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성경배경사

[스크랩] 이스라엘 역사

은바리라이프 2012. 2. 17. 18:45

 

이스라엘 역사

 
서론


이스라엘 역사는 여호와와의 언약을 통해 형성된 한 민족의 역사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처음에는 한 국가로 시작해서 둘로 나 누어지고 결국에는 종교 공동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종교사라고 할 정도로 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 다. 또한 이스라엘국가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팔레스타인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이미 주전7000년대에는 성경의 무대를 이루고 있는 모든 지역에 걸쳐 정착 촌락들이 있었다. 이스라엘역사는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고대 이집트, 팔레스 타인, 메소포타미아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의 주변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여 한 민족의 발자취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겠다.

본론


1부. 이스라엘의 전사(前史)와 초창기 : 족장시대


a. 이스라엘이 기원한 세계


주전 2000년대 전반을 이스라엘의 기원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여서는 주전 13세기 이스라엘이라 부르는 한 민족 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했지만 이보다 훨씬 먼저 반유목민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 가운데에 이스라엘의 선조 들도 끼어 있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기원시대에 고대 오리엔트의 상황을 먼저 알아보자. 메소포타미아에 서는 우르 제3왕조의 몰락과 주전18세기에 아모리족 군주들에 의해 통치되는 시기였다. 이시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 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집트는 중왕조의 바로들 아래에서 새로운 번영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격변과 혼 란기를 벗어나 점차 회복을 찾아가는 시대이다. 강력한 도시들이 다시 건설되고 도시 생활이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새로 운 이주자의 무리들이 도착하고 점차적으로 많은 수의 반유목민들이 정착하게 됨에 따라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 아모리인'들, 즉 서부 셈족 이었다는 것이 확실시된다. (족장 설화들에 나오는 이름들은 주전2000년대에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 타인의 두 지역에서 통용된 것으로 알려진 계층, 특히 아모리족 주민들의 이름과 완전히 일치한다.)
주전18세기 이집트의 중왕조가 붕괴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세력다툼이 있었다. 이 세력 다툼은 결국 함무라비의 바빌로니아 의 승리로 끝났다. 함부라비가 바빌로니아를 전성기로 끌어 올렸을 때, 고대 세계에는 암흑기가 드리워지고 메소포타미아, 수리 아, 팔레스타인의 전지역에 걸쳐 민족 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바빌로니아는 주전1530년에 멸망하였다.(헷족의 침입)


b.족장시대


주전2000년경의 족장시대의 족장들은 반유목민이었다. 그들은 성읍들 근처에서 야영을 했고 성읍의 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다. 그들은 한정적이었지만 땅을 경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주민들과 동화되지 않았고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 사 들인 땅 외에는 토지를 소유하지도 않았다. 족장들은 개별인물들이 아니라 규모가 큰 씨족들의 추장이었다. 여러 가지 설화들에 비치어 볼 때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동은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계 속해서 진행된 복잡한 것이었다.


족장들의 종교의 성격으로 각각의 족장들은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자기 개인의 하나님인 동시에 자기 씨족의 수호신으 로 주장하였다. 우리는 족장들의 종교를 일종의 씨족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족장들의 이주는 실질적 의미에서 하나의 신앙 행위였다. 족장들의 약속의 성취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가 시작되었고, 구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 가 있는' 도성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제2부. 이스라엘의 형성기


a.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후기 청동기 시대에 제18왕조의 바로들에 의해서 건설된 이집트는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고 약250년동안(주전1552-1306 년경) 막강한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헷족과의 전쟁을 하게 되었고 이 혼란기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집트의 지배권은 사실상 상 실되었고 이것은 반대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었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헷족은 서아시아 의 지배권을 놓고 이집트와 경쟁했지만 13세기에 서부 소아시아의 연합세력에 대항하여 지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고 13세기말 에 멸망하였다. 이로서 이전에 세력을 경쟁하던 세 강대국 중에 앗시리아만이 기반을 잡고 남게 되었지만 앗시리아도 결코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결국 후기 청동기 시대의 세력 다툼은 모든 경쟁국가들의 멸망이나 쇠진으로 끝장이 났다.


