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시리아의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타인과 마카베오 독립전쟁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Antiochus) 3세(기원전 223-187)는 첫 번째의 시도를 실패하고 나서 3세기에서 2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팔레스타인을 이집트인들로부터 빼앗는 데 성공하였다. 톨레메우스의 군인들은 퇴각하고 그 땅을 시리아 인들에게 양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대인들은 적시에 세력 판도가 시리아 인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전쟁 동안에 시리아의 편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후 시리아 인들로부터 호의적인 대우를 받았다. 전투 중에 예루살렘이 입은 전쟁 손해를 복구하려고 하였으며 지금까지의 권리에 보다 더 큰 특권을 받았다. 즉 성전 의식에 드는 비용들은 일정한 한도에 이르기까지 국고에서 지불되었으며, 장로회의의 회원들과 서기관들에게는 면세의 특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호의적인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는 없었다. 시리아를 다스리던 셀류키드 왕조(Seleukiden)는 헬라주의화의 열렬한 대변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헬라주의 문화를 장려함으로써 나라 안에 있는 여러 다른 민족들을 밀접하게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광범위한 유대인 사회는 이러한 정책에 대립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사제권에서는 많은 헬라주의화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대제사장은 유대사회의 지도자로서 시리아 왕의 법률과 명령이 철저히 시행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또한 부과된 세금을 정확히 거둬들이는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인들이 돈을 더 많이 거둬들이려고 할 때 그들은 대제사장에게 그 문제를 부탁하곤 하였다. 기원전 175년에 안티오쿠스 4세가 시리아의 통치권을 계승하였을 때 예루살렘에는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사람 오니아스(Onias)가 대제사장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사제들 사이에 반대자들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의 동생 요수아(Josua)와 헬라주의화의 추종자들이 그의 반대자였다. 요수아는 그의 이름을 야손(Jason)이라고 희랍 식으로 바꾸었으며 세금을 인상하여 거둬들인 거액의 금액을 시리아에 바쳤다. 결국 오니아스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아 그 자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대제사장직의 교체가 빼앗긴 측의 항거 없이 이루어졌다. 오니아스는 몇 년 후 안티오쿠스에서 살해되었으며 같은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은 이집트로 도망가서 기원전 160년 경 톨레메우스의 원조로 레온토폴리스에 성전을 세웠다. 이 성전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본을 따라서 희생 의식이 집행되었으며 기원후 7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이 성소의 중요성은 미미하였다. 왜냐하면 이집트에 사는 유대인 사회 역시 계속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는 야손이 율법의 규정에 상응하게 성전 의식을 집행하였으나 그는 강력하게 헬라주의화를 추진하였다. 운동장이 건설되고 거기에서는 젊은이들이 옷을 벗고 운동을 하였으며 사제들도 거기에 참가하였다. 희랍인들이 할례를 비웃자 유대인들은 할례를 부끄럽게 여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수술을 하여 이를 제거하였다(1마카 1,15). 이는 바오로 시대에도 유대인들 사이에 자주 있었던 태도이다(1코린 7,18). 야손이 3년 동안 직무를 수행하였을 때 메네라우스(Menelaus)라는 사람이 예전에 야손이 그렇게 하였던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을 시리아 왕에게 주고 야손 대신 대제사장이 되었다. 대제사장의 직위는 매매할 수 있는 정치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한니발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동양에서도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로마인들은 이집트를 다스리는 톨레메우스 왕조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으나 시리아의 안티오코스에게는 적대적이었다. 안티오코스가 이집트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으나 로마가 그에게 중지하도록 함으로써 그의 계획은 좌절되어야 했다. 이집트에로의 진군이 실패한 후 예루살렘에서는 안티오코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직위에서 쫓겨난 야손이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무력으로 메네라우스를 몰아내고 대제사장직에 즉위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장악하였다. 안티오코스가 이러한 사건을 알고 매우 분노하여 쳐들어와서 다시 메네라우스를 복직시켰다. 메네라우스는 시리아 왕의 지지에 의해서만 그의 지위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가 전쟁으로 바닥난 국고를 충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강탈하였을 때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성전의 값비싼 기물들, 즉 번제 제단과 일곱 촛대 그리고 제상 등을 안티오키아로 가져갔다.(1마카1,20-24)
