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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날다

은바리라이프 2010. 10. 7. 12:47

지렁이 날다

 

 

지난 여름 일이다. 산으로 난 길을 산책 삼아 걸었다.

해가 쨍쨍하고 뜨거웠다. 반면에 신록은 푸르고 무성했다.

길을 가노라니 지렁이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제법 굵직한 놈이었다.

지렁이는 차바퀴 자국을 따라 열심히 기어가고 있었다. 그래봐야 꿈틀꿈틀이었지만.

놈은 뜨거운 햇빛과 지열에도 아랑곳 않고 마치 급한 볼일이라도 있다는 듯,

약속시간에 늦었다는 듯 부지런히 꿈틀댔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는 것이 오직 촉각에만 의지하여 잘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에서 자동차 한대가 모퉁이를 돌아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지렁이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10초 후의 지렁이 운명이 훤히 내다보였다.

차 한 대가 겨우 다니는 산길에서 차바퀴 자국을 따라 가는 지렁이의 미래 쯤은 어렵지 않게 예언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얼른 가는 나뭇가지를 젓가락처럼 사용하여 지렁이를 집어들었다.

넌 참 운이 좋았다. 내가 널 보아주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니.

 

지렁이를 길 옆 풀숲으로 던지려는데, 놈이 꿈틀거리며 버둥대더니 젓가락을 벗어나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살려준다는데 왜 이리 앙탈이냐.

 

나는 다시 지렁이를 짚었다. 이번엔 짚자마자 풀숲으로 휙 던져버렸다.

지렁이는 긴 포물선을 그리며 잠시 하늘을 날았다.

그리곤 풀들을 쿠션 삼아 굴러 떨어져 그늘과 물기와 부드러운 흙이 있는 안전지대로 떨어졌다.

그러자 곧 자동차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나는 지렁이의 운명과 그에 대한 나의 선행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아마도 그 웃음에는 도통 지각이라고는 없는 아둔한 지렁이에 대한 비웃음도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뒷골이 서늘해졌다. 하나님이 보신다면,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 또한 지렁이와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렁이를 비웃은 내가 부끄러웠다. 내가 저와 같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거부하고 미약한 내 능력, 내 뜻대로 세상을 살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쓴 것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아니었던가.

또, 멸망의 길을 죽을 둥 살 둥 달려오다 이제 겨우 구속의 은혜를 입어 쉴만한 물가를 찾았으되,

여전히 옛사람이 시퍼렇게 살아있어 틈만 나면 죽을 길로 달려 나가는 내가 조금 전의 그 지렁이와 무엇이 다를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주께서 나를 보아주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주시니 나는 이제 멸망할 일이 없으리라.

비록 세상의 눈으로는 지극히 둔한 ‘꿈틀꿈틀’ 느린 인생이 됐지만,

지렁이가 나로 인해 잠시 하늘을 날았듯 나 또한 하나님께 들려서 천국까지 날아갈 것이니

느리고 둔한 것이 빠르고 민첩한 것보다 오히려 빠름을 알겠다.

 

내 힘을 빼고 내가 약해지는 것이 순종이며,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들어 마음껏 역사하실 때,

하나님의 강함으로 인해 덩달아 내가 강해지는 것임을 또한 알겠다,

거북이도 날고 지렁이도 난다. 느리고 약한 것은 모두 난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이사야 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