성경은 이스라엘 시대 이전의 팔레스타인 주민을 가나안인 또는 아모리족이라 부르고 있다. 가나안의 종교는 타락한 형태의 이교였고 하나의 문화권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동질서이 없었다. 이러한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출애굽을 통해서이다. 출애굽의 연대는 대략13세기로 추정되어진다. 이 시대에 이스라엘은 자신의 독특한 신앙을 받아서 하 나의 민족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모든 사건들에서 모세라는 위대한 인물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모세에 대하여 성경에서밖에 알 수 없지만 그가 이스라엘 신앙의 위대한 창시자 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스라엘인들은 광야 에서 유랑생활을 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을 침공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선조가 모두 출애굽에 참여했던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든 어는 정도는 가설이며 앞으로 있을 연구 성과에 따라 충분히 수정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정복 사업이 마무리된 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대표자들과 새로이 그들과 합류한 팔레스타인 의 히브리인들 모두는 세겜에서 모임을 갖고 엄숙한 언약을 통해 여호와의 백성이 되고 오직 그 분만을 예배하기로 서약하였다.( 여호수아24장) 이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의 지퍼 체제는 표준적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비로소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형성은 세계의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신앙이 밑바탕이 되었 으며 이스라엘의 종교는 하나님과 백성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믿는 관계에 대한 강렬한 인식, 즉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자신이 특별한 호의의 대상으로 선택하였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에게 그의 백성으로 스스로 헌신하였다는 믿음을 중심으로 삼았다. 이스라 엘의 종교는 어떤 종교적 개념이나 윤리적 원칙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해석되고 또 신앙으로 응답된 역사적 체험에 대한 기억에 의거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가 권능 있는 역사를 통해 자기들을 이집트에서 구하였으 며 언약을 통해 그의 백성으로 삼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형성에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b.초기 이스라엘의 체제와 신앙지파동맹


초기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토대로 한 성스러운 지퍼 동맹으로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파동맹은 약 200여 년 동안 느슨하게 조직된 체제였고 이 기간에는 중앙정부나 국가체제가 없었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은 한가족 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역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의 최초의 출현이나 계속된 생존 그 어느 것도 혈통에 의한 친족 관 계라는 견지에서 설명될 수 없다.


우리는 사사기에서 정착생활을 시작한 초기 단계의 이스라엘의 동태에 관하여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지형으로 말미암아 각 자 고유한 관습, 전통, 방언을 지닌 각기 고립된 작은 산촌들이 형성되었고 한 지방의 관심사가 이스라엘 전체에 관한 문제보다 우선하였다. 또한 이러한 지파동맹의 시대는 이스라엘의 적응과 조정의 시대였다. 이스라엘은 지형의 특성상 긴급한 사태에 대하 여 몇몇의 지퍼들의 비공식적인 집결만으로도 대처할 수 있었다. 지퍼 조직은 몇몇 분명하게 정의 된 범위 안에서만 지퍼들의 행 동을 규제하고 나머지 분야에서는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러한 지파동맹은 불레셋인들로 인한 긴급 사태가 닥치지 않았다면 계속되었을 것이다.



제3부 이스라엘의 왕정시대


a.지파동맹에서 왕정으로-왕정의 등장과 발전


약200년간 지속되왔던 지파동맹은 강력한 군사적 전통을 갖고 있던 블레셋인들의 침략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블레셋인들은 제 철에 대한 독점덕분으로 우수한 병기들로 무장한 잘 훈련된 병사들이었다. 더욱이 블레셋인들의 도시 전제군주들은 단합된 행동 을 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옛 질서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두운 시대에 사무엘 이라는 정신적 지도자가 이스라엘을 이끌었다.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저항 의지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 특히 이 무렵 출현한 선지자 집단 덕분으로 카리스마적 전통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기브아라는 성읍의 베냐민 지퍼 사람 사울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사울은 불레셋인들에게 저항을 했고 이스라엘인들에게 얼마동안 여유와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었다. 사울은 여호와의 대적들과 맞서 싸우는 사사의 직무를 수 행하는 것이 그가 맡은 과업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의 통치 기간은 모두 전쟁으로 얼룩져 있던 시기였다. 사울의 통 치 기간은 알려져있지 않고 약 주전1000년 전의 10년간으로 추정되고있다. 하지만 이러한 휴식은 일시적이었다. 사울은 정신적인 이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하여 베들레헴 출신의 젊은 다윗이 등장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질투하였고 다윗은 유다의 광야로 도망가게 되었다.


