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G뉴스/문화읽기

바벨론의 교육과 참 교육

은바리라이프 2011. 8. 27. 16:18

바벨론의 교육과 참 교육


저자: 생애의 빛 (1989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진리와 기별을 교회 안과 세상에 전파하기 위하여 출판 사업과 테잎과 텔레비젼 방송을 해오고 있는 자영 선교 기관)
 

세계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은 나라를 꼽으라면 한국이 단연 최고일 것이다. 그리고 자녀를 둔 대한민국의 부부 어느 누구에게라도 생애의 최대의 목적과 관심사가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면 그들의 대답은 단연 “자녀 교육”일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부모들을 보면 그들만의 삶이 거의 없는 듯 보인다. 모든 것이 ‘자녀 교육’ 위주이며, ‘자녀 교육을 위해서’가 그들의 삶의 우선이다. 그런데 한국 부모들이 그렇게 ‘자녀교육’에 치중하는 이유를 심도있게 살펴보면, 물론 사회 제도가 높은 교육 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뒤에는 사회적인 체면을 중요시하는 부모의 태도와 자녀들을 통해 자신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려는 부모의 보상심리가 많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자녀가 좋은 직장과 높은 보수와 명예를 얻으면 부모의 위신도 덩달아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사회적 통념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거의 모든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그들의 최고의 열정을 쏟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도 (미국이나 한국을 막론하고) 예외가 아니어서 한국 부모들 사이에 자녀교육에 대한 이상 열풍이 불고 있는 현실을 볼 수 있으며, 참 교육의 개념이 희박해 지고 있다. 아니, 교인들이 알아야 할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참 교육의 의미와 원칙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리하여
참 교육의 의미를 떠나 이 세상의 학제를 따라 우리의 자녀들을 교육시킨 결과, 많은 청년들이 신앙을 잃어버리고 교회를 속속히 떠나고 있는 현실을 본다. 아니,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수년 동안 다닌 학생들 중에서조차도 많은 수의 청년들이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신앙도 졸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설사 교회에 남아 있는 청년들이라 할지라도 교회 청년들의 신앙의 경험과 지식은 너무나 피상적이며, 단순한 신앙을 잃어버린 혼돈과 의심 위에 그들의 신앙의 탑을 쌓고 있을 뿐 아니라, 확고한 신앙관의 부재로 인해 표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참 교육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성경과 선지자가 말하는 참 교육의 원칙이란 무엇인가?

가장 고상하고 참된 교육이란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신성과 연합하여 죄를 이기고, 창조 받던 당시의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구원을 얻는지에 대한 능력을 가르치고 얻게 하는 것이며, 예수께서 인성을 쓰시고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자신을 부인하고 희생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셨는지를 배워 우리도 그와 같은 생애를 살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높은 학위와 지식을 갖춘, 그리고 훌륭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그러나 똑똑하고 지식이 많고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 보면, 많은 경우에 그들이 가진 지식으로 세상에 공헌하려는 생각이나 마땅히 인류와 세상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사랑과 사명과 책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다만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하면 더 나타낼 수 있으며, 더 즐겁게 할 수 있고, 더 가질 수 있고, 더 편안히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는 이기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세상의 교육은 사람을, 흐뭇한 인류애를 가진, 사회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기를 즐기는 진정한 인격체로 만들기 보다는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우월감에 찬 편협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기가 훨씬 쉽다. 왜 그런가? 그것은 교육의 진정한 본질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전인적이어야 하는 교육이 지식 위주로 흐르는 편파적인 것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태초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진정한 교육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죄와 타락으로 인해 그 교육의 참된 근본이 바뀐 것이다. 특히 예외가 되어야 하는 교회내의 교육의 이념조차 변하여 세상의 교육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서글픔을 금할 길 없다.


