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역사/성경세계사

4. 하스모네어 왕국

은바리라이프 2010. 7. 24. 02:18

4. 하스모네어 왕국

 

팔레스타인의 형세에 영향력을 쥐려는 시리아의 마지막 시도가 실패한 뒤(기원전 128년) 요한네스 히르칸은 마음대로 온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는 유대 지방 곳곳에 승리의 진군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위하여 싸우는 국민 군대가 아니라 그가 모집하고 그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하는 용병 군단을 이끌고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미 요나단과 시몬이 유대인의 세력 범위를 확대할 수 있었다면, 히르칸 역시 그의 지배권을 확대하는 데 전념하였다. 기원전 128년에 그리짐 위에 있는 성전이 파괴됨으로써 사마리아인들에게서 그들의 성지를 빼앗았다. 옛날 에돔의 영역인 이두매를 향한 또 다른 전투를 벌려 그 주민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땅을 유대인 지배 밑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사마리아를 향한 진군 역시 승전으로 끝났다. 즉 헬라주의화된 도시가 기원전 107년에 점령되고 파괴된 것이다.

 

비록 히르칸의 정책이 군사적인 계획에서 성공하기는 했지만 백성들에게서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거부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생활이 하느님의 율법에 따라서 형성되는데 전심하였으므로 하스모네어의 군사적인 노력을 지배자들의 세속적인 행위로 비난하였다. 마카베오 봉기를 일으켰던 율법에 신실한 유댕니 무리들 가운데서 바리사이의 공동사회가 생겨났다. 하스모네어는 본래 이들과 가까운 관계였으나 이제는 매우 거리가 멀어져 히르칸은 바리사이들에게서 지지를 얻으려 하지 않고 냉정한 현실주의적 정ㅇ치를 추구하며 헬라주의에 대해서도 패쇄적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얻으려고 하였다. 히르칸은 처음에는 율법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태도에 따라서 점차 그로부터 돌아서서 그의 뜻을 지지하는 사두가이들과 가까워졌다. 히르칸과 바리사이들 사이가 갑작스럽게 절교된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승은 말하고 있다. 히르칸이 한 번은 바리사이들의 집회에서 그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본다면 그에게 말해 줄 것을 요구하였을 때 처음에는 누구도 그에게 공개적으로 비판을 하지 못하고 모두 찬사만 들어놓았다. 그러나 그 때 엘레아자르(Eleazar)라고 부르는 바리사이가 일어나서 히르칸에게 그의 어머니가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시대에 포로로 감금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명예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여자는 감금되어 혹시 강간당할 수가 있었고 그러한 어머니의 아들이 최고의 사제적 정결이 요청되는 직위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히르칸은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매우 진노하여 이 요구를 모든 바리사이들의 의견으로 보고서 그들과 절교하였다. 이 이야기는 경건한 사람들의 판단에 따르면 하스모네어의 지배자는 대제사장의 정결에 대한 율법의 규정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비록 그가 주조하게 했던 화폐에는 "대제사장 요한네스와 유대 공동체" 또는 "유대 공동체의 우두머리 대제사장 요한네스"라는 말을 새기기는 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사령관과 지배자의 직위가 대제사장의 의식적인 사명보다 더 중요하였다.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아들인 아리스토불(Aristobul)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히르칸은 그의 뒤를 이어 그의 부인이 통치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아리스토불이 자기의 어머니를 몰아내고 세 명의 동생들을 감금해 버렸다. 그는 그의 동생인 안티고누스만을 그의 정부에 참여시켰으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의심하도록 하여 살해해 버렸다. 아리스토불은 동방의 작은 국가들의 왕들처럼 행동하였다. 그는 유대인 지배자로서는 처음으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는 출전을 계속하여 갈릴래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점령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로 할례 받게 하였다. 그렇지만 유대교로의 강제 개종은 종교적인 의도에서가 아니라 왕의 지배권에 복종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희랍인들의 친구인 양 행세하였으며 다른 동방의 지배자들의 선례를 추종하였다.

 

