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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역사 :: [4회]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1)

은바리라이프 2010. 7. 13. 13:12

성경과 역사 :: [4회]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1)

로마 통치 하의 유대인 (B.C. 63 ~ A.D.135)

유대 역사에 있어서 로마의 통치 기간은 B.C. 63년에 시작되어 유대인 생활의 붕괴를 가져오는 바르-코흐바(Bar-Cochba)의 반란이 하드리안(Hadrian-로마황제)에 의하여 진압이 될 때까지 계속된다(A. D. 135년에 하드리안은 예루살렘에 로마식 도시인 Aelia Capitolina를 세움). 신약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이 기간이 A.D.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에서 끝이 난다.

유대인들은 로마 통치자가 제정한 법률에 복종할 때에만 정상이 참작된 대우를 받았다. 유대교는 로마제국 안에서 인정된 종교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유대인들은 그 액수가 작아서 부담이 되지 않을 만큼의 조공을 바치도록 요구되었는데도 그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법과 입법기관인 산헤드린 공회가 있었고 국내적인 사소한 사건들을 자치적으로 해결하도록 허용되었다. 페르샤의 지배가 로마의 통치보다 더 나은 대우를 유대인들에게 하였기 때문은 아니지만 열심당이라는 극단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을 불안상태에 몰아넣고 수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켜서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동참하기를 권했다.

B.C. 63년에서부터 43년까지, 특히 B.C. 53년부터 43년까지의 사이에 근동 세계는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다. 시저(Caesar)와 폼페이우스는 B.C. 49년에 반목하기 시작하여 폼페이우스가 테살리의 파르살루스에서 패배할 때까지 (B.C. 48년) 두 사람 사이에는 내전이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애굽에서 얼마 후에 살해되었다.

B.C.44년에 시저가 살해된 뒤에 브루투스(Brutus)와 카시우스(Cassius)의 연합 세력과 마크 안토니(Mark Antony), 옥타비안(Octovian)의 세력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로마 치하의 유대교 역사는 다섯 부분, 즉 이두매 왕조, 첫 지방 총독(Proculator), 아그립바 1세의 통치, 두번째 지방 총독, 유대인의 반란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두매 왕조(B.C. 63 ~ A.D. 6)

프톨레미의 왕당파에 속하였던 헤롯 안티파터는 시저의 동맹국인 버가모(Pergamus)의 미트라다테스가 시내 사막을 횡단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지혜롭게 시저의 호의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시저는 힐카누스 2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통치자적 대제사장이라는 그의 간판격인 직임을 보류시키는 반면에 안티파터에게 로마 시민권을 수여하고 유대 총독에 임명하였다. 당시에 유대인은 팔레스타인과 알렉산드리아, 로마에서 많은 특권을 누렸으며 그들 가운데서 종교적 자유를 향유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 안티파터는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한 뒤에 그의 아들인 파사엘(Phasael)과 헤롯에게 고위직을 맡겼는데 먼저 파사엘은 유대 군대 사령관으로, 헤롯은 갈릴리의 분봉왕(Tetrarch)으로 삼았다.

안티파터는 로마에 충성을 다하는 동시에 유대의 국내적이며 정치적인 이익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두매인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싫어하였다. 수세기에 걸쳐 유대인과 에돔 사람 사이에는 뿌리 깊은 반감이 있어 왔다. 갈릴리 통치자인 헤롯이 갈릴리에 횡행하는 일단의 도둑들을 쳐부수고 그 두목 히스기야를 처형하자 산헤드린은 그가 스스로 권력을 남용하여 중앙에서 행할 일을 행사하였다고 하여 그에게 출두를 명령하였다. 헤롯은 산헤드린에 출두하는 대신에 한때 헤롯을 코엘레-수리아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던 수리아인 총독 섹스투스 시저(Sextus Caesar)에게 탄원하였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아들인 안티고누스는 파르디아인, (북부 이란에 살던 민족)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그들은 즉시 출병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파사엘은 체포되자 자결하였다. 헤롯은 대적들의 눈을 피하여 로마로 도망하여 안토니우스에게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유대의 왕으로 삼도록 청원하였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하스모니아 왕조를 신뢰하지 않았고 로마 원로원의 재가를 얻어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삼았다. 이 일은 B.C. 4년에 있었으며 이로부터 3년 후 그는 예루살렘을 재탈환할 수 있었으며 로마에 의하여 그에게 할당된 영토를 차지하였다.