교육의 역사와 변천


교육과 신앙과 부흥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먼저 미국의 초기 교육사에 대해 살펴보려고 하는데, 그 목적은 1844년 당시 밤중소리 재림운동이 미국에서 큰 능력으로 전파될 시기에 무엇 때문에 개신교회가 그 운동을 반대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교회들이 그렇게도 영적으로 죽어 있었으며 또한 도덕적으로 쇠퇴하여 있었는지, 그래서 왜 이 세상의 개신교회가 그 재림 운동의 본래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했는가 이유를 밝히고, 불원한 장래에 세상을 향해 증거하게 될 큰 외침의 시기에 접근해 가고 있는 교인들을 도와 저들이 범한 과거의 실수들을 다시 반복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에 있다.


개신교회사에 대해 간략하게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1844년 당시에 저들이 영적으로 쇠퇴하게 된 원인은 저들이 “참된 교육에 대한 과학”을 이해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 교육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인 교육의 원칙을 시행하는 데 실패함으로 저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별을 세상에 전하는 데 적합하지 못하게 되었다. 개신교회들은 짐승과 그 우상을 대항하여 개혁운동을 일으킬 세째 천사의 기별을 전하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저들 자신이 짐승과 그의 우상을 형성하는 교육의 원칙과 교리에 집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신교주의는 16세기경에 유럽에서 거의 진리의 빛이 사라지려 할 때에 탄생하였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땅을 마련하셨는데, 그 땅은 후에 개신교 주의의 원칙들을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요람이 된 미합중국이 되었으며, 이 나라로부터 구세주의 재강림을 선포하는 세계적인 마지막 기별이 전파되게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와 법왕을 피해서 종교의 자유를 위해 아메리카에 도착한 이들 개혁자들은, 교회와 주정부의 행정적인 면에 있어서는 법왕교의 교리를 부인했으나 교육제도에 있어서는 법왕교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자기들로 하여금 저희 본토를 떠나 먼 나라로 이민을 가도록 만든 바로 그 장본인인 법왕교회가 시행해 온 그 교육제도를 폐지하는 일에 실패한 것이 저들이 범한 가장 심각한 실수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이 고수했던 교육제도는 개신교의 형태는 갖추었으나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 정신은 법왕교의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신세계(미국)에 있던 청교도들의 학교들에 대해서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의 교육과정은... 라틴어와 헬라어와 고등수학을 많이 가르쳤으며, 일반적으로 인문학에 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제도는 럭비 이튼(Rugby Eton) 학교와 명성이 높은 다른 영국의 학교들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 제도는 거대한 교회제도(천주교)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하바드 대학의 초창기 학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던스터(Dunster)씨는 그의 저서에서


“하바드 대학의 초창기 발전 단계부터 그 대학의 교과 과정은 영국대학의 교과 과정들을 거의 그대로 모방했다. 그들은 영국에 있는 캠브리지 대학을 너무나도 비슷하게 모방하였기 때문에 역사가는 하바드를 미국의 캠브리지라고 불렀다.”


영국의 대학들이 법왕교에 의하여 창안된 교육제도들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미국 독립전쟁 이전의 윌리암 엔 메리 대학(William and Mary)의 교육과정에 대해 분(Boon)씨는 “모든 교육과정은 영국의 것을 쏙 빼닮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 후에 설립된 학교들은 먼저 설립된 학교들의 학제들을 그대로 모방했다. 예일대학이 영국에 있는 법왕교의 교육제도를 본따서 설립되었을 것이 당연한 것은 설립자인 엘리후 예일(Ellihu Yale)씨가 영국에 있는 학교들에서 20년을 봉직하였던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는 영국에 있는 학교들에서 특별한 연구를 하며 20년을 보냈다”(Boon, p 24~40).


