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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여, 분노하라!

은바리라이프 2011. 11. 7. 04:39

문화로 읽는 신학

이달의 주제-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성도여, 분노하라!




<분노하라>로 촉발된 분노

세상이 ‘분노’로 뒤덮이고 있다. 작년 10월부터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의 젊은이들이 뛰쳐나오더니 중동과 아프리카에서는 분노한 국민들이 자스민 혁명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장기독재하던 무라바크, 카다피 등 낡은 권력들이 날라갔다.

세계 최강국 미국에서도 분노의 시위가 확산됐다.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월가 금융자본에 의해 빈부 격차가 더 벌어지자 뉴욕을 비롯한 미국 전역에서 ‘점령하라(Occupy ~)’는 시위가 미국을 휩쓸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위는 제각기 성격이 다르지만 근원은 하나다. 상위 1%의 탐욕에 대한 나머지 99%의 출구 없는 절망이다.

그런데 전 세계 젊은이의 분노를 촉발시킨 것은 놀랍게도 94세의 노인이었다. 2차세계대전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의 스테판 에셀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지난해 <분노하라!>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만 2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광고문구와 주석을 뺀 본문은 13쪽에 불과해 책이라기보다 격정적인 레드북(정치 팸플릿)에 가깝다.



레지스탕스 노영웅의 분노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의 정신을 되찾아, 돈과 시장의 무례하고 이기적인 힘을 거부하고 근대 민주주의의 사회적 가치를 수호하자”

레지스탕스 노영웅은 약자를 짓밟는 탐욕을 비난하고 있다.

“분노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귀중한 선물이며, 분노할 것에 분노할 때 당신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의 일부가 된다. 그 흐름이 우리를 더 많은 정의와 자유로 이끈다. 그 자유는 여우가 닭장 속에서나 맘껏 누리는 자유가 아니다.”

근대적 시민사회의 가치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시장에 대한 맹신과 자본의 폭력에 ‘분노하라’는 외침은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당장 자기 집 앞길만 쓸어놓고 만족하거나 길 넓히는 데만 골몰하는 동안 울타리 바로 너머에 어떠한 재앙이 기다리고 있는 지를 보라고 외쳤다. 그리고 ‘폭력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폭력이란 행위는 피할 수 없는 실패이며, 폭력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수단 또한 폭력’이라는 장 폴 샤르트르의 주장과 대비되게도 분노하되 비폭력적인 투쟁과 평화적인 봉기로 표출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면서 아폴리네르의 시구를 빌려 이렇게 말했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역사는 예수 이야기

세계 곳곳에서 격렬한 역사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분노’에 SNS(소셜네트워크)가 더해져 더욱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민중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인류는 더 나은 이상세계를 이룰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심드렁한 예상은 데자뷰처럼 인류가 이미 숱하게 겪어온 사건들 때문이다. 일례로 무산자, 노동자의 천국을 만들자던 공산주의 혁명도 있었다.

인간의 힘으로 이상세계를 이룩하자는 노력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전 역사를 통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그동안 명멸한 수많은 주의와 사상을 통해 인간이 깨달은 것은 새롭고 이상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고착화의 과정을 겪은 후 결국은 낡은 것, 타도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역사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그곳은 이미 완료된 묵시의 세계다.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이르러 보고 온 세계, 사도 요한이 보고 기록한 세계, 이미 완성된 천국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무엇인가. 인간은 왜 이 힘든 고난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왜 스크루지 영감처럼 완성된 그 세계를 꼭꼭 숨겨둔 채 우리에게 고난을 요구하시는가.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 하나님은 성도가 인생과 역사 속에서 무언가 깨닫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모든 노력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겠다는 선악과 사건 이래 인간의 힘만으로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인간의 하나님 흉내내기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아담의 의미가 ‘흙, 없음’이듯 아담 이후 인간의 모든 시도는 죄악만을 토해낸 채 ‘가치 없음’으로 종결됐다. 역사는 ‘이 세상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누구에 의해 완료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역사는 ‘History(그의 이야기, 곧 예수의 이야기)'인 것이다.



성도가 분노해야 할 때

가인은 하나님께 분노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지만 제 것은 열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죄의 종이 되어 살인자가 됐다. 반면, 민수기의 비느하스는 살인을 하고도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고 바알브올에게 사로잡혔으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염병을 창궐케 하셨다. 그때에 어떤 자가 겁도 없이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서 미디안 여자를 데리고 왔으므로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분노하여 창으로 두 남녀를 한 번에 꿰뚫어 죽였다. 이에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다.

항상 기뻐해야할 성도지만 비느하스처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룩한 분노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가 언제일까. 성도가 분노할 때는 실제(천국)보다 허상(현실)에 더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교회가 바로 서지 않을 때, 거짓 선지자로 인해 복음이 왜곡될 때다. 성도는 이미 하늘의 복을 받은 성도에게 이 세상의 다른 복이 있다고 현혹하는 모든 거짓 복음에 분노해야 한다. 성도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모든 선동에 분노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을 도둑의 굴혈로 만드는 모든 시도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성전을 뒤엎은 예수님의 분노를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마가복음 11:15,17)

조정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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