헤롯 대왕

역사 기록들은 헤롯이 유대인에게 강하고 유력한 정부를 수립하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신조는 자기 아버지 안티파터에게 물려받은 그대로, 로마에서 누가 실권을 행사하든지간에 로마에 충성하였다. 안토니우스의 권세가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절정에 달하는 동안 헤롯은 그에게 충성하였으나, B.C. 31년에 있었던 악티움 해전 이후 헤롯은 자기의 가치를 인정해준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에게 충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헤롯을 동맹국의 왕에 임명하였고 실제로 팔레스타인 전역을 그의 왕국으로 편입시켜주었다.

헤롯은 그의 반대자들을 제거하려고 철저한 계획을 수행하였다. 안티고누스와 대부분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제거되었고 어린 아리스토불루스는 헤롯의 심복에 의하여 “우발적으로” 익사하였다. 노령의 힐카누스는 살해되었고, 헤롯의 아름다운 부인이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마리암네(Mariamne)는 헤롯의 여동생인 살로메(Salome)에게 충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헤롯은 그리스 로마 문화의 대단한 숭배자였다. 그는 피로 점철된 그의 첫번째 계획을 수행한 뒤에 자기 왕국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불필요한 전쟁을 회피함으로써 그의 왕국은 발전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강력하고 효과적인 행정으로 도움을 주었다. 많은 새로운 건물들이 건축되었고 다른 건물들은 개축되었다.

헤롯의 뜻에 따라 그의 왕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즉, 아켈라우스는 유대(사마리아와 이두매를 포함한)의 왕으로,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으로, 헤롯 빌립은 트라코니티스와 인근 지역의 분봉왕으로 내정되었다.
이러한 헤롯의 조치는, 특별히 왕위에 있어서는 로마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왜냐하면 로마는 어느 왕도 그 왕위를 세습시키는 것을 불허하였기 때문이다. 세 형제는 모두 인준을 받으려고 로마에 갔는데 아켈라우스와 안티파스는 왕국을 구하였고, 아케라우스는 빌립의 지지를 받았다.
유대인의 한 사자가 로마에 가서 헤롯의 모든 아들로부터 벗어날 것을 청하면서 대신에 유대를 로마의 직접 통치에 둘 것을 구하였다.

아켈라우스

아켈라우스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의 분봉왕으로 확정되었다. 처음부터 그는 통치자로서 호평을 받지 못하여서 그가 통치하면 할수록 백성들은 더욱 그를 싫어하였다. 심지어 아켈라우스는 자기 일로 로마에 가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였으며 그의 군대는 유월절에 3천 명의 유대인을 살해하였다.

그의 전 통치 기간은 혼란과 피바람으로 특징지워졌다. 아켈라우스는 헤롯의 죽음이 남기고 간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소유하지 못하였다. 이혼한 여인과 한 그의 결혼은 그로부터 유대인의 충성심을 갈라놓았으며 헤로디아 일가에 대한 그들의 혐오감을 고조시켰다. 두번에 걸쳐서 그는 대제사장을 해임시키고 자신이 직접 야만적이며 고압적인 태도로 그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의 치리 가운데서 한가지 칭송받을 만한 모습은 그의 건축 계획이었다. 10년간에 걸친 분봉왕으로서의 통치 기간에 쌓인 그와 유대인 사이의 알력이 폭발하여 그는 로마인에 의하여 고울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유대는 이어서 코포니우스 출신의 총독을 맞아들였다 (A.D. 6 ~ 9) .

헤롯 안티파스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으로서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는 그의 형 아켈라우스에 비하여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참을 만하였다. 헤롯 안티파스는 대규모의 건축을 하였고 국방을 견고케 하였다. 그는 신약에서 특별히 세례 요한과 관련하여 여러번 언급되고 있다. 엄격한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헤로디아스와 그의 불법적인 결혼은, 그의 간음죄를 지적하였기 때문에 투옥시킨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범한 것이다. 이 헤롯은 본디오 빌라도가 성금요일 아침에 예수님을 보낸 헤롯과 동일인이었다 (눅 23:7~12) . 헤롯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스의 설득을 받아 그녀와 함께로마에 가서 칼리큘라에게 왕의 칭호를 제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헤롯 안티파스는 그의 청원을 수락받지 못하고 오히려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하였다.

빌립

헤롯이 세째 아들인 빌립은 갈릴리 호수의 동부와 남동부에 위치한 속주의 분봉왕이었다 .헤롯의 아들 가운데서 그는 단연코 최상의 통치자였다. 빌립은 신약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 복음서 저자들은 바리새인들의 증오심이 예수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때 주님은 빌립이 다스리는 지경으로피신하였다고 적고 있다. 쉬러의 견해를 따르면 빌립의 통치는 “온건하고 공정하며 평화로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