성소에 대하여 행해진 이러한 첫 번째의 만행이 있은 후 곧 두 번째의 더욱 가혹한 침해가 뒤따랐다. 몇몇의 저항에 부딪치기는 했으나 확고하게 기반을 구축했던 예루살렘과 유대의 헬라주의화는 이제는 강제로 시행되었으며 그럼으로써 유대인 공동체의 독자적인 생활은 끝장이 났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무너졌으며 옛 다윗 도시의 언덕 위에는 폭군의 성(Akra)이 세워졌다. 안식일을 지키고 자녀들에게 할례를 베푸는 행위가 유대인에게 사형의 협박으로 금지되었다. 왕의 감독관들이 이러한 명령이 준수되고 있는지를 감시하기 위하여 나라 곳곳에 파견되었다. 예루살렘의 번제 제단이 있던 자리에 이교도의 제단이 세워졌고 거기에서 최고의 신, 즉 올림피아의 제우스에게 희생 제물이 드려졌다(기원전 167년). 또한 돼지들이 희생 제물로서 봉헌되었다. 희랍인들이 이러한 행위를 모든 의식에서는 궁극적으로 한 분 하느님이 경배 받게 된다는 점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었고 그래서 야훼의 이름이 불려지든지 하늘의 바알이나 제우스가 불려지든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다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소의 모독은 비참한 폐허의 전율을 의미하였다(다니 11,31 ; 12,11). 이러한 사건 속에서 사람들은 마지막 때의 표징을 보았으며 그 이후에도 언제나 이 시대의 종말에 바로 앞서 드러나는 사건으로서의 폐허의 전율을 말했다(마르13,14). 이러한 과정들로 인하여 매우 위험한 위기가 유대교에 닥쳐와서 유대교가 끝장이 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선조들의 신앙을 버릴 수는 없었다. 다니엘서는 이러한 곤궁에 빠진 공동체에 대하여 위로하는 책으로 기록되었다. 여기에는 박해와 고난이 하느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곧 종말이 와야 하는 마지막 때의 표징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복종을 거부하고 기꺼이 고난과 죽음을 감수하였다(2 마카 7장).
지방의 주민들은 헬라주의 문화와 문명에 스스로를 개방하였던 많은 도시인들보다 더욱 집요하게 선조들의 신앙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서 시리아 정책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다. 리따에서 멀지 않은 모데인(Modei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돌발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외국 지배권에 대한 봉기가 불붙었다. 왕의 감독관들은 이곳에 와서도 유대인들에게 이방 제물을 봉헌하도록 강요하자 마타티아스라는 늙은 제사장 -그들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하스모네어(Hasmonaer)라고 불리는 가문의 가장- 이 제단 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려고 준비하던 한 유대인을 죽이고 희생 제물을 드리도록 강요했던 왕의 관리도 쳐 죽여 버렸다. 이 행위가 커다란 소란을 야기 시켰다.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은 도망하여 유대 광야의 산골 속으로 숨어야 했다(1마카 1,15-28). 여기에서 투쟁의 의지에 불타는 유대인 군중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광야에서 여기 저기 나타나 나라 안 도처에 세워졌던 이방 신전을 파괴하거나 배교한 유대인들을 징벌하기 위하여 소규모의 군사 행동을 하였다. 그 후 얼마 뒤에 늙은 제사장 마타티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가 戰士전사들의 지휘관을 이어받았다. 그는 별명을 "마카베오"(Makkabeer)라고 하였다. 마카베오는 "망치와 같은 자"를 뜻하는 듯하다(아람어의 makkaba는 망치를 뜻한다). 그는 유능한 투사로서 그의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적들로부터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는 더 이상 소규모의 게릴라 활동이나 습격을 못하게 하고 시리아에 대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므로 시리아인들은 방어하기에 급급하였다. 동방에서 파르테르(Parther) 유목민과 전투를 하고 있던 안티오코스 왕은 그의 장군 리시아스(Lysias)를 팔레스타인으로 보냈다. 유다는 그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고 계속되는 전쟁에서 시리아인들을 쳐부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개선 입성하여 더럽혀진 성소를 탈환하고 율법의 규정대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하였다. 기원전 164년 키스레브(12월) 25일에 제단이 새롭게 봉헌되고 일주일 동안의 축제로써 율법에 합당하게 예배가 다시 드려졌다. 이때부터 유대교는 매년 성전 봉헌(히브리어 ; 하누카, 요한10,22) 축제에서 이 사건을 기억하며 암흑과 어둠이 빛에게 쫓겨나야 한다는 표징으로 등불에 점화를 해야 만 한다.