교인들은 이 사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미국이 독립하기 이전,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 미국에 유명한 세 개의 대학이 세워 졌는데 이 대학들은 영국의 법왕교 교리를 피해 망명해 온 사람들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법왕권 세력의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교육과 종교와의 관계에 대해 무지하였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저들이 도망 나온 교회의 교육기관의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큰 희생을 치르고 종교의 자유와 개혁을 이루었으나, 반면에 그들의 목적에 어긋나는 교육제도를 그대로 허용하여 그들의 자녀들이 실제로는 그 교육제도로부터 영양을 공급받고 자라도록 만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의 성품과 그리스도인 경험은 그들(자녀들)이 받아먹는 지적 음식이 어떠한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만일 그들이 자녀교육과 교회 안에서의 개인적인 종교생활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이해했더라면 이러한 법왕교의 교육제도는 도입하지 않았을 것이며, 개신교의 범주 안에 수용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런 교육제도를 통째로 없애 버렸을 것이다.


교육사에 나타난 몇몇 사실들은 옥스포드, 캠브리지, 이튼, 럭비 대학의 교육제도들이 법왕교의 교육제도를 모방하였다는 것과, 또한 뉴잉글랜드의 개혁자들이 저들의 학교를 세울 때에 위에 언급한 학교들을 모방하였다고 하는 것들을 분명히 밝혀주는 바, 이들이 미국에 있는 교육제도에 법왕권의 씨앗을 심은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대학들은 대부분 파리대학의 제도를 모방하였는데, 파리대학은 신학적인 지식을 배우는 중심지였고, 법왕으로부터 많은 특권을 받아 누리므로 법왕권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대학이었다.

16세기의 유명한 개혁자 루터와 멜랑톤은 일찌기 올바른 그리스도인 교육 없이는 영구적인 종교개혁을 이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였다. 이들 개혁자들은 법왕교회의 힘이 그 교육제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교육의 급소를 쳐서 상하게 하여 법왕교로 그 무릎을 꿇게 하였다. 이 개혁자들은 강력한 그리스도인 교육제도를 계발하였고, 그리스도인 학교 제도를 설립하여 그 자녀들로 개신교도들이 되게 하였다. 교육과 종교에 있어서 감행된 이 놀라운 혁명은 한 세대, 즉 한 사람의 당대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 교육운동이 지녔던 능력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한 역사가는 여러 유럽 국가들을 예로 들었다. “그 나라의 귀족들은 위텐버그에서 공부하였고, 그 땅의 모든 대학들은 개신교도들로 가득 찼다... 천주교에 남아 있는 인구는 1/30도 안되었다... 천주교도들은 그들의 자녀들까지라도 천주교 학교들로부터 빼내었다... 그 당시 독일에 있는 교사들은 거의 예외없이 모두 개신교도들이었다. 그 당시 자라나는 세대의 모든 자녀들이 그 교사들의 발 앞에 앉아 맨 처음 배운 것은 법왕권에 대한 증오심이었다”(Von Ranke, p135).


종교 개혁자 중 특별히 멜랑톤은 교육사업의 진전과 훌륭한 그리스도인 학교들의 건설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그는 “종교란 학교들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참된 교육 사업은 하나님의 사업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많은 학교들을 세우는 중 1528년에 독일의 여러 학교들을 위한 조직의 근간으로서 “쌕소니 학교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에는 “학과를 늘리는 것은 결실이 없게 할뿐 아니라 심지어는 해롭기 까지 하다...”라는 문제를 다루었으며,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책들로 부담을 줘서는 안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 학교들은 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영혼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여 실천했으며, 진정한 개신교의 정신, 즉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높이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방법과 능력을 학생들에게 교육시켰다.

