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십일조의 개관에 앞서 몇가지 언급해보길 원합니다.
신약시대에 십일조가 성경적이냐 아니냐에 대하여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어떤이들은 인용하신 말라기의 말씀이 구약시대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지 신약의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십일조를 정확히 드리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쳐 드리는 동기 자체를 불순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온 존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헌금문제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구절은 이것입니다.
“...먼저 자신들을 주께 드리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었느니라”(고후8:5)
십일조를 하고 하지 않고는 자신의 믿음대로 할 일입니다. 만약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시험하기 위하여 십일조를 하려면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을 떠났고 심지어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조차 드려지는 십일조가 없어 생계를 위해 제사장의 직무를 떠나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권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과 관계없이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것은 십일조이든 십의오조이든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드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물질에 대한 유혹으로 이 말씀을 붙잡는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 역시 돈을 위해 말씀을 악용하는 삯군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삯군 목자가 있는 교회에다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물론 더러는 삯군들이 자신의 배를 위하여 이런 말씀을 앞세워 교인들을 협박함으로 돈을 갈취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진리가 있는 교회에 속하여 그곳에 물질을 드리므로 그 물질이 하나님의 일에 선용되게 해야 하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교회를 삯군으로 치부하고 자신들만 참된 일꾼으로 가장한다는 점입니다.
사실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앞잡이들이 기존의 교회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쓰는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헌금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십일조는 많은 논란의 여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십일조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성경적이지 않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성경은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전에 이 글로 논쟁이나 다툼이 일지 않기를 바라며 함께 생각해보는 교제의 차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오래전부터 한번 다루고 싶었지만 예민한 주제라 망설이고 있었는데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 십일조의 유래
십일조에 대해서 제일 처음 마음에 떠오르는 말씀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14 장에서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롯과 재물 을 구출하여 오는 중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그를 맞이하며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노획한 재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
이 사건에 근거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란 이유로 신약의 성도들이 마땅히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과연 신약적 경륜과 일치하는가에 대하여는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신약의 사도들은 단 한번도 십일조를 교회의 실행으로 언급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교회에 보낸 서신 어느 곳에서도 십일조에 관한 암시조차 없습니다.
○ 구약의 십일조
1.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의 생계를 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의 일을 레위지파에게 드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십분의 일에 대한 첫 언급은 레위지파에 대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을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지파로 삼으시고 그들에게는 이스라엘 땅에서 아무 유업도 없겠고, 또 아무 몫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주께서 저들의 유업이시며, 저들의 분깃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18:20).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로 하여금 하나님의 직무를 잘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의 어떠한 일들도 하지 않고 오직 성막에서 여러 가지 직무만을 감당하게 하셨으며 그들의 생계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소산의 십의 일에 속한 것들을 레위지파에게 드리게 하여 레위지파로 하여금 성막 일에만 전념하게 하셨습니다.(민18:21)
2.십의 일에 드리는 것들로는 땅의 곡식과, 나무의 과실, 포도주와 기름, 소, 양, 염소 떼의 처음 낳은 짐승들이었습니다.(레27:30 ; 신12:17)
구약에서는 화폐가 아니라 농산물과 가축들을 십의 일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십의 일은 주로 레위인의 생계를 위해서 드렸기에 주로 농산물을 드렸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기뻐 받으시는 헌금은 우리가 어떠한 일이든지 정성을 다하여 땀 흘려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소산으로 주시는 것들을 드렸습니다.
○ 사복음서의 십일조
"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박하와 아나스와 커민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율법과 공의와 자비와 믿음의 더 중요한 것을 빠뜨렸기 때문이라. 너희는 이것들도 마땅히 행하고 또 저것들도 저버리지 말아야 하리라"(마23:23).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언급하고 계신 부분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구절이 신약 성도들이 십일조를 드려야 되는 직접적인 성경의 증거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신약의 성도들도 마땅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연 이 구절이 그런 뜻을 나타내고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시대가 어느 시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후에 다시 부활할 때에 율법이 폐하게 되고 은혜 시대가 열린다고 보면,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말씀하시는 때는 율법 시대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은 아주 당연한 말씀이라고 봅니다.