그렇지만 시리아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의 성을 점유하고 있었다. 몇 차례의 작은 전투를 한 후 유다는 이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결국 시라아의 반격을 초래하였다. 파르테르인과의 전쟁 중에 사망한 안티오코스 왕을 대신하여 사령관 리시아스가 아직 미성년자인 왕자의 후견인으로서, 그리고 나라의 섭정으로서 시리아를 다스렸다. 그는 무장이 잘된 군대를 보내서 유대인들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봉쇄하였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유다와 그의 추종자들은 시리아에서 일어난 왕위 쟁탈전의 도움을 받았다. 한 다른 사령관이 리시아스를 몰아내려고 하였다. 리시아스는 본격적으로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유대인들과 협정을 맺었다. 즉 그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아무런 간섭 없이 신봉하도록 허용했고 유대인들은 시리아의 최고 지배권을 승인하였다. 그 이후부터 이 협정은 계속되었다. 왕위 쟁탈을 위해 시리아에서 일어난 수많은 분규 동안 어떠한 시리아 군주도 이 협정을 문제 삼지 않았다.
마카베오 독립 전쟁의 이러한 성과에 많은 유대인들은 만족했다. 특히 얼마 후에 공석이던 대제사장의 직위도 다시 차지 할 수 있었다. 대제사장의 직위를 근본적으로 요용했던 메네라우스는 마카베오 개혁으로 제거되었다. 기원전 162년에 권력을 장악한 시리아 왕 데메트리우스(Demetrius)에게 예루살렘의 헬라주의화 된 사람들이 청원하여 그들이 유다의 억압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왕은 이들의 청원을 들어 알키무스라는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사람은 헬라주의화의 옹호자이기는 하였으나 아론 지파 출신이었다. 이제는 의식이 다시 율법의 규정에 상응하게 거행될 수 있었으며 신실한 유대인들로서 간섭 없이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의 폭력 정치에 항거하였던 경건한 사람들(히브리어; 하시딤)은 그들의 봉기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시리아에 의하여 임명된 대제사장을 합법적인 직무의 소유자로 인정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다와 그의 동료들은 시리아를 불신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올바른 예배를 다시 회복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를 넘어서 정치적인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다. 정치적인 독립을 통해서만 시리아적 - 헬라주의적 영향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유다는 대제사자아 알키무스에 항거하였으며 알키무스는 시리아에 도움을 청했다.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그 과정 중에 유다가 기원전 160년에 죽었다. 체포된 그의 추종자들은 시리아인들로부터 참혹한 박해를 받아다. 전사들은 광야로 후퇴했고 유대 대신에 그의 동생 요나단(Jonathan)이 지도자가 되었다. 비록 그의 병력은 적고 상황은 극도로 어려웠지만 시리아에서 계속되는 왕위 쟁탈전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서로 싸우는 당파에 때로는 이쪽에 때로는 다른 쪽에 가담하면서서 스스로를 지켜 갈 수 있었다. 그는 모든 당파로부터 특정한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의 영향 아래 있는 지역을 확대하여 갈 수 있었다. 즉 그 주민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고수하던 사마리아 남부가 그의 통치권 아래 들어왔다. 기원전 160년 말 알키무스가 죽은 이후 대제사장의 직위는 공석이었다. 그 후 요나단은 이 공석이 된 직위를 그가 넘겨받도록 시리아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기원전 153년). 시골 제사장 혈통의 출신이기는 하지만 사독의 혈통 출신은 아니며, 전쟁 중에 더럽혀진 사람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되었다. 한때 마카베오 봉기에 가담한 적이 있었던 경건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기원전 143년 시리아인들의 음모로 요나단이 살해되자 그의 세 번째 동생인 시몬(Simon)이 전투의 지휘권을 이어 받았다. 