그러나 루터와 멜랑톤의 사망 후, 그들이 하던 개혁사업을 이어받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 학교들을 증가시키는 대신 단지 신학적인 기교에만 몰두하여 당대에 이루어졌어야 할 위대한 사업이 그만 중단되게 되었다. 루터와 멜랑톤의 후계자들은 장래 선교사들이며 교회의 기둥들이 될 청년들을 교육하는 일에 실패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진 대부분의 시간을 대단치 않은 몇몇 신학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자신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몇몇 동료들의 견해를 비난하느라고 소비하여 버렸으며, 그들의 대부분의 정력을 유전적인 교리를 고수하느라고 소모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들의 신조를 구체화는 시켰으나 그들의 등잔에 기름이 되는 그리스도인 교육 이념을 상실하였고, 발전은 중단되었다.
개혁자의 후계자들은 “교육의 참된 과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식으로 약화된 개신교회는 다시 원기를 회복한 법왕교의 교육제도의 큰 힘을 저항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사단은 이 개혁자들의 눈먼 상태를 이용하여 자신의 교육자들을 개신교 학교 교육계에 침투하여 영향을 미치게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쟌 스텀이었다.
스텀은 스트라쓰버그에 있던 큰 개신교 학교에 법왕교의 교육제도를 실제적으로 도입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그가 신실한 개신교도로 가장하였기 때문에 루터의 뒤를 이은 개혁자들은 그가 채택한 교육제도를 좋게 생각했으며, 그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교육자라는 평판을 받게 되었고, 그의 학교는 독일에 있는 개신교 학교의 모델로서 개신교도들 가운데 아주 유명해졌고, 그의 영향력은 영국에서 미국까지 미치게 되었다.


스텀이 설립한 학교는 절반은 그리스도인 학교요, 절반은 법왕교의 학교였다. 그 학교는 중세기적 고전문학에다 약간의 성경을 첨가하고 효과를 내기 위해 교회의 교리를 쌘드위치하여 가르쳤다.
그들의 과정은 비실제적이며, 교육방법은 기계적이었으며, 암기하는 것이 중시되었다. 학문적인 죽은 지식이 사물에 대한 산 지식을 대신하였다. 학생들은 배우도록 강요받았으나, 보고 듣고 생각하고 증명하도록 가르침받지 못하였으며, 진정한 독립심이나 개인적인 완전을 이룩하도록 이끌림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한 교육은 죽은 지식들만 중시하였으며 노작 교육이나 남을 위하여 일하고 희생하며 봉사하면서 얻는 기쁨에 대하여서는 전혀 강조하지 않는 죽은 교육이었다. 그들은 실행할 수 없는 것들을 숭상했고, 실행할 수 있는 것들을 무시했다. 그들은 세상을 길고 긴 미사여구와 학구적인 것들로 채웠으나 무지하고 악으로 편만한 세상을 바로 잡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개신교의 학교들과 단체들은 잘못된 교육으로 인해 약해지게 되었으며, 천주교회가 제수잇 창설자인 로욜라에 의해 도입된 강력한 교육제도를 통해 공격을 가했을 때,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전의 천주교회는 루터와 멜랑톤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수천 명의 선교사들로 인해 시작된 거대한 개신교주의를 대항하기에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루터의 뒤를 이은 계승자들의 무능력한 지도 아래서 개신교회 학교들이 옛날 법왕교의 죽은 정통교리를 지향하고 있다는 약점을 간파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제수잇파들은 개신교의 발전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 그들의 교육제도를 장악할 목적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들은 개신교 나라들 안으로 침입하여 들어와 방대한 교육사업을 벌려 놓았는데, 그것은 제수잇 학교들을 많이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학교들은 곧 호평을 받게 되었고, 법왕교는 다른 어떤 방법이나 수단보다 이 방법으로 개신교회의 발전을 제지하였으며, 개신교회가 점령한 많은 지역들을 다시 되찾아 가게 된 것이다. 드디어 교육사업으로써 천주교회는 반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사업을 성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제수잇 학교들의 교수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암기하는 것은 자유로운 사고 능력과 명석한 판단 능력을 제어하는 한 수단으로서 강요되었다. 자제력을 가르치는 대신 엄격한 훈련을 시키는 그들의 교육방법은 서로를 불신하고, 밀고하며, 고자질하도록 하였다. 절대적인 맹종을 강요함으로 학생들은 저들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제수잇의 교사들은 경쟁심을 크게 야기시켰다. 경쟁심을 잘 유발시키는 교수는 가장 유능한 교수로 인정받았다. 학생들 중 가장 큰 명예는 동료 학생들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었으며, 가장 불명예스러운 것은 동료 학생들에게 짓밟히는 것이었다. 뛰어난 학생들에게는 상급을 주었으며, 그러한 교육 방법들은 과시하고 세상을 현혹시키는 상급을 추구하게는 하였지만 균형진 발달을 이룩하는 데는 무용지물이었다. 제수잇 교사들은 학생들의 모든 기능들을 균형지게 계발시키는 것을 목적하지 않았는데, 마음의 독창성이나 독립심,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진리를 사랑하는 것, 올바른 판단력을 형성하는 것 등은 소홀히 할 뿐 아니라 오히려 억압하였다.

