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격투기에 대한 목양적 관심
| 글쓴이 : 최성수
이종격투기는 서양의 격투 스포츠로서 우리의 전통 사회에선 아직 낯선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 현대 문화에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예컨대 고인이 된 홍콩의 영화배우 이소룡과 각종 쿵푸 영화에 보인 높은 관심과 이미 오래 전부터 각종 무술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보여 왔다. 그뿐 아니라 국내 영화 <친구>, <조폭 마누라>, <달마야 놀자>, <가문의 영광> 등을 통한 ‘조폭 신드롬’은 싸움의 문화가 안방에까지 침투할 수 있게 했다. 또 드라마 <야인 시대>를 통해 정치 깡패라는 김두한의 싸움질을 담은 생애를 정치사적으로 새롭게 조명하려 했다.
한국 영화사에서 한 획을 그었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북한 인민군 포로들을 상대로 생존을 위한 싸움을 자행하고, 그것을 즐기는 국군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일본에서 전설적인 투사로 알려진 최배달의 생애를 그린 영화 <바람의 파이터>는 장르가 다른 무술끼리도 최고수를 가리는 싸움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얼마 전에 개봉된 영화 <쿵푸 허슬>에 대한 관심도 역시 격투 스포츠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문화적 쇼크가 다가오다
지난 2003년 4월 26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국내 처음으로 이종격투기 대회로서 실전 지향의 종합격투기대회로 명명된 스피릿 MC(Spirit Martial Challenge) 결승전이 열렸다. 당시 도올 김용옥은 경기를 관전한 후 그 충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가 여태까지 믿어왔던 모든 무술에 대한 수도적 신념이나 화려한 상상이나 르카프의 기술, 그 모든 신화를 여지없이 산산조각 내버리고만 불행한 역사의 한 토막이었다”(<문화일보> 2003. 4. 30). 동양적 사고에서 바라본 무도가 싸움질로 변한 듯한 것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일종의 문화적 쇼크다.
문화적 쇼크에도 불구하고 서울 삼성동 오크우드호텔 지하 1층에 이종격투기 전용장인 ‘김미 파이브’가 세워졌다. 500여 명의 남녀가 술과 음악과 더불어 이종격투기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지하 공간에 격투기 링이 마련되고, 관중들은 그 안에서 피를 튀기며 싸우는 선수들의 처절한 투쟁을 보며 열광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볼 수 있듯이, 마치 로마 시대의 원형 경기장에서 검투사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모습을 보고 열광하는 로마 시민들을 보는 듯하다.
격투기의 역사와 전통
일본에서 도입된 이종격투기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표현하면서 혹자는 ‘토네이도급 바람’이라고 할 정도로 이종격투기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은 거의 폭발적이다. 이것은 공영 방송국이 이종격투기의 폭력성을 근거로 방영 금지를 결정했을 때 나타난 네티즌들의 분노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서희진의 논문 “이종격투기에 반영된 사회 문화적 코드 읽기”(한국스포츠사회학회, 2004, pp61~71)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이종격투기를 격투 스포츠와 무술계의 생존 전략과 상업적 흥행이라는 소비 사회의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양산한 잡종적 성격을 지닌 경기로 규정한다. 따라서 그는 격투 스포츠 혹은 무술 발전의 이면에서 시대 문화적 상황과 사회 문화적 수요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그리스의 판크라티온(레슬링과 복싱의 혼합 형태),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각종 경기(검투사나 굶주린 사자와의 싸움) 등은 현대 격투 스포츠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전쟁 혹은 참전 용사들의 용맹을 북돋우기 위한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과 무관한 시대에 이종격투기가 유행하게 된 이유를 사회 문화적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규명해 보려는 노력은 당연하다.
과거 히틀러는 스포츠를 이용해 우민화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스포츠의 정치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부각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무엇이 격투 스포츠인 이종격투기에 대한 열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질문해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원인을 사회 문화적 상황에서 찾아보자.
