었던 "오므라의 상수리 나무" 아래였으며 기드온은 그 곳에 야웨를 위한 제단을 쌓고 "야웨는 샬롬"이라 불렀다. 그런데 요아스는 마을사람들이 섬기는 바알제단과 아세라상을 같은 장소인 자기집에 함께 두고 있었는데 기드온이 밤중에 그것들을 부숴버렸다.
기드온과 미가의 경우를 보면서 결론을 내린다면 ①사사 시대의 종교생활은 팔레스틴의 종교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된 모습을 보여 주며②신전,제단,성소,제사장 등이 단일화되고 제도화 되어 있는것이 아니라 각 마을마다 혹은 씨족마다 개별적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다양함을 알 수 있고,③ 따라서 통일된 하나의 종교가 있었다기보다 다양한 종교 속에서 야웨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V.초기 왕정 시대
사울을 초대 왕으로 하는 이스라엘 왕국이 주전 1000년 경에 팔레스틴에 나타났다. 그러나 왕국다운 면모를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으며 사사시대로부터 왕국시대로 건너가는 전환기의 독특한 상황이 사무엘 상 1-15장에 그려져 있다.
1.사무엘 상에 나타난 엘리, 사무엘과 사울
1)성서자료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엠 지파 사무엘은 태어나기 전부터 야웨께 드려진다는 어머니의 서원으로 젊은 시절에 당시 실로의 엘리라는 연로한 제사장을 돕고 있었다. 엘리에게는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아들이 있는데 그들은 야웨 앞에서 불경스러운 일을 범하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야웨는 이들의 계보를 거부한다. 그러한 계보는 어린 사무엘에게 이어지게 되며 사무엘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예언자적 명성을 얻으며 예언자로 세워진다(삼상1-3장).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이 에벤에셀에서 일어났으며 이 때 엘리의 두 아들은 전사하고 야웨의 법궤는 블레셋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 다음 사무엘은 미스바에 사람들을 모아 다시 하나님께 헌신케 한다. 이스라엘이 모였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은 위기 의식을 느낀 채 전쟁을 하러 오지만 다시금 벌어지는 에벤 에셀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야웨의 능력으로 승리한다.
사는 날 동안 사무엘은 야웨를 위한 단을 쌓은 라마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해마다 벧엘과 길갈을 순회하면서 재판하였다(삼상 7:3-17). 사무엘이 나이들고 그의 두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제 길로 나가자 이스라엘은 그에게 새로운 지도자를 원하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왕이었다.
베냐민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은 모든 백성보다 키가 한 자나 더하였고 매우 준수하였다. 아버지의 암나귀를 찾기 위해 사울은 숲 땅까지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사무엘을 만나게 된다. 이미 야웨는 사무엘에게 사울이 올 것을 계시하였으며 사무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붓는다. 후에 사무엘은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하고 제베뽑기를 통해 왕을 뽑는다. 그러나 모든 백성들이 다 사울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사울을 불신한 자들도 있었다(삼상10:26-27).
사울은 자신의 힘을 나타내 보이게 된다.점점 더 강해지는 사울은 이후에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사무엘의 명을 어기고 아말렉 왕 아각과 좋은 동물들을 죽이지 않는데 이때 화난 사무엘은 " 네가 야웨의 말씀을 거역하였으므로 야웨도 왕을 버려 왕이되지 못하게 하였다"(삼상 15:23).
이 때로부터 사무엘 상은 다윗에게 촛점을 ꁹ추고 사무엘과 사울 및 그의 가족들을 부수적으로 다룬다. 사울과 다윗 사이에는 갈등이 이루어졌으며 결국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은 전사하고 사울 왕국은 혼란을 맞게된다.
2)성서자료의 문제점
사무엘 상은 창세기-사사기를 이어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완전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상이한 독립 개별 전승들(실로성서와 사무엘의 출생, 법궤설화, 사울전승, 사무엘 전승, 다윗의 전승)이 뭉쳐져 이루어진 작품이다.
사무엘 상 1장 20절에는 사무엘(shemu'l '하나님의 이름' 혹은 '그의 이름은 하나님이다'는 뜻)이란 이름의 뜻을 "내가 야웨께 그를 구했다" 라고 하였는데 이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사부엘보다는 사실 사울(sh'ul '구하는 자')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또한 삼상 1:27-28에는 한나의 입에서 계속 '샤알'(sh'al '구하다'라는 뜻)이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나온다.
3)실로와 엘리가문
여호수아서에 의하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로에 모였으며, 그 곳에 '회의 장막'(tent of meeting)을 세우고 벱궤를 안치하여 아론의 아들 비느하스가 관장하게 한다(수14:1; 17:4; 19:51; 22:13,31-32; 24:33). 이렇게 실로는 이스라엘의 역사 초기에서 지파들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사사기 21:12이 속해있는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 이야기에는 베냐민이 실로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기술되어있다(삿21:19).
이러한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실로는 매우 초기에 이스라엘 지파들의 정치적,제의적 중요 장소였으며 그 이후에 중요성이 약화되었다가 엘리시대에 다시 우위성을 얻다가 법궤의 빼았김과 더불어 그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또 다른 가정은 초기 지파시대에 팔레스타인 산악지대의 수많은 성소 중의 하나였던 실로가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 가문이 사울과 연합하여 블레셋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나서야 벱궤가 이스라엘의 국가적 종교적 상징이 되었으며, 법궤가 안치되어있는 실로가 국가의 중요한 성소로 부각된 것이다. 그러나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등극으로 예루살렘 제사장들이 벱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가면서 실로의 위치는 없어진다.
4)사무엘과 사울
사무엘에 대해서는 실로의 제사장적 예언자(삼상1:1-4:1a), 숩땅의 지방 예언자(삼상 9:1-10:16), 왕을 기름부은 자이며 또한 왕정을 거부한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삼상 7:3-8:22;10:17-25등)의 모습으로 나눌 수 있으며 마지막의 사무엘 모습이 가장 역사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며, 옛 전승에 근거해 사무엘을 위대한 마지막 사사로 묘사하고자 한 창세기-열왕기하의 마지막 편집자의 의도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사울왕은 수도를 기브아로 정했는데 이 위치는 아직도 모호하다. 주위의 인물 중에 외국인 을 용병으로 기용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삼상 21:7참조), 아직은 그러한 용병의 규모가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상비군을 유지하는 데에는 유지비가 들게 마련이고 땅을 징발하거나 세금을 징수하게되고 부역을 시키게 된다."환난을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에 원한이 있는 자가 다 그(다윗)에게로 모였고 ...사백명 가량이었더라"(삼상 22:2).
이러한 사울은 용사답게 그의 최후를 마쳤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에 대한 기억은 훌륭한 용사요, 영웅이었다(삼하1:19-21).
VI.예루살렘왕 다윗
다윗은 4세기에 걸쳐서 예루살렘을 통치한 왕조를 세웠다.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586 B.C.E.에 멸망한 후에도 다윗 왕조는 계속되었다. 많은 유다, 예루살렘백성들은 다시 다윗 왕국을 회복할 희망을 가졌다. 그래서 다윗에 관한 자료는 성서 자료들에 있어서 많은 관심 거리가 되었고, 우호적인 관점으로 편집자에게 보였다.
예루살렘 몰락후 유대 편집자들에 의해 편집된 창-왕하기사는 다윗에게 42장을 할애하고, 다윗을 야웨의 선택을 받고, 참되고 의로운 왕으로 묘사하려 했다. 역대기에서는 20장을 할애하고, 전혀 잘못하지 않는 이상적인 영웅으로 제시한다. 시편의 전승과 관련된 다윗은 그의 경력에 연결된 개인 시편이 13개 있다.
1. 성서 자료에 나타난 다윗
(1) 창-왕하기사의 다윗
창-왕하기사는 다윗의 생애에 관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다윗은 삼상16장에서 부터 왕하1-2장까지 나타난다.
<삼상16-왕상2장의 요약>
사울이 두번 왕위를 물러나게 되고, 사울의 뒤를 이을 왕의 선택을 선포한 후 사무엘은 베들레헴 이새의 가문으로 야웨에 의해 보내졌다. 야웨에 의해 인도된 사무엘은 다윗을 지명하였다(삼상16:1-13).야웨의 영이다윗에게 임하였다. 반면 악령이 사울을 괴롭게 하였다. 사울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악사를 찾을 때 다윗이 다시선택되었다. 그리하여 사울의 궁정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사울의 개인 악사와 무기담지자가 되었다(삼상16:14-23).
한번은 이스라엘군대와 불레셋군대가 전투를 하게 되었을 때 이새는 다윗을 전선에 보내어 형들에게 음식을 전하게 했다. 다윗은 거기서 골리앗을 보게 되고, 이스라엘을 향한 도전을 그가 받아들여 골리앗을 죽이고 영웅이 된다. 사우은 그 소년을 찾으라 보냈고,"그를 취하여 그의 아버지 집으로 그를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삼상17:1-18:2).
사울의 궁정의 일원으로서 다윗은 요나단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또한 사울의 장녀 미갈은 다윗을 사랑하였다. 여러차례의 전투로 다윗은 사울을 능가하는 영웅이 되었다. 질투에 사로잡힌 사울은 한번이상 다윗을 죽이려 했다. 이러한 시도와 연결되어 미갈을 다윗에게 결혼시키려 했다. 다윗은 200개의 양피를 가져왔고, 미갈과 결혼하였다(삼상18:3-30).
결국 사울과 다윗의 갈등은 커져서 다윗은 사울의 궁정을 도망가야 했다. 다윗은 요나단, 미갈, 사무엘,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도망하였다(삼상19:1-21:9). 다윗은 갓의 불레셋왕 아기스에게 처음으로 갔다.그다음에 아들람의 교외로 갔다. 그일라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은 진격하러간다. 다윗은 십광야로 이동하였다.여러차례의 도망후에 아기스에 돌아왔고, 아기스는 다윗에게 시글락의 도시를 주었다(삼상21:-27:12).
불레셋이 길보아산전투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죽였을때 다윗은 아기스의 군대에 여전히 있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실제로 전투에 싸우지 않고 시글락에 돌아왔을때 도시가 아말렉에 의해 습격을 받은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아말렉습격자들을 학살하고 노략물을 유다장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윗은 아말렉을 치고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 시편으로 애도한다(삼상28-삼하1).
그후 다윗은 헤브론 점령과 유다왕 즉위가 있고, 다윗의 군사들과 이시보셋의 군사들과 전쟁을 계속하게된다. 헤브론 통치시대때 6명의 아들이 태어난다 -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등(삼하2:1-3:5)
아브넬협상이이루어진 수에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다. 아브넬과 이시보셋이 죽었을때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와서 계약을 맺고 그들의 왕으로 삼았다(삼하3:6-5:5).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수도를 삼았다. 두로의 히람왕과 국제관계를하고 블레셋으로 부터 침략을 받았지만 블레셋을 무찔르고(삼하5:6-25)법궤를 길르앗여아림(삼상7:1-2)으로 부터 기티, 오벧에돔의 집까지 이전을 하고, 예루살렘까지 가져온다.
다윗은 또한 예루살렘 궁전을 건설하고 성전건축을 계획한다. 성전계획은 거절당하고 영원한 다윗계약만 약속을 받는다. 다윗은 모든 적들을 패퇴시키고 (블레셋, 모압, 소밥, 암몬, 아말렉, 에돔) 사울가문의 땅을 므비보셋에게 환원시킨다. 므비보셋을 예루살렘에 있게 하며 왕의 식탁에서 먹게한다(삼하9).
그후 사건을 요약하면,
밧세바 사건, 암몬과의 전투, 솔로몬 탄생(삼하10-12), 암논의 다말강(탈), 압살롬의 복수, 압살롬의 게술(Geshur)피신, 결국 다윗과의 화해. 후에 압살롬의 반란, 다윗의 마하나임 도피. 압살롬의 죽음, 다윗의 재등극, 압살롬의 반란뒤에 또다른 반란이 베냐민지파의 세바에 의해 일어남(삼하15-20). 다윗의 인구조사, 징벌(삼하24). 노년에 아도니야로 왕위계승자행. 나단이 밧세바와 함께 다윗에게 영향을 두어 솔로몬을 아도니야 대신 그의 계승자로서 솔로몬을 위임케함. 솔로몬이 나단과 사독에 의해 왕좌에 오름(왕상1-2) 등을 말 할 수 있다.
2. 창-왕하기사의 다윗부분의 성격들
창-왕하기사의 성격에 관한 세가지 관찰
(1) 이기사는 복잡하다. 다양한 전승들이 민속전설로서 잘 묘사될수 있다. 그것들은 역사적기록들로서 읽을수 없다.
(2) 개별전승들은 친 다윗과 친 솔로몬편견을 반영한다.
(3) 자료들의 배치, 선택, 음조가 후기유대 텬집자들의 신학적 관심들에 의해 주요한 정도에 따라 결정되었다.
3. 다윗통치의 역대기 기자의 기술
역대기 기사는 아담으로 부터시작하여 고레스칙령까지 이야기를 다룬다. 역대기의 이스라엘과 유역사기사는 창-왕하기사보다 이상화 시킨다. 그러나 역대기사가는 창-왕하편집자다. 제의와 종교적 일들에 보다 주체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고 생명과 예루살렘성전과 그것의 인사의 조직에 관심을 갖는다. 특별히 예루살렘 제의에 있어서레위지파의 역할을 부각시킨다. 또한 다윗왕조와 유다왕국에 보다 촛점을 맞춘다. 다윗기사에 대한 역재기자의 신명기사가의 작품사용은 분명하다(성전제의 구성자, 레위기등등) 다윗의 어려움은 역대기 기자에게는 기록되지 않았다(밧세바 사건, 압살롬과 세바의 반란, 아도니야와 솔로몬의 투쟁). 이를 통하여 볼때 역대기 기자는 위대한 전사로, 성전의 건립자로서 이상화된 다윗을 제시한다.
역대기 기자는 분명히 사무엘-왕하의 자료들을 사용했다. 그러나 몇개의 자료는 전혀 평행되는 기사가 없다. 보충적인 자료의 대부분은 신학적 설명이 있게 된다. 역대기 기자가 다윗통치와 관련된 기사들은 독자적인 자료들로부터 파생되어 왔던 것일수 있지만 사실상 그 자료들은 다윗시대보다 훨씬 후기시대에 다루었던 자료이다.
4. 다윗과 시편
다윗은 시편과 전승에 의해 연결되었다. 시편의 73편이 ledawid(df David)라는 표기가 붙어서 다윗이 기록하였다는 것을 추론케한다. 하지만 ledawid의le가 ("for", 'concerning', "dedicated to") 등으로 번역될 수 있어 반드시 다윗이 저작한 것으로 볼 수 없다. 또한 다윗이란 말도 특별히 다윗 자신을 언급하기 보다는 다윗왕조를 언급할수도 있다(겔34:23-24:37:24-25). 그래서 ledawid의 표기는 다윗긍정, 예루살렘성전 왕국어법, 시편들의 특별한 왕국수집을 의미할 수 있다. 들째로 다윗이 실제로 음악적 능력을 가져서 예루살렘제의의 인원과 절차들을 세우는데 몇가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삼상16:14-22:암6:5). 음악가와 제의 혁신자로서 그의 상이 유대역사말기부터 비로서 꽃핀다. 그리고 종말에는 실제 다윗과 거의 유사성이 없게 되었다.