마침내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주장하는 사울의 아들 에스바알과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된 다윗이 "이스라엘 "과"유다"라는 새로운 의미를 띤 나라의 왕이 되었다. 에스바알은 2년을 통치하고 죽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서 더 이상 사울가문의 왕권을 주장하는 자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백성들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모여들어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로서 남부에서 이미 다윗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던 왕국과 북부에서 에스바알에의해 통치권 이 주장되던 지역이 다윗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통일되었다. 왕이된 다윗은 블레셋을 격파하였고 블레셋은 다윗을 위해 복무하 는 용병이 된다. 다윗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기럇여아림에 한 세대 이상이나 방치되어 있던 언약궤를 수도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옛 제도들의 정신적인 영향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예루살렘을 정치적 수도로 만이 아니라 종교적 수도로도 만들려는 것이 다윗의 목적이었다. 다윗은 정복 사업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 및 수리아의 제일 강대국으로 변모시켰다.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솔로몬은 그의 영토를 위협할 만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체제를 그대로 유지 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는 산업과 교역을 발달시켰고 국가에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또한 국가가 부유해짐과 동시에 나라전체 의 생활 수준도 마찬가지로 급격히 향상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솔로몬의 부는 수많은 건설사업에 활용되었고 성전을 건축하였 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다 좋은 것은 아니었고 어떤 이들은 노예의 삶을 살게 되었다. 솔로몬의 시대에 이스라엘의 옛 제도 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사회구조는 왕조 국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지퍼들의 독립성과 중앙정부의 요구와의 간격, 옛 전통과 새로운 체제의 요구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b.솔로몬의 죽음에서 주전 8세기 중엽까지


솔로몬의 억압정책으로 인하여 북부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중앙정부로 부타 완전히 등을 돌린 상태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솔 로몬의 죽음으로 인하여 유다의 르호보암(주전 922-915)과 북부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주전 922-901)으로 분리되었다. 분열에 뒤 이어 산발적인 국지전이 벌어졌으나 결말이 나지 않았고 두 나라의 지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 시기에 유다는 영토가 작고 가난 했지만 좀더 동질적인 주민이 어울려 살았고 지리적으로 비교적 격리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은 영토가 넓고 비옥했고 옛 지파동맹 의 중심지에 더 가까이 위치해 있었지만 가나안 족 주민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고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외세의 영향을 받기 쉬 웠다. 더욱이 유다는 확고한 왕조 전통을 갖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전통이 없었다. 이 시기는 내정이 극단적으로 불안 정했다. 그러나 오므리(주전876-843/2년) 왕가 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안정되었다. 하지만 아합과 이세벨의 혼인으로 종교적인 위 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결국 예후라는 장군에 의해 주도된'쿠데타'의 형식으로 오므리왕가는 몰락하였다. 하지만 이 혁명은 오므 리 왕가와 그 모든 정책에 대해 대중의 누적된 분노, 또한 이스라엘에서 보수적이었던 모든 백성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예후 는 두로와 바알을 제거했고 한 세기 동안 북부 이스라엘을 다스린 왕조를 창건했지만 그의 통치기간은 재난이 잇따른 취약의 시 대였고 북부 왕국은 독자적인 존립을 거의 상실하였다.


하지만 주전8세기에 이스라엘의 여호아스(주전 802-786년)와 여로보암2세(주전 786-746) 그리고 유다의 아마샤(주전 800-783) 와 웃시아(주전 783-742)때에 이 유능한 통치자들 덕분으로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과 솔로몬이래 누려보지 못한 막강한 세력과 번영의 절정기를 누린다. 그러나 북부 왕국의 겉모습은 건전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부패가 상당히 진척되었다. 이스라엘 사회의 두드러진 병폐는 극심한 부정부폐와 현저한 빈부 격차였다. 이 시대에 아모스와 호 세아라는 선지자가 당시의 악폐들을 공격하였다.


c. 주전 8세기 중엽부터 히스기아의 죽음까지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생존해온 500년간은 강대국이 없는 공백기 속에서 이어져온 것이다. 하지만 주전8세기 중엽 이후 에 앗시리아가 본격적인 제국 건설의 길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여로보암의 죽음으로 북부왕국은 무정부 상태로 지내게 되었으며 25년 안에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또한 유다 는 아하스(주전 735-715년)왕 때에 앗시리아 제국의 봉신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하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히스기야(주전715- 687년)는 결국엔 허사가 되고 말았지만 앗시리아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을 하였다. 이 시대의 선지자로는 이사야와 미가가 활동 하였다.


d. 유다왕국


히스기야의 죽음으로부터 발베론인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최종적인 멸망까지는 정확히 한 세기였다(주전 687-587년). 이시기에 유다는 처음에는 이집트에 예속되었다가 다음에는 바벨론에 예속되었고, 마침내는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다가 자멸하고 말았다.


