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성경배경사

유대전쟁과 예루살렘의 멸망

은바리라이프 2012. 2. 17. 18:54

  유대전쟁과 예루살렘의 멸망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 멸망 예언과 성취


유대인들의 1차 반란 후 예수님의 예언(눅 19 : 41-44, 21 : 6, 20 : 24)대로 예루살렘은 타이터스(Titus)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누가복음 21:5-6, 20, 23-24)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지 한 세대도 되지 않아 이 땅에서 말살되었다. 예수님을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예루살렘은 세계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한 지옥(AD 66-70년 사이에 있었던 ‘유대전쟁’)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로마 행정장관의 독재 정치로 말미암아 로마제국과 로마인들에 대한 유대인의 항거가 점점 증대하여 갔다.

 

 유대교의 광신자들과 과격한 애국자들 및 저항자들은 단결하여 외세를 몰아내자고 끊임없이 외쳤다. 저들은 각자 품속에 단도를 품고 다녔다. 저들의 과격한 폭력 행위는 나라 안의 평화와 질서를 깨뜨렸다. 이 팽팽하게 고조되던 항거는 주후 66년 5월에 행정장관 플로루스가 성전 금고에서 17달란트를 요구했을 때 격노와 폭동으로 변하였다. 로마 수비대가 공략 당하였으며 예루살렘은 반란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저들은 매일 황제에게 올려지던 제물 헌납을 금지하였다. 이것은 로마 제국에 대한 공개적인 선전포고를 의미하였다. 왜소한 예루살렘이 대 로마 제국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전 국민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반란과 폭동이 도처에서 발생하였다.

 

플로루스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태에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다. 시리아 지방 총독 C. 세스티아스 갈루스가 플로루스를 구출하기 위하여 1개 군단과 수많은 외인 보조 부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였지만 막대한 병력을 잃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 반도들은 전국을 장악하였다. 로마가 가까운 시일 내에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으로 확신한 유대인들은 서둘러 도성 방어를 강화하였다. 옛 방어 성벽을 수리하고 군 지휘관을 임명하였다. 


후에 사학가 요세푸스로 알려진 요셉은 갈릴리 지구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로마의 네로 황제는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안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베스파시안 장군은 영국을 정복할 때 혁혁한 무공을 세운 명장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는 가장 우수한 3개 군단과 수많은 외인부대를 이끌고 북쪽에서 갈릴리를 공격하였다. 이 원정에 그의 아들 타이터스(Titus)가 군단장으로 참전하였다. 


주후 67년 10월 경 갈릴리의 전 지역이 정복되었다. 수많은 포로들의 행렬 속에는 요세푸스도 눈에 띄었다. 그는 베스파시안의 명령으로 사슬에 묶인 채 본부로 이송되었다. 그 때부터 그는 적국의 병영 내에서 유대 전쟁을 목격하였다. 전시 중에 당분간 원정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네로가 자살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베스파시안이 로마의 황제가 되고 그의 후임으로 그의 아들 타이터스가 총사령관이 되어 유대 전쟁의 마지막 수행임무를 맡았다. 



2. 로마 타이터스(Titus)의 예루살렘 공격


주후 70년 봄 만월 직전에 타이터스는 어마어마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 성 밖에 나타났다. 유대의 도성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와 샛길에는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끝없는 행렬의 군사들과 각종 병거 및 포차가 이동하고 있었다. 저들의 병력은 거의 8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경축하기 위하여 원근 각지에서 모여든 순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유대교의 과격파들과 온건파들 간에 벌어진 싸움은 그들의 신앙심과 애국심을 더럽혔다. 


한편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 성 주위에 방대한 야영을 설치하였다. 항복하라는 외침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조소와 야유로 응답하였다. 타이터스는 마침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예루살렘 함락시에 사용한 로마인들의 공성망치, 이것은 양의 머리를 한 쇠망치였다. 성의 동, 남, 서쪽은 험준한 절벽이었으므로 로마군은 북쪽에서 공격하였다. 그러나 북쪽 역시 세 겹의 거대한 성으로 아주 견고하게 방어되어 있었다.