시편의 최종편집자는 역대기시대나 혹은 후대에 속한다. 그래서 다윗이 시편 편집적 표기에서 자랑스런 위치에 주어진다.
4.역사적 재구성을 위한 다윗 성서자료 이용하기
1)해석학적 원칙
衁. 우리는 다윗을 주로 창-왕하기사에 의존할 것이다. 역대기 기사와 평행을 이룰때 창-왕하기사를 우선할 것이다. 그러나 역대기의 독특한 항목들은 조심스럽게 간주할 것이다.
遁. 창-왕하의 다윗제시가 구성하는 대부분전숭들은 친다윗서 들로부터온 민담등이다. 그리고 그것은 후기 편집적 중복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전승들의 많은 것은 아마도 대부분은 실제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에 궁극적으로 위존되었다고 전제한다. 성서외적 자료들이 이러한 전제들을 입증할 수 없다. 다윗을 언급한 시대의 성서외적 자료들이 없다. 고고하적 자료들이 초기 철기시대 팔레스틴의 일반적 생활상과 현상적 조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주지만 여갓적 사항의 문제들을 명확히 하는데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다위시대의 유물들을 통하여 적대적 확실성을 세우는데 어려움이 있다.
鑁. 민속전승들의 많은 것이 역사적 기억의 핵심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은 첫번째 단계이다. 역사적 자료를 전설과 편집적 중복으로부터 분리하는 시도는 훨씬 초정도의 주관성이 내포된다. 해석할 때 우리가 특별한 결론들에 "왜, 어떻게 도달했는지" 설명하도록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최종분석에서 이후의 다윗의 취급이 단순히 "우리의 최선의 창작"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2)사울 궁정에서 다윗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 유다족속이다. 그의 할머니는 모압인 릇이었고 그의 아버지 이새(Jesse)는 베들레헴사람(삼상16:1,18)과 에브랏(Ephrathite)사람으로 언급된다. 그는 베들레헴가문의 족장이나 지방족장이었을 것이다.
衁. 베들레헴의 이름은 지방성소에서 파생.
에브랏 이름은 주도적인 지방씨족의 이름으로 추정
遁. 에브랏과 베들레헴관계와 에브라임과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음(삿12:5;삼상1:1)
鑁. 베들레헴의 에브랏은 에브라임 에브랏의 부속지방이였다.
鱁. 에브랏과 베들레헴과 동일이름 (라헬매장지, 창35:19;48;7)
3)사울에 궁정에 들어온 3가지 상층된 이야기
衁. 첫번째 이야기(삼상16:1-13)는 순지한 양치기 소년 다윗이 사울의 계승자로 사무엘에 의해 선택되고 기름부음 받게 되는 내용을 기술한다. 강조점은 야웨의 선택받은 소년이였다.
遁. 두번째 이야기(삼상16:14-23)는 다윗을 왕의 신경을 진정시키기 위해 사울의 궁정에서 부름받은 움악가로서 묘사된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제의 음악전승과 관련된다.
鑁. 세번째 이야기(삼상(17)는 다윗을 거대한 살인자, 순진하고 유망하지 못한 소년이지만 이스라엘을 구원한 소년으로 묘사한다. 일반적인 민담 모티브로 인식된다. - 어떤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인 것으로 기록한다(삼하 21:19) - 삼상17이 의심스런 역사적 가치의 민담 전승.
다윗은 사울궁정에 젊은 직업군인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에 인용된바, 사울의 무기든 자(삼상16:21)로 기록되었다. 어째든 다윗은 블레셋과 싸우는 명장으로 알려졌다(삼상18:6-7).
사울궁정에서 다윗의 인기 - 사울 가문과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18:1-4,20 요나단과의 관계, 미갈과의 혼사). 이런 관계를 강조하는 이유는 다윗의 왕위찬탈을 합법화시키기위해서다. 그래서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다윗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어떤 의도도 가지지 않은 무죄함
㉡ 사울의 아들과 딸이 다윗이 왕위를 차지한 것을 만족했다.
㉢ 다윗은 아무튼 실제적으로 가문에 일원이었다.
사울이 자기 딸 미갈을 다윗에게 결혼시키는 것은 인기있는 다윗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의 권위가 불확실한 때 그러한 결혼은 좋은 의미를 갖었다. 다윗의 군사적 성공과 사울가문과의 친밀한 관계는 대조적이였다.
다윗과 사울을 대조적으로 그리다보니 역사적 의심을 갖게 되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① 사울의 개인적 생각과 느깸(삼상18:8-12)
②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가 실패한 기록(삼상18:10-11;19:8-10)
③ 다윗을 죽이도록 시키는 일(삼상18:17-29)
④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대화의 내용기사(삼상18:20-26;19:1-6)
사울과 다윗의 갈등요소는 다음과 같다.
⑴ 사울의 질투심과 왕조계승을 확보하려는 관심
⑵ 다윗의 야망은 기여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다윗은 사울의 궁정을 떠나 남부구릉지대 변두리로 도망가 군대를 조직한다. 다시 성서기사의 기자는 주장한다. 사울의 눈먼 질투심이 다윗을 도망가게 하고, 미갈, 요나단, 사무엘, 놉의 제사장에 의해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을 강조한다(삼상19:11-23;20;21:1-9). 이것은 사무엘의 비난과 사울통치의 반대세력이 형성되기 시작되는 시기가 아니었던가 추측케한다.
5.다윗의 여정
궁정으로부터 도피한 후 다윗은 사울로 부터 도망쳐서 변절자로서 시간을 보냈다(지도14참조). 이시기의 다윗은 삼상19:11-삼하1장에 다루고 있다.
1)연대기적 사건의 연속
衁. 다윗이 사울의 궁정으로부터 도망함(삼상19:11-21:15)
遁. 다윗이 아들람굴로 도망하여 다른 사람들과 합류함(삼상22:1-23:14)
鑁. 다윗과 무리들이 십동편과 갈멜, 마온 황무지에서 주로 배회함
鱁. 다윗은 블레셋 진영에 가게됨(삼상27-삼하1장)
A. 궁정에서의 도피
삼상19:11-21:9절은 네가지 기사로 구성된다.
a. 미갈, 사무엘, 요나단, 놉제사장 아히멜렉으로 부터 각각 어?게 도움을 받는가.
b. 미갈이 사울의 군대를 방해하여 다윗이 창문으로 도망하게 하는 이야기(삼상19:11-17)
c. 다윗이 놉에서 어떻게 공급을 받는가의 기사는 사무엘과 요나단의 도움보다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었다(삼상21:1-9;삼상19:18-20:42) .4가지 이야기 모두는 기브아(Gibeah)에 배경을 갖는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넘어가는 이야기는(삼상21:10-15) - 두개의 분리된 전승(하나는 다윗이 놉의 아히멜렉, 다른하나의 전승은 블레셋과의 동맹, 삼상27장)의 혼합되어 분명하지 않는다. 짐작켠대, 다윗이 몰래 미갈의 도움으로 기보아를 빠져나와서 놉의 아히멜렉으로 부터 공급을 받는다.그리고 유다의 지파영토로 곧장 진행한다.
B. 아둘람과 굴에서 다윗
다윗이 사울의 궁정에서 도망친후 곧바로추적을 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들을 모압으로 이도케하고 아둘람으로 피신하였다. 거기서 다양한 종류-친척과 사울의 대적자들, 다른사람들-의 개인들이 합류한다. 그래서 곧 그는 조그만 개인 군대의 장관이 되었다.(삼상22:1-2). 이때에 두명의 종교관리가 다윗군대에 참가하였다.
⑴ 하나는 선지자 갓이었는데 다윗에게 전략적 충고를 하였다. 그는 다윗생애에 항상 같이 있었다. 특별히 갓은 다윗에게 아둘람으로 부터 나와서 헤렛 수풀속에 진을 치도록 지시하였다.
⑵ 두번째 종교관리는 아비아달이였다. 그는 놉의 제사장들의 무자비한 대학살 중에살아난 유일한 생존자였다. 삼상23:8-14은 다윗과 그의 무리가 그일라와 그 인근주민들로 부터의 도움에 의존할 수 없는 것을 분명케한다.
C. 십고아야를 배회함
그일라에서 도망쳐서 다윗과 그 무리들은 남부구릉지대의 남동 경사지역 황무지에, 주로 십, 갈멜, 마온, 사해마을들 사이의 지역에 은신처를 둔다. 다윗의 군대는 600명의 수였는데 황무지에서 그만한 수가 지역주민들의 도움없이, 습격함이 없이 유지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시기에 관련된 이야기는(삼상23:15-26:25) 두가지 주제를 반영한다.
a.지역주민들로 받는 도움의 부족
b.사울로부터 도피하며 배회하기
이시기에 관해서 세가지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패턴이 따라온다(삼상23:19-29,24:26).
① 삼상23:19-29 이야기는 불레셋 습격자를 다루기 위해 추적으로부터 철수하는 이야기 ② 삼상24와 삼상26은 사울은 죽을 기회를 얻지만 "야웨의 기름부은자의 충성심"을 보여준다. ③ 이 이야기들은 단일 사건의 세가지 판을 갖는데 삼상23:19-29이 보다 확실성을 갖는다.
삼상25:1-42 나발이야기는 지역의 주민들이 사울에게 보호받기 위해 모였다가 다윗을 귀찮게 여겼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윗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과 결혼하게 된다. 이 지역에서 또 다른 아내를 취하는데 이스르엘 출신 아히노임이다. 그이름이 사울의 부인들중의 한 이름과 똑같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을, 이스르엘이 이스르엘계곡의 보다 뛰어난 이스르엘과 똑같은 동일한 이름을 갖었다는 일치성이 있는 것처럼 아주 부합된다.
A. 불레셋과 함께한 다윗
사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다윗은 철저한 조치를 취한다. 다윗과 그무리들은 가드의 불레셋왕 아기스에게로 건너간다.아기스는 다윗에게시글락 도시를 준다.
아기스에 대한 다윗의 봉사는 삼중적이다.
① 불레셋 변경의 일부를 방어할 책임
② 불레셋군의 이동중일때 불레셋 주력군으로 전투에 참가
③ 불레셋적들을 습격할 때 참여
아기스밑에서 1년4개월 있으면서 조직적으로 아기스를 속이며 먼 남방 사람을 침로하였다. 삼상30장의 승리의 탈취물을 유다, 여라므엘,겐 마을에 보낸다. 아벡전쟁이 불레셋과 사울사이에 일어난다. 다윗은 불레셋방백들의 반대로 그 전투에서 불참케된다. 그것은 당황할 수 있는 상황을 모면케 했다.
불레셋 봉주에서 예루살렘 왕으로
불레셋의 길보아산 전투에서 승리와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은 왕국을 충격의 상태로 만들었다. 불레셋은 에브라임/베냐민 구릉지대의 마을들을 습격하고 약탈할 상황의 잇점을 갖게 된다. 이스보셋은 요단동편 마하나님으로 철수하고 영향력있던 지역을 떠난다. 불레셋을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고 특히 그들의 봉주 다윗이 이동하게 된다.
B. 유다왕 다윗
다윗이 사울의 ?음을 애도한 후 이동하여 헤브론의도시와 그 주변 마을들을 점령하였다. 헤브론과 베들레헴을 장악하고 통치하는 상황에서 유다의 왕이된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족속의 왕을 삼았더라"
유다족속의 왕이 된 사건의 주목할 점
1.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은 사람이 "유다의 사람들"이라는 진술은 이 도유식이 신적인 위임의 특별한 형식보다 오히려 백성들에 의한 다윗왕권의 공식적인 인식을 상징하였다.
2.이 시대의 "유대"의 개념에 대해 유념해야 한다. 이때의 유다는 유다산의 교외에 정착하던 부족들로 구성된 개별지파였다. 다윗이 헤브론 통치후 좀더 확대된 "대유다"개념이 되었다. 7년6개월 헤브론을 통치하였을때 남부구릉지대 모든 지역과 세펠라, 넴겜,유다광야지역에 그이 통치력이 미쳤다."대유다"의 보다 확대된 영역은 솔로몬 사망후 였다.
C.사울 왕국의 남은자 이전
다윗은 이웃국가와의 좋은 외교관계를 수립하며 국력을신장시켜 간다.
1)불레셋-지금은 서북쪽에 둘러사인 사울완국의 남은자를 가짐
2)모압
3)암몬-암몬왕 나하스와 동맹
4)야베스 길르앗 백성과 접촉
5)그술-그술왕 달매의 딸 미아가와 결혼
이러한 발전들은 삼하3:1에 요약된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사울의 잔존세력인 아브넬이 다윗과 협상을 시작하지만 결국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저격을 당한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헤브론의 다윗에게 와서 그를 왕으로 임명한다.
불레셋과의 두차례 전투가 있었다.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왕을 삼았다함을 불레셋사람이 듣고" 그 전투는 르바임 골짜기에서 있었다. 다윗의 첫승리는 바알브리심에서 있었다. 두번재 승리는 예루살렘 북서쪽에서 있었다. 다윗은 불레셋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렀다.
D.예루살렘의 왕 다윗
다윗생애의 가장중여한 행동은 예루살렘정복과 수도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오래된 청동기 시대도시들 중 하나였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즉,유대연합의 독립으로 남아있었다. 사실상 다윗이 정복할때 여부스 손에 있?넜다. 여부스족은 이스라엘과 유다 부족들과 함께 구릉지대에 거주했던 다양한 인구 집단 중에 하나였다. 다윗의 예루살렘은 오늘날 예루살렘의 바로 남쪽 경사면 오펠지역으로 경계지어진다.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과 도시의 건축 계획의 기사는 전체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두가지 결정적인 용어 의미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1)8절의 sinnor가 "water shaft(수직갱)"으로 번역되었다.
2)삼하5:9에서 밀로는 물저장체제를 언급할 수 있다.
예루살렘은 다윗에게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한 이상적인 행정중심이 되었다.
<에루살렘 정도 배경>
1)예루살렘은 두 나라 사이의 접경지대에 위치하였다.
2)또한 삼면이 계곡으로 둘러쌓여 있고 돌출부에 세워졌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좋은 수원을 가진 천연요새가 되었다.
3)이전에 두나라와 연관이 없었기 때문에 질투감이 없었다.
다윗은 정치적으로 제의적 전승에 유산으로서 사울왕국의 연속선으로 이해될 예루살렘 기반의 행정체재를 생각한다.
1)그 조처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이전한다. 이것은 다윗이 "국가적"제의의 새로운 보호자로서 역할을 한 것이고 실론의 예루살렘 대치를 새로운 종교중심지로 상징하였음.
2)예루살렘 법궤 이전은 에브라임/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기초한 왕국 사이의 연속점을 강조하고 예루살렘-유다 연속점을 강조하기 위해 레위인에게 정부의 두드러진 역할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역대기서는 특히 다윗과 레위인을 이상화시키는 경향의 관점에서 믿을만한 자료는 아니다. 하지만 잘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증거 몇조각이 있다.
1)레위그룹은 군주입각 이전에 실존했었다. 몇가지는 다윗의 고향,특히 베들레헴 남쪽과 밀접한 연결을 갖었다.
2)수21:1-42는 레위도시들의 고도의도식화된 목록을 제공한다. 목록은 12지파도식에 맞추어서 여러지파들 사이에 공정하게 분배한 48개도시를 보여준다. 도시의 형성은 다윗이 통치를 확대해 간 장소로 형성된다.