요나단이 힘써 얻었던 같은 지위를 그도 역시 갖게 되었다. 그는 유대 사회의 사령관과 우두머리일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이기도 하였다. 요나단은 그의 통치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고 시몬은 이제 예루살렘 성의 시리아 수비대와 싸워 승리하여 그들을 끝내 몰아냈다. 이제 예루살렘은 이방 지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시몬은 밖으로도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시리아인들의 과세를 유대인의 권한에 귀속시켰으며(기원전 142년) 처음으로 자신의 화폐를 주조하게 되었다.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사령관, 그리고 유대인들의 영도자의 직위가 기원전 140년에 국민들에 의하여 그에게 세습되도록 주어졌고 그럼으로써 하스모네어 왕조가 세워졌다. 그리고 이것은 로마로부터도 승인되었다. 유대 국가는 계속하여 독립을 갖게 되었고 시몬의 통치하에 다시 평화로운 상태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안심하고 시몬의 통치를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마음 깊이 찬양하였다. "백성은 평화로이 제 땅을 이루고 땅은 소출을 내었으며 들판의 나무들도 열매를 맺었다. 노인들은 거리에 나와 앉아 모두 함께 좋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젊은이들은 화려한 군복을 입었다. 시몬이 성읍마다 양식을 공급하고 방어 무기들을 설치하니 그 명성이 땅 끝까지 자자하였다. 그가 이 땅에 평화를 이루자 이스라엘은 크게 기뻐하였다. 저마다 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았다. 그들을 두렵게 할 자 아무도 없고 이 땅에 남아 그들과 싸울 자 아무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임금들까지도 패망하였다. 시몬은 백성 가운데 가련한 모든 이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스스로 율법을 따르면서 무도한 자들과 악한 자들을 모두 쫓아내었다. 그는 또 성소를 영광스럽게 꾸미고 성전 기물들을 많이 갖추어 놓았다."(1마카 14,8-15)
시몬의 시대는 마카베오 상권의 이러한 말에서 열광적으로 찬양되었고 평화로운 상황은 예언자들의 약속의 실현으로 이해되었다 ;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지내
3. 시리아의 지배하에 있는 팔레스타인과 마카베오 독립전쟁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Antiochus) 3세(기원전 223-187)는 첫 번째의 시도를 실패하고 나서 3세기에서 2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팔레스타인을 이집트인들로부터 빼앗는 데 성공하였다. 톨레메우스의 군인들은 퇴각하고 그 땅을 시리아 인들에게 양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대인들은 적시에 세력 판도가 시리아 인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간파하여 전쟁 동안에 시리아의 편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후 시리아 인들로부터 호의적인 대우를 받았다. 전투 중에 예루살렘이 입은 전쟁 손해를 복구하려고 하였으며 지금까지의 권리에 보다 더 큰 특권을 받았다. 즉 성전 의식에 드는 비용들은 일정한 한도에 이르기까지 국고에서 지불되었으며, 장로회의의 회원들과 서기관들에게는 면세의 특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호의적인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는 없었다. 시리아를 다스리던 셀류키드 왕조(Seleukiden)는 헬라주의화의 열렬한 대변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헬라주의 문화를 장려함으로써 나라 안에 있는 여러 다른 민족들을 밀접하게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광범위한 유대인 사회는 이러한 정책에 대립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사제권에서는 많은 헬라주의화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대제사장은 유대사회의 지도자로서 시리아 왕의 법률과 명령이 철저히 시행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또한 부과된 세금을 정확히 거둬들이는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인들이 돈을 더 많이 거둬들이려고 할 때 그들은 대제사장에게 그 문제를 부탁하곤 하였다. 