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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역사 :: [5회]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2)

은바리라이프 2010. 7. 13. 13:13

성경과 역사 :: [5회]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2)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 (B.C. 63 ~ A.D.135)

처음 세 명의 로마인 총독들은 나라를 지혜롭게 통치한 듯이 보인다. 유대인이 로마를 통치해 달라고 했을 때 그들은 수리아의 지배 아래 있었고 A.D.6-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대를 통치한 총독들 가운데 첫 사람을 맞아들였다.

유대 지방(혹은 주)은 요단 지역의 동부와 에스다엘론의 남부를 포함하는 전 지역을 말하며 이 지방은 차례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11개의 지구로 분할되었다. 하나의 지구는 하나의 대도시와 수개의 부락을 포함하는 인근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비록 유대력에 의한 중요한 절기 때는 예루살렘에 머물곤 하였을지라도 총독의 관저는 가이사랴에 있었다.

총독은 주로 로마를 위한 재정 대리인이었다. 그의 직무는 “로마 정부가 부과한 세금의 징수, 그 속주에 주둔한 군대의 통솔, 보다 중요한 사건의 재판”이었다. 유대는 원로원에 속한 주가 아니라 제국의 속주였기 때문에 징수된 세금은 직접 시저에게 보내졌다 (마22:17) .

많은 유대인들이 세금 징수에 종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과정은 이렇다. 한 개인이 어떤 군에 매년 할당된 액수의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를 청구하며 그는 어느 정도 더 징수하여서 만일 배당액을 초과하게 되면 자기가 가져도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당 이득(토색)의 여지가 상당히 있었다. 따라서 세리는 외세에 봉사하는 자와 토색하는 자라는 명목으로 유대인의 미움을 받았다. 세리들은 다양한 세금을 징수하였다. 즉 도시에서 도시로 전입되는 상품의 수출입세, 주에서 주로 가는 선편에 대한 세금, 세금에 부과한 세금, 또한 다리의 통과세, 입항할 때의 세금 등이었다.

사법기능 또한 총독이 관장하였으며 사소한 사건들은 보다 저급한 유대인의 법정이 다루도록 위임된 반면에 중요한 범죄들은 그가 판결하였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을 선고할 권세가 없었으며 예수님의 경우에서와 같이 이러한 사건은 총독에게 회부된다. 일상적인 민사소송이나 형사사건은 지방의 공회에 위임되었다.

총독은 또한 군사적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곳에 주둔한 군대들을 보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동부 전선이었던 유대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의 파견부대가 질서유지를 위하여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다. 유대가 로마의 속주가 되자 즉시 수리아인 총독은 한 가지 세금을 징수하도록 명령하였고, 이것은 유대인에 의한 반란을 조장하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종교문제에 있어서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총독들은 그들을 만족시키는 일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에 유대를 통치하였던 본디오 빌라도는 10년간 총독의 직임을 수행하였지만 결국 A.D. 36년에는 유대인에 대하여 대단히 잔인하다는 이유로 시저 티베리우스에 의하여 고울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헤롯 아그립바 1세 (A.D.41 - 44)

헤롯 안티파스가 A.D. 39년에 왕위를 박탈당하고 고울로 추방된 뒤에 그의 뒤를 이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왕이 되었는데 그는 젊은 시절을 로마에서 대단한 사치와 방종 속에서 성장하였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중년의 나이에 들어가자 그는 클라우디우스에 의하여 추방되었고 남부 팔레스타인의 구석진 곳에 피신하였다. 빈곤과 파산에 직면한 그는 자살하기로 작정하였으나 그의 신실한 아내가 그를 설득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의 수 차에 걸친 절망적인 경험 끝에 그는 로마로 가서 그의 채권자들에게서 몸을 숨기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티베리우스 황제의 양자인 가이우스 칼리큘라의 친구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만사가 헤롯 아그립바 1세를 위하여 잘되어 갔지만 어느 날 가이우스와 함께 마차를 탄 자리에서 만일 황제가 죽는다면 좋을 것이라고 한 마디하였다. 티베리우스는 이 말을 전해 듣고 헤롯 아그립바 1세를 투옥하였다.

A.D.37년 티베리우스가 죽자 칼리큘라가 계승자가 되고 헤롯 아그립바는 칼리큘라에 의하여 석방되고 그의 총애를 입어 A.D.39년에 왕으로 임명된다. 아그립바는 클라우디우스로부터 빌립의 분봉국을 떼어받았으며 얼마 후에 유대와 이두매, 사마리아도 그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어서도 수 년 간을 기다렸다가 그의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4년간 괄목할 만큼 성공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는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 사실은 그가 요한을 죽이고 베드로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 일에서 분명히 증명된다 (행12장) .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요령이 있고 빈틈이 없는 통치자였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유대인의 반발을 살만한 일은 피하도록 하였다.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 칼리큘라가 자기의 동상을 세우고자 하였을 때 이것을 저지함으로써 그는 예루살렘에서 평화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비록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예루살렘을 흥미있어 하는 것처럼 하였지만 사실상 그는 헬레니즘의 숭배자였고 그리스 로마적 향락에 탐닉하였다. 그는 심각한 질병을 얻어 A.D.44년에 지겹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헤롯 아그립바 2세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뒤를 17살난 아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계승하지 못하고 후에 레바논 지방의 콜키스 지역을 분배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갈릴리 부근과 윗 요단을 포함하는 빌립의 이전 분봉국을 얻었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네로에 의하여 갈릴리의 여러 곳과 베뢰아의 율리아스란 도시를 다스리게 되어 영토가 확장되었다.