 

성 안에 커다란 돌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밤낮으로 공성 망치가 성문과 성벽을 강타하는 ‘쿵쿵’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밖이 시끄러울 때만 내분을 멈추던 두 파벌은 타협을 했다. 온건파의 지도자 시몬 바르 기오라는 북쪽의 방어를 맡았으며 과격파의 지도자 기스갈라의 요한은 성전 지역과 안토니아 탑의 방어를 맡았다. 5월 초순 경 2주일 만에 공성 병기는 가장 북쪽에 있는 성벽에 구멍을 뚫었다. 로마 군대는 또 닷새 만에 두 번째 성벽을 통과하였다. 유대 병사들은 반격하여 두 번째 성벽을 다시 탈환하였지만 로마 군대에 또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이로써 성의 북쪽 외곽지역은 완전히 로마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사태 하에서 예루살렘이 곧 항복할 것이라고 확신한 타이터스는 공격 중지를 명령하였다. 그는 포위당한 유대의 눈앞에서 로마의 위용을 보이면 그들의 마음이 변할 것이라 생각하여 나흘 동안 장엄하고 화려한 사열식을 거행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무적의 로마 군대의 행군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그러나 아무 소용 없었다. 성벽의 옥상과 지붕에서 이 광경을 내다보고 있던 유대인들은 로마 군인들에게 증오의 침을 뱉었다. 



3. 요세푸스의 항복 설득


타이터스는 저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마지막 한 가지 방책을 시도하였다. 그는 포로로 잡은 유대인 대장 요세푸스를 성곽 밑으로 보내어 저들에게 투항을 종용하는 연설을 하게 하였다. 성곽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요세푸스의 음성이 저들의 귀를 쟁쟁히 울렸다. 


“오, 마음이 완고한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무기를 버리십시오. 심연(深淵)의 끝에 서 있는 여러분의 나라를 불쌍하게 여기십시오.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배반하려고 하는 그 모든 주변의 아름다움을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 성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성전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건물이며 가옥입니까! 이 모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을 누가 감히 잿더미로 만들려 합니까? 여러분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기를 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먼 앞날을 바라볼 줄 아는 사려 깊고 슬기로운 유대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요세푸스는 비통한 말로 저들에게 과거의 위대한 공적과 저들의 선조들과 저들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사명을 상기시켜 주었지만 그의 권면과 호소는 아무런 주의도 끌지 못하였다. 제 2성벽에서부터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어둠이 깔리면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이 성벽 밑을 통하여, 혹은 성벽을 타고 로마 병영 부근에 모여들었다.

 

 

타이터스는 이 유령과 같은 사람들을 모두 처치하라고 명령하였다. 탈주자든 기습자든 약탈자들간에 성 밖을 배회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끌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였다. 외인부대는 바로 성 밖에서 매일 저들 중 500명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십자가와 공성 경사로와 사다리 및 모닥불로 사용될 나무를 충당하기 위하여 로마군대와 외인부대는 인근의 야산과 과수원의 올리브나무와 무화과나무들을 모두 베어서 저들의 병영으로 운반하였다. 한편 예루살렘 성 안에서는 더욱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감돌고 있었다. 굶주림으로 죽은 사람들과 전사한 사람들의 시체가 하루에도 수백 구 씩 성벽 밖으로 던져져 성곽 바로 밑 부분에 산처럼 쌓였으며 시체 부패로 인한 악취는 예루살렘 성 주변을 진동하였다. 저들 중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매장할 능력과 여유를 갖고 있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옛 유다와 유대 수도의 아름다운 교외를 보고 오늘날 이 참화를 목격하는 사람은 끔직한 변화에 눈물과 비탄을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은 그 모든 아름다운 것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이전에 이곳들을 보고 다시 느닷없이 어느 곳인가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요세푸스는 슬퍼하였다. 


4. 예루살렘성안의 기근과 죽음 

타이터스는 성을 완전히 밀폐하기 위하여 토성을 쌓으라고 명령하였다. 거대하고 높은 성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그동안 유대인들에게는 터널이나 도랑과 같은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군수품과 식량을 성 안으로 반입했을 가능성이 있었지만 토성의 축성은 이와 같은 최후의 빈약한 보급 방법마저 저지하였다. 기근이라는 유령이 성에 출현하였다. 어떤 종류의 음식이든 먹을 것에 대한 갈망은 저들에게서 정상적인 모든 감정을 빼앗아 갔으며 저들을 동물 이하의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요세푸스가 쓴 ‘유대인들의 전쟁사’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읽을 수 있다. “매일 무섭게 증가한 기근은 예루살렘의 전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테라스에는 굶어 죽은 여자들과 아이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골목에는 노인들의 처참한 주검들이 쌓여 있었다. 영양실조로 퉁퉁 부은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길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유령처럼 거리를 헤매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혈육의 시체를 보고도 눈물을 흘리거나 통곡할 줄 몰랐다. 또 한 가지 형용할 수 없는 비극이 있었다.