 

부주의하고 무관심한 개신교도들을 정복한 제수잇파의 노력은 특별히 대학에 바쳐졌고, 이제 개신교도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제수잇 학교에 보내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교육적인 정복은 거의 모든 유럽에 걸쳐 신속하게 파급되어 갔다. 그들은 영국 청년들을 로마에 있는 제수잇 학교들로 보내 교육시킨 후에, 그들을 선교사와 교사들로서 그들의 본토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영국의 학교들에서도 그들의 세력이 점점 더 확고하게 되었으며, 또한 신세계인 미국에서도 그들의 세력을 미치기 시작하여 철저히 그들의 자리를 굳혔으며, 미국은 그들의 교육방법을 지금까지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뉴잉글랜드에 있던 최초의 학교 하버드는 처음에는 목사들을 양성하는 학교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성경을 배웠으나, 스텀이 시작한 교육제도를 모방함으로 개신교 미국이 법왕교의 교육을 따르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1844년 당시 개신교회가 하나님의 기별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절한 이유이다.
그들이 겉으로는 개신교회의 형태는 고수하고 있었으나 내적으로 교육제도는 여전히 법왕교의 생활양식에 젖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법왕교의 정신을 지닌 개신교주의 형태를 낳게 했으며, 이렇게 하여 그들은 바벨론의 딸들이 된 것이다.

우리는 그 당시 개신교회가 그리스도인 교육 원칙을 반대하므로 밤중소리의 기별을 증거 하도록 저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일에 실패하였다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교회의 자녀들이 1844년 당시의 사람들이 경험한 실패를 다시 경험하게 할 수는 없다. 만일 교회가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외칠 마지막 큰 소리 외침에 참여하게 하려면 말이다.
지금이야말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달리 교육에 대한 참된 과학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왕국에서 우리를 위한 자리를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 교회의 교육제도를 자세히 연구해 보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세상이 지향하는 교육과정을 똑같이 답습하고 있다. 교회는 교육사업이나 의료사업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영감의 권고들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우리 교회의 학교는 정부의 인가를 받지 말도록 하셨는데, 그 이유는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으려면 별로 필요하지 않고 쓸데없는 많은 과목들을 교과과정에 포함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앞에서 1844년 당시 개신교회가 하나님께서 성취하기를 바라셨던 사명과 책임을 이루지 못하게 된 원인은 잘못된 교육, 곧 법왕교로부터 미처 개혁하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한 잘못된 교육 때문이라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보배와 같이 귀중한, 앞으로 주의 재림의 큰 날 바로 전에 큰 외침에 참가하여 바벨론을 향하여 외쳐야 할 사명을 가진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그들이 바벨론의 관습과 교육과 사상에서 벗어나 있지 않는 한,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께서 마지막 교회 청년들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교육과정에 있어서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교회와 가정과 개인들이 교육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하여 참 교육의 개념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며, 부모들은 특히 우리 자녀들에게 참 교육을 주기 위해 혼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1844년 이전의 교육에 대한 개혁운동사를 보면, 많은 학교들이 세상이 따르는 인기있는 교육제도를 발전시켰으나, 교육계에 있는 꽤 많은 개혁자들이 교육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것을 알게 된다. 그 개혁에 대해 자세하고 바람직하게 역사가들이 기록해 놓지 않았으나, 약 60여개의 학교들이 개혁운동에 참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참된 교육을 실시하고 그 당시 세상에 기별을 전할 선교사들을 양성하고자 했던 것을 역사를 통해 알게 된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개혁하려고 했던 문제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것들은 성경의 위치, 고대 및 현대의 세상적인 고전문학, 선택과목과 학위 및 표창제도, 식생활 개혁, 학교의 위치, 학교 건물, 자급 선교인의 양성 및 평신도 운동 등이다. 지면상 몇 가지만 잠깐 살펴보자.