3)창49:5-7은 레위인을 맹렬하고 질투심있고 다른집파들을 흩으는 자로서 묘사된다. 이러한 성격은 아마도 다윗성전에 특별한 충성심과 행정적 목적에 역할때문이다. 시므온족속이 포함된 귀절은 다윗재임기간 인구이동을 나타낸다.
4)이스라엘이 다윗왕국에 반란했을때 여로보암1세의 첫번째 행동중에 하나가 레위인들이 아닌 새 제사장들을 임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레위인들이 다윗에게 충성하였다면 이해할 수 있는 조처일 것이다.
네가지 결합된 이러한 요소들은 다윗이 레위인들을 행정에 중용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전 왕국을 통하여 특히 다윗에 의해 병합된 비이스라엘과 비유대지역에서 레위인들은 안전한 통제와 강화된 정책을 위한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시므온 사람들도 몇가지 비슷한 양상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법궤이동과 레위인의 중용은 사울의 이스라엘-유다왕국의 연속성을 제시하며 그것은 아주 새로운 발전이었다. 차이점은 대개 예루살렘의 역할과 관련이 있었다. 예루살렘이 다윗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도시"즉 왕재산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기시대에 생존하였던 구 청동시대 도시들 중 하나였던 독재적이고 세습적통치의 긴역사를 가졌을 것이다. 이런 유산을 가진 다른 팔레스틴도시들은 결국 다윗에게 또한 정복되었다.-세겜,므싯도,하솔,등등 그의 왕국은 구 청동시대 도시국가 중 하나의 성격을 보다 많이 취한 예루살렘 기반을 둔 왕국이었다.더우기 법궤의 현존과 레위지파에 할당된 행정역할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지방제사장 계열을 가진 토착 예루살렘제의를 보유했고 국가제의의 중요한 요소가 되도록 허용했다.
<제사장 명단의 문제점>
삼하8:17에 다윗의 중요한 두 제사장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이 기록되었다.
1)삼상22:아비아달을 아히멜렉의 아들로 보고 이 제사장 계열은 아히둡의 후손으로 본다.
2)삼상14:3;아히둡은 엘리의 가문과 연관되었다.추측컨대 다윗의 고위제사장,사독과 아히멜렉은 엘리가문에 속하였을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가망없지만 특히 법궤기사의 관점에서 법궤가 예루살렘에서 발견되기전 엘리가문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설명해주는 듯하다.
3)한 아히둡이상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아비아달은 아히멜렉 이름을 가진 아버지와 아들 둘을 가졌을 것이다.
4)삼상14:3과 삼하8:17의 본문들은 몇가지 편집적 바꿈작업을 하였고 아마도 엘리계열의 다윗제사장 둘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정확히 의도했던 것이다.
다윗의 두 주요 제사장은 사독과 아비아달이다. 귿鱁은 예루살렘과 놉 근처 지방제사장 가문을 대표한다. 사독은 토착적 예루살렘 제사장으로 친 예루살렘 사람들과 관계가 있다. 아비아달은 놉제사장들의 학살여부로 물론 초기에 다웃과 조인하였다.
대적자 처리
A.사울 후손들의 처형
어떤 점에서 다윗은 사울 가문의 여러 사람을 처형하는데 참여하였다. 삼하21:1-4에 따르면 이 처형은 살임과 땅의 기근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윗의왕위에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이용하여 사울가를 처형하였다.기브온 족속과 사울과의 관계는 악연이었다. 기근의 결과로 다윗은 사울의 아들과 손자 7명을 처형하도록 허락하였다.
B.압살롬의 반란
암논이 죽자 압살롬이 왕가의 후계자 역할을 하며 백성들의 불평을 들어주며 환심을 샀다. 불평이 유다와 이스라엘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압살롬의 지지자들 중에 다윗 자신의 측근 지지자들 일부가 포함되었다. 그중에 아히도벨과 아마사가 있었다.반란이 시작 되자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왕선포를 하였다.에브라임/이스라엘이 특별히 협조하였다. 지지가 확대되자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도망가야 했다. 그는 협공작전에 의해 도시에서 붙잡힐 위험에 빠졌다. 그러나 떠나기전 사독과 아비아달을 남기고 간다. 또한 후새는 남아서 압살롬의 지지자인체 하였다.
<두그룹의 지지자들을 재고해 보면>
1)분파적 관심들,가문결속,개인적 악감들은 강한 국가 창조를 여전히 악화 시키는 강한 요소들이었다.
2)다윗-사울과 충돌의 상처는 여전히 곪아갔다.
3)다윗은 외국용병들과 비이스라엘계에 그의 권력기반을 심하게 의존하였다.
압살롬은 도시를 점령한 후 아히도벨의 충고에 따라 다윗의 후궁으 鱁취하는 공적인 쑈를 하였다. 몇가지 조처중에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충고를 따르지 안하고 후새의 말을 들음으오써 결정적인 실수를 하여 퇴각하는 군대를 무찌르지 못하고 그리하여 다윗은 군대를 재정비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다윗과 압살롬의 군대가 에브라임 수풀 길리앗에서 전투를 하여 다윗군대가 승리한다. 요압이 압살롬을 죽인다.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메시지를 보내 유다 장로들을 격려한다. 그리하여 유다는 다윗을 지지하기 위해 모였고 길갈로 왓다.이스라엘 대표들은 다윗을 왕좌에 환원시킨 첫 조치를 행했던 사람들은 유다인들이 아니라 자신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전체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행동했고 베냐민 족속은 제 삼자로사 행한다.그들은 별개적 실체로서 이해되었다. 다윗초기에 각기 분리되어 임명되었던 압살롬 반란후 이스라엘과 유다 대표들이 다윗복위에 참여하였다.
C.세바의 반란
다윗이 길갈에서 이스라엘과 유다 지도자와 모여있는 동안 세바는 다윗가문을 깨뜨리기위해 소집하였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재빨리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아마사에게 시켜 세바를 진압케 하였다. 아벨 시민들이 세바의 목을 쳐서 기다리는 요압에게 던져준다.
VII.솔로몬
솔로몬의 통치시기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황금기였다. 창세기에서부터 열왕기하까지에 솔로몬은 뛰어난 지혜, 엄청난 부, 유프라테스강에서부터 이집트 국경까지 이르는 제국의 강력한 통치자로 묘사되어있다. 역대기에서는 솔로몬의 부정적인 측면은 삭제하고 성전을 건축한 임금, 다윗과 함께 이스라엘 제의를 세운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보다 세밀하게 자료를 검토해 보면 솔로몬에 관한 뜻밖에 사실을 만나게 된다. 예를들면 솔로몬은 Ꞩ을 갚지 못해서 페니키아의 두로왕 히람에게 갈릴리에 있는 12성을 양도한다(왕상 9:10-14). 또한 강력한 제국의 왕 솔로몬이 주변의 작은 나라들인 에돔의 하닷, 다마스커스의 르손, 에브라임 족의 여로보암 등에 곤욕을 치룬다. 또한 지헤의 왕 솔로몬이 강제적으로 노역을 시키고 막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듣는다.
1.성서자료와 그 문제점
열왕기 상 1-11장에는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제치고 왕위를 차지하는 '왕위계승설화'(Succession Narrative)가 1-2장에 있고, 기타 제의적인 모슴, 성전건축, 행정, 시바여왕의 방문 등이 이어지면서 솔로몬의 우상신전건립과 외적의 침략 등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는 이야기에서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고대사회에서 장자가 아닌 솔로몬이 왕에 올랐다는 것은 사실상 솔로몬의 쿠데타로 보여진다. 솔로몬은 등극 후 아비아달을 아나돗으로 낙향시켰고(왕상2:26), 그대신 제사장 사독을 그 자리에 앉혔다. 아도니야가 수넴 여인 아비삭과 결혼하겠다고 요청했을 때 왕위를 넘보는 것이라하여 그를 죽였고, 그후 일련의 반대파를 다윗의 유언이라는 명분으로 숙청, 제거했다.
역대하 1-9장의 기사는 다른 자료들을 사용한 흔적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심하게 윤색되어있다.그러므로 사료로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하다.
2.솔로몬의 종교활동
솔로몬의 궁정에는 야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다른 신전도 자리잡고 있었다. 왕비들과 후궁들의 간청에 못이겨 이러한 신정들이 건립되었다고는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솔로몬의 국가가 단일한 종교가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종교가 지배하는 국가였다는데 있다.
3.솔로몬의 경제활동
부구영화를 누린 솔로몬의 모습은 "솔로몬의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요,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들도 다 정금이다"(왕상10:21)라고 묘사되어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과도한 군사비지출과, 건축 등으로 실패했으며 이러한 실패로 인해 남북분열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솔로몬의 공과
정통성이 결여된 채 시작된 소로몬의 정치는 취약할 수밖에 없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과대한 세금, 노동, 착취등의 결과로 국민들의 원망과 불평은 더욱 심해졌고, 특히 북쪽 지파 사람들에게 더욱 심화되었다. 그후에 북쪽지파의 지도자인 여로보암을 필두로 솔로몬에게 반란이 일어나게된다.솔로몬의 쇠락은 이미 그의 등극 초기부터 씨앗이 배태되었다고 볼 수 있다.
VIII.오므리 왕조
솔로몬 사후 그동안 쌓여왔던 요소들이 폭발하여 마침내 이스라엘은 분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후 약 40여년 동안의 다툼 속에 사실상 북쪽의 이스라엘은 더많은 발전을 하게 되었고 더 바삐 움직였다.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나라를 뽑는다면 바로 오므리 왕조이다. 이미 두로와의 정략결혼을 통해서 경제력을 확보하였으며, 군사력도 강대하여 앗수르의 문헌에서는 '오므리의 집'이라는 말로 기록이 되어있다. 거의 한 세기 반동안 유다는 이스라엘의 속국처럼 지냈다.
1.자료
열왕기상 16:15-하8:27에는 오므리 왕조에 대한 기록이 실려있는데 대부분 예언자(엘리야)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있고 실제 오므리에 대한 기록은 얼마 되지 않는다.
벤하닷과 세 전쟁 이야기에 나타난 엘리사의 이야기는 사실은 오므리 시대가 아니라 예후 왕조의 시대이다.
특별히 오므리에 대한 자료는 성서뿐 아니라 모압비문(메샤비석),에포님 리스트,모놀리스 비문, 황소비문, 블렉 오벨리스크등과 같은 모압이나 앗시리아의 자료들 속에 오므리의 이름이 등장한다.
2.오므리 왕조
이스라엘의 네번째 왕인 엘라(881-880)는 시므리에 의해 살해된다. 오므리는 그 당시 블레셋을 공격하던 야전 사령관이었는데 , 시므리의 크데타 소식을 듣고 자기 군사를 이끌고 시므리를 공격한다. 다급해진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놓고 자살한다. 이후 오므리는 며느리 이세벨을 두로에서 데려왔고,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아합(혹은 오므리)의 딸 아달리야를 혼인시켜 대외 정책을 안정시킨다.
3.유다의 여호사밧과 여호람
유다왕 여호람은 여호사밧의 아들임에는 분명하나 이스라엘의 여호람에 대해서는 모호한 점이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이 아합의 아들임을 보여주는 본문들이 있다(왕하 8:61;25:9,29). 이러한 내용은 결국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두 왕국을 동시에 다스렸다는 셈이된다.
IX.예후왕조
앗수르 왕 살만에셀 3세로부터 이스라엘의 새 왕으로 임명받은 예후는 이스라엘의 친 앗수르 시대를 개막했다. 예후 왕조는 여로보암 2세 때 잠깐 부흥을 맛보았으나 곧 몰락의 길을 걸었고, 쿠데타의 연속 속에서 멸망하고 말았다.
1.자료
1)열왕기 자료
이 시기에 해당되는 자료로는 열왕기하 9:1-15의 자료와 엘리사 설화(왕하 2;4:1-8)및 세 전쟁 설화(왕상 20;22:1-38)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예후왕조가 1 세기 동안이나 이스라엘의 왕위를 지켜온 데 비해서는 너무나 간략하게 표시되어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후 왕조에 대해서 열왕기 사가의 신학적인 눈은 곤란한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야웨 예언자의 지지를 받으면서 쿠데타를 일으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줄곧 시리아의 압박을 받으면서 초라하게 지내왔고, 여로보암 2세 때 잠깐 위세를 떨쳤지만 그가 야웨 종교에 충실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엘리사 선지자의 이야기, 벤하닷과의 세 전쟁 설화는 예후왕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 아합시대에 배열한 이유도 역시 저자의 어떠한 고충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비록 엘리사 설화가 열왕기에서는 예후왕조 시대에 배열되어 있지만 엘리사 설화 속의 이스라엘 왕은 줄곧 익명의 이스라엘 왕으로 나타나있고 그 시대 배경이 예후왕조시대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원래의 엘리사 설화는 예후 왕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것으로 여겨진다. 시리아의 벤하닷과의 세 번에 걸친 전쟁 설화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 진다.즉 시리아의 압제에 항거하여 시리아와 싸워 승리하는 모습은 오므리 왕조가 아니라 예후 왕조의 여호아하스의 시대였다.
2)역대기 및 기타 성서자료
역대기 자료(대하 22:10-27:9)의 자료는 유다의 왕들과 레위인의 활동을 부각시킨 반면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기술한다. 역대기 기자의 관심사는 야웨의 제사장과 예언자를 선대하는 왕은 흥왕하지만 그렇지 않은 왕은 몰락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있었다.
3)앗수르와 시리아 문헌
예후왕조와 관련되는 앗수르 왕은 살만에셀 3세(858-824)와 아닷니라리 3세(819-783) 등이다. 살만에셀 3세의 비문들 가운데 대리석판 비문(Thej Marble-Slab Inscription)과 오벨리스크에 예후에 관한 기록이 있다. 대리석판 비문에 의하면 841년 예후가 살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쳤으며 블렉 오벨리스크에는 '오므리의 통치자(아들) 예후'가 조공을 바친 기록과 그림이 새겨져있다.
아닷니라리 3세와 관련된 사건으로는 요아스가 조공을 바친 사실이 있는데 문제는 그 연도가 불분명하며 또 다른 문제는 아닷니라리 3세가 언제 시리아-팔레스틴을 침공했는가?하는 연도문제이다.즉 요아스의 조공이 796년인가 805년인가하는 문제인데 정중호는 요아스가 조공을 바친 것은 조금 후의 사건 즉 그의 즉위연도인 804년일 것으로 주장한다.
4)고고학 자료
예후왕조에 해당하는 층(strata)에 해당하는 고고학적 발굴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마리아, 하솔, 세겜, 게셀, 라기스, 아랏, 브엘세바, 등...출토된 것들 가운데 사마리아의 오스트라카(ostraca)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자료인데 그 연도에 관해서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100여개가 발견된 이 오스트라카는 특정한 층에서 발굴된 것이 아니라 쓰레기 더미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라카에 새겨진 내용은 이스라엘 각 지역에서 아마도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것으로 보이는 기름과 포도주가 사마리아로 운송된 것이 나타나있다.