 

 

어디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이 나타나면 그것을 서로 자기가 먹으려고 싸움이 벌어졌다. 가장 친한 친구들이 가장 사소한 것을 서로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였다. 시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도둑과 강도로 돌변하였다. 저들은 금방 숨이 넘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달려들어 옷을 벗기고 그의 소지품을 약탈하였다. 저들은 마치 미친개처럼 정처 없이 거리를 쏘다니다가 주택에 침입하여 먹을 것을 강탈하였다. 사람들은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그리고 그 배고픔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입에 넣어 씹어야만 했다. 저들은 동물 가죽으로 만든 외투와 혁대와 신발을 뜯어 먹거나 끓여서 그 국물을 마시기도 하였다.

 

저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오래된 건초를 먹고 살았으며 곡식 줄기를 모아두었다가 그 일부 소량은 그리스 은화 네 닢을 받고 팔았다.”“내가 기근과 전쟁으로 인한 저들의 수치와 모욕을 이렇게 기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후대에 역사적인 교훈을 남겨주기 위함이다.”라고 밝힌 요세푸스는 기근이, 봉쇄된 시민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시작했을 때 발생했던 비인간적인 일들을 두려움 없이 기술하였다. “유대교 광신자들은 거리의 뒷골목에서 먹을 것을 약탈하고 있었다. 어느 한 집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 나왔다. 광신자들은 곧 그 집으로 몰려가 난폭하게 문을 두드렸다. 저들에게 문을 열어준 사람은 요단강 동편 지방의 벳에조보에서 살고 있는 매우 부유한 귀족의 딸 마리아였다. 이 여자는 유월절을 보내기 위하여 순례 차 예루살렘에 와 있다가 유대 전쟁과 기근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얽매인 몸이 된 것이다. 광신자들은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 불고기를 내놓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녀는 마녀와 같이 험악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불고기를 저들에게 건네주었다. 불고기를 본 순간 저들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 불고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반쯤 불에 굽힌 어린 아기였던 것이다.

 

 

아기는 마리아의 친 자식이었다.” 이 이야기는 곧 예루살렘 성 전역에 알려졌을 뿐 아니라 바람결을 타고 성벽을 넘어 로마군 병영에까지 전해졌다. 이와 같은 끔직한 사실이 다른 나라에나 로마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한 타이터스는 휘하의 전 병사들에게 일체의 함구령을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지 않으려고 야음을 이용하여 성을 탈출하였다. 저들은 도망 나올 때 대부분 금이나 보석 등 값진 물건을 휴대하였지만 그것을 로마 병사들이나 낯선 사람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목 안으로 삼켜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한편, 공성 망치는 주야로 예루살렘의 성벽 외곽을 강타하고 있었다. 타이터스는 몹시 서둘렀다. 그는 이 끔찍한 악몽을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싶었다. 7월 초순 그의 병사들은 안토니아 탑을 공격하였다. 드디어 그 성이 함락되었다. 안토니아 탑의 벽은 성전의 북쪽 성벽과 접해 있었다. 다음은 성전 차례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주 장엄하면서도 견고한 건축물이었다. 파괴시키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예술품이었다. 타이터스는 이 장엄한 성전을 가능한 한 아껴두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군사를 보내어 반역자들에게 항복을 요구하였다. 이번에도 저들의 응답은 ‘거절’이었다. 타이터스는 마침내 성역(聖域)에 대하여 일대 공격을 감행하였다.


 


5. 예루살렘 성 함락과 성전 파괴

무거운 돌과 화살이 우박처럼 성전 안뜰에 계속 떨어졌다. 유대인들은 마치 신들린 사람들처럼 열심히 싸웠으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여호와께서 저들을 도와주실 것으로 믿고 여호와의 성소를 굳게 지켰다. 군단 병사들은 공성 사다리로 외곽 성벽으로 올라갔다. 저들의 성벽의 난간과 지붕에 거의 도착할 때마다 저들은 유대인 방위군에 의해 사다리와 함께 뒤로 던져지곤 했다. 공성 망치와 공성 병기가 이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성전의 성벽에는 무력하였다. 헤롯이 성전을 건축할 때 사용한 커다란 석재를 분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제로 들어가기 위하여 타이터스는 성전의 목조 대문에 불을 놓았다. 그러나 대문에 불이 붙어 군단 병사들이 공격할 만한 통로가 생기자마자 타이터스는 불길을 잡으라고 명령하였다. “성전을 아끼겠다.”라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미 성전 안뜰에 불이 붙었고 로마 병사들은 불을 끄려고 사력을 다하였다.