기원전 175년에 안티오쿠스 4세가 시리아의 통치권을 계승하였을 때 예루살렘에는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사람 오니아스(Onias)가 대제사장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사제들 사이에 반대자들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그의 동생 요수아(Josua)와 헬라주의화의 추종자들이 그의 반대자였다. 요수아는 그의 이름을 야손(Jason)이라고 희랍 식으로 바꾸었으며 세금을 인상하여 거둬들인 거액의 금액을 시리아에 바쳤다. 결국 오니아스의 대제사장직을 빼앗아 그 자신이 대제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대제사장직의 교체가 빼앗긴 측의 항거 없이 이루어졌다. 오니아스는 몇 년 후 안티오쿠스에서 살해되었으며 같은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은 이집트로 도망가서 기원전 160년 경 톨레메우스의 원조로 레온토폴리스에 성전을 세웠다. 이 성전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본을 따라서 희생 의식이 집행되었으며 기원후 7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이 성소의 중요성은 미미하였다. 왜냐하면 이집트에 사는 유대인 사회 역시 계속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는 야손이 율법의 규정에 상응하게 성전 의식을 집행하였으나 그는 강력하게 헬라주의화를 추진하였다. 운동장이 건설되고 거기에서는 젊은이들이 옷을 벗고 운동을 하였으며 사제들도 거기에 참가하였다. 희랍인들이 할례를 비웃자 유대인들은 할례를 부끄럽게 여겼으며 많은 사람들이 수술을 하여 이를 제거하였다(1마카 1,15). 이는 바오로 시대에도 유대인들 사이에 자주 있었던 태도이다(1코린 7,18). 야손이 3년 동안 직무를 수행하였을 때 메네라우스(Menelaus)라는 사람이 예전에 야손이 그렇게 하였던 것보다 더 많은 금액을 시리아 왕에게 주고 야손 대신 대제사장이 되었다. 대제사장의 직위는 매매할 수 있는 정치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한니발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동양에서도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로마인들은 이집트를 다스리는 톨레메우스 왕조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으나 시리아의 안티오코스에게는 적대적이었다. 안티오코스가 이집트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으나 로마가 그에게 중지하도록 함으로써 그의 계획은 좌절되어야 했다. 이집트에로의 진군이 실패한 후 예루살렘에서는 안티오코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직위에서 쫓겨난 야손이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무력으로 메네라우스를 몰아내고 대제사장직에 즉위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장악하였다. 안티오코스가 이러한 사건을 알고 매우 분노하여 쳐들어와서 다시 메네라우스를 복직시켰다. 메네라우스는 시리아 왕의 지지에 의해서만 그의 지위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기원전 169년 안티오코스가 전쟁으로 바닥난 국고를 충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강탈하였을 때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성전의 값비싼 기물들, 즉 번제 제단과 일곱 촛대 그리고 제상 등을 안티오키아로 가져갔다.(1마카1,20-24)