2.시리아의 압제
1)이스라엘-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衁.예후(839-822)
예후가 쿠데타를 일으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배경에는 시리아와 앗수르가 펼치는 국제정세의 변화가 있었다.당시 앗수르의 살만에셀은 841년 서방을 원정하여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다투고있는 요단 동편까지 휩쓸어 버렸다. 살만에셀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앗수르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된 예후는 앗수르의 세력을 업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예후 지지세력은 야웨예언자들과 오므리 왕조에 불만을 품은 자들 및 자기 휘하의 군대였다. 사마리아로 진격한 예후는 여호람, 오므리 집안의 사람들을 모두 죽였고 나름대로의 종교개혁을 실시하였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遁.여호아하스(821-805)와 요아스(804-789)
시리아의 압제는 여호아하스시대에 절정에 달했는데 이스라엘은 수시로 시리아의 침략을 겪어야 했고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다(왕하5:2). 바로 이 때 여호아하스가 있었다.
엘리사 설화도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엘리사는 왕을 도와 시리아의 압제를 견뎌나가며, 때로는 아주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시리아의 압제에서 도운 것으로 나타난다(왕하 6:8-7:20). 그러나 아닷니라리 3세의 서방진출이 시작되자(805) 시리아는 위축되기 시작했고 여호아하스는 그의 통치 말기에 과감히 시리아에 대항하여 반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 시리아의 왕권은 하사엘에게서 벤하닷 2세(806-?)으로 이어졌다. 여호아하스는 아벡 전투에서 벤하닷을 사로잡기까지 했으나 결국 라못 길르앗전투(왕상 22:1-38)에서 전사했다.
2)유다-아달리아, 요아스, 아마샤
衁.아달리야(839-833)
남편 여호람과 아들 아하시야를 예후로인해 잃어버린 아달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로 페니키아의 핏줄을 이어받은 왕녀였다. 열왕기하 11:1-20에는 아달리야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으며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 말해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아 볼 수 있다.
첫째,아달리야가 유다왕족을 모두 살해했으며 손자 요아스만 놓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행동은 여호람에게도 찾아볼 수 있다(대하21:4). 들째, 이스라엘과 유다가 동시에 예후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유다왕위를 보존했다는 것이다. 셋째,그 당시 국제 경제에 영향력이 컸던 두로와 우호관계를 맺음으로써 국력신장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넷째,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틀어 유일한 여왕인 아달리야가 적어도 7년이란 기간 동안 통치력을 발휘한 것은 백성들의 지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遁.요아스((832-803?793?)
요아스는 일곱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여호야다는 요아스를 가르치는 스승이었으며(왕하12:2) 요아스에게 왕비를 선택해준 사람이었다(대하 24:3). 요아스는 늘 유약하였으며 그가 장성해지자 제사장들에게 성전을 수리하도록 했으나 제사장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요아스는 그의 권위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왕을 비난하자 그를 돌로 쳐죽였다(대하 24:17-22). 그후 몇년 안되어 요아스는 반역자들에게 부상을 입고 퇴위했으며 그의 아들 아마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鑁.아마샤(802-786?774?)
아마샤가 등극한 때의 국제정세는 시리아의 세력이 기울고 앗수르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므로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영토를 확장하며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아마샤는 왕권이 신장됨에 따라 선왕 요아스를 대적하여 모반한 세력들을 척결했으며 왕권을 튼튼히 세우는데 주력했다. 아마도 제사장 세력들을 척결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아마샤는 유다의 서편 지역인 쉐펠라를 확보했으며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대면하자고 했다. 열왕기하 14:8-14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아마샤의 전갈을 받은 요아스는 벧세메스 전투에서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 성벽의 일부를 헐었으며 왕궁과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하였으며 포로들을 잡아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유다는 이스라엘의 속국임이 다시 확인되었고 유다의 독립은 아직 반세기 이상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3.이스라엘과 유다의 부흥
1)여로보암 2세(788-748)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오랫 동안 통치한 여로보암 2세는 시리아의 약화와 앗수르와의 친화관계에 힘입어 영토를 확장하고 급속한 경제부흥을 이루어 놓았다. 에포님 리스트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 적어도 앗수르는 여섯 번 유라투를 공격하였고(781, 780, 779, 778, 776, 774) 다마스커스와 시리아 북쪽의 하타리카 등지로 서방원정을 다섯 번 하였다(773, 772, 765, 755, 754).
여로보암 2세도 앗수르와 발 ꁹ춰서 다마스커스와 하맛을 공략했지만(왕하14:28) 점령했다기 보다는 조공을 받는 권한 또는 국제 무역권을 그 지방까지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이어지는 앗수르의 약세와 시리아의 득세는 이스라엘을 위축시키기 시작했으며 이는 곧 이스라엘의 상업활동의 부진으로 이어져 여로보암 2세 말기에는 경제 불황의 모습이 역력했다. 문제는 국가경제가 어려운데도 권력자들과 부유층이 이제껏 누려왔던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하려고 하여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려는 사례가 빈번했다는 것이다. 이에 호세아와 아모스같은 선지자들이 일어나 이스라엘의 권력가들과 부유층을 비판하며 예후왕조의 몰락을 예언하기 시작했다(호1:4-5;암7:8-9).
여로보암이 죽던 748년에는 전대미문의 지진이 일어나 이스라엘과 유다는 참담한 재앙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때 왕위를 계승한 스가랴는 6개월 안에 샬룸의 쿠데타로 인하여 예후 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2)유다의 웃시야(785-760?734?)와 요담(759-744)
성서에서는 아자리야(왕하 15:1, 6, 7, 23, 27)와 웃시야(왕하 13:30,32,34;대하 26-27장; 사1:1;6:1)가 동일 인물임을 말해준다. 아마도 아자리야는 본명이며 웃시야는 왕명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왕하 14:28에는 "이스라엘 안에 있는 유다에게..."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이 유다를 속국으로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요담은 예루살렘 성전의 윗 문을 건축했으며(왕하 15:35), 예루살렘 성을 증축했다(대하 26:6-15). 요담 말기에는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 및 불안 그리고 종교적 병리현상 등이 겹쳐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으며, 이사야 및 미가 등과 같은 선지자들로부터 날카로운 비난을 듣게 되었다(사 1장;미3장).
X.이스라엘의 멸망
예후 왕조 이래 1세기 동안이나 친 앗수르 정책을 지켜왔던 이스라엘은 마지막에 앗수르에 대항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기에 722년 앗수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점령되어 앗수르 영토로 합병되고 말았다.
1.자 료
이 기간에 관련된 앗수르 왕들은 앗수르니라리 5세,티글랏빌레셀 3,살만에셀 5세,사르곤 2세 등이며 티글랏빌레셀의 연대기는 석판에 새겨졌는데 후대의 왕 에살하돈이 그 석판들을 다른 곳에 옮겨 사용하였기 때문에 파손되거나 혼합되어 연대 순으로 정리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티글랏빌레셀에 관한 중요한 자료는 ① 님루드 서판;744-728기간의 일을 요약한 것으로 조공을 바친 명단에 유다도 포함되어 있다.② ND400;서판에 새겨진 것으로 734년 서방원정에 대한 기록이다.③ ND2715 님루드 서한;두로의 통치자로 임명된 크르디아수르라무르의 편지로 앗수르가 이집트의 해상무역을 견제하는 내용 ④ ND4301+4305;호세아를 이스라엘 왕으로 임명하는 내용 ⑤ 이란 비석;므나헴의 조공에 관한 기록 ⑥ 전시비문;733-732의 사건 기록인데 호세아의 왕권 탈취와 므나헴의 조공에 관한 기록이 있음 ⑦ ⅢR10석판에 새겨진 38줄의 내용은 시리아-팔레스틴 원정에 관한 것으로 티글랏빌레셀에 의해 임명된 호세아가 베가를 대신해 이스라엘 왕위에 올랐음을 명시했다.
2.국 제 정 세
1)앗수르
티글랏빌레셀 3세 이전 약 2세기 동안 앗수르는 유프라테스강을 넘어 서쪽으로 자주 군사 원정을 하였으나 앗수르 영토로 합병하는 일은 없었다. 앗수르는 티글라빌레셀이 즉위하기 이전 40여년 동안 내부 사정 때문에 서방 원정에 힘을 쏟을 수 없었다.이 때 앗수르 내의 지방장관들이 마치 왕처럼 행세했으며 전체적으로 물자가 부족한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티글랏빌레셀은 739년에 유라투 남서쪽 울루바를 공격했고 그 다음 738년에 시리아 북부 지역에 결성된 반앗수르 연합군을 격파했다.티글랏빌레셀 시대부터 달라진 앗수르 대외 정책의 특색은 더이상 앗수르에 반항하지 않도록 영토로 합병시켜 버린 점이다.
2)시리아
시리아는 르신의 등장으로“강대국 시리아”를 건설하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시리아는 므나헴과 요담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각각 통치하던 시대에 이미 팔레스틴 땅을 잠식해들어갔다. 시리아가 어느 정도 팔레스틴 땅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는 앗수르가 시리아를 멸망시키고 시리아 땅을 합병할 때의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다.732년 앗수르는 팔레스틴 중부 해안 지역을 합병했는데 이 지역은 페니키아와 블레셋 중간 지역으로 도로 주변 지역이다. 또한 앗수르가 요단 동편고 갈릴리 지역을 합병한 것으로 보아 시리아가 이 ㅈ역을 이미 차지한 것을 알 수 있다. 734년 르신은 반 앗수르 동맹을 맺어 티글랏빌레셀에게 정면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역대하28:18등을 통해 에돔을 비롯한 요단 동편의 여러 나라들과블레셋등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이 대부분 반앗수르 동맹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시리아-에브라임 전쟁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은 734년 베가가 이스라엘 왕으로 즉위한 직후 시리아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가 함께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한 전쟁이다.예루살렘을 공격한 이유는아하스가 친 앗수르 정책을 선언하여 이스라엘-시리아의 반앗수르 정책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베가는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기 이전에 아하스를 암살하고 타벨의 아들 유다를왕으로 앉히려고 했다. 아하스 암살에 실패한 베가는 종주국이 봉신국을 징벌하는 태세로예루살렘을 공격했는데 이 때 아하스는 이스라엘의 침략뿐 아니라 유다 내부의 국론 분열로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지중해 연안의 거의 무든 나라들이 반앗수르 동맹을 맺었는데 유다의 아하스만 친앗수르 정책을 취한 데 대한 유다 백성들의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예루살렘이 함락당할 위태로운 시기에 갑자기 나타난 티글랏빌레셀 덕택에 아하스는 위기를 모면했다.그 때 티글랏빌레셀은 신속하게 블레셋으로 진격하여 가자까지 점령했다.이스라엘-시리아는 더이상 예루살렘점령에 집착할 수 없게 되었으며 앗수르에 대한 방어 태세를 갖추어야만 했다.이리하여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은 끝났고 아하스와 이사야가 추구했던 대로 유다는 이스라엘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4)티글랏빌레셀의 시리아-팔레스틴 원정
738년 하맛을 공격한 후 티글랏빌레셀은 한동안 앗수르 제국의 동부에 힘을 쏟았다.그 동안 서부에서는 시리아-두로-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지중해 연안 지역의 나라들이 반앗수르 동맹을 결성했다.734년 티글랏빌레셀은 에포님 리스트에 있는 대로 블레셋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겨했다.이 때 가자 왕 하누누는 이집트와 이디오피아로 도망하여 나라의 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이집트와 이디오피아 군사들이 파병된 기록은 없다.중요한 것은 두로와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조공 명단에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다는뜻이다.
3.유다의 아하스
티글랏빌레셀의 비명에도 나타나는 아하스는 요담의 아들로 743년에 유다의 왕으로 즉위했는데 그 때 나이 20세였다.그런데 특이하게 그의 어머니인 대비의 이름이 소개되어있지 않다.유다 왕들중에 대비의 이름이 소개되어 있지 않은 왕은 여로보암과 아하스 뿐이다.열왕기 기자가 아하스왕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을 보내어 앗수르가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는 점이다.아하스의 종교 활동도 열왕기 기자에 의해 지탄을 받았는데 ① “그의 아들을 불가운데 지나가게 하였다.”는 사실 ② 다마스커스에 가서 거기 있던 제단을 본따서 예루살렘성전에 새 제단을 만든 사건 때문이었다.아하스가 그의 아들을 죽여 제사를 드렸는지 아니면 단순히 불 가운데를 통과시키는 의식을 거행했는지는 불분명하다.만약 아하스가 자기 아들을 죽여 제사를 드렸다면 아마도 모압 왕 메사가 제사드렸던 것처럼 예루살렘이 포위당한 위기 상황에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4.이스라엘의 최후
이스라엘 왕권의 불안정은 왕조 신학의 부재라든가 지역 및 집단 간의 다툼 등 내부적 원인에 의한 것도 있지만 더 큰 원인은 앗수르와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와 두로 등이 펼치는 국제 정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살룸,므나헴,브가히야,베가
여로보암 2세에서 스가랴로 왕권이 계승된 후 6개월 만에 사가랴는 살룸에 의해 쿠테타를 당하여 제거되었으며 이로써 예후 왕조는 막을 내렸다.살룸은 쿠테타에 성공하였으나 1개월 만에 므나헴에 의해서 학살되었다.티글랏빌레셀은 즉위 다음 해 서부로 시선을 돌려 4년간 북시리아의 지중해 연안을 원정했다.이 때 므나헴은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티글랏빌레셀에게 대가를 지불했는데 다마스커스의 르신과 두로의 투바일등도 조공을 바쳤다. 므나헴이 바친 일천달란트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6만 명의 부자들로부터 50세겔씩 거둔 것이었다.베가는 750년경부터 요단 동편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시리아 왕 르신의 사주를 받으면서 반 앗수르 동맹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했다.므나헴-브가히야 통치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베가에게 동조하시 시작했으며 급기야 베가는 쿠테타를 성공시켜 734년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했다.
2)호세아
호세아에 관한 성서 기록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스라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이스라엘 왕 중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또 한 왕이 있는데 그는 여호람이었다.그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동시에 통치한 왕이었다.호세아의 경우 역시 친유다적인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가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근거는 유다왕 아하스가 베가를 제거하려는 호세아를 적극 지원했으리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호세아가 인수한 이스라엘의 영토는 겨우 사마리아와 에브라임산지에 불과했다.시리아를 멸망시킨 앗수르는 요단 동편과 이스라엘 골짜기,갈릴리 지역을 제국의 영토로 이미 합병해 버렸다.
호세아는 앗수르 왕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지만 몇 년도 안 되어 반앗수르 반란에 가담했다.호세아는 다시 반앗수르 동맹에 가담하여 조공을 중단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집트 왕 소(so)에게 도움을 요청했다.호세아는 726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725년 살만에셀의 서부 원정 때 사로잡혔고 왕궁과 성전이 부숴지고 약탈당했다.그러나 사마리아는 호세아 왕이 없었음에도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살만에셀은 724년 마헤스반 15일 직후에 사마리아를 포위하여 3년간이나 공격했다.
3)이스라엘의 멸망
722년 겨울 사마리아는 살만에셀에 의해 함락되었다.
XI.앗수르 전성기의 유다
앗수르의 전성기는 티글랏빌레셀 이후에도 계속되어 살만에셀,사르곤,산헤립,에살하돈 등으로 이어지며 앗수르바니팔 후반기에 이르러 비로소 퇴조 현상을 보였다.이 시기의 유다 왕은 히스기야,므낫세,암몬 등이며 그들은 앗수르의 강력한 통제 속에서 유다를 이끌어나갔다.
