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2. 알렉산더 대왕과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타인

은바리라이프 2010. 7. 24. 02:13

2. 알렉산더 대왕과 이집트의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타인

 

이수수(Issus)의 전투(기원전 333년)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하였으며 이 승리로 인하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마케도니아 병력이 파죽지세로 진군해 나가는 데는 경미한 저항을 받았을 뿐이다. 견고한 섬 요세인 티루스(Tyrus)는 처음에는 지탱할 수 있었지만 7개월 동안의 포위 공격으로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가자(Gaza)는 2개월을 버틴 후에 쓰러졌다. 이러한 저항들을 진압한 후 알렉산더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곧바로 이집트에 진군할 수 있었다. 승리의 왕은 내륙을 점령하는 데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그 임무를 그의 장군들에게 맡겼다. 유대는 아무런 저항 없이 파르메니오(Parmenio) 사령관에게 항복하였다. 페르시아 총독이 거주하던 사마리아는 페르딕카스(Perdikkas)와 그의 군사들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유대인들은 강력한 희랍 군대에 깊은 충격을 받고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지배자의 우월한 세력을 받아들였다. 유대인들은 평화적으로 항복하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지배 하에서 누리던 권리를 계속 하여 가질 수 있었다.

 

유대인 공동체가 누리던 권리의 상황에 대한 지배권의 변화에 따라서 외적인 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지만 온 나라 안에 희랍인들이 들어오게 됨에 따라 그들 내부의 생활은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미 그 이전에 희랍 상인들과 여행자들이 팔레스타인에 와 있었지만 이제는 희랍인들의 상업과 생활양식이 나라 안으로 어디에나 미치게 되었다. 아랍 민족들은 희랍인들의 영향력, 즉 희랍인들의 예법과 문화 그리고 정신적 재산 등에 스스로를 개방하였다. 그래서 옛 페니키아와 블레셋의 후손들은 그들의 언어를 버리고 희랍어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하여 헬라주의 세계 속에 완전히 젖어들어 그들의 독자적 생활을 상실하였다. 희랍인들의 거주촌과 도시들이 건설되었으며 희랍인들은 기존 도시들 안에도 정착하였다. 정복된 요새 티루스에는 희랍인들이 새로 이주하였으며 저항을 하였던 사마리아 도시에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살았다. 많은 도시들에 희랍 이름이 붙여졌을 뿐만 아니라 희랍의 도시법이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희랍어를 통상 언어로서 사용하는 희랍인들과 직접적으로 이웃하여 살게 되었다. 희랍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야만인으로 서 생각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승전의 행군이 이른 모든 나라에서 상용되었던 외국인의 언어를 배웠다. 그래서 신약성경 시대에 팔레스타인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희랍어를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었다. 로마 수비대의 지도자와 대면할 때에는 희랍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많은 군중들 앞에서 변명하려고 했을 때 -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 그가 희랍어가 아닌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사용하는데 사람들은 놀랐다(사도 22,2). 분명히 그 사람들은 두 언어를 별로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언어와 더불어 헬라주의 문명이 또한 이 땅에 들어왔다. 왜냐하면 희랍 이주민들은 그들의 생활 유형을 가지고 왔으며 이러한 생활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희랍 건축물들이 생겨났다. 극장과 목욕탕이 여러 도시 안에 세워졌으며 경기장에서는 운동 경기가 개최되었다. 축제 때 식탁에서 식사를 함으로서 희랍 풍습에 동화되었다(마르14,18. 22). 희랍인들에 의하여 고도로 발달된 의술이 이용되었다(마르 5,26). 희랍인들이 대화 속에서 사상의 단계를 전개해 나가고 질문과 대답을 교대하여 문제의 해결을 찾으려는 것과 같이 유대인들은 토론하고, 교리 문답에서 神意신의의 진리를 묻고 설명하는 것을 배웠다. 이러한 예들은 유대인들 역시 새로운 상황에 어떻게 적응할 것이며 그 속에서 어떻게 바른 길을 찾아 낼 수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희랍인들의 우월한 문화와 문명에 대하여 많은 유대권에서 느꼈던 호의는 매우 광범위하였다. 그래서 기원전 2세기에 예루살렘에는 그들의 흠잡을 데 없는 법 때문에 유명했던 스파르타 사람들과 근친일 것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했던 유대인들이 있었다. 마카베오 1서에는 스파르타 왕 아레우스가 대제사장 오니아스에게 썼다는 편지가 문제가 되는데 이 편지에 의하면 사람들이 한 옛 날 문헌에서 스파르타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형제들이며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었다(1마카 12,21)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은 유대와 예루살렘 역시 페니키아와 블레셋처럼 완전히 헬라주의화 되었다는 것을 철저하게 알 수 있게 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기록되고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율법은 공동체로 하여금 옛날의 신앙을 지키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예배를 드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자기 민족을 선별하셨다는 의식을 갖도록 구속하였다.

 

기원전 323년 33세로 알렉산더 대왕이 갑자기 죽게 되자 신속하게 합병된 엄청난 제국은 정치적 혼란 속으로 빠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왕의 사령관들의 후계자 싸움으로 제국의 통일은 깨져 버렸다. 이집트에 주둔하던 총독 톨레메우스(Ptoremeus)는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제일 먼저 자기 권력의 소유로 만들었다. 그러나 시리아를 다스리던 안티고누스(Antigonus)가 톨레메우스와 싸워 팔레스타인을 빼앗았다.(기원전 315년) 그러나 안티고누스가 옛 페르시아 제국의 거의 전역을 얻을 수 있었을 때 알렉산더의 나머지 옛날 총독들은 그가 성공하는 것을 싫어하여 공동으로 그에게 대항하였다. 그 결과 톨레메우스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새로 갖게 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그 다음 1세기의 판도가 결정되었다. 그의 역사에 있어서 이집트와 바빌론 사이에 싸움의 원인이 되었던 팔레스타인은 이제는 헬라주의 국가가 된 이집트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그래서 헬라주의적인 영향이 팔레스타인 안에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페르시아 및 알렉산더 대왕과 마찬가지로 톨레메우스 역시 예루살렘 제의 공동체의 내적인 용무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지 않았다. 유대인 사회의 지배는 이집트의 헬라주의 군주의 승인으로 이해관계를 정하고 조종할 수 있었던 대제사장의 손에 놓여 있었다. 산헤드린에서는 예루살렘의 영향력 있는 가문의 우두머리들인 사제들과 장로들이 대제사장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유대인 최고의 관청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확실하게 주장할 수 없다. 그의 기원이 페르시아 시대로 소급될 수도 있겠지만 헬라주의 시대에 비로소 명백히 확인된다. 기원전 1세기에 사제들과 장로들에 이어 세 번째 무리로서 서기관들이 끼어들었다. 산헤드린은 이러한 구성 때문에 신약성경, 특히 수난 사화에서 자주 언급된다(마르10,33 ; 11,27 ; 14,43). 혹시 두 개의 그룹만이 언급되거나 -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마태21,45 ; 26,3.47) - 대제사장들만이 산헤드린의 대표자들로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면(마르 14,55)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모든 세속적인 일들이나 영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유대인의 최고 관청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관청은 대제사장의 통솔 아래 있다. 대제사장(Hohenpriester)의 사회로 유대 민중들이 처한 모든 세상적인 용무와 종교적인 용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회합한 이 유대인 최고 관청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