1. 성경의 위치 ; 그들은 성경을 원래의 위치로 환원시키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의 노력에 함께 하셨다. 그들은 성경이 최소한 고전문학과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하며, 성경이 첫째와 마지막 그리고 평상시 어디에서나 연구되어야 하며, 경시당하고 소홀히 여김을 받는 성경을 원래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도록 해야 한다고 외쳤다.

2. 고대와 현대의 세상 고전 문학 ; 세상의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교주의의 고전에 나타난 사상과 세상적인 저자들의 아이디어로 영감을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만일 고전문학이나 인본주의 사상을 연구하고 배우는 인문학이 그 제도가 성경의 정신에 의해서 고무되지 않는다면 저들이 하는 교육은 세상적인 교육의 특성을 드러내는 결과를 낼 것이다. 이러한 사상으로 개혁을 시도한 대학 중 특히 오벌린 대학 같은 데서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된 이교주의 고전문학을 학과에서 빼고 대신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된 성경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자연과학이나 미국의 국법, 역사 등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 이 일이 있은 지 60년 후 교회에는 선지자로부터 불신자들의 사상에 나타난 감상과 방종자의 표현을 경계할 것에 대하여 권고를 받았다.

3. 연구와 학위를 위한 선택과목과 학위, 표창제도 * 선택과목 : 세상교육은 학생들의 필요와 장래의 직업과는 상관없이 저들이 선정해 놓은 교과과정들을 공부하도록 강요하며 학교에서는 학생들 전체를 하나로 다룬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교육은 개인의 필요를 인식하며 개인의 품성의 완성을 위해 일한다.


* 학위 :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앞에 모든 인류는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야 한다. 배교한 개신교회의 지도자들은 교인들이 자기들의 가르침에 복종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교육적인 권위를 얻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와 같은 교육제도는 학위제도로 이끄는 딱딱한 이교의 교과과정을 채택하게 하였다. 배교한 개신교회의 교육제도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하트만씨는 “학위제도는 교황에 의해 기원되었다”고 말한다(Religion or No Religion, p.43).


인간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는 거룩한 원칙을 선포한 토마스 제퍼슨은 정부(미국)가 원하는 개혁과 일치를 이루는 교육제도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딱딱한 교과과정들과 학위제도”를 없앨 필요성을 알았고, 학생 각자가 필요한 과정을 선택하여 공부하고 자신의 분야에 대한 공부를 마쳤다는 증서만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그는 피력하였다. 제퍼슨의 뜻을 받들어 미시간 초대학장을 지낸 탑판(Toppan)교수는 학교(버지니아 대학)를 개혁하고 운영하려고 했으나, 개혁하는 일을 포기하라는 강압을 받았다. 법왕교는 인간이 동등하게 창조 받았다는 진리를 반대하고 그들의 뜻하는 바에 맞는 제도를 도입한 교육제도를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자유, 독립심, 창의적인 사고방식을 파괴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의 차별, 귀족정치, 제국주의, 집권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발전시킨다.