1.자 료
성서 자료로는 열왕기하18-21장과 역대하29-33장을 들 수 있으며 이사야36-39장과 이 시기에 관련된 제1이사야의 다른 부분등을 들 수 있다.산헤립의 비문들은6각형 흙 기둥에 새겨진 테일러 프리즘,오리엔탈 인스티튜트 프리즘,황소 비문,라기스릴리프,신에게 바치는 편지등이 있다.
2.앗수르와 이집트
즉위 초기의 어수선했던 국내 문제를 정리한 사르곤은 720년 서부로 원정했다.이 때 사마리아 점령 문제를 완결했고 블레셋 도시들을 공격하여 가자의 하누누를 사로잡았으며 와디 베소르 남쪽 이집트 영토인 라피아를 함락시켰다.사르곤의 720년 서부 원정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은 앗수르와 이집트가 손을 맞잡고 우호 관계를 수립했다는 것이다.티글랏빌레셀이 734년 가자 지역에 열었던 무역센터는 그 동안 폐쇄되어 왔는데 720년 서부 원정 때 사르곤이 다시 열고 이집트사람들과 어울려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이리하겨 앗수르와 이집트는 경제적 이득이라는 목표를 위해 보조를 같이 했으나 이집트 남부에 있는 에디오피아가 방해했다.에디오피아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나일강 상류에서 델타 쪽으로 진격하여 세력을 팽창시키고 왕조를 확립.679년 앗수르 왕위에 오른 에살하돈은 왕위에 오르기까지 이집트에 있는 에디오피아 왕조인 제25왕조를 견제하려“이집트 개울”까지 진군했다.그러나 에살하돈은 674년 제25왕조를 징벌하려는 이집트 원정에는실패했다.
3.히스기야
티글랏빌레셀에서 살만에셀로 앗수르 왕위가 교체되기 직전에 유다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는 앗수르 위성국가인 유다의 상황을 물려받았다.이 때 티글랏빌레셀은 반란을 진압하러 서부원정중이었으며 유다의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도움으로 친앗수르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사마리아가 함락될 때까지도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에 동조하지 않고 친앗수르 국가로 남아 있었다.713-711년에 또다시 반란이 일어났는데 바벨론과 아스돗이 반란을 일으켰다.이 때 유다도 반란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유다의 히스기야는 이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714년경부터 병을 얻어 행정권을 정승인 셉나에게 넘겨준 상태였다.셉나가 주동이 되어 반앗수르 반란에 참여했고 셉나는 실로암 터널을 뚫기 시작했다.
1)히스기야의 전쟁 준비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통제하에서도 앗수르에 대항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해 온 것으로 보인다. 실로암 터널 공사가 이미 시작되었는데 이 터널은 예루살렘 성곽 밖에 있는 기흔 샘에서 성안에 있는 실로암 못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통로로서 실로암 비문에 의하면 양쪽에서 터널을 뚫어오던 건설 기술자들이 있다.히스기야는 성벽을 증수할 뿐더러 바같성을 쌓고 망대까디 세우는 준비를 했으며 다윗 성의 밀로를 견고하게 했다.물론 무기도 만들고 군대의 지도자도 임명하는 등 군사력을 증강시켰다.사마리아의 점령 이후 피난민들로 예루살렘의 인구는 증가했으며 도시도 확대되었다.종교개혁을 단행한 히스기야는 지방성소를파괴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종교정책을 시행했는데 이 일들은 앗수르 왕의 사신 랍사게의 말에도 나타나 있다.히스기야는 제의의 중앙 집중화를 통해 예루살렘의 위치를 더욱 굳건히했으며 모든 국력을 예루살렘 중심으로 집결시켜 놓으려고 노력했다.
2)산헤립의 팔레스틴 원정
705년 사르곤은 시메리안과의 전투에서 죽었는데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사르곤이 죽자 앗수르 제국으로부터 압박을 받던 나라들이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에서는 히스기야가 반란의 주동자였다.어려움 없이 왕위를 계승한 산헤립은 바벨론의 므로닥발라단을 평정한 뒤 701년 서부로 원정했다.산헤립은 쉐펠라 지역의 유다 도시들을 공격하여 라기스를 점령했으며 그 곳을 야전 사령부로 사용했다.산헤립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면서 히스기야와 협상을 진행했다.산헤립의 포위공격과 항복 권유를 받으면서 히스기야는 저항도 했지만 결국 굴복한 것으로 보인다.앗수르 문헌에는 산헤립의 승리를 기록해 두었다.아마도 바벨론의 반란으로 급히 돌아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산헤립은 히스기야를 쳐부수지는 못하였고 협상을 통해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얻어 냈다.히스기야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유다에는 히스기야를 대신할 지도자도 없었고 왕자인 므낫세도 너무 나이가 어려 왕위를 교체할 수 없었기에 히스기야의 복종 서약만 받고 그대로 왕위에 있도록 산헤립이 허락했다.유다 지역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무너지고 약탈 당했지만 예루살렘은 함락당하지 않았으므로 예루살렘 주민들은 승리 못지 않은 환성을 울렸다.
4.므낫세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유다 왕 므낫세는 열두 살에 왕위에 올랐다.므낫세에 관한 성서 기록은 거의 부정적인 기록밖에 없으며 므낫세의 죄악으로 결국 유다가 멸망했음을 강조했다.역대기 기자 역시 므낫세를 부정적으로 묘사했으나 므낫세가 앗수르 군대에 의해 바벨론으로 붙잡혀간 후 하나님깨 회개했고 돌아와서 종교개혁을 단행한 “돌아온 탕자”로 묘사했다.므낫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유다의 형편은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파괴와 약탈 그리고 포로 등으로 인해 피폐한 상황이었다.블레셋 지역의 영토 반환으로 수입이 감소한 반면 앗수르에 바치는 막대한 조공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도 당했다.앗수르의 봉신국가로서 예루살렘에 앗수르 군인들과 관리들이 주둔하여 내정을 간섭했고 소년왕 므낫세는 친앗수르 섭정의 지도를 받으며 유명무실한 왕으로 출발했다.
1)므낫세와 에살하돈
산헤립의 아들 중 황태자 에살하돈이 680년 왕위에 올랐다.677-676년에 에살하돈은 시돈의 반란을 평정하고 시돈 왕 압디밀쿠드를 처형했다.
2)므낫세와 앗수르바니팔
앗수르 왕위를 계승헌 앗수르바니팔의 이집트 원정때는 서부의 봉신국 군주들이 군사들과 수송을 위한 배 등을 제공했는데 므낫세도 포함되어 있다.시리아-팔레스틴은 양 강대국의 우호 관계 아래 앗수르의 통제를 계속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므낫세는 644년 죽었으며 그의 아들 아몬이 왕위를 계승했다.
5.아몬
아몬에 관한 기사는 아몬의 모친 이름과 아몬의 우상 숭배 사실 및 아몬이 암살되었다는 사실뿐이다.아몬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집트 태양신 아문과 유사하여 이집트의 영향을짐작하게 한다.아몬은 2년간 통치한 후 신하들에 의해 암살 당했는데 그 암살자들을 “땅의 사람들”이 처형하고 아몬의 아들 요시야를 왕위에 앉혔다.
XII.유다의 멸망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와 마찬가지로 유다가 멸망하게 된 배경에는 복잡한 국제정세와 유다 국내의 파벌 싸움이 있었다.앗수르,바벨론,이집트 등의 열강들뿐 아니라 시메리아,메대,스키티아 등의 북방 민족들이 등장하여 주전 7세기 후반의 중동 정세는 그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유다의 마지막 왕들을 살펴보면 8세 된 요시야가 왕위에 올랐으나 원인 모를 죽임을 당했고,여호아하스는 이집트로 붙잡혀 갔으며, 여호야긴과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여호야김만 자연사했는데 그것도 바벨론군대가 유다에 쳐들어 오는 것을 보면서 임종했다.
1.자료
1)열왕기하22:1-25:30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들 가운데 요시야는 가장 의로운 왕으로 묘사되어 있다.많은 학자들은 원래의 여호수아-열왕기는 요시야 때 기록/편집되었으며 요시야 왕 이후 부분은 유다 멸망 후에 첨가되었다고 주장했다.
2)역대하34:1-36:20
역대기 사가도 요시야왕을 극구 칭찬했다.역대기하는 열왕기하보다 제의와 레위인을 더 강조하며 상세히 기록하였다.역대기 기자는 위대한 왕의 명예로운 최후로 의문스러운 죽음보다 전사를 합당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3)예언서
주전 7세기 후반가 6세기 초에 할동한 예언자들은 나훔,하박국,예레미야, 에스겔 등이며 그 중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활동 가운데 이 시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되는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다.
4)성서 외 자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벨론 역대기이다.742년부터 셀류커스2세에 이르는 오랜 기간의 사건들을 담고 있다.헤로도투스의 『역사』와 소위“와디 브리사 비문”이라 부르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비문 및 에글론 왕 아돈이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보낸 편지 등이 이 시대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2.앗수르의 멸망과 바벨론의 등장
1)바벨론의 등장
바벨론은 689년 산헤립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에살하돈이 다시 재건했고 앗수르바니팔이 죽자 신슘리시르가 일 년간 바벨론을 통치했지만 곧 나보폴라살에게 왕권이 넘어갔다. 나보폴라살은 제국을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담당했다.나보폴라살은 손쉽게 국가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2)북방 민족들
소위 야만족이라 불리는 북방 민족인 스카타이,메대,시메리아 등이었다.
3)앗수르의 멸망
사르곤 2세 이후 앗수르와 이집트는 우호관계를 맺었는데 이집트는 앗수르가 멸망할 때까지 앗수르를 지원했으며 616년에는 유프라데스 강변 가블리니까지 진군하여 앗수르를 도왔다.바벨론을 장악한 나보폴라살은 616년 앗수르-이집트 연합군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했고,그 이듬 해 앗수르의 수도인 아슈르를 다시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그 이듬 해 앗수르의 수도인 아슈르를 다시 공격했지만 또 다시 패배했다.612년에는 메대-바벨론의 군대가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를 함락시켰다. 소 예언서 나훔은 이 때의 니느웨 함락을 축하한 내용을 실은 책이다.
3.이집트와 유다
앗수르는 유다를 봉신국가로 지배하고 있었지만 7세기 후반부터는 메소포타미아의 주변 상황과 국내 문제로 인해 유다를 포함한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에서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앗수르의 영향력이 줄어든 이 지역에 자연스럽게 세력이 확장한 나라는 사르곤2세 때부터 앗수르와 우호관계를 맺은 이집트였다.이집트가 팔레스틴을 지배했다면 유다는 당연히 이집트의 봉신국가가 될수 밖에 없다.요시야시대부터 유다가 이집트의 세력권에 있었고 아마도 이집트의 봉신국가였으리라 짐작되는 그 외의 상황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바벨론 역대기에 의하면 616년 이집트 군대가 유프라테스강변 가블리니까니 진출했고 610년,609년,605년 등의 전투에도 참여한 것으로보아 이집트가 이 시기에 적어도 시리아-팔레스틴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유다인들이 이집트 군대 안에 있었고 이집트에 고용된 헬라군인들이 팔레스틴에 주둔해 있었다는 사실은 유다가 군사적으로 이집트의 봉신 역할을 했다는 증거가 된다.
3)이집트가 시리아와 블레셋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볼 때 시리아와 이집트의 중간에 있는 유다 역시 이집트에 의해 장악되었음을 알 수 있다.
4)성서의 내용 가운데 유다가 이집트 휘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요시야 제13년부터 예언 활동을 시작한 예레미야는 요시야 통치 전반기에 유다가 이미 이집트와 앗수르 양 강대국을 동시에 섬기고 있었음을 말해 주었으며 앗수르의 약세로 말미암아 유다는 요시야 후반기에 이집트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4.요시야
신명기 사가에 의해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을 받은 요시야 왕은 종교개혁을 단행한 인물이었지만 정치-군사적으로는 이집트 휘하에 있었다.앗수르가 약화되고 이집트의 세력이 증대되어 가는 상황에서 요시야는 장성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했는데,이 개혁이 이집트에 반기를 드는 반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며 다만 느슨한 이집트의 통제 아래서 유다의 종교적 상황을 재정비했을 뿐이었다.요시야의 종교개혁은 그의 통치 18년 티스리 15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개혁에는 달력 체계의 변동,율법책의 발견,성전정화,종교의 중앙 집중화, 유월절과 무교절을 분리하여 준수하는 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달력체계의 변동
요시야 왕 때 달력 체계가 변동되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① 여호야김 제5년 9월에 예레미야의 두루마리가 여호야김에 의해 불태워졌는데 그곳은 겨울궁이었고 난로를 피우는 겨울철이었다.② 유다의 연대기에는 609년이 어떤 오아에게도 할당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를 니산-니산 체계로만 설명할 수 있다. 요시야가 느고2세에 의해 죽은 것은 610년 늦 여름 혹은 이른 가을이었다.③ 에스겔1:1의 “제30년”은 유다의 달력 체계가 변경된 622년 니산부터 계산된 연도이다.④ 요시야 제18년에 지킨 유월절은 전례가 없었던 새로운 것이라 했다.유월절은 역사가 오래된 축제로 요시야 왕 때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전례가 없었던 것이라 하였는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유월절이 무교절과 분리되어 지켜진 전승층이 제사장 문서층이라는 사실이다.
2)요시야의 종교개혁
달력 체계 변경과 유월절 준수는 율법책이 신명기의 초기 원본이 아님을 말해 준다.역대기 사가의 신학적 의도에 보다 더 조심할 필요가 있으며 역대기 자료보다는 열왕기 자료가 좀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종교개혁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작되었는데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제거하는 일들이었다.요시야가 실시한 종교개혁의 뚜렷한 특징은 종교의 중앙 집중화경향이었다.이집트의 느슨한 통치가 있었던 시기에 요시야는 제사장들과 더불어 종교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고 부분적으로나마 국력을 정비하여 벧엘과 게바까디 영토를 조금 넓힐 수 있었다.
3)요시야의 죽음
역사적으로 근거 있는 자료라기보다 위대한 왕의 죽음을 비명 횡사로 그리지 않으려는 신학적 의도가 담겨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요시야가 전투중에 전사했다는 시나리오는 그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 가능하지 않은 추측이다.비록 느슨한 통치를 받고 있지만 이집트의 봉신의 위치에 있었던 유다가 단독으로 강대국 이집트와 정면 대결을 할 수 없었을 뿐 더러 바벨론이 지원했다는 근거도 없고,그 외 주변 국가들이 유다와 합세할 이유도 없었다.그리고 요시야가 국방을 강화하고 군대를 재정비했다는 기록도 없다.또 다른 시나리오는 새로 등극한 이집트 왕에 대한 요시야의 결례와 이집트 왕의 권위 과시가 결부된 사건이라는 추측이다.느고2세와 요시야가 대면한 장소는 므깃도였다.므깃도는 이스라엘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요시야가 느고2세를 예루살렘보다 남쪽에서 영접하지 않고 훨씬 북쪽인 므깃도에서 만났다는 것으로 보아 요시야가 느고2세를 소홀히 대했음을 알 수 있다.