 

 

한편 포위당한 반역자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반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중과부적이었다. 로마 병사들은 죽기로 저항하는 유대인들의 마지막 방어선을 뚫고 저들을 성전의 안뜰로 몰아넣었다. 살아남은 유대인 반역자들은 이곳에서 무자비하게 살육을 당하였다. 성역을 점령한 로마 병사들은 승전의 기쁨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 중 한 병사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신의 행동의 가공성을 의식하지 못한 채, 아니 어쩌면 어떤 악귀에 홀렸는지 모르지만 동료 병사의 어깨에 올라서서 그가 손에 쥐고 있던 타오르는 횃불을 훤히 열려진 성전의 ‘황금 창문’ 안으로 던져 넣었다. 횃불이 떨어진 곳은 지성소 바로 옆에 있는 예배실이었다.” 이 예배실은 오래된 목재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제사용 동물을 태우기 위한 가연성 물질 및 기름단지 등이 비치되어 있었으므로 활활 타오르던 횃불은 제철을 만난 듯 춤을 추었다. 타이터스는 예배실에서 불이 난 것을 알고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타이터스는 큰 소리로 병사들에게 불을 끄라고 명령하였지만 개선의 함성을 지르고 있는 병사들의 귀에 총사령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아니, 혹시 저들이 총사령관의 명령을 들었다 할지라도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열렬한 호전성 때문에 그것을 무시했는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예루살렘 성전은 황제(타이터스는 70년에 황제가 되었음)의 승인 없이 불타고 만 것이다.


 

6. 예루살렘의 멸망과 승리의 타이터스 개선문 

예루살렘의 반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성역에서 검붉은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도 유대교 광신자들은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타이터스는 또 한 번 그의 공병대와 포병과 공성병기 및 그 모든 탁월한 전술을 사용해야만 했다. 9월에 예루살렘 성의 상부 지역과 헤롯 궁전이 점령되었고 이어서 남쪽의 마지막 요새도 정복되었다. 이로써 만 4년간에 걸친 저항이 그 종말을 고하였다. 승리자들은 저들에게 격렬하게 저항했던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하였다. 예루살렘 성은 유혈과 단말마의 도시가 되었다. “황제는 예루살렘 성 전역의 모든 건물과 성전을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파괴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파사엘탑과 히피쿠스탑과 마리암에탑 및 서쪽 성벽의 일부만을 그대로 남겨 놓았다. 이것은 뒤에 남을 수비대의 주둔지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유대인의 인명 손실은 엄청났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을 때 성의 전체 인구는 60만 명이었다고 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대인 포로가 9만 7천 명이었으며, 유대인들이 3개월 간 성 밖으로 끌어낸 시체만도 11만 5천 8백 구였다고 한다. 71년에 타이터스는 로마에 개선하여 유대 전쟁의 대승을 거대한 개선 행렬로 경축하였다. 타이터스의 개선문은 아직도 이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로마 황제 하드리안(주후 117-138년)은 유대인이나 기독교도들에게 주거를 금지시킨 이 황량하고 쓸쓸한 폐허 위에 새로운 로마 식민지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를 세웠다. 이 성지에 외국인들의 거주지가 생기는 것을 본 일부 유대인들은 노골적인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이로 인하여 또 한 차례 반란의 불길이 일어났다. 영국 총독 줄리아스 세베루스는 황제의 명을 받고 유대로 진군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으려던 저들의 마지막이며 필사적인 시도가 완전히 무산되었다. 그 때 황제 하드리안은 경주장과 두 개의 욕실과 극장을 세웠다. 유대 성전의 폐허 위에 쥬피터 신과 비너스 여신상이 세워지고 그 곳에서 공공연하게 이방의 우상이 숭배되었다. 66년부터 70년까지 계속된 유대 전쟁과 132년부터 135년까지 계속되었던 바로 코크바 반란에서 대량 학살을 당하지 않은 팔레스타인의 전 유대인들은 노예로 팔렸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라는 말씀대로 된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70년 이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했음을 보여주는 물질적인 증거나, 유대인의 명각이 새겨 있는 묘비를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무정하고 냉혹한 운명의 손이 민족들의 연주회에서 이스라엘을 퇴장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 때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불가항력적이며 승리적인 여행을 통하여 만방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모든 민족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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