주전627년에 앗시리아는 멸망의 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바벨론인과 메대인들과의 동맹에 의하여 파괴되었고 그후 20년이 못 가 서 앗시리아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앗시리아가 제국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자, 유다는 공백상태로 말미암아 다시한번 자유 국가가 되었다. 이 때에 유다의 젊은 요시아왕은 유다의 역사에서 가장 광범위한 개혁에 착수하였다. 요시아는 이 방 제의와 관습에 대한 일관된 숙청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온갖 우상숭배 관습을 발본 색원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요시아의 개혁은 성전을 수리하는 가운데 발견된 율법책(오늘날의 신명기와는 조금 다른 형태) 에 따라 율법이 그의 여러 조치들의 토대가 되어서 진행되었다. 요시아가 전사하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3개월후 여호아아스의 형제인 엘리아김이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고 이집트의 봉신으로써 유다의 왕위에 올랐다. 유다의 독립은 20년도 채 지속되지 못한 것이다. 그후 바벨론 군대가 블레셋을 석권했을 때 유다는 메소포타미아의 한 제국의 신민(臣民)이 되었다. 그후 바벨론에 반기를 든 여호야김은 죽었 고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랐다. 그후 시드기야가 통치자로 임명되었고 예루살렘에서의 반란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바벨론에게 파 괴되었고 주전587년에 유다 나라는 영원히 끝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에도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그것 은 선지자들의 선포였다. 예레미아와 에스겔은 유다의 파멸을 여호와의 공의로운 심판이라고 선언하였다. 선지자들은 신앙에 입 각하여 그 비극을 앞서 설명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비극으로 말미암아 신앙이 파괴되는 것을 막았다. 이에 신실한 이스라엘 사 람들은 충격을 받고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며 회개하게 되었다.



제4부 포로기와 그 이후의 시대


a. 포로생할과 귀환


예루살렘의 파괴와 포로생활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끝이 났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다시 재건하였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여 하나의 민족으로서 삶을 재개하였다. 포로생활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하면서 유대교가 탄생하였다. 포로생활 당시의 이스 라엘의 신앙은 그들의 신앙을 극한까지 시험 당하였다. 이스라엘을 자기 성찰과 피나는 재적응을 통하여 이를 극복하였다.


실질적으로 유다의 붕괴이후 50년간 유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다만 시국이 안정됨에 따라 난민이 돌아와서 유다 땅에 있던 주민들과 다시 합류하여 근근히 생존해 갔을 것이라는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바벨론에서 살고 잇던 유대인들은 유다의 정치적, 종교적, 지성적 지도층들이었다. 이것이 그들이 선발되어 유배되어온 이유 였다. 이들은 소수였지만 이스라엘의 장래를 설계하게 될 사람들이었다. 그 밖에 자발적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상당수의 사 람들이 이집트로 들어갔다. 또한 이집트 외에 다른 나라로 피신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열방들 가운데 흩어져 살기 시작하게 되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죽자 바벨론은 급속도로 세력이 약해졌고 페르시아인인 고레스의 등장으로 상황은 변하였다. 고레스는 제국을 장악하였고 소아시아의 대부분이 고레스의 지배하여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바벨론은 혼자 남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 들은 유대인들의 가슴속에 극심한 흥분과 잠재해 있던 해방에 대한 소망을 용솟음치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제2이사야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참회가 받아들여졌고 또한 여호와가 곧 권능과 한량없는 자비로써 자기 양떼를 모아 고향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여호 와의 결심을 알리는 천상의 포고를 들었다고 선포하고 또한 여호와가 역사를 절대적으로 주재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 동포들에게 확신시켰다.