5.여호아하스 2세
요시야가 죽자 “땅의 사람들”이 요시야의 아들 중 형인 여호야김을 제쳐두고 동생인 살룸을 왕위에 앉히고 여호아하스라 불렀다.느고2세는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곧 사람을 보내어 여호아하스를 체포하여 라블라에 구금시켜 버렸다.여호아하스는 이집트에 끌려가서 다시는 유대땅을 밟지 못했는데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여호아하스를 위해 슬피 울어 주라고 충고했다.
6.여호야김
여호야김은 친 이집트파로 끝까지 이집트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605년 칼케미스 전투를 기점으로 바벨론이 승리자로 부상했으며 곧 이은 하맛 전투에서도 바벨론이 승리했다.여호야김은 3년간 바벨론의 봉신으로 지내다가 급기야 이집트를 등에 업고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다.여호야김도 바벨론에 보내는 조공을 중단해 버렸던 것이다.
1)여호야김과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시대부터 예언 활동을 시작했지만 요시야 왕과 그의 종교개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주로 여호야김,여호야긴,시드기야 왕과 그 시대의 사건들을 언급했다.여호야김은 친이집트 정책을 선호했지만 유다 내부에는 친바벨론파도 있었다.예레미야는 친바벨론 정책을 지지하면서 바벨론의 멍에를 메는 길만이 유다가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임을 역설했다.예레미야는 칼케미스 전투가 있던 해에 느부갓네살을 야웨의 종이라 불렀으며 느부갓네살이 천하를 평정하여 황무지로 만들고 70년 동안 유다를 다스릴 것이라 선포했다.그의 고향은 아나돗으로 솔로몬 왕 때 축출당한 아비아달의 고향과 동일하다.사반 가문이 친바벨론파였음을 명확히 알 수 있으며 왜 예레미야를 도왔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예레미야가 여호야김을 비난한 이유는 여호야김이 야웨의 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7.여호야긴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여호야긴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거기서 죽었지만 유다 사람들은 계속 여호야긴 통치 연도를 사용했고 바벨론이 임명한 시드기야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8.시드기야
느브갓네살은 여호야긴을 대신하여 맛다디야를 유다왕으로 임명했는데 왕명을 시드기야로 불렀다. 이때에 예레미야는 느브갓네살을 야웨의 종이라 불렀고(렘 27:6)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멍에를 꺾어버렸다.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느브갓네살의 경호대장 느브사르단에 의해 불태워졌고, 이 때가 586년 아달월5일 혹은 10일 이었다(왕하25:8-9;렘52:21).
XIII.바벨론 포로 시기(주전 586-539년)
예루살렘 파괴와 그에 뒤이은 포로생활은 이스라엘 역사의 커다란 분수령을 이룬다. 바벨론 제국의 일격에 이스라엘의 국가로서 존립은 끝이 났고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삶을 표현하고 있었던 모든 제도도 끝장이 났다.
이 시기의 성서 자료로는 열왕기하 24:18-25:30(=렘 52:1-33)과 력대하 36:11-21, 그리고 에스겔, 예레미야 39-44장, 이사야 40-55장, 예레미야 애가등이 이 시대의 상황을 전해 주고 있다. 또한 고고학 자료로는 아랏과 라기스에서 발굴된 우스트라카와 라기스, 아랏, 엔게디 등지에서 발굴된 파괴의 흔적, 그달리아의 인장 및 야아시니아의 인장 등을 들 수 있다. 고대 중동 문헌으로는 바벨론 역대기, 아리스테스의 편지, 니푸를에서 1893년에 발굴된 토판들, 엘레판틴 파피루스등이 있다.
바벨론 군대에 포위된 예루살렘 성을 탈출한 시드기야는 결국 여리고 근방에서 붙잡혔다. 그는 하맛 땅 립나에 머물러 있던 느부갓네살에게 끌려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왕하 25:1-7). 또한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니야, 그리고 성전 문지기, 왕의 신하, 서기관, 백성의 지도자 등이 붙잡혀 립나에서 처형당하였다(왕하25:18-21). 바벨론의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은 전례대로 하류층 백성들만 남기고 지도자, 기술자 등 중상층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 갔다(왕하 25:11-12). 이 때 예루살렘 성벽은 파괴되어 무너졌으며 성 안에 있던 보물들과 성전의 기물들은 약탈당했고 성전은 불태워졌다.
예루살렘의 파괴 직후의 정치적 상황에 관한 자세한 것은 불분명하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느브갓네살이 사반의 손자요, 아히감의 아들인 그달리야를 유대 지역을 다스리도록 지명하였다는 것이다(왕하25:22). 그달리야는 친바벨론파 가문의 출신이므로 파괴되지 않은 도시 미스바로 수도를 옮겨 유다를 통치했다. 미스바는 그달리야 왕 이후에도 유다의 수도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수도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A. 586년 이후 유다의 생활상
외적의 침략으로 패배한 나라는 곳곳마다 약탈당하고 파괴되어 백성들의 생활상은 비참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유다 전체가 폐허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예루살렘은 무너졌지만 유다의 모든 도시들이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주로 군인들이 주둔했던 요새들이 파괴되었으나 그 외 도시들은 파괴되지 않았다. 특히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베냐민 지역은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일부 계층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고 예루살렘에도 재산이 없었던 하층 계급에 속한 백성들이 남아 있어서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었다(왕하 25:12;렘39:10). 이웃 나라(모압, 암몬, 에돔)에 피난 갔던 사람들도 다시 돌아와 생활을 영위하여 갔다(렘40:10-12). 종교 생활도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미스바를 위시하여 지방에 있는 성소들은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희생제사 의식이 예전대로 거행되고 있었다. 이 종교생활이 계속되었을 것으로 보는 이유는 1) 성전이 파괴된 것을 탄식하는 예레미야 애가의 탄식은 파괴된 예루살렘에서 제사가 계속 드려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2) 페르시다가 들어서면서 성전 기물을 돌려 주었다는 것은 성전 기물을 둘 수 있는 '거룩한 곳'이 이미 있었음을 보여 주며, 3)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계속 생활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갑자기 종교 생활을 중단해 버릴 뚜렷한 이유가 없다는 점 등이다.
이렇게 종교 생활은 지속되었지만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의 판도는 많은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중심으로 종교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사독 계열의 영향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고 지방에 있었던 제사장들이 종교세력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미스바를 중심으로 하는 제사장들이 바벨론 시대에 이미 부상하여 종교 활동을 이끌어 갔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그달리야가 백성들을 달래려고 했고(렘40:7-12) 또 국토를 정상 상태로 회복시키려고 애를 ?지만, 완강한 저항자들은 그를 부역자로 여겼다. 그들 중의 왕족의 한 사람인 이스마엘이란 사람이 그달리야를 죽일 음모를 꾸몄고 암몬 왕이 이를 후원하였는데, 이스마엘은 전에 암몬 땅으로 피신 했었고 또 거기서는 여전히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스마엘은 그달리야를 살해하고 왕권을 장악하고자 했으나, 그달리야의 신하들의 반대와 이스라엘 백성들도 지지하지 않아 그는 암몬 왕에게로 도망을 갔다. 또한 그달리야의 신하들도 바벨론 왕이 임명한 그달리야가 살해되었으므로 바벨론이 보복할까 두려워서 백성들과 함께 이집트로 피신했는데 이 때 이집트 피신을 반대하던 예레미야도 데려갔다(렘41:17-43:7).
실패로 끝난 이스마엘의 반란 사건은 내부적으로 볼 때 다윗 왕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신념 곧 유다의 정통성 있는 국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및 파벌주의가 배태한 사건이라 볼 수 있으나 그 당시 국제 정세에 비추어 볼 때 이 사건은 단순한 유다 내부의 세력 다툼이 아니라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반바벨론 분위기에 편승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느부갓네살은 582-581년에 모압과 암몬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두로는 13년간이나 바벨론에 포위 당한 채 저항하고 있었다. 또한 소아시아 지역의 문제로 느부갓네살이 고심하고 있던 터라 팔레스틴 지역에서 반바벨론 봉기가 일어날 수 있었던 좋은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앗수르 치하에서 지중해 연안 국가들이 기회있을 때마다 연합전선을 펴서 반란을 일으켰던 사실과 마찬가지로 580년대 후반에도 페니키아-시리아-팔레스틴-이집트의 국가들이 반바벨론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이스마엘은 반바벨론 반란을 일으킨 암몬의 후원을 등에 없고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반바벨론 반란을 응징하는 방법은 역시 바벨론 군대가 암몬과 모압을 징벌하면서 유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고(렘52:30) 봉신 국가였던 유다를 바벨론 영토로 합병해 버리는 방법이었다.
B. 바벨론의 포로들
1) 디아스포라의 생활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었던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었다. 이들 중에는 586년 예루살렘 함락으로 인해 끌려간 사람들도 있지만 그 이전부터, 앗수르 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미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었다. 앗시리아인들이 갈릴리와 트랜스요르단 지역 사람들은 주전 733-732년에 포로로 삼았고(왕하15:29;ANET 283), 722년의 사마리아 함락시 사르곤 Ⅱ세는 사마리아 땅에서 27,290명을 끌고 와서 메소포타미아와 메대지역에 정착시켰다(왕하17:6,18:18:11;대상5:26). 주전 701년의 산헤립의 원정시 산헤립은 히스기야로부터 200,150명을 포로로 잡아왔으며(ANET288),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그 밖의 지역에서 살았다(사5:13; 11:12-16; 27:8;미1:16). 그리고 느브갓네살의 주전 597, 586, 582년의 침략은 많은 수의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디아스포라가 되게 하였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앗수르, 바벨론, 베대 등지로 분산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황폐된 도시거나 개척이 필요한 지역이었다. 그들이 정착한 곳의 이름들을 보면 텔 멜라, 텔 하르솨, 텔 아비브 등 텔이란 단어가 들어 있는데 텔은 '언덕'이란 뜻도 있지만 종종 '폐허'라는 뜻도 있으며 보통 고고학 발굴지에 붙이는 단어이다. 이러한 장소에 정착한 그들의 생업은 주로 농업(렘29:5-7; 왕하18:31-32)이었다. 또한 강 하류 운하 부근에도 정착했는데 그발강가 텔 아비브(겔1:3;3:15)를 비롯해서 하볼(대상5:26) 등 운하 근처에 있는 도시들은 큰 상업 도시인 니푸르와 연결되어 상업 활동에도 종사할 수 있었다.
주전 5세기 니푸르의 상황을 알려주는 상업 활동 문서인 무라슈 토판에는 여러 명의 유대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야후나탄, 토비야유, 바나야유, 자바디야유) 유대인들이 상업 활동에 적극 개입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이러한 활동에 종사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이 포로로 구금되어 있지 아니하고 소수 민족의 일원으로서 상당한 자치권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겔33:30-33). 그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렘29:5), 노비도 있었으며(스2:65), 그들 중에는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다(스1:6;2:68-69). 다른 민족들과 동일하게 행정직에도 오를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소수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촌락을 형성할 수 있었고 그들의 공동체에는 지도자들도 있었다.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간 유다 왕들은 여호야긴과 시드기야인데 바벨론 디아스포라의 지도자로 인정받은 왕은 여호야긴이었으며 바벨론 디아스포라들은 여호야긴의 연호를 사용했다(겔1:2;33:21;40:1). 벧세메스, 텔 베트미르심, 라맛라헬 등 유다 지역 여러 곳에서 "야유킨의 청지기 엘리아킴의 것"이란 인장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여호야긴(야유킨)의 왕실 소유지가 여호야긴이 바벨론으로 잡혀간 뒤에도 그대로 여호야긴의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호야긴은 포로된 지 37년 만에(561) 아멜 마르둑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 났으며 "유다 왕"이란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고 "그위가 바벨론에 저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위보다 높았다"(왕하25:28). 또한 그의 다섯 아들들도 왕실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바벨론 디아스포라들에게는 그들의 촌락을 지도하는 "유다/이스라엘의 장로들"(겔8:1;14:1;20:1,3)이 있었으며 예언자들이 있었다(에스겔, 제2이사야). 자치권을 누린 그들은 팔레스틴에서 지켜왔던 풍습, 가족제도, 지도체제, 종교 등을 계속 지킬 수 있었으며 박해나 외부적 탄압을 받은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2) 디아스포라의 종교
바벨론의 디아스포라는 정결의식 및 안식일과 할례를 준수했으며 기도를 강조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버린 일과 그달리야가 살해된 것(슥7:3-5), 그리고 예루살렘 함락 사건을 회상하며(슥8:18) 애도와 탄원의 절기를 지켰다. 그들 가운데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느디딤들이 있었고, 성전 기물이 있었다. 많은 학자들이 바벨론의 디아스포라에게는 성전이 없었으며 희생제사 의식도 없었다고 주장해 왔으나 과연 그들이 외부적 박해가 없었는데도 갑자기 희생제사 의식을 중단했겠냐는 의문과, 그들이 팔레스틴으로 귀환할 때 가져온 성전 기물들이 어디서 보관되고 만들어졌으며, 성전에서 일하는 인원들이 어디서 양성되었는지 하는 의문들은 바벨론에서 야웨 성전이 있었어야만 해결되는 의문이다. 바벨론에 야웨 성전과 희생 제사 의식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근거에서 이야기 할 수 있다.
(1) 바벨론이 야웨 성전 건축과 희생제사 의식을 금지시키고 야웨 종교를 탄압했다는 흔적이 없으며 다른 소수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그들의 종교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귀환한 디아스포라가 회당 형식의 종교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희생제사 의식을 더욱 철저히 강조했으며 종교 형식이 변화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2) 신명기 법에도(신12장) 팔레스틴 외부에서 성전 건립과 제사 드림을 금지시킨 항목이 없으며, 실제로 이집트 디아스포라는 엘레판틴에 야웨 성전을 지었고 희생제사를 드렸다. 뿐만 아니라 요단 동편에 제단이 있었으며(수22:13-34), 주전 2세기에는 토비아드 가문의 히르카누스가 아락엘에미르에 성전을 지었다.
(3)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등장으로 귀환된 많은 양의 성전 기물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한 것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적은 양에 불과했고 대부분 바벨론에서 사용되었거나 만들어진 것이므로 성전 기물들이 보관, 사용, 제작된 장소는 야웨 성전이었을 것이다.
(4) 제사장과 레위인 및 느디딤들이 바벨론에서 활동했고 또 페르시아의 등장으로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벌써 2-3세대가 지난 후 귀환했는데 그들이 어디서 활동했고 교육받아 양성되었는가?
