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식 기자, 태국 선교 현장을 가다] 두 남자가 싹틔운 ‘겨자씨 희망’
[2010.11.24 19:59]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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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 우본 라차타니 수해 지역 비행기로 서울에서 제주도 가는 거리였다. 태국 방콕 수완나폼 국제공항을 이륙한 지 1시간 만에 우본 라차타니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본 우본은 에메랄드빛 호반의 도시 같았다. 우기가 끝났지만 물이 빠지지 않아 도심 문강 다리 건너 저지대 평지는 거대한 호수가 됐다. 마치 비밀의 화원처럼 어디가 강이고 어디가 산인지, 물과 숲을 구분할 수 없었다. 우본은 예전부터 ‘연꽃이 활짝 핀 왕의 땅’으로 불린다. 그래서일까 전국에서 불상과 절이 가장 많다. 지난달 홍수 때문에 ‘다리 밑 동네’ 극빈지역 주민은 아직도 수상가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가뜩이나 수십 년간 잊혀진 땅인데 침수 피해까지 입어 고립무원이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회장 정정섭)가 지난 6월 10일부터 어린이개발사업(CDP)을 시작하면서 꽉 닫혔던 주민들의 가슴이 서서히 열리고 있다.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들의 얼굴에 미소가 되살아나고 있는 현장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문강은 우본 남쪽 외곽을 끼고 흐른다. 시내에서 살 형편이 안 되는 가난한 사람들이 나무토막과 판자 등으로 가건물을 지어 산다. 대부분 그날 벌어서 그날 먹는다. 어두워지면 적막강산으로 변한다. 언제, 어디서 폭행이나 살인 사건이 벌어질지 모르는 우범지역. 외지인들은 대낮에도 들어가기를 꺼린다. 술과 마약, 도박이 대물림되고 있지만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이곳에 겨자씨 같은 희망이 피어나고 있다. 한국의 홍성원(42·목사)씨와 허기동(45·선교사)씨 등이 중심이 돼 팀사역을 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느냐. 함부로 돌아다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밥숟가락을 놓을 수 있다. 좋은 말 할 때 물러나라.” 많은 이들이 걱정했다. 특히 현지 학교 교사들은 무모한 짓이라며 들어오지 말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며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난 17일 우본 국제공항으로 마중 나온 두 사람을 처음 본 순간 낮은 곳으로 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아대책 유니폼과 닳고 닳은 구형 휴대전화기가 그들이 지닌 전부였다. 허씨는 키가 165㎝도 채 안 돼 보였다. 군살이라곤 없다. 홍씨는 키 182㎝, 미국 유학 시절엔 몸무게가 100㎏을 넘긴 적도 있다고 했다. 문강 침수지역으로 향하기에 앞서 두 사람은 현지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나 솔직히 두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더 궁금했다. “남서울교회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새 교회를 개척한 홍정길 목사님이 제 사촌 형님입니다. 저의 유일한 후원자죠. 매달 선교헌금으로 10만원을 꼬박 보내주시거든요. 2005년 8월 결혼식 주례를 서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동생의 주례를 선거죠.” 홍성원씨는 1968년 9월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그가 태어나기 한 달 전, 대동면 덕산교회 종탑을 세운 이튿날 새벽기도를 마친 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홍 목사 부친과 백부는 당시 함평 일대에서 20여 교회를 지었다. 그는 2남4녀 중 막내다. 이 중 5명이 목회자다. 어머니 유보영(78) 권사가 막내아들을 낳고 사도바울처럼 5대양 6대주를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는 광주 삼일고교 2학년 때 선교사의 길을 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서울 상계동 한국성서대를 나왔다. 번역 선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어서 9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유학 중 잔디 깎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전 프로골프 선수를 만나서 골프를 배웠다. 2003년엔 미국 프로골프 티칭 프로 대회에서 3등을 했다. 270명이 참여했는데 7명이 뽑혔다. 한국인은 유일했다. 2004년 귀국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골프만으로도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위에 계시는 분(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듬해 기아봉사단 훈련을 받았다. 이어 방콕 은혜국제학교에서 3년 동안 사역을 마치고 우본으로 향했다. 베테랑 선교사 허씨를 만난 것은 홍씨에게 행운이었다. “허기동 선교사님을 이름만 들었지 한 번도 뵌 적이 없었어요. 우본 공항에 내려 한참을 기다렸는데 보이지 않았어요. 콧수염을 팔자로 기른 타이족 같아 보이는 분일 줄이야 몰랐지요. 설마 했는데 허 선교사님이었어요.” 두 사람의 공통분모는 고등학교 때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강원대 재료공학과 출신인 허 선교사는 학교로부터 대기업 등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추천장을 받았다. 하지만 다 내려놓았다. 선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 서울로 올라와 선교훈련원(GPTI)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직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다행히 당시 학습지 회사에 입사했다. 학습지 훈련원 생활이 끝날 무렵,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는데 지구장(계장) 자리를 줄 테니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불광동에 있는 한 수양관에서 정정섭 회장의 강연을 들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어딘가에서 긴급 재난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의 소중한 선택이 소중한 생명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허씨는 이날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라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 그로부터 허씨는 1년 정도 간사 생활을 거쳐 94년 태국의 시사껫 푸씽 콕짜른 마을에 정착했다. 크리스천이 한 명도 없던 마을에서 성경공부반을 만들어 복음의 밭을 갈았다. 마침내 98년 현지인들에 의해 콕짜른 교회가 세워졌다. 허씨는 “내년이 되면 6년 전에 조성한 고무농장에서 첫 수확의 기쁨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간단한 통성명과 자기소개가 끝날 무렵 문강 다리를 지났다. 갈래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자동차가 소용이 없었다. 작은 길은 시내가 됐으며 큰 길은 하천으로 변했다. 소와 아이들이 뛰놀던 드넓은 들판은 물속에 잠겨버렸다. 길을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통나무배였다. ■ 후원안내 ARS: 060-700-0770 계좌: 국민은행 059-01-0536-352(예금주: 기아대책) 우본(태국)=글·사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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