4. 경쟁, 표창, 상급 ; 학위제도, 표창 및 상급 등을 수여하는 것은 법왕교의 교육제도로부터 빌려 온 제도이다. 선지자는 “우리 교육기관에서는 세상이 하는 것과 다르게 할 것”을 권고 했으며, “칭찬이나 아첨을 사랑하는 마음, 높은 상급을 위해 경쟁하는 일, 공부를 잘했다고 해서 표창하는 일들은 장려하지 말아야 할 것”을 경고하였다. (R &H, Jan. 9, 1894). 경쟁심은 학생들로 하여금 하늘을 위한 성품을 준비하는 일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5. 음식물 개혁 ; “교육의 참된 과학”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신체를 주관하는 법칙을 알게 하며, 그 법칙을 사랑하도록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 학교는 적당한 식생활, 적합한 의복, 중요한 건강개혁의 원칙에 대하여 배우며 알아야 한다.

6. 학교의 위치와 노작교육 ; 법왕교의 교육제도는 중앙집권제라는 말로 특징 지워진다. 그들은 사람과 사람의 생각, 그리고 사람의 방법들을 높인다. 즉 자연적인 것보다 가공적인 것을 연구하며 그런 교육이념은 도시생활을 통해 최상의 결과를 낸다. 반면에 그리스도인 교육은 집중이 아닌 분산이 그 원칙이며,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높이며, 하나님의 하신 일을 높인다. 이와 같은 교육은 마지막 기별을 전할 수 있는 실제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농장이 있는 시골에서 시행해야만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다. 육체적인 노동은 지혜의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것이다. 청년들은 젊었을 때에 생애에 필요되는 생애의 실제적인 의무들을 배워야 한다. 최초에 교육의 개혁의 원칙에 따라 시작되었던 오벌린 대학에 있던 유용한 노작교육을 반대한 뒤에 들어 온 체육관 시설은 학생들의 영성과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경쟁하는 마음이나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에는 평화가 깃들 수가 없으며 또한 진정한 행복을 맛 볼 수가 없다. 남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오히려 이웃을 도와주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품성만이 진정한 행복과 생애의 기쁨을 맛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아니었던가! 이러한 성품은 교육을 통하여 그 사상을 심어 주고 고상한 습관을 가르치며 심어 주는 일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배도한 이스라엘을 개혁시키라고 부르신 엘리야나 메시야의 길을 예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침례 요한이 시골에서 바로 이러한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품성을 교육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늦은 비 성령을 통한 큰 소리 외침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떠한 청년들을 찾고 계실까?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참 교육을 시켜야 하는 특별하고 명확한 이유와 목적도 가지고 있다. 목적과 사명은 다름이 아니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품성과 예언을 이루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증인들을 필요로 하고 계신다. 증인들, 즉 하나님의 비밀(우리 속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 온전히 마음 속에 이루어진 사람들, 온전히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계명이 그 마음 속에 기록된 경험을 하는 사람들, 그들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는 사람들, 성령과 예수의 능력으로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버리며 극복하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 바벨론의 습관과 행습과 사상과 교육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필요로 하고 계시며, 마지막에 이 목적을 이룰 사람들, 즉 바벨론을 향하여 그곳에서 나오라고 큰 외침을 할 사람들과 청년들을 필요로 하신다.


그런데 이 사명을 이룰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하는 것이 참 교육이다. 많은 경우에
세상교육의 방침인 인본주의는 홀로 서는 법을 배우지 못하게 만들고, 독창적이거나 자신이 주위 환경이나 주위의 사람들과 다른 것을 스스로 허용할 수 없도록 만들며, 그룹 사이에서 일률적으로 같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짐승의 표가 강요될 때, 세상과 다르게 살며, 세상과 다르게 서서 하나님을 증거 하도록 부르심을 받으려면 세상적인 교육에서 탈피해야 한다. 즉, 세상과 다른 것, 또한 독특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충만한 경험을 하는 신실한 청년들이 생겨나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청년들을 생산해내는 참 교육이야말로 우리 교회에 시급한 일이며, 우리 교회의 운명이 달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참 교육의 원칙과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자!


“과거 어느 때와는 달리 지금이야말로 교육에 대한 참된 과학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우리를 위한 자리를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U.T, 198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