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쇼퍼홀릭
지름신에 붙잡힌 쇼퍼홀릭
‘반짝거리는 쇼핑백의 짙은 녹색끈을 쥘 때, 난 거의 소리 내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너무 멋지다. 바로 이 순간 말이다. 나의 손가락에 빛나는 쇼핑백의 손잡이가 걸리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멋지고 새로운 상품이 나의 것이 되는 그 순간. 어디에 비유하면 좋을까. 며칠 굶다가 버터 바른 따뜻한 빵을 한입 가득 베어 문 순간이랄까. 아침에 눈을 뜨니 주말이었을 때 같다고 할까. 마음속에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이건 순수하며, 매우 이기적인 쾌락이다.’
소설 <쇼퍼홀릭>의 베키는 카드빚에 허덕이고 은행 직원에게 쫓기면서도 지름신의 은혜를 수시로 확인하는 못말리는 신상 명품 쇼퍼홀릭(Shopaholic 쇼핑중독자)이다.
신용카드와 명품매장 사이에서 탄생한 이러한 쇼퍼홀릭계(系)에게 쇼핑은 구매의 차원이 아니라 정체성을 찾는 행위쯤 된다. 이 족속에게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보다는 바바라 크루거의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더 적합하다. 스마트폰으로 구루폰의 최대 70% 할인쿠폰 챙기고, 한정 수량 득템하고, 백화점 돌면서 ‘머스트 해브’나 특별세일 제품 리스트업 하는데 바쁘시므로 존재의 유무는 그닥 시급한 일이 아니다.
소비로 만들어지는 정체성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근검절약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닌 듯하다. 심지어 소비는 개인의 자아를 형성하고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까지 그 의미가 격상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력 있고 성능 좋은 신상품이야말로 자신이 누구인지 나타내기에 더없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를 보라. 애플의 신제품 출시 때 줄서는 사람들을 보라. 자신의 존재를 나타낼 표현방법이 없을수록,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구가 강할수록 더 많은 소비가 이루어진다.
자본주의는 속성상 소비주의를 부추기므로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소비의 욕구에 노출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한 가지 알아둘 것이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생산력은 증대하고 제품의 내구성도 점점 더 좋아진다. 이는 바람직하지만 모순적인 상황이다. 제품의 질이 좋은 탓에 더 많은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시스템의 유지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이 문제를 인위적인 수단, 곧 유행과 트렌드로 해결하고 있다. 유행과 트렌드는 내구성과 관계없이 여전히 훌륭한 제품을 낡고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해마다, 절기마다 유행이 되풀이 된다. 이미 오래전에 뵌 분인데 ‘나가수’처럼 다시 등장해 인기를 끈다. ‘미니스커트’의 변종 ‘하의실종’처럼 말이다.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 소외감, 도태되는 느낌이 든다. 생존과 관계없을수록 가격은 높다. 명품을 보라. 무엇을 소비하느냐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고 믿는 소비주의의 지존이다.
에르메스에 현혹된 한국의 쇼퍼홀릭
에르메스의 버킨백은 장 루이 뒤마 회장이 “편하게 쓸 큼직한 가방이 있으면 좋겠다”는 영국 출신 프랑스 가수 겸 영화배우 제인 버킨의 부탁에 검은색 가죽가방을 만들어 선물한 데서 비롯됐다. 가격은 크기나 재질에 따라 1000만~1억원에 달한다. 이걸 사려면 선금을 내고도 1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기어이 갖고야 말겠다는 집념의 대기자가 1000명이 넘는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점에 가도 자리가 없으면 “안 먹고 말지” 하고 냉큼 딴 집 찾는 ‘지조 없는’ 필자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어렵다.
버킨백은 프랑스 현지 공방에서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만들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쉽게 구매할 수 없다. 사실 알고 보면 ‘줄 세우기 마케팅’을 구사하는 에르메스사의 기법에 순진한 한국의 쇼퍼홀릭들이 놀아나는 느낌도 든다.
에르메스(Hermes 헤르메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이다. 바울이 바나바와 루스드라에서 전도를 할 때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자 사람들이 허매(헤르메스)와 쓰스(제우스)가 저희 중에 강림하셨다며 놀란다. 그때 바울은 옷을 찢고 이렇게 말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는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사도의 외침은 에르메스의 백신(Bag神)에 현혹된 오늘의 우상숭배자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은 그의 명저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를 지향하며 돈 명예 권력에 무한한 탐욕을 나타내는 인간에 대해 분석한 바 있다. 그는 인간의 욕망을 양파에 비유했다. 아무리 찾고자 심연을 뒤져도 껍질만 나올 뿐 알맹이는 없기 때문이다. 소유적 실존 양식의 삶은 소모적인 일회성의 쾌락을 추구하면서 늘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놓이게 된다.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은 자연적으로 인간을 그러한 삶으로 몰고 간다. 따라서 프롬은 소유로 인해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삶이 아니라 외적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자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롬의 철학을 충실히 실천한 어떤 스님은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큰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스님은 열반 직전에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달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론적 삶의 모순을 스스로 증명했다. 그는 평생을 무소유로 살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 ‘무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 버린 것이다. 사실 그 스님과 에리히 프롬이 놓친 심각한 오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죽은 흙이므로 스스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형 인간’은 있겠지만 ‘존재’는 오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때만 가능하다. 하물며 소유이랴. 아, 의도는 다소 다르겠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행복해질 수 없다’는 프롬의 말은 백번지당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 2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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