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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결산은 ‘심판의 날’에

은바리라이프 2011. 1. 17. 15:50

 

하나님의 결산은 ‘심판의 날’에

-연말결산

 

 

 

창랑의 물이 흐리면

12월입니다. 한 해를 결산할 때가 됐습니다.

사회 이곳저곳에서 2010년이 다 끝나가니 결산을 해보자며 공고를 냅니다.

뮤뱅의 연말결산은 ‘1위 Gee, 2위 소원을 말해봐’랍니다. 이 시대는 소녀시대입니다.

 

  

 

어느 볼링동호회에서는 모일 모볼링장에 모여 연말결산을 겸해 한 게임하잡니다.

세 게임 합산해 순위를 정할 예정이라니 살짝 딴 볼링장 가서 칼 좀 갈고 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우리 집’은 어떻습니까? 올 한해 재미 좀 보셨습니까?

“웃기는 소리! 요즘 같은 불경기에 재미는 무슨 재미. 죽지 못해 산다!”

금방이라도 호통이 떨어질 듯합니다.

 

초(楚)의 굴원(屈原)이 유배되어 호숫가를 거닐 때 한 어부가 사연을 묻습니다. 굴원은 “세상이 다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다.”고 답합니다. 그런 심정입니까? 어쩌면 우리 인생의 불경기도 굴원의 이유와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어부의 입을 빌어 굴원은 이런 명구로 답했습니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은 인생의 오랜 주제입니다. 요는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것 같습니다. 레닌은 ‘역사에서 배울 것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2010년에서 무언갈 챙겨 2011년으로 가져가야 하는 걸까요?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죽음으로 사는

주후 313년 로마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밀라노칙령 이래 기독교는 세상에 군림하는 종교가 됐습니다. 소위 기독교 왕국(Christendom) 시대입니다.

로마제국의 번영과 함께 기독교는 천년 이상 세상에 위력을 떨쳤습니다. 기독교인은 사회의 주류가 됐고, 교회가 출세와 명예의 기회를 제공하는 강력한 세력이 됐습니다. 교황의 권위에는 왕도 복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예배 대신 호화찬란한 건물과 멋진 의식, 복음 자체의 능력보다 세 확산에 집중했습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공의가 물처럼 흐른 시대가 아니라 빛이 사라진 어둡고 괴로운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물론 로마 카톨릭 자체가 엉터리 이방잡교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런 탓에 까따꼼(지하 무덤)에서 나왔다가 “저건 가짜야!‘ 하며 도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 버린 참기독교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놀랍지 않습니까? 그 시대의 묘사가 오늘의 교회에도 비교적 잘 들어맞는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 영적 암흑의 시대에 유행하던 기독교 사상이 고지론(高地論)입니다. 기독교인은 성공의 높은 고지에 올라가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기 위해 부와 명예와 권력을 내 품에 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부족하시니 일단 내가 성공하여 힘을 보태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고지론은 실상 인본주의였습니다.

 

그런데 고지론은 중세 뿐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중요한 비즈니스, 시험이 있으면 교회에 나올 수 없습니다. 일단 내가 잘 되어야 하나님 영광도 높여드릴 수 있으니까요. 내가 없으면 하나님도 없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섬김으로 권위를 세우고, 죽음으로 사는’ 역설의 진리 속에 있습니다.

 

 

 

거룩한 비효율로 장성하기

예일과 하버드대학교에서 최고의 지성들을 가르치던 헨리 나우웬은 어느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캐나다의 정신지체 공동체(라르쉬)로 들어갔습니다. 나우웬은 그곳에서 장애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이에 필립 얀시가 나우웬을 찾아가 따집니다.

 

▲라르쉬의 나우웬

 

“왜 커다란 가능성을 버리고 굳이 낮은 곳에서 기회를 낭비하는가?”

그러나 결국 얀시는 나우웬에게서 '거룩한 비효율'을 깨닫습니다. ‘거룩한 비효율’은 성도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정확한 말입니다. 일주일 내내 일한 성도가 일요일에 쉬지도 못하고 교회에 나옵니다. 하루 종일 봉사하기도 합니다. 주말에 마음 편히 어디 놀러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참으며 전도에 나섭니다. 시간과 (돈 벌 기회를 포함해)돈을 헛되이 낭비합니다.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봉사는 봉사대로 하면서 헌금이니 십일조니 하며 애써 번 돈까지 냅니다. 정말 바보 같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성도의 삶은 비효율 자체입니다. 성도는 삶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빚진 자’이며, 그의 존재이유는 세상의 성공에 있지 않고 오직 복음의 구현에 있습니다. 또한 봉사, 헌금, 전도 등 성도의 모든 행위는 성도의 거룩과 ‘장성(長成)’과 관련 있습니다. 이 일들의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결산은 심판의 날에

사탄은 하나님을 볼 수 없도록 세상에 많은 것을 뿌려놓았습니다. 그중 가장 성공적인 것이 ‘경쟁’입니다. 극도의 효율을 이끌어내어 남을 누르고 내 목적을 이루는 것이 경쟁의 승리, 성공입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경쟁에 참여하여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해 매진합니다. 경쟁에서 뒤처지거나 참여하지 않으면 루저, 패배자로 손가락질 합니다. 경쟁은 멋들어진 사탄의 걸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방식은 다릅니다. ‘순종, 낮아짐, 희생, 십자가’가 그 요체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께 순종해 낮아지고 낮아져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죽는 것이 승리입니다. 거룩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미천한 제물이 되는 건 비효율의 극치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악인의 형통이 부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고난이 없고 재앙도 없나니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시73:4-5, 12)’

 

여름내 무성했던 숲에는 생기 잃은 활엽수의 잎들이 떨어져 쌓여있습니다.

거무칙칙하고 너덜너덜한 낙엽은 실패한 일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낙엽들이 실패를 상징할까요?

낙엽은 나무에게 허무감만 남겨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죽은 낙엽이 숲을 살찌웁니다. 성도의 실패와 고난이 성도를 장성한 분량으로 이끕니다.

‘회사가 망했다’ ‘가계가 적자의 늪 속에 처박혔다’ ‘불치병에 걸렸다’ ‘수능성적이 엉망이다’ ‘큰 놈이 가출했다’

..라구요? 축하합니다. 올 한 해도 성공하셨군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의 삶에 절대(!) 마이너스는 없습니다.

 

성도의 모든 ‘범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장성’을 위해 주신 것이며, 그것들은 차곡차곡 쌓여 성도를 ‘장성한 분량’으로, ‘성화’로, ‘천국’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천국백성 삼아주려고 하나님이 특별히 계획하시고 허락하신 것이니까요. 하나님은 연말결산 따윈 하지 않으십니다. ‘심판의 날’에 한꺼번에 결산하십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 20:12, 15)’

 

GGNEWS2010.12월호 은바리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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