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사도행전

사도행전에 나오는 연설(설교)들

은바리라이프 2010. 7. 24. 20:36

외국과 팔레스타인 각 지역에서 오순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을 찾아온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방언하는 소리를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외국어를 배우지 않은 갈릴리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그들 중에 일부 사람들은 제자들이 술에 취해서 떠들어대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베드로가 11제자들과 함께 일어나서 그들에게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일반적인 연설(설교)들에 대해서 살펴보는 일입니다.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연설이 매우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을 "행전"(Acts)으로 부르는 것은 정확한 이름은 아닙니다. 이 책에는 그리스도, 성령, 또는 사도들의 행적뿐 아니라, 수많은 연설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주님의 행적과 함께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들(1:1)도 함께 기록했습니다.

  또한 그는 사도행전에서도 이 원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자그마치 19번이나 되는 중요한 연설(설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가말리엘, 에베소 서기장, 더둘로 등의 비기독인들이 한 연설을 제외하더라도). 이 19개의 연설 중에서 8개는 베드로가 한 것이고(1,2,3,4,5,10,11,15장), 스데반과 야고보의 연설이 하나씩 있으며(7,15장), 또한 바울이 한 연설이 9개 나오고 있습니다(13,14,17,20,28장에 나오는 5개의 연설, 22장,26장에 나오는 네 개의 변론을 위한 연설). 사도행전의 1/5은 베드로와 바울이 한 연설(설교)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스데반의 연설을 추가하면 약 1/4정도가 연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연설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동안 사도행전에 나타난 연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토론을 해왔습니다. 정말로 이 연설들이 각 사람들이 말한 것인가? 그리고 그 연설의 내용은 정확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학자들은 여러 가지 답변을 제시해 왔습니다. 이러한 답변들을 요약해 보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사도행전에 나오는 연설은 각 사람의 연설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첫째로 일부 학자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연설들이 원래 각 사람들이 했던 연설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이러한 연설들이 그대로 기록된 것이라면 그 내용이 너무 짧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한 연설은 누가의 기록대로라면 3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또한 바울이 아덴에서 한 연설도 누가의 기록대로라면 1분 30초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둘째로 누가는 베드로가 한 설교 끝에서 "이밖에도 많은 말을 증거하면서"(40절) 계속해서 무리들을 권면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베드로가 사도행전에 기록된 내용 외에도 다른 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당시에는 속기가 발달하긴 했지만, 지금과 같은 기록 장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그대로 받아 적고 그것을 보전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가가 직접 현장에서 그 설교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청중이 전해준 설교들을 듣고, 그것을 요약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연설들은 각 사람들이 한 설교를 그대로 기록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 사도행전에 나오는 연설은 누가가 만들어낸 것이며 신뢰성이 없다.
  둘째로 비평주의자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연설들이 누가가 만들어 낸 것이며 신뢰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현대비평주는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영어권의 캐드베리와 독일의 마틴 디벨리우스가 발전시키고 보급시킨 입장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때문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연설의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첫째로 그들은 이 연설들은 모두 누가가 사용한 문체와 어휘들이 사용되고 있고, 많은 연설들이 모두 같은 형식과 같은 신학적인 강조점, 그리고 같은 성경 인용구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비평주의자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연설들이 누가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사도행전이 연설을 말들어 삽입하는 당시의 역사가의 관례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대 역사가들은 이야기 안에 주인공들의 연설을 삽입하고, 그 연설을 마음대로 지어넣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헬라 역사에 나오는 연설들은 헬라 연극의 합창처럼, 설명적인 기능을 담당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예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주전 5세기 펠로폰네서스 전쟁의 사가였던 투키디데스(Thucydides)였습니다. 또 유대인의 예로 일반적으로 인용된 것은 요셉푸스였습니다. 그는 실제로 투키디데스보다 훨씬 많은 내용을 변형한 흔적이 보입니다. 케드베리는 이러한 실례를 들어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연설은 누가가 상상으로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이 당시 헬라와 로마 역사를 기록하는 관례였으며, 기독교 역사가인 누가도 이러한 관례를 따랐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사도행전의 연설들은 각 사람의 연설을 믿을 만한 방법으로 요약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앞에서 말한 두 가지 극단적인 방법들을 거부하고, 사도행전의 연설을 각 사람들이 한 연설을 믿을만한 방법으로 요약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첫 번째 견해가 옳지 않은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두 번째 비평주의자들의 견해 역시 세 가지 이유로 옳지 않습니다. 첫째로 비평주의자들은 고대의 모든 사료들을 공정하게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요셉푸스와 일부 헬라 역사가들은 그들이 기록한 연설들을 역사보다는 수사학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투키디데스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곰(A.W. Gomme)은 투키디데스가 인용한 구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사건들(연설들과 행해진 행동들 모두)을 가능한 정확하게(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말하려고 애썼다." 와드 가스크(Ward Gasque)박사 역시 주전 2세기의 헬라 역사가였던 폴리비우스(Polybius)가 "역사가들이 연설들을 마음대로 만들어 내는 관습을 여러 번 명백하게 비난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스코 박사는 "연설들을 마음대로 꾸며내는 것은, 그레코 로마 세계에서 역사가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관습이 아니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둘째로 비평주의자들은 누가에 대해서도 역시 공정하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누가는 서문에서 자신이 주의 깊게 연구 조사한 역사를 쓰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연설들을 날조했다는 비평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러한 증언과 충돌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역사가들이 연설을 날조했기 때문에, 누가도 연설을 날조했다는 가정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가는 그의 글의 주된 출처였던 마가복음을 진정으로 존중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실하게 기록했던 것처럼, 사도행전에 기록한 연설들도 성실하게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바울과 동행하면서 바울이 했던 많은 연설들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설교들도 다른 목격자들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에, 다른 역사가들보다 훨씬 더 원형에 가까운 기록을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셋째로 비평주의자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연설들의 다양성과 적절성을 평가하는 데 공정하지 못했습니다. 행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를 읽으면, 우리는 사도들에 의해  복음이 최초로 공식화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리델보스(H. N. Ridderbos)는 이러한 설교가 후대에 발전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있는 점에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그는 이 연설에 나온 기독론적 용어와, 성경을 인용하는 방식이 옛 선지자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누가는 헬라 로마 사가의 관례를 따르기 보다, 옛 선지자의  전통을 따르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온느 바울의 연설을 읽어보면 그 설교의 적응성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와(13장), 루스드라의 옥외에서 이방인들에게 한 설교(14장),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철학자들에게 한 연설(17장), 그리고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한 연설(20장)들은 각각의 내용은 달랐지만, 그 설교는 각 교회의 상황에 매우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누가가 그토록 각 상황에 적합한 설교를 만들어낼 정도로 풍부한 신학적 통찰력과, 역사적 감각, 그리고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누가가 바울이 했던 연설들을 듣고 그것을 적절히 요약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브루스가 말한 것처럼 바울이 했던 연설들은 대체로 연설자와 청중과 그 연설을 했던 상황에 적합했습니다. 브루스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연설들은 역사가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행해진 연설을 요약한 기사이다. 그러므로 이 연설들은 원시 기독교의 역사와 신학에 대한 귀중하고도 독자적인 자료라고 생각할만한....훌륭한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위한문

1. 사도행전에는 연설들이 얼마나 기록되어 있는가? 이 연설들은 각 사람들이 했던 설교를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인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비평주의자들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연설들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이러한 비평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지 않은 이유를 세 가지 들어보자. 

3. 우리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연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