아리스토불은 기원전 103년 짧은 통치를 한 후 죽었다. 그의 부인 살로메 알랙산드라는 감금되어 있던 죽은 왕의 동생들을 석방시키고 제일 큰 형에게 통치권을 이양하고 그의 부인이 되었다. 이 새로운 지배자는 요나단이라는 자기 이름을 희랍식으로 얀네우스(Jannaus)로 개명하여 자신을 알렉산더 얀네우스라고 불렀다. 그도 역시 많은 전쟁을 하였으며 그의 전임자들처럼 대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지중해 연안 지역을 점령하고 동부 요르단 땅에서도 전투를 치르고 난 이후 당시 발흥하고 있던 다마스쿠스와의 충돌에서 겨우 자기 지위를 고수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하여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넓이에 거의 상응하는 지역을 통합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확고하지 못하였다. 점령지의 주민들은 추방되든가 아니면 강제로 유대화되어야 했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였고 왕은 자주 나라 안의 이곳저곳으로 반란을 진압하거나 예방하기 위하여 급히 출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스모네어의 지배는 자기 백성들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기반이 약했다. 경건한 사람들은 군인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의 직위를 수행하고 있는 지배자의 정책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그는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잔인하고 독단적으로 그의 뜻을 관철하였으며 바리사이들과 그 추종자들을 폭력으로 억압하였다. 긴장이 고조되어 무장충돌이 일어났다. 전승에 의하면 얀네우스는 800명의 폭도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한 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고 한다. 그는 그의 부인들과 함께 십자가 앞에서 향연을 베풀게 하였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남자들의 부인들과 아이들을 그들의 눈앞에서 살해하도록 하였다. 십자가 처형의 잔인한 형벌이 결코 이스라엘에서는 집행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그의 적들을 잡아 "그들을 산채로 매달은"(4Qp Nah I.6-7) 무서운 복수는 백성들에게 경악과 두려움을 자나냈다. 얀네우스가 테러를 통해서 공개적인 저항을 분쇄하였으나 백성들 사이에는 그에 대한 내적인 반발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는 임종하면서 그의 부인 살로메 알랙산드라에게 바리사이들과 다시 화해하도록 충고했다고 한다. 그녀는 왕이 죽은 후 지배권을 이양 받아 9년 동안 신중하고 지혜롭게 통치하였다(기원전 76-67년). 그녀가 여자로서 여왕이 되기는 하였으나 대제사장의 직위는 맡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유약하고 활동능력이 별로 없는 아들 히르칸 2세가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살로메는 이제 나라의 정치적인 상황에도 영향력을 갖고 있던 바리사이들과 화해하였다. 바리사이 공동체의 서기관들은 그때까지 우두머리 사제(Oberpriester)들과 장로들만이 될 수 있었던 산헤드린 의 회원이 되었다. 이들은 산헤드린에서 자기들의 의견을 주장하여 여러 가지로 관철할 수가 있었다. 이에 따라 얀네우스의 무력 통치하에서 도망갔던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었다. 유대인들의 최고회의에서 그들의 의견을 결정적으로 행사하여 오던 사두가이들은 자신들이 밀려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과 또 여왕의 통치에 불만을 가져온 모든 사람들과 여왕의 작은 아들이며 권력에 강하게 집착하는 아리스토불 2세가 접촉하였다.

 

이러한 긴장에 직면하여 살로메는 신중하게 고삐를 끌고 가면서 군사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것을 피하였다. 오히려 그녀는 나라의 내적 만족을 얻기 위하여 평화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바리사이적인 전승에서는 그녀의 통치가 축복된 평화로운 시대로서 찬양되고 있다. 살로메 여왕 시대에 가장 유명한 서기관이었던 시몬 벤 샤타하(Simon ben Schatach)가 살아있는 동안 비가 풍부하게 내려서 밀알은 콩이나 팥과 같이 커졌으며 보리 알맹이는 감람 열매와 같이, 콩은 金貨금화와 같이 커졌다고 한다.

 

기원전 67년에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죽자 그녀의 합법적인 아들 히르칸 2세가 법에 따라서 왕위를 이어 받아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아르스토불 2세가 왕위를 놓고 그와 쟁탈전을 벌였다.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아리스토불의 군대가 히르칸의 군대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히르칸의 부하들은 그를 버리고 강자의 편을 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대 제사장과 왕위를 아르스토불에게 넘겨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로써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더 얀네우스 밑에서 그의 아버지가 이두매의 총독으로 있었던 안티파테르(Atipater)가 밀려난 히르칸의 편을 들었다. 그는 얀네우스가 빼앗은 도시들을 다시 돌려 줄 것을 야속하고 다마스쿠스의 아레타스 왕을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아레타스와 안티파테르는 그들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이 결판나기 전에 장차 아랍 제국의 운명과 또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로마의 월등한 세력이 뛰어들었다.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왔을 때 셀류키드 왕조의 약한 나라는 무너졌고 시리아 지방으로서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유대에서 권력 투쟁을 하고 있던 두 파벌은 폼페이우스 쪽으로 돌아서서 그를 자기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폼페이우스가 왕국을 폐하고 옛날 제사장들의 통치권을 회복하여 줄 것을 원하였다. 하스모네어 왕국은 외적인 힘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대 백성들에게서도 왕국을 지지하여 줄 수 있는 세력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의 종말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자기의 판결을 내리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중재자로 서 판단하기 전에 먼저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