성소에 대하여 행해진 이러한 첫 번째의 만행이 있은 후 곧 두 번째의 더욱 가혹한 침해가 뒤따랐다. 몇몇의 저항에 부딪치기는 했으나 확고하게 기반을 구축했던 예루살렘과 유대의 헬라주의화는 이제는 강제로 시행되었으며 그럼으로써 유대인 공동체의 독자적인 생활은 끝장이 났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무너졌으며 옛 다윗 도시의 언덕 위에는 폭군의 성(Akra)이 세워졌다. 안식일을 지키고 자녀들에게 할례를 베푸는 행위가 유대인에게 사형의 협박으로 금지되었다. 왕의 감독관들이 이러한 명령이 준수되고 있는지를 감시하기 위하여 나라 곳곳에 파견되었다. 예루살렘의 번제 제단이 있던 자리에 이교도의 제단이 세워졌고 거기에서 최고의 신, 즉 올림피아의 제우스에게 희생 제물이 드려졌다(기원전 167년). 또한 돼지들이 희생 제물로서 봉헌되었다. 희랍인들이 이러한 행위를 모든 의식에서는 궁극적으로 한 분 하느님이 경배 받게 된다는 점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었고 그래서 야훼의 이름이 불려지든지 하늘의 바알이나 제우스가 불려지든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다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소의 모독은 비참한 폐허의 전율을 의미하였다(다니 11,31 ; 12,11). 이러한 사건 속에서 사람들은 마지막 때의 표징을 보았으며 그 이후에도 언제나 이 시대의 종말에 바로 앞서 드러나는 사건으로서의 폐허의 전율을 말했다(마르13,14). 이러한 과정들로 인하여 매우 위험한 위기가 유대교에 닥쳐와서 유대교가 끝장이 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선조들의 신앙을 버릴 수는 없었다. 다니엘서는 이러한 곤궁에 빠진 공동체에 대하여 위로하는 책으로 기록되었다. 여기에는 박해와 고난이 하느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곧 종말이 와야 하는 마지막 때의 표징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율법에 어긋나는 복종을 거부하고 기꺼이 고난과 죽음을 감수하였다(2 마카 7장).
지방의 주민들은 헬라주의 문화와 문명에 스스로를 개방하였던 많은 도시인들보다 더욱 집요하게 선조들의 신앙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서 시리아 정책에 대한 저항이 일어났다. 리따에서 멀지 않은 모데인(Modei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돌발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외국 지배권에 대한 봉기가 불붙었다. 왕의 감독관들은 이곳에 와서도 유대인들에게 이방 제물을 봉헌하도록 강요하자 마타티아스라는 늙은 제사장 -그들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라서 하스모네어(Hasmonaer)라고 불리는 가문의 가장- 이 제단 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려고 준비하던 한 유대인을 죽이고 희생 제물을 드리도록 강요했던 왕의 관리도 쳐 죽여 버렸다. 이 행위가 커다란 소란을 야기 시켰다.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은 도망하여 유대 광야의 산골 속으로 숨어야 했다(1마카 1,15-28). 여기에서 투쟁의 의지에 불타는 유대인 군중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광야에서 여기 저기 나타나 나라 안 도처에 세워졌던 이방 신전을 파괴하거나 배교한 유대인들을 징벌하기 위하여 소규모의 군사 행동을 하였다. 그 후 얼마 뒤에 늙은 제사장 마타티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가 戰士전사들의 지휘관을 이어받았다. 그는 별명을 "마카베오"(Makkabeer)라고 하였다. 마카베오는 "망치와 같은 자"를 뜻하는 듯하다(아람어의 makkaba는 망치를 뜻한다). 그는 유능한 투사로서 그의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적들로부터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는 더 이상 소규모의 게릴라 활동이나 습격을 못하게 하고 시리아에 대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므로 시리아인들은 방어하기에 급급하였다. 동방에서 파르테르(Parther) 유목민과 전투를 하고 있던 안티오코스 왕은 그의 장군 리시아스(Lysias)를 팔레스타인으로 보냈다. 유다는 그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고 계속되는 전쟁에서 시리아인들을 쳐부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개선 입성하여 더럽혀진 성소를 탈환하고 율법의 규정대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를 회복하였다. 기원전 164년 키스레브(12월) 25일에 제단이 새롭게 봉헌되고 일주일 동안의 축제로써 율법에 합당하게 예배가 다시 드려졌다. 이때부터 유대교는 매년 성전 봉헌(히브리어 ; 하누카, 요한10,22) 축제에서 이 사건을 기억하며 암흑과 어둠이 빛에게 쫓겨나야 한다는 표징으로 등불에 점화를 해야 만 한다.