주님께서 이 구절을 말씀하신 이유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며 남에게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보이고자 하는 의도로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참 의도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의 참 중요성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율법의 목적은 그 말씀을 순종할 때에 "공의와 자비와 믿음"에 대해서 깨달을 수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저들에게 율법의 참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결론을 내리시기를 율법의 십일조도 행하고 또한 율법의 목적인 "공의와 자비와 믿음"도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위 구절이 선포된 때는 은혜 시대가 아닌 율법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도 십일조를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이지 결코 신약의 성도들을 위해서 말씀하신 구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은혜 시대에서의 십일조
1. 신약 시대에서는 레위 직분이 폐지되고 십일조를 드릴 의무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교회가 탄생한 것은 베드로가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많은 이스라엘이 주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침례를 받아 주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의 복음 사역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으며, 수천 명이 모여서 주님을 위해서 날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리와 빵을 나누며 교제와 전도에 전념하였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초대 교회가 세워진 행적들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의 어느 곳에서도 십일조를 언급하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분들이 십일조가 성경적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단 한 구절도 십일조를 교회의 실행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십일조가 성경적이라면 신약 성경에도 반드시 기록되어 교회가 지켜야 할 양식으로 주셨을 것인데, 우리는 이에 관한 어떠한 자취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레위지파에게 드렸던 십일조는 이제 더 이상 효력을 발생하지 않으며, 레위지파가 성전에서 드렸던 희생제사는 완전히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구약에서 드렸던 제사는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주님께서 단 한번에 자신을 드림으로서 이제 모든 사람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처럼 제사장에게 나와서 짐승을 잡아 레위 제사장에게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지금의 목사계급을 레위지파를 대치하는 것으로 합리화한다면 그것은 구약적 사고일 뿐입니다.
2. 초대 교회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와 재산을 다 팔아서 공동으로 소유하며 생활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모금에 대해서 언급하는 곳이 사도행전 2장 후반 절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구절에서 보면 모든 성도들이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소유와 재산을 다 팔아서 서로가 필요한대로 함께 쓰며 생활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물과 소유를 아끼지 않고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눔으로 아무도 부족함이나 더함이 없는 삶을 살았으며, 복음 증거와 말씀 교제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전념하여,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우며, 날마다 모여 빵과 잔을 나누며 성령으로 충만한 교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믿는 이들을 날마다 더해주시는 축복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본이야말로 하나님의 교회들이 따라야 할 양식입니다. 이러한 단순한 초대교회의 양식은 거듭난 믿는 이와 신약교회가 당연히 따라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교회들이 이러한 진리를 보지 못하고 십일조의 수준에서 만족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다.
○ 신약 교회 안에서 연보의 실행
신약에서는 십일조를 대신하여 새로운 단어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연보(모금)이라는 단어입니다. 초기 신약 교회에서 실행된 모금이야말로 믿는 이들이 따라야 할 헌금 양식이라고 믿습니다. 초기 신약교회들은 과연 어떻게 모금을 하였는지를 성경을 통하여 고찰함으로써 요즈음 실행되고 있는 십일조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신약 교회에서 모금을 최초로 하게 된 동기
아가보란 한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와서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온 세상에 흉년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가이사 클라디우스 시대에 엄청난 기근이 유대에 임하여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행11:27). 그러한 소식을 들은 안디옥 교회은 즉시 각자가 능력만큼 모금을 거두어 유대에 거하는 형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으며,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거둔 모금을 예루살렘 교회로 보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행11:29-30).
고린도 교회도 미리 모금을 준비하였다가 바울이 보낸 신실한 형제를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로 위로금을 보냈습니다(고전16:1-3).
우리는 성경에서 최초의 헌금에 관한 구절이 모금에서 비롯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들은 극심한 환난과 핍박과 기근으로 인해서 지역 교회들이 어려운 생활에 처해 있을 때 서로의 어려움을 도와주기 위해서 모금을 하였습니다. 이 모금은 성도들이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자세로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마음이 감동이 되는 되는대로 모금을 하여 지역 교회들이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각 지역의 교회들을 다니면서 교회에서 성도들이 모금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을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2. 신약교회에서 드린 연보(헌금)의 방법
가. 번성케 하신 대로
"매주의 첫날에 너희 각 자가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신 대로 따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는 모금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전16:2)
바울 사도는 반드시 모금(헌금)은 자신의 처지에 맞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곧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신대로 감사함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주의 첫날에 주님께 나와서 자신에게 베푸신 주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고, 매일의 삶 가운데 영과 혼과 몸을 지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참 모금의 자세로 가르칩니다.
