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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름을 빼앗는 하나님

은바리라이프 2011. 8. 4. 09:24

2011년 4월호-MBC<위대한 탄생>

인간의 이름을 빼앗는 하나님

 

 

 

 

대한민국은 시험 중

포털 사이트를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영화<내티비티 스토리>가 실시간 영화 검색순위 1위에 올라있었기 때문이었다. <내티비티 스토리>는 아기예수 탄생을 그린 영화다. 캐럴이 울리는 12월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겠지만 지금은 봄이다. 게다가 영화의 개봉도 5년 전인 2006년인데다, 미안하지만 두고두고 볼만한 걸작도 아니다. 별일이다 싶어 고개를 갸웃하며 클릭해 봤다. 의문은 곧 풀렸다. <내티비티 스토리>의 부제 ‘위대한 탄생’ 때문이었다. 오디션프로그램으로 인기가 높은 <위대한 탄생(이하 위탄)>과 검색어가 같은 덕분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MBC <위탄>은 Mnet <슈퍼스타 K(이하 슈스케)>의 성공을 시샘하며 그의 아류-물론 <슈스케>도 외국 프로의 아류다-로 출발했다. 그러나 공중파라는 절대적인 강점에다 멘토 시스템 도입 등 차별화에 힘쓴 덕에 금요일 예능의 절대강자로 우뚝 섰다.

<슈스케>가 불붙인 ‘리얼리티’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열풍은 MBC <위탄> <신입사원> <나는 가수다>, SBS <기적의 오디션>, KBS <도전자>, tvN <코리아 갓 탤런트> <오페라스타>까지 들불처럼 번지며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갖가지 시험에 드는 중이다.

 

 

인기 있는 리얼리티 서바이벌 프로

‘리얼리티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왜 인기일까? <위탄>을 보면, 20%에 육박하는 높은 시청률에다 14회 방송 중 6~7회의 광고를 완판, 40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한다. 방송국 입장에서 보면 ‘리얼리티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성공이 보장된 황금알 낳는 거위로 보일 법 하다. 또한 그 속에는 치열한 경쟁이 있고,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는 경쟁구도도 있다. 이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그러므로 잠시만 들여다보면 즉시 감정이입이 이루어져 몰입하기 쉽다. 도전자들의 개인사도 시청자들의 감정이입을 심화시켜준다.

‘검투사의 쇼’라고 한 신해철의 정의가 적절하다. 피 흘리고 상처받는 검투사의 투쟁,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쓰러뜨려야만 하는 약육강식의 경쟁구도, 가끔씩 그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심사위원의 독설... 이 모든 것이 관전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잔혹할수록, 가혹할수록 그걸 지켜보는 재미가 커진다. 여기서 ‘즐거움, 재미’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러한 프로그램을 보는 시청자는 어쩔 수 없이, 싫건 좋건, 빛나는 햇빛 아래 칼을 높이 치켜든 승자의 기쁨과 피 흘리며 죽어가는 패자의 고통이 교차하는 그 장면을 보는 것이 차츰 쾌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 시청자는 로마 귀족이나 황제가 된 기분으로 패배한 검투사의 목을 따는 장면을 기대하고 있으므로 <나는 가수다>에서처럼 시시하게시리 온정을 베풀어 회생의 기회를 주었다간 매치의 주선자들까지 경을 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서바이벌, 세상의 큰 자 되기 다툼

도전자들은 심사위원으로부터 여러 가지 지적을 받는다. 공식에 맞지 않는 사람은 혹평을 받는다. 심사위원의 지적과 그 앞에 움츠러드는 도전자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아, 인생도 그렇고, 역사도 그렇지!’하며 무릎을 치게 된다. 참된 가치와 보물을 찾지 않고, 세상의 큰 자, 유명한 자가 되겠다는 욕망의 헛된 가치로 무장하고, 성공이라는 허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인생이고, 역사인 것이다.

심사위원은 이미 거기에 도달한 자로 등장해 “제대로 하지 않으면 너는 내가 오른 곳에 절대로 이를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다. 무명한 자만이 유명한 자가 되는 진리는 설 곳이 없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고후6:9)

<위탄>에서 죄의 속성 한 가지를 더 확인했다. 모범생처럼 예쁘게 노래하는 조형우에게 심사위원들이 ‘클럽행’을 거듭 권유했다. 죄인들은 공범의식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자기와 다른 부류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끼며 타락을 부추긴다. 인간은 유유상종으로 자신의 죄책감을 가리는 것이다.

죄인은 자신이 자랑하고 중시하는 가치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타락과 실패’ 중의 택일은 너무도 쉽다. 세상의 큰 자, 유명한 자가 되기가 어떤 가치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결국 조형우는 “앞으로 최선을 다해 방탕한 생활을 하겠습니다.”라며 굴복하고 말았다.

성도의 일생과 그 종국이 어떠할 지가 깨달아진다. 성도는 세상에서 높아지고, 군림하고, 존경 받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처럼 세상에게 맞아죽는 자가 되어야 할 운명이다. 성도는 세상과 타협하고 화합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이 불편해 하고 감당하지 못할 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구원, 하나님에게 이름을 빼앗기는 것

홍수 이후 사람들이 시날 평야에 모여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결의했다. 인간은 세상에서 높아져 자기 이름을 내려 애쓰지만 이는 하나님 앞에 참람하다.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계17:3)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인간의 유명한 자 되기’의 꿈을 부수고 들어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빼앗고, 진짜 가치인 하나님의 이름을 주신다. 인간의 꿈을 부수고 이름을 부정하는 것이 고난이며, 이 고난이 곧 구원이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에 의해 환도뼈가 위골되어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것, 이름을 빼앗기고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로 사는 것이 고난처럼 보이는 구원이며 축복이다.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일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의 이름을 빼앗고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 그래서 인간은 ‘아브람, 야곱’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이름 ‘아브라함, 이스라엘’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사 43:7)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한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성도를 이름을 높여 유명한 자 되려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내고 계시다. 오직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안전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의 자리로 들어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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