그렇지만 시리아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의 성을 점유하고 있었다. 몇 차례의 작은 전투를 한 후 유다는 이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결국 시라아의 반격을 초래하였다. 파르테르인과의 전쟁 중에 사망한 안티오코스 왕을 대신하여 사령관 리시아스가 아직 미성년자인 왕자의 후견인으로서, 그리고 나라의 섭정으로서 시리아를 다스렸다. 그는 무장이 잘된 군대를 보내서 유대인들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봉쇄하였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유다와 그의 추종자들은 시리아에서 일어난 왕위 쟁탈전의 도움을 받았다. 한 다른 사령관이 리시아스를 몰아내려고 하였다. 리시아스는 본격적으로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유대인들과 협정을 맺었다. 즉 그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아무런 간섭 없이 신봉하도록 허용했고 유대인들은 시리아의 최고 지배권을 승인하였다. 그 이후부터 이 협정은 계속되었다. 왕위 쟁탈을 위해 시리아에서 일어난 수많은 분규 동안 어떠한 시리아 군주도 이 협정을 문제 삼지 않았다.
마카베오 독립 전쟁의 이러한 성과에 많은 유대인들은 만족했다. 특히 얼마 후에 공석이던 대제사장의 직위도 다시 차지 할 수 있었다. 대제사장의 직위를 근본적으로 요용했던 메네라우스는 마카베오 개혁으로 제거되었다. 기원전 162년에 권력을 장악한 시리아 왕 데메트리우스(Demetrius)에게 예루살렘의 헬라주의화 된 사람들이 청원하여 그들이 유다의 억압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왕은 이들의 청원을 들어 알키무스라는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사람은 헬라주의화의 옹호자이기는 하였으나 아론 지파 출신이었다. 이제는 의식이 다시 율법의 규정에 상응하게 거행될 수 있었으며 신실한 유대인들로서 간섭 없이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의 폭력 정치에 항거하였던 경건한 사람들(히브리어; 하시딤)은 그들의 봉기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시리아에 의하여 임명된 대제사장을 합법적인 직무의 소유자로 인정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다와 그의 동료들은 시리아를 불신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올바른 예배를 다시 회복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를 넘어서 정치적인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다. 정치적인 독립을 통해서만 시리아적 - 헬라주의적 영향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유다는 대제사자아 알키무스에 항거하였으며 알키무스는 시리아에 도움을 청했다.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그 과정 중에 유다가 기원전 160년에 죽었다. 체포된 그의 추종자들은 시리아인들로부터 참혹한 박해를 받아다. 전사들은 광야로 후퇴했고 유대 대신에 그의 동생 요나단(Jonathan)이 지도자가 되었다. 비록 그의 병력은 적고 상황은 극도로 어려웠지만 시리아에서 계속되는 왕위 쟁탈전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서로 싸우는 당파에 때로는 이쪽에 때로는 다른 쪽에 가담하면서서 스스로를 지켜 갈 수 있었다. 그는 모든 당파로부터 특정한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의 영향 아래 있는 지역을 확대하여 갈 수 있었다. 즉 그 주민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고수하던 사마리아 남부가 그의 통치권 아래 들어왔다. 기원전 160년 말 알키무스가 죽은 이후 대제사장의 직위는 공석이었다. 그 후 요나단은 이 공석이 된 직위를 그가 넘겨받도록 시리아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기원전 153년). 시골 제사장 혈통의 출신이기는 하지만 사독의 혈통 출신은 아니며, 전쟁 중에 더럽혀진 사람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되었다. 한때 마카베오 봉기에 가담한 적이 있었던 경건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기원전 143년 시리아인들의 음모로 요나단이 살해되자 그의 세 번째 동생인 시몬(Simon)이 전투의 지휘권을 이어 받았다. 요나단이 힘써 얻었던 같은 지위를 그도 역시 갖게 되었다. 그는 유대 사회의 사령관과 우두머리일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이기도 하였다. 요나단은 그의 통치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고 시몬은 이제 예루살렘 성의 시리아 수비대와 싸워 승리하여 그들을 끝내 몰아냈다. 이제 예루살렘은 이방 지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시몬은 밖으로도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시리아인들의 과세를 유대인의 권한에 귀속시켰으며(기원전 142년) 처음으로 자신의 화폐를 주조하게 되었다.