곧 바벨론은 멸망하였고 고레스는 바벨론에서 그의 재위 제1년(주전 538년)에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공동체 및 제의의 재 건을 명하는 포고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유대인들은 귀환할 수 있었지만 재건은 역경과 좌절의 세월이었다. 소망이 절망으로 변 함에 따라 혼합주의가 기승을 부렸으며 이에 대하여 유대 공동체는 그 신앙이 결집될 수 있는 구심점을 절실히 필요로 하였다. 이것은 바로 성전의 건축이었다. 이때에 페르시아는 다리우스의 왕위 계승으로 인하여 혼란에 싸여 있었다. 때가 왔다고 생각한 선지자들로 인하여 성전재건 공사는 재개되었다. 성전은 주전513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소망은 실현되지는 않았고 유다는 느헤미야 때까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그의 후계자들의 권세아래에서 일종의 신정 공동체로서 존속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 당시의 유대인들의 역사는 페르시아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제국의 판도 내에서 살고 있 었기 때문이다.


b. 유대인 공동체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제국내의 여러 곳에서 흩어져서 생활하였지만 재건 사업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유대인의 여러 집단들은 계속해서 고향 땅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스룹바벨 이후에 유다에는 토착민 출신의 총독이 없었을 것이고 행정상으로는 사마리 아의 당국에 의해 관리되었으므로 공동체의 지위는 이 시기 내낸 극도로 불안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에 충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전 5세기 후반기에 느헤미아와 에스라로 인하여 유대인 공동체는 철저히 재편되었고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제5부 유대교의 형성기


a. 구약시대의 말기


유대교의 형성기에 대하여 말하지 전에 안타까운 사실은 이 시대의 상당기간동안 유대인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거의 전무하 다는 것이다. 특히 주전4세기의 6, 70년 동안의 유다의사정에 대하여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이시기에 아람어가 결 국 히브리어를 대신하여 유대인 대다수의 일상어로 되게 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람어는 국제어이자 공용어였기 때문에 아람어를 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유다인들은 헬라이들과의 교역에 따라 헬라정신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주전 336-323)은 정복사업을 시작하였고 유다와 사마리아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내륙지 방은 알렉산더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알렉산더는 모든 국가들을 헬라화 하려고 하였다. 알렉산더의 헬라화는 급속도로 진 행되었으며 유대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알렉산더가 죽고 알렉산더 제국은 분열되었다. 알렉산더 제국은 이집트를 장악한 프톨 레마이오스와 바벨론의 지배자가된 셀류코스가 지배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은 이후 한 세기 동안이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의 해 통치 되었다. 이 시기에 이집트에 사는 유대인들의 수는 늘어났고 헬라어를 그들의 모국어로 채택하였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주전3세기에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번역본이 70인역이다.


주전198년에 셀류코스 제국은 이집트를 물리치고 팔레스타인을 병합하였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변화를 기뻐했으며 셀류코스의 왕 안티오쿠스는 유대인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였다. 하지만 셀류코스 제국은 오랜 사양(斜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안티 오쿠스는 종교문제에 간섭을 하기 시작하였고 유대인들은 헬라문화를 어디까지 받아들이냐하는 문제로 고민하였다. 이시기에 안 티오쿠스가 죽었다는 소문에 야손은 예루살렘성을 점령하고 주전167년초에 예루살렘은 다시 안티오쿠스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예 루살렘에는 '아크라'라고 불린 성채가 세워졌고 (이방의 지배를 나타내는 가증스러운 상징) 유대인들은 저항하였다. 이에 안티오 쿠스는 유대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종교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고 특혜를 폐지하고 유대교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했다. 그 리고 곧 온 유다는 무장 봉기로 들끓게 되었다. 투쟁의 절정은 마카베오라불린 유다에의해서 전면적인 독립투쟁으로 전환되었다. 투쟁의 결실로 주전164년에 성전이 다시 봉헌되었다. 유대인들은 기나긴 투쟁을 하였다. 결국에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자치권을 가져다주었다.


결론


수 천년전의 역사를 정확히 밝히는 일은 결코 쉬운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현재도 자료의 보충과 수정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많은 논란거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수 차래 밝혔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이스라엘의 종교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정말 대단하고도 등에 전율이 일어날 만큼 무서운 민족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의 수난사와 그 것을 극복해내는 신앙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여호와 와의 약속과 성취의 신앙은 영원히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끊임없는 생명력이다.


출처 : 포도나무 - Vitis
글쓴이 : Viti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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