인간 안에 잠재된 폭력성에 대한 경고
각 나라에 형성된 다양한 격투 스포츠에 한 가지 공통된 동기가 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 생존을 위한 싸움이 격투기로 발전하고, 또 스포츠 문화라는 이름으로 구경거리가 된 것이다. 실전적인 경기로 인해 대단히 흥분된 분위기에서 격투가 진행되고, 관객들은 극도의 흥분된 상태에서 긴장과 이완을 경험한다. 다양한 공격 기술이 사용되기 때문에 경기 진행을 예측할 수 없어 흥미가 더해지고, 이로 인해 관객들의 흥분은 절정에 이른다. 더욱 극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관객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선수들의 경쟁은 더욱 극단화된다. 빠른 승부와 분명한 승패의 결과로 인해 생존 경쟁의 처절함이 그대로 나타난다. 참가 선수들은 물론이고 관중들 역시 심리적으로 직접 싸움에 참여하게 된다. 소위 대리 만족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이런 맥락에서 스포츠 학계는 이종격투기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로 흔히 세 가지를 거론한다. 보다 자극적인 볼거리를 통한 대리 만족을 추구하기 위함이고, 원초적 본능을 발산할 수 있는 통로가 되며, 문화적 상상물(만화나 영화 등) 등을 현실적으로 경험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내부에 잠재돼 있는 폭력성을 이종격투기에 대한 열광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폭력의 상품화 반대
기독교는 인간 내부에 잠재돼 있는 폭력성이라는 마그마(죄성)가 오히려 삶의 원동력으로 분출되기를 추구한다(사랑의 역사). 싸움이나 다툼을 피하고 오히려 온유하고 절제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면서 평화를 추구하기를 권고한다. 메시아를 심판주가 아닌 평화의 주님으로 증거하는 성경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격투 스포츠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아직은 기독교인들의 격투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에 대한 통계가 나와 있지 않지만, 문화 사역에 대한 책임감을 의식한다면 결코 간과할 없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최근 스포츠의 경향은 ‘관전 스포츠’에서 ‘참여 스포츠’로 변해 가는 추세다. 단순히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스포츠는 점점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 격투기를 스포츠로 인정한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종격투기 동호회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또 그 모임에서 실제로 이종격투기를 연습하고 실행하기도 한다. 전쟁이 없던 시기에 원시적 형태의 이종격투기에 대한 높은 참여와 관심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주목되고 있지만, 폭력이 대중화되는 계기로 작용해선 안 된다. 따라서 경각심을 늦춰선 안 된다.
현재 이종격투기는 다음과 같이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
첫째, 이종격투기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단순히 스포츠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포츠란 단순한 놀이와 달라서 일정한 규칙과 절차에 따라 승패나 우열을 가리는 놀이인데, 현재 이종격투기는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포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거 권투나 레슬링도 처음에 지하에서 이뤄졌지만, 경기 규칙을 갖추고 양성화되면서 조화로운 인간을 육성하는 교육적 수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현상으로 사회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격투기는 우리 안에 있는 폭력성을 반영한다. 이종격투기 방영을 금지하고, 스포츠로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지하에서 계속될 것이라는 네티즌들의 견해가 틀린 말은 아니다. 현재 이종격투기는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에서 음성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차라리 양성화시키자는 의견에 더 큰 설득력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스포츠로 인정된 권투가 스스로 그 폭력성과 폐해로 인해 관심을 잃게 되었듯이, 이종격투기 역시 동일한 운명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폭력성이 근원적으로 치료되지 않는 한 격투기에 대한 관심은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둘째, 상업화된 모든 스포츠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이종격투기가 갖는 가장 우선인 문제는 인격의 상품화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어떤 이유이든 상업적인 도구로 되어선 안 된다. 여성의 미모가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말아야 하듯이, 남성들의 용맹스러움도 인격의 한 부분으로서 결코 상품화되어선 안 된다.
셋째, 스포츠 문화의 힘을 이용해 돈을 벌고자 하는 상업 자본주의와의 결탁이다. 스포츠는 건전한 정신에 따라 건강한 인격 형성에 도움을 줘야 한다. 이것이 상업화되면 타락을 면치 못한다.
격투 문화 앞에 선 기독교
이런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인들의 주목을 환기시키면서 교회는 이에 대한 목회적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권위에 의존하기보다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과 컨텐츠로 접근하기를 권한다.
첫째, 우리 안의 폭력성은 그것이 아무리 대리 만족이라 하더라도 폭력을 통해 결코 잠재워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자극만 될 뿐이다. 폭력은 자신을 관철시키려는 의지가 비정상적으로 표현된 형태이다. 현대인들이 받는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은 가정이나 직장에서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것에 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또 인정되고 있음을 여러 가지 통로와 매개를 통해 강조해야 한다. 복음 선포의 정신에서 시종일관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행위보다 구원하시고 위로하시는 행위인 복음을 먼저 선포해야 한다.
둘째, 복음적 가치관을 확립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문화는 상업 자본주의와 깊이 결탁돼 있다. 찬양과 예배가 쇼맨십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교회 안에 물신론적 경향이 지배하면서 문화 상업주의의 정신에 오염된 결과이다. 복음에 근거한 가치관을 확립해야 한다. 특히 기독교 문화를 형성할 뿐 아니라, 기독교인은 스스로 사회에서 건전한 문화에 대한 강력한 수요자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한다. 세속 문화를 선도할 책임감이 있음을 강하게 부각시켜야 한다.
셋째, 기독교인들은 흥미와 재미 위주로 이뤄진 문화의 자극을 거부할 수 있도록 훈련돼야 한다. 예컨대 질 낮은 오락 프로그램 안보기 운동이 대표적인 것이다. 보통 이상의 자극에 한 번 빠져 들면 계속해 더 큰 자극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가 언제나 긴장과 흥분 속에서만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고요와 평안 속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위해 영성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넷째, 교회가 성도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건전한 스포츠 문화 육성 및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문화 사역을 기획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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