(5) 바벨론의 야웨 성전으로 여겨지는 부분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① 에스겔에게 들려진 "야웨의 말씀" 가운데 "그들이 이르른 땅의 작은 성소를 위하여 내가 그들과 함께 머무르리라"(겔11:16b)는 부분이 있다. "(작은)성소"라는 단어는 회당으로 쓰여진 적이 없으며 에스겔 11:16b에서는 이 구절이 야웨 성전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② 구약에서 ࠎࠅࠗन(마콤)이란 히브리 단어는 "장소" 혹은 "성소"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에스라 8:17에 사용된 이 단어는 제사장들과 느디딤들이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일반적 의미의 "장소"라기 보다는 성전 혹은 성소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따라서 바벨론 땅 카스피아에 야웨 성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③ 스가랴의 환상(슥5:5-11) 가운데 시날 땅에 에바를 옮겨 성전을 짓는다는 대목이 있다. 아마도 스가랴가 혼합 종교의 색채를 띤 유대 성전을 건립하려는 디아스포라의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해 반대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근거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벨론에 야웨 성전과 희생제사가 없었다는 주장은 그것들이 있었다는 주장보다 더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다는 것과, 바벨론에 야웨 성전이 없었다는 주장에 근거한 구약학의 일반적인 흐름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C. 이집트의 포로들
이집트 디아스포라의 상황은 엘레판틴 파피리가 발견됨으로써 명확히 알 수 있지만 주전 6세기 이전에도 이집트에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집트는 팔레스틴과 거리가 가까울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출현하기 이전부터 팔레스틴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국제무역을 통해서나 군사적인 교류 및 용병 등으로 수시로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왕래했고 일부는 이집트에 머물러 살기도 했다.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는 이집트와 바드로스와 에디오피아에 있었던 유대인들을 언급했고(사11:11), 히스기야 시대에 있었던 디아스포라와 유대인들의 종교 활동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사19:19-22). 이집트에 있었던 디아스포라에게는 야웨 희생제사를 드릴 제단이 있었으며 앗수르-이집트의 우호관계의 배경으로 이러한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증가했고 이들은 유대와 이집트간의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교류를 담당했다. 예루살렘 파괴 직후에 예레미야가 "이집트 땅에 거하는 모든 유대인들 곧 믹돌과 놉(멤피스)과 바드로스에 거하는 자들"(렘44:1)에게 예언한 적도 있었다. 믹돌과 다바네스와 놉은 이집트 하부에 위치해 있었으며, 국경 요새지였다(렘46:14). 바드로스는 이집트 상부에 있는 도시였으며 엘레판틴 섬과 같이 이집트 상부에 있는 요새지였다. 이집트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환영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이집트의 용병으로 활약해 주었고 그들이 국경 도시에 정착해 살았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함락과 그달리야의 살해 사건으로 바벨론 디아스포라도 증가했지만 이집트 디아스포라도 증가했고, 예레미야 역시 이집트 디아스포라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집트 디아스포라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예레미야서(렘43-44;46)을 제외하고 엘레판틴 파피리에서 알 수 있다.
여기에 따르면 ① 엘레판틴 공동체는 국경 요새지였다. ② 이집트인들과 결혼을 했다. ③ 어떤 유대인들은 높은 지위에 까지 오를 수 있었고, 재산을 축적하기도 했다. ④ 이 공동체는 제한된 자율성과 그들의 선조들의 관습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여자가 이혼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등이다. ⑤ 적어도 많은 유대 전통적인 절기들을 알고 있었다. 즉 안식일 준수, 유월절, 무교절등. ⑥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것과 유사한 성전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기서 조상들의 신 야웨를 섬겼으며, 희생제사를 드렸다. ⑦ 엘레판틴의 유대인들은 혼합 종교의 양상을 띤다. 서약이나 축복 그리고 시리아-팔레스틴의 신들을 섬겼다.
XIV.페르시아 시대
인도 유럽족인 페르시안인들은 고레스 2세(559-530)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북동쪽에 위치한 안산(Anshan)의 왕으로 등극(559)하면서부터 급속히 그 세력을 펼쳐나갔다. 현재 이란 동부 지역에서 시작된 페르시아는 바벨론의 몰락(539)과 더불어 중동 지역을 제패하여 중동 역사상 가장 큰 제국으로 발전했으며 알렉산더가 두로를 점령하기까지(332) 2세기 동안 중동 지역을 통치했다. 페르시아는 동쪽으로 인도와 접경하고 서쪽으로는 소아시아 반도를 지나서 헬라 지역까지 진출했으며 북으로는 카스피아 해의 동부 지역까지 그리고 남쪽은 이집트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영토를 이루었다.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강 건너편" 지역에 속하는 유다에는 바벨론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귀환했고, 성전이 재건되었으며 예루살렘 성벽도 다시 건설되었다.
이 시기의 기본적인 유대 자료로는 에스라, 느헤미야가 있으며, 예언서로는 학개와 스가랴(슥1-8), 제1 에스드라서와 요세푸스의 {고대사}(?)가 있다. 에스라 1장은 고레스 왕이 유대인들이 귀환해서 성전을 짓도록 허가했다는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스1:1-4;비교.6:1-5). 그리고 느브갓네살이 가져갔던 성전 기물들을 세스바알에게 주어 다시 가져가도록 했다(스1:5-11). 귀환자들의 명단이 나온 후에(스2;느7:6-73), 귀환 이야기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이 지도한 성전 재건에 촛점이 맞취진다(스3:1-4:5;5:13-16). 반대자들에도 불구하고(4:6-24) 결국 성전을 다시 재건한다(6:1-22). 그리고 에스라, 느헤미야의 이야기가 나온다(스7-10, 느7:73b-10:39, 1:1-7:73a; 11-13). 제1에스드라서는 역대하 35-36장과 에스라, 느헤미야7:38-8:12을 헬라어로 요약한 책이다.
A. 고레스의 등장과 페르시아
느브갓네살이 죽자 바벨론의 세력은 급속도로 기울었다. 국내 정세가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7년 동안에 왕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느부갓네살의 아들 아멜 마르둑, 곧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풀어 준 에윌 마르둑(왕하25:27-30)은 재위 2년 만에 그의 매부인 네르갈 사르 우술에게 무력으로 왕위를 탈취당하였다. 아마 후자는 예레미야 39:3, 13에 바벨론의 군관으로 나오는 네르갈사레셀인 듯하다. 네리글리살(560-556)은 정력적으로 활동했지만 4년만에 죽고 미성년자 아들인 라바시 마르둑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라바시 마르둑은 하란 출신의 아람계 귀족 가문의 자손인 나부나이드(나보니두스)에 의해 곧 제거되었고, 후자가 스스로 왕권을 장악하였다.
나보니두스(556-539)의 통치는 바벨론에 커다란 알력을 가져왔다. 특히 월신(月神) 신(Sin) 종교르 우대하여 상대적으로 천대받은 마르둑 제사장들은 나부니두스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나보니두스가 수도에 10년 동안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10년 동안 마르둑 중심의 신년 축제를 거행하지 못했다. 따라서 마르둑 제사장들의 불만은 수 년 간 쌓인 뿌리깊은 불만으로 굳어 있었다. 국제 무역로가 막히고 경제가 쇠퇴해졌으므로 상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백성들도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 때 바벨론으로서는 대처해 나갈 수 없었던 새로운 외부의 위협이 증대하였다. 바로 페르시아의 고레스의 등장이었다. 이 사람은 남부 이란에 있는 안산의 봉신 군주오서 메대 왕 들과 혈연 관계가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고레스는 메대 왕국을 정복한 다음 바벨론을 공겨하기 보다 서쪽에 있는 리디아를 공격했는데 이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미리 협상을 한 후 리디아 왕 크뢰수스(Croesus)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고레스는 리디아를 포함하여 소아시아 전역과 키프러스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인도와의 접경 지역까지 평정한 뒤 비로소 바벨론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 바벨론은 페르시아의 상대가 될 수 없을 만큼 약화되어 있었다. 70세가 넘은 나보니두스는 540년경에 수도로 돌아와 수도를 방어하려 노력했지만 싸움도 해 보지 못하고 수도를 고레스에게 내주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고레스는 아라비아와 지중해 연안을 포함한 바벨론 제국을 차지하여 명실공히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B. 유대인들에 대한 고레스의 정책
고레스는 이제부터 거대한 국가의 지배자였다. 그는 그 자신이 지체 없이 실현하기 시작하였던, 확실한 정치적인 계획들을 가지고 있었다. 앗수르와 바빌론의 정치수단은 격하와 파괴 뿐이었다. 거기에는 약소한 상태에 있던 폴괄적인 여러 계층들의 포로민들이 속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고레스는 굴복당한 이방민족들의 운명이 행복할수록 그들의 운명은 더 만족을 느낀다는 관점에서 억압보다는 회유를 통해 이방민족들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레스는 관대하며 자비로운 왕으로 알려졌다. 즉 바벨론에 억류되어 있던 소수 민족들을 고국으로 귀환시킨 해방자로 알려져있다. 제 2 이사야(사40-55)에서는 고레스가 극구 칭찬을 받고 있는데 고레스가 "나(야웨)의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야)"(사45:1), "나(야웨)의 목자"(사44:28) 등의 칭호로 불리고 있다. 제 2 이사야의 메시지는 바벨론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희망의 기쁜 소식이 되었을 것이고 페르시아인들에게는 고레스가 야웨에 의해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고레스는 바벨론에서 그의 재위 제 1 년에 팔레스틴에서의 유대인 공동체 및 제의의 재건을 명하는 포고령을 공포하였다. 성경은 이에 관한 두 가지 보도를 제공해 준다:에스라1:2-4과 6:3-5. 그것은 고레스가 성전의 재건을 명령하였을 뿐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귀환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벨론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기부금을 통해 이 사업을 돕도록 촉구하였다. 또한 역대기 사가는 느부갓네살이 빼앗아간 성전의 기물들이 돌아온 것도 보도하면서(스1:7-11), 이 업무가 "유다의 군주"인 세스바살에게 맡겨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유대인의 귀환과 관련된 상황을 검토해 보면 첫째, 고레스가 유대인들을 위하여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기보다 고레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치적 이미지를 선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유대인들을 귀환시켰고, 제의 기구들을 돌려 보내었으며 다른 소수 민족들도 그러한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둘째, 모든 소수 민족들이 "고레스의 자비"를 받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같은 특정한 민족들만 그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을 귀환시키는 것이 고레스의 통치에 필요했고, 이집트와 경계하고 있는 국경 방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다에 인구가 불어나고, 유다의 자치 능력을 향상시켜 주고, 그들의 종교를 존중해 줌으로 인해 유다는 친페르시아적인 완충지역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 구레스는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 제고와 통치 방편으로 유대인들을 귀환시키고 성전을 재건하라는 칙령(538)을 내렸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이 칙령이 해방의 소식이었고 야웨 승리의 소식으로 받아들여졌다.
C. 유대인의 귀환
바벨론이 쇠퇴해갈 무렵 바벨론 내부에 있던 불만 세력 가운데 하나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였다. 강제로 바벨론에 이끌려온 다른 소수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쇠퇴와 페르시아의 상승을 희망적인 기회로 여겼다. 제 2 이사야는 고레스를 "야웨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사 45:1)로 불렀으며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고레스를 환영했다. 기대했던 대로 고레스는 유대인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의 귀환을 허락했는데 이 귀환 허락은 선별적이었으며 페르시아의 정책에 부합하는 범위에서 부분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새로운 왕조의 이데올로기를 수립하는 데 부합하는 조치로 소수민족의 이익보다는 페르시아의 이익 때문에 시행된 것이었다.
에스라 6:1-5과 1:2-4에는 538년 고레스가 내렸던 칙령이라 여겨지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아람어(스 6:1-5)와 히브리어(스 1:2-4)로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 6:1-5에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성전 기물의 반환에 대해 고레스가 물자지원과 설계까지 언급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한편 이 칙령 후에 나온 것으로 짐작되는 에스라 1:2-4에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필요한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하는 것과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격려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들 자료에서 드러난 사실은 광범위한 유대인 귀환보다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 강조되어 있다는 것이다. 소수 민족을 자기들의 고국으로 귀환시키는 것은 고레스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기여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을 고레스가 지어 준다는 것은 고레스가 유다 왕실을 어떤 형태로든 장악하여 유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이집트에서 캄비세스가 이집트의 왕실을 계승했던 것처럼 고레스도 유다의 왕실 신전을 재건하는 데 주력하여 유다를 장악하고 유다로 하여금 이집트와의 국경 지역의 완충 역할을 담당케 하려는 의도로 유다를 도왔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규모와 시기는 분명치 않다. 에스라 2장과 느헤미야 7장에 귀환 명단이 나와 있는데 그 규모는 약 5만명이고(스 2:64-67), 그 명단 가운데는 스룹바벨, 예수아, 느헤미야 등 후기에 귀환한 인물들까지 들어 있다. 따라서 이 귀환 명단은 후대에 작성된 것으로 시대별로 귀환 규모를 알 수는 없다. 고레스 통치 초기에 귀환한 규모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후기에 각각 귀환한 것으로 보아 귀환은 일시적 대규모 귀환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여러 시기로 나누어져서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레스의 칙령과 대규모 귀환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이미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하여 생활 근거를 마련한 반면 팔레스틴에 귀환할 경우 생활 기반을 새로 개척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② 적어도 2-3세대가 지나는 동안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새로운 세대는 메소포타미아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귀환해야 할 절실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부분적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야웨 종교에 투철했던 사람들이거나, 페르시아 정책에 편승하여 보다 나은 장래가 보장되는 사람들이었으며, 때로는 페르시아의 상황이 좋지 않아 팔레스틴으로 피난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해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수축을 위해 페르시아에서 사람들을 파견할 때, 캄비세스의 이집트 원정시(525), 왕위 계승 문제로 쿠데타롸 내전이 일어난 위기 상황이었을 때 유대인 디아스포라 중 상당수가 팔레스틴으로 귀환하여 정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D. 유다의 상황과 성전 재건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예루살렘 함락(586) 후 팔레스틴의 상황은 공백기나 암흑기가 아니라 다소 위축된 상태로 전개되어 갔다. 아마도 그달리야 왕 이후 미스바가 계속 정치 중심지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 바벨론이 임명한 통치자가 다스렸으며, 일상적인 경제 생활 및 종교 의식은 방해받지 않고 진행되어 갔음이 분명하다. 페르시아가 중동의 패권을 잡았으므로 유다도 자연스레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이 때 세스바살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스 5:14). 그런데 세스바살은 바벨론 이름으로, 아마도 고레스가 등장했을 당시 유다를 다스렸던 바벨론의 유다 통치자로서 고레스가 세스바살을 그대로 인정하여 총독으로 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레스가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해 칙령을 발표하고 실질적인 지원을 했으나(538년, 스 6:1-5), 성전은 다리우스 1 세 때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515). 에스라 1-6장은 성전 재건에 관한 세 가지 다른 전승들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첫째 전승은(스 1장; 5:6-17) 세스바살이 고레스의 명령을 받아 성전 재건을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 줄곧 임무를 수행했다. 둘째 전승(스 3장; 6:19-22)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성전을 재건했다. 셋째 전승(스 5:1-5, 6:1-18, 학개, 스가랴)은 학개, 스가랴 등의 예언자들과 협조하여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성전을 재건했다.
이 전승들과 다른 자료들을 종합하여 성전 재건에 관한 역사를 재구성한다면 다음과 같다. 고레스가 임명한 유다 총독 세스바살은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성전 재건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 후 어떤 영문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유다 총독의 자리는 스룹바벨에게 승계되었고 다리우스 왕 시대에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주도하에 새로운 진척을 보였다(스 3장; 5:1-5; 6:1-22; 학개, 스가랴).
그런데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성향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모호한 점이 많다. 스룹바벨은 역대기(대상 3:17-24)에서 다윗 가문의 후손이라는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다윗의 후손은 아닌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귀환한 사람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확실한 것은 그가 다리우스 왕(522-486) 이전에 이미 유다 총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스 3:7; 4:3-5).