비록 헤롯 아그립바 2세가 예루살렘에 저택을 갖고 있었지만 왕국의 수도는 가이사랴 빌립보였다. 유대인들은 그가 명목상의 유대교인임을 알고는 그를 싫어하였다. 유대인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그의 통치는 하찮은 것이었다. 누가는 사도행전 24:26-32에서 그가 바울의 재판에 참석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의 통치 기간에 끔찍스런 유대 전쟁(A.D.66-70)이 발발하였다. 그는 A.D.100년 경에 죽었다.

제 2기의 총독들

A.D.44-66년 사이에 팔레스타인은 7명의 총독 즉 파두스, 알렉산더, 쿠마누스, 벨릭스, 베스도, 알비누스, 플로루스가 다스렸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자 클라우디우스는 팔레스타인을 총독의 통치 아래 두었다. 이들 7명의 총독들이 다스리는 기간은 대단한 고통과 압제의 날들이었다. 파두스(A.D.44-48)는 자기가 통치하려고 팔레스타인에 도착해보니 불안한 상태인 것을 깨달았다. 유대는 세 부류의 적대적인 당파들로 나뉘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율법적인 생활에 광적이었고 열심당은 팔레스타인에서 로마를 축출하고자 하였다. 파두스는 유대에서 강도들의 만연을 해소하였다. 그는 대제사장의 제복을 빼앗아 안토니오 탑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변인을 보내어 그 제복의 관리권을 갖게 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클라우디우스는 이 청원을 수락하였다.

처음 두 총독, 즉 파두스와 알렉산더의 행정은 비록 이따금 그들에게 대항하는 폭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온건하고 평화스러웠다. 쿠마누스의 통치는 심각한 소동으로 점철되었다. 유월절에 한 로마 군병이 성전을 더럽혔다고 해서 폭동을 일으킨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또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발발한 전쟁에도 개입하였다.

그가 사마리아인을 징계하는 대신에 그들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쿠마누스의 추방을 초래하였다. 세번에 걸쳐 많은 유대인을 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잔인한 행동을 자행한 책임이 쿠마누스에게 있었다.

벨릭스는 유대인을 다루는 데 있어서 그의 전임자들보다 더욱 거칠었다. 시카리 즉 “단검을 찬 자”로 알려진 일단의 무리들이 사람을 죽이는 흉포함 때문에 그들로 인한 공포가 나라 안에 퍼졌다. 이 시카리 단원들은 끊임없이 유대인들에게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였다. 또한 메시야의 출현이 가끔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도행전 21:38에 언급되고 있다. 사도행전 24장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벨릭스에게 이송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베스도의 통치 기간은 상황이 괄목할 만하게 호전되었으나 그는 유대인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소환되었다. A.D.44-66년 사이에 유대인의 격분과 광란의 상태가 계속되었으며 로마와의 대대적이며 피어린 전투를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다.

유대인의 반란(A.D.66 - 70)

열심당의 혁명적인 활동의 결과로서 유대인들은 로마와 로마적인 모든 것에 반대하는 억누를 수 없는 증오심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을 지지하지 않는 많은 유대인들이 열심당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로마에 대한 혁명은 플로루스의 통치 때에 발발하였다. 플로루스가 성전의 보물창고에서 얼마를 탈취하자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욕으로 생각하였고 로마의 멍에를 벗어버리려는 시도를 낳게 하였다. 아그립바 왕은 유대인의 격분을 가라앉히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수리아의 총독인 케스티우스 갈루스가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고자 쓸데없는 시도를 하였지만 패배하고 극히 소수의 생존자들과 함께 안디옥으로 도피하였다.

이러한 승리는 로마의 굴레를 벗어버리려고 시도하는 유대의 혁명주의자들을 대단히 고무시켰다. 그리고 비록 동족들의 행동이 무익한 것을 알고 있던 평화주의자들도 굴복하고 말았다. 요세푸스는 갈릴리 지방을 책임맡았으나 유대인의 반란이 실패하리란 것을 확신하였다. 팔레스틴의 여러 지방에 군사적 지도자들이 전쟁터를 준비하고자 분담받았다.

그러자 로마제국은 유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그들의 뛰어난 장군인 베스파시안을 파견하였다. 일년 사이에 팔레스틴이 대부분의 요새들이 함락되었고 베스파시안은 예루살렘의 성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네로가 죽었고 베스파시안은 로마로 돌아가서 황제에 즉위하여야만 하였다. 이와 같이 자기들의 전력을 보강할 절호의 기회에 유대인들은 내란을 겪었다. 베스파시안의 아들인 티투스는 자기 아버지의 직위에 임명되고 4개 군단을 지휘하여 예루살렘의 탈환을 위하여 다시 출정하였다. 5개월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성전과 도시는 훼파되었으며 수 십만의 유대인들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교의 동질성의 상실을 의미하였다. 성전 제사는 멈추어졌고 유대교의 영향력있는 계급인 제사장직이 따라서 소멸되었다. 또 다른 영향력있는 기관이었던 산헤드린도 역사 속으로 숨어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몰락 이후에 유대교의 중심지는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다수의 지도적 랍비들이 피신하였던 암니아가 되었다.

이후에도 유대의 독립을 위한 두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하였다. A.D.115-117년에 구레네, 애굽, 구브로,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유대인들에 의하여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으나 트라얀 황제는 상당한 살륙을 감행하여 이것을 진압하였다. 다른 하나는 A.D.132-135년에 바르 코흐바, 또는 바르코지바가 유대인에게 엄격한 제한을 가하는 로마의 통치를 벗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드리안 황제는 이 반란을 철저하게 분쇄하여 실제로 팔레스틴에 있는 분산된 유대인의 남은 자들을 궤멸하였고 로마제국 전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혹독한 제한조치를 취하였다. 이때부터 팔레스타인에는 이교도가 번성하였고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는 1948년 이스라엘의 주권국가가 선포되기 전까지는 종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