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사령관, 그리고 유대인들의 영도자의 직위가 기원전 140년에 국민들에 의하여 그에게 세습되도록 주어졌고 그럼으로써 하스모네어 왕조가 세워졌다. 그리고 이것은 로마로부터도 승인되었다. 유대 국가는 계속하여 독립을 갖게 되었고 시몬의 통치하에 다시 평화로운 상태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안심하고 시몬의 통치를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마음 깊이 찬양하였다. "백성은 평화로이 제 땅을 이루고 땅은 소출을 내었으며 들판의 나무들도 열매를 맺었다. 노인들은 거리에 나와 앉아 모두 함께 좋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젊은이들은 화려한 군복을 입었다. 시몬이 성읍마다 양식을 공급하고 방어 무기들을 설치하니 그 명성이 땅 끝까지 자자하였다. 그가 이 땅에 평화를 이루자 이스라엘은 크게 기뻐하였다. 저마다 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았다. 그들을 두렵게 할 자 아무도 없고 이 땅에 남아 그들과 싸울 자 아무도 없었다. 그 시절에는 임금들까지도 패망하였다. 시몬은 백성 가운데 가련한 모든 이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스스로 율법을 따르면서 무도한 자들과 악한 자들을 모두 쫓아내었다. 그는 또 성소를 영광스럽게 꾸미고 성전 기물들을 많이 갖추어 놓았다."(1마카 14,8-15)
시몬의 시대는 마카베오 상권의 이러한 말에서 열광적으로 찬양되었고 평화로운 상황은 예언자들의 약속의 실현으로 이해되었다 ;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지내리라(미카4,4). 시몬의 현명한 통치, 율법과 성전을 위한 그의 열심과 배려는 종말적 기다림 속에서 메시야에게 돌렸던 특징으로서 기술되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결코 모든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납득될 수 있도록 보인 것은 아니었다. 많은 제사장들과 경건한 사람들은 대제사장 혈통 출신도 아니고 다윗 혈통의 출신도 아니면서 대제사장의 직위를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자의 직위와 결합시켜 버린 하스모네어의 지배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난으로 대립하였다. 이미 요나단 시대에 이러한 경건한 사람들과 대제사장 및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율법에 엄격한 유대인 그룹이 율법에 대하여 온전한 복종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사해 바닷가 광야로 물러갔다. 그들은 마카베오 상권이 시몬의 통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찬양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기원전 134년 시몬이 그의 사위 톨레메우스에 의하여 꾸며진 살해 음모에 의하여 희생되자 그의 지배는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그러나 살해범은 시몬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오히려 통치권은 시몬의 생전에 국민에 의하여 결의된 대로 그의 아들요한네스 히르칸(Johannes Hyrkan )에게 돌아갔다.
리라(미카4,4). 시몬의 현명한 통치, 율법과 성전을 위한 그의 열심과 배려는 종말적 기다림 속에서 메시야에게 돌렸던 특징으로서 기술되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결코 모든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납득될 수 있도록 보인 것은 아니었다. 많은 제사장들과 경건한 사람들은 대제사장 혈통 출신도 아니고 다윗 혈통의 출신도 아니면서 대제사장의 직위를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자의 직위와 결합시켜 버린 하스모네어의 지배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난으로 대립하였다. 이미 요나단 시대에 이러한 경건한 사람들과 대제사장 및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율법에 엄격한 유대인 그룹이 율법에 대하여 온전한 복종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사해 바닷가 광야로 물러갔다. 그들은 마카베오 상권이 시몬의 통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찬양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기원전 134년 시몬이 그의 사위 톨레메우스에 의하여 꾸며진 살해 음모에 의하여 희생되자 그의 지배는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그러나 살해범은 시몬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오히려 통치권은 시몬의 생전에 국민에 의하여 결의된 대로 그의 아들요한네스 히르칸(Johannes Hyrkan )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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