스룹바벨과 함께 성전을 재선한 여호수아가 귀환한 인물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여러자료를 종합하여 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역대기사가(대상 6:1-15)는 여호수아가 아론의 24대손(솔로몬 성전 전 12대, 그후 12대)으로 24대 대제사장임을 족보를 통해 밝히면서, 여호수아가 거슬러 올라가면 사독의 자손이요, 포로로 잡혀간 여호사닥의 아들로서 귀환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족보는 포로전 사닥의 아들로서 귀환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족보는 포로전 제의(cult)와 포로 후 제의를 연결시키려는 역대기 사가의 신학적 의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더구나 아론 계열과 사독 계열은 별개의 계열인데 이 족보에서 하나의 계열로 나타난 것은 "하나의 제사장 계열"을 강조하는 역대기 사가의 신학적 의도 때문이었다. 이 부분 외에는 여호수아가 예루살렘 제사장 가문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 또한 포로 후기 유다의 상황을 보면 귀환한 집단과 팔레스틴에 남아 있었던 집단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귀환한 자들은 남아 있었던 사람들 보다 더 순수하고 신명기적 야웨 신앙에 더 철저한 사람들임을 강조했는데, 이상한 것은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귀환한 자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슥 3:3-4).
귀환한 자들의 눈으로 볼 때 여호수아가 정결하지 못한 인물이라면 그것은 여호수아가 귀환한 사람이 아니라 팔레스틴에 남아 있었던 인물임을 말해 준다. 여호수아가 팔레스틴에 남아 있었던 인물이라면 그는 사독 계열이 아니라 아론 계열 혹은 레위 계열에 속한 제사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포로 후기 유다 사회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제사장 계열은 아론 계열이었으며, 이 계열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연결되어 있음을 볼 때 여호수아가 아론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사독 계열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제사장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팔레스틴의 종교 중심지는 예루살렘에서 미스바로 옮겨졌고, 미스바는 벧엘 부근으로 아론 계열의 영향이 큰 지역이었다. 따라서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는 아론 계열의 영향이 큰 지역이었다. 따라서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는 아론 계열 제사장으로 포로 시기에 팔레스틴의 종교 지도자였으며, 페르시아 시대가 시작되고 귀환한 사람들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었을 때 그들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결국 그들과 더불어 성전 재건을 이룩한 제사장이었다.
고레스의 칙령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성전 재건은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지지 부진했다. 귀환한 사람들과 페르시아의 지원으로 시작된 성전 재건은 팔레스틴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과 불화를 일으켰으므로 건축이 지연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캄비세스가 죽고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 때문에 유다에서도 그 영향으로 예언 활동이 활발해졌고(학개, 스가랴) 예언자들은 야웨 종교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성전 재건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예언자들은 총독인 스룹바벨을 새로운 야웨 공동체의 정치적 지도자로 부각시켰는대 "기름부음을 받은 자"(슥 4:14), "순(筍)"(슥 6:12-13) 등 정치적 메시야의 이미지를 사용하여(학 2:2-9, 20-23) 그를 높이 세웠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여호수아를 종교 지도자로 높이 세우고 스룹바벨과 평화를 이루어 성전 재건에 힘을 하나로 모으도록 노력했다(슥 6;12-13).
예언자들의 열정적인 활동과 유대인들의 뜨거운 메시야 사상에 대해서 "강 건너편" 지역의 지방장관 닷드네(Tattenai)는 반란을 도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표명했다(스5:3-6). 그러나 다리우스는 유대인들의 성전 건축을 옹호해 주었으며 성전 재건은 몇 년 후 완성을 보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이 519년 2월(슥 4장) 이후에는 전혀 없으며, 물론 성전 준공때(515, 스 6:15)에도 나타나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스룹바벨이 사라짐으로써 유다의 지도자는 여호수아만 남았으며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유대의 종교 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지도력을 행사했다.
E. 에스라와 느헤미야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 그들이 예루살렘에 왔으며 누가 먼저 왔느냐 하는 연대에 관한 것이다. 성서에 의하면 에스라가 느헤미야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왔다고 되어 있다. ①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제 7 년 5월 1일에 예루살렘에 왔다(스 7:7-8). ②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제 20 년 니산월에 예루살렘에 왔다(느 2:1). 만약 아닥사스다 2 세(405/4-359/8)가 그 왕이라면 에스라는 398녀에 그리고 느헤미야는 384년에 예루살렘에 온 것이다. 그러나 아닥사스다 3 세가 그 왕이라면(359-338/7) 에스라의 연대는 별 문제없지만 느헤미야의 연대(352/1)로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느헤미야의 연대 중에는 아닥사스다 제 32 년(스 5:14)이라는 숫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인물은 느헤미야인데 에스라가 왔을 때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며(스 9:9) 성 안에는 이미 인구가 증가한 상태였다. 둘째, 느헤미야 당시의 대제사장은 엘리아십(느 3:1, 20; 13:4)이었으며, 에스라 당시의 대제사장은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야난(스 10:6)이었다. 그리고 여호야난은 엘레판틴 파피루스에 나타나는 예루살렘 대제사장인데 이 파피루스 편지는 407년 유다 총독 바고아스에게 보낸 편지였다. 이 편지의 내용은 무너진 엘레판틴의 야웨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편지였다. 셋째, 편집자의 부분을 제거하면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동시에 나타나 활동한 사실을 찾을 수 없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각각 개별적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에스라는 제 2 의 출애굽을 주도한 인물이며 포로 후기 유대의 위상을 재건한 인물이고 성서의 마지막 편집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넷째, 느헤미야의 인구 조사 통계에는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사람들이 들어 있으나 에스라와 함께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은 들어 있지 않다(참조 느 7:5-73; 스 8:1-14).
1)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궁정에서 왕과 가까이할 수 있는 높은 위치에 있었다. LXX에서는 "내가 잔을 책임지고 있었을 때에"라고 되어 있어 느헤미야가 왕의 "잔 맡은 관원"임을 알려 주고 있으나 MT에서는 "술이 그의 앞에 있었을 때에"라고 되어 있어 "잔 맡은 관원"임을 명시하지 않았다. 또한 느헤미야가 수사에서 유대인을 만나 유대의 비참한 상황을 전해 들은 때는 키슬레브달(11/12월 겨울)이었으나(느 1:1) 왕을 만나 느헤미야의 심경을 밝힌 것은 4개월 후인 니산달(3/4월, 봄)이었다(느 2:1-2). 왕의 "잔 맡은 관원"이었으면 이렇게 오랫동안 왕이 느헤미야의 수심어린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느헤미야는 왕의 "잔 맡은 관원"이라기 보다는 왕의 측근에 있었고 또 왕의 신임을 받은 고관이었을 것이다. 느헤미야가 황폐해진 예루살렘의 상황을 왕에게 전달하자 왕은 느헤미야를 왕의 특사로 파견하여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공식적인 유다 총독은 아니었다. 아마도 나중에 총독으로 임명 받은 것으로 보인다(느 5;14).
아닥사스다 1세가 445년 느헤미야를 특사로 예루살렘에 파견한 이유는 왕이 느헤미야를 총해한 데도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적인 데에 있었다. 아닥사스다 1세(465-424)가 왕권을 쟁취하고 즉위하는 혼란을 틈타 이집트의 이나로스(Inaros)는 반란을 일으켰는데(465) 아테네가 협조했다. 힘겹게 이집트를 진압하고 나니(455) 이제는 "강 건너편" 지방장관 메가비주스가 반란을 일으켰다(449/8). 이 반란도 곧 해결되었지만 페르시아 왕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집트와의 국경은 언제나 불안한 지역일 뿐이었다. 왕의 심복인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려 했을 때 왕은 이집트 국경을 튼튼히 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겨 반가워했을 것이고 느헤미야는 왕으로부터 파격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다를 포함한 "강 건너편" 지역을 총괄하는 지방장관은 왕의 특사로 나타난 느헤미야의 출현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달가와하지 않은 또 다른 사람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호론 사람 산발렛, 암몬인 도비야, 아랍인 게셈, 아스돗 백성 등이었으며(느 2;10, 19; 4:7), 이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위협받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었다. 그들은 느헤미야가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고 페르시아 왕에게 고발하기도 하면서 느헤미야의 일을 방해했다(느 6:1-9).
왕의 조서를 휴대한 느헤미야는(느 2:7-9) 페르시아의 군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여러 가지 방해가 그를 가로막았는데도 느헤미야는 과감하고 신속하게 일을 진행했다. 성벽 재건은 52일 만에 끝났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만(느 6:15), 요세푸스는 2년 4개월 동안 걸렸다고 했다. 성전 재건을 위한 사전 조사, 설계, 목재 및 석재의 운반, 축성 과정, 반대파들의 방해를 가정한다면 52일은 너무나 짧은 기간으로 여겨지지만 예상보다 신속히 성벽이 재건된 것은 분명했다. 반대파들의 방해를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군사적 경계를 강화하고 한편으로는 성벽 재건을 독려했는데 장시간 노동을 했고("동틀 때부터 별이 나기까지" 느 4:21) 페르시아 군대의 역할도 컸을 것이 분명하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혁신적인 일을 시도했다. 첫째, 고리대금으로 치부하여 힘 없고 가난한 백성들을 억합하는 귀족들과 관리들을 불러 그 일을 중단하게 하고 이자라는 명목으로 긁어 모은 것을 되돌렬 주도록 했다(느 5:1-13). 양식이 부족하여 집과 밭과 포도원 등을 저당잡힌 가난한 백성들이 이자와 원금을 상환하지 못하여 아들과 딸들을 노예로 빼앗기는 현상까지 생겼으며 동족인 유대인 손을 통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팔려가는 비참한 일이 일어난 것을 보고 느헤미야가 일대 개혁을 단행한 것이었다. 둘째, 총독인 느헤미야가 치부하지 않고 검소하게 생활함으로써 백성의 세금 부담을 줄였다(느 5:14-18). 총독이 "땅을 사지 아니하였다"(느 5:16)는 말은 총독이 권력으로 자기의 토지를 늘려 재물을 쌓지 않았고 백성들의 기본 재산을 존중해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외국인들을 성전에서 추방했는데 암몬이 도비야를 추방했다(느 13:4-9). 그 당시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임명한 것을 보면 느헤미야는 제사장들보다 훨씬 신명기적이며(신 23:3-6), 엄격한 야웨 신앙을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방 여인과의 혼인을 금지했는데(느 13:23-28) 이방여인과 혼인함으로써 유대의 언어를 잊어버린 것에 대해 느헤미야는 분노했다. "내가 책망하고 저주하며 두어 사람을 때리고 머리털을 뽑고..."(느 13:25) 느헤미야의 강직하고 독재적인 일면을 볼 수 있다. 넷째, 투철한 야웨 신앙을 갖고 있는 레위인들이 성전에서 소외당하고 수입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성전을 떠나는 모습을 보고 느헤미야는 그들을 다시 불러 성전의 직책을 다시 맡기고 성전을 돌보도록 했다(느 13:10-14). 다섯째, 안식일을 지키도록 했다. 안식일에 일하면서 장사하는 행위를 금하고 레위인들로 하여금 성문을 지키게 하여 안식일을 준수하도록 했다(느 13:15-22). 엄격한 야웨 신앙으로 무장하고 페르시아 군대를 대동한 느헤미야는 포로 후기 유대 사회를 정비하고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기틀을 바로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일면 무리한 돌진으로 저항을 받기도 했다.
2) 에스라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서기관이며 제사장인 에스라"(스 7:12)는 398/7년 아닥사스다 2세의 명령을 받아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왕의 특사였지만 에스라는 페르시아 군대도 대동하지 않았고, 주로 종교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의 국제 정세는, 페르시아가 기울어져 가고 있었으며, 몇 년 전 이집트가 반란을 일으켰으나(401) 진압할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집트가 팔레스틴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독립을 쟁취한 이집트의 물결은 팔레스틴과 지중해 연안으로 밀려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에스라를 유대로 보낸 페르시아 왕의 의도는 유다의 내부를 재정비하되 친페르시아적인 질서를 정착시키려는 것이었다. 에스라가 페르시아의 고관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 관직은 알 수 없고 유다에서의 위치도 모호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다 총독은 바고아스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에스라는 왕의 특사 자격으로 바고아스와 협력하여 자신의 한정된 임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스라가 받은 페르시아 왕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스 7:11-26).
①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인 중에 누구든지 에스라와 함께 귀환할 수 있다(5,000명 귀환, 스 8:1-14).
② 에스라가 들고 있는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상황을 살피라. 그리고 그 율법을 따라 관리와 재판관들을 임명하여 그 율법을 가르치라.
③ 왕과 그 각료들이 준 금 은과 디아스포라가 낸 예물 및 성전 기물들을 가져가서 제사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용하라.
④ "강 건너편" 지방장관의 재무 담당자는 에스라를 적극 지원하며 제사장, 레위인, 성가대원, 문지기, 느디딤 등 하나님의 전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면세 혜택을 주라.
에스라의 활동을 이해하려면 에스라가 들고 온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스 7:12,21)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하늘의 하나님"이란 용어는 페르시아 정부의 외교적 언어로 보이며 열왕기 상 8:27에 나타나는 용어이다. 그것은 오경도 아니었으며, 오경의 초본도 아니었다. 에스라가 들고 온 율법은 유대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었으며(느 8:1), 그들은 그 율법을 듣고 울었다(느 8:9-10). 그리고 그 율법에 따라 장막절을 지켰는데 이러한 절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행하지 않은"(느 8:17) 절기였으며 레위인들이 이들을 가르치며 도왔다. 아마도 이 율법은 그 후 오경에 부분적으로 합류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방 여인과 혼인하여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민족과 서로 섞이게 하는"(스 9:2) 행위에 대해 에스라는 느헤미야보다 훨씬 더 엄격한 제재를 가했다. 느헤미야는 더이상 이방 여인과 혼인하지 말도록 했지만 에스라는 이미 혼인한 부부를 이혼시키고 그 자녀들을 내보내도록 했다(스 10:3). 에스라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스 10:5) 이방 여인과 그 자녀들을 내보내기로 서약하게 하고 에스라가 위임한 사람들로 하여금 이방 여인과 혼인한 가정들을 3개월에 걸쳐 조사하게 했다(스 10:18-43). 그러나 에스라의 계획이 어떻게 시행되었는지 그 결과에 대한 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마지막에 "이 모든 사람들은 이방 여인들을 취하였고 그들의 아내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자녀들을 두었다"(스 10:44)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아마도 에스라의 엄격한 조치는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활동도 더 이상 알려진 바가 없다.
맺는말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다. 나에게는 소중한 것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관계없이 생각되는 기억도 많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함께 찾아보는 여행을 한 것도 그들의,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였다. 수천년에 걸친 한 나라의 역사를 짧은 지면에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이번 소고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문제점이 되는 것만을 살펴보았다.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객관적인 자료나 물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신앙고백에 근거한 성서 속의 역사이므로 우리는 성서 속의 기사 속에서 윤색되지 않은 기사를 찾아야만 했으며, 고대 근동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했다.
실로 주전 4000년 경부터 꽃을 피워온 근동의 문화에 비하면 이스라엘의 역사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이 가지고 있었던 야웨 신앙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역사에 대한 기나긴 전승과 유래를 가지게 하였으며, 생명력을 갖게 해주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나 그 지나간 것 속에서 누구나 그냥 스치고 말 진리가 있으며 그 진리는 그것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만 열려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나 그 지나간 것 속에서 누구나 그냥 스치고 말 진리가 있으며 그 진리는 그것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만 열려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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