나. 자원하여
" 먼저 할 마음만 있다면 사람이 가진 대로 받으실 것이며,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이 말씀은 구약에서 드렸던 십일조와 상반되는 구절이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성경적이라면, 성경은 분명하게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려야 한다고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말씀에서 보듯이 신약에서는 성도의 개인 양심에 따라 헌금을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스스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와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므로 자신의 형편과 소득에 따라 마음의 감동으로 믿음의 분량만큼 주님께 드릴 때에, 주께서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약에서는 자원하는 마음이 아닌 율법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십분의 일을 레위족속에게 드렸던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 율법에 순종하여 십일조를 무조건 드려야 했지만 신약에서는 오직 기쁨 가운데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께 헌금을 드리는 것이 성경적인 모금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신약은 은혜 시대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구약의 율법 시대와 같이 십일조를 드려야만 된다면, 그것은 자원하는 마음보다는 명령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모금을 강요하지 않으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지 않은 모금은 결코 주님께서 받으시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고후9:7)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모금을 드리는 자가 자신을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이 생겨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자신이 가진 소득에서 얼마를 믿음에 따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주님께서는 기뻐 받으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 마음에 정한 대로 기쁨으로 드림
" 각 사람은 미리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는 하지 말아야 하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드리는 자를 사랑하심이라"(고후8:7)
이제 결론적인 구절에 도달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모금에 대한 기준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금의 기준에 대하여 "마음에 정한 대로"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날마다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고, 모든 일들을 형통하게 해 주시고, 내게 주시는 소득에 대하여 하나님께 자원하여 자신이 마음속으로 얼마를 낼 것인가를 정하여 즐거이 내는 성도들을 주님께서는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십일조를 잘 내는 사람은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교회에서 인정받게 되며, 또한 말라키에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창고에 가득 채워 넣으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어 엄청난 복을 채워 주 실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십일조를 즐거이 내는 사람은 엄청난 축복을 받을 것으로 가르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인하여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결국 그 십일조로 인해서 시험을 받게 되며 연약한 자들을 정죄의 올무에 묶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르침은 헌금의 참된 의미를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고 하는 기복 신앙을 심어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은혜 아래의 연보가 아니라 법 아래의 헌금으로 끌어 내릴 수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크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이 먼저 선행되어 주님께 드릴 때에 그 헌금은 주님께서 받으시고 분명히 우리의 부족함을 풍성히 채워 주실 것입니다.
라. 연보를 드린 성도의 축복
성경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필요에 따라 모금을 할 경우에 즐거이 기쁨으로 내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뿌린 그대로 다시 주님께서 그 사람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인색하게 뿌린 사람은 반대로 인색하게 거둘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인색하게 심는 자는 인색하게 거둘 것이요, 넉넉하게 심는 자는 넉넉하게 거둔다는 것이라" (고후9:6).
주님께서는 또한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우리의 필요를 넉넉하게 채워주시며, 우리가 주님의 선하신 그 일들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자 더 후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고후9:8).
○ 성경적인 연보의 사용
1. 교회와 교회간의 균등한 생활을 위해서 어려운 교회를 지원함
신약에서 최초로 모금을 하게 된 동기는 어려운 교회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형편을 자신들의 형편과 균등하게 하기 위해서 비롯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일들을 섬김의 직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거듭난 성도들이 다 마땅히 해야 할 직무란 것입니다.
“이는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충족시켜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인하여 넘쳐나기 때문이라."(고후9:12).
다시 말하면 모금은 성도를 섬기는 방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교회에서 모금을 하여 제일 먼저 써야 될 곳은 어려운 교회들을 지원하여 그들이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없도록 서로가 도와주어야 될 것입니다
" 균등하게 하려는 것이니 지금은 너희의 풍족함으로 그들의 부족함을 보충함으로써 후에 그들의 풍족함으로 너희의 부족함을 보충하여 균등함이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후8:14)
2. 복음의 전도자들(선교사)을 지원함
우리가 직접 복음 전도자가 되어 복음을 전할 수 없다면,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것이 복음에 빚진 자들의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교회에게 두 번째로 중요한 사역은 복음 전도자들을 도와줌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지역들을 다니면서 복음 전도 여행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활을 지원하던 교회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교회들의 헌신적인 섬김의 직무를 통해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다른 교회들에게 삯을 받은 것은 그들에게서 탈취한 셈이니라"(고후11:8)
"마케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충분하게 채워 주었음이니라 ....."(고후11:9)
왜 우리는 모금(헌금)을 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교회가 가장 우선순위로 하여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복음전도자(선교사)들을 지원하며 어려운 지역 교회들을 도와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어려움 없이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때, 주님께서는 그러한 교회의 모금을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3. 어려운 가정과 참 과부를 구제하는 일과 선한 일들을 함
성경에 보면 교회 안에서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혼자 사는 참과부가 있다면 반드시 교회가 그 과부를 구제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교회에는 과부가 아니라도 여러 가지 환경으로 인해서 어려운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도와줌으로써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경제적인 부분으로 인해서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먼저 믿는 가정을 먼저 돌보고 나서 어려운 주위의 사람들을 구제하여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일조와 신약의 모금에 대해서 개관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관점에 보완이 필요 없다고 단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은혜 시대에서는 오직 성도의 양심에 따라 하나님께 자원하여 자신에게 주신 형편에 맞게 주님께 헌금을 내는 것이지, 강요나 억지로 드린다면 결코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 형편에 맞게 기쁘게 헌금하는 사람에 대하여 주님께서 반드시 뿌린 대로 그의 모든 삶을 넉넉하게 해 주시며 주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게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소유가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이 직무를 잘 감당하여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먼저 자신들을 주께 드리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었느니라”(고후8: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