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로마 지배하의 팔레스타인
유대에서 서로 대립하여 있던 두 파벌은 폼페이우스의 호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애썼다. 처음에는 아리스토불이 좀 더 유리한 기회를 가져 그의 계획이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결단을 미루자 아리스토불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군사적인 수단으로 그의 지배권의 기반을 확고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의심을 하게 되어 예루살렘까지 진격하였다. 다마스쿠스는 로마의 경고로 물러났다. 아리스토불과 그의 추종자들은 도시 안에 보루를 쌓고 항거하였으나 3개월 동안의 포위 후에 그들의 저항은 무너졌다.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에 들어갔으며 또한 지성소(至聖所)를 실제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성소에서 아무 것도 탈취하지 않았으며 곧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명하였다. 대제사장만이 접근하는 지성소 앞에서 이방인이 멈추어 서지 않았다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죄를 지은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이해될 수 있는, 성전에 대한 무서운 모독으로 보였다. 바리사이들의 무리 가운데서 유래된 솔로몬의 시편에는 폼페이우스를 통해서 예루살렘이 점령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풍자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죄인이 교만하게 망치로 튼튼한 성벽을 무너뜨렸으며 당신의 그것을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이 당신의 제단에 올라가 거만하게 신발을 신고 (제단을) 짓밟았습니다. 하느님의 제물을 불신앙으로 더럽힌 예루살렘의 아들들이 주님의 성소를 모독하였기 때문입니다."(Ps. Sal. 2,1-3). 이러한 탄식에 이어서 곧 다음과 같은 기도가 계속된다. "주님, 이방인들이 쇄도할 때 예루살렘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당신의 손을 거두어 주소서"(Ps. Sal. 2,22).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정리하였다. 아리스토불은 그의 두 아들 알렉산더와 안티고누스와 함께 로마로 압송되었으며 히르칸은 다시 대제사장의 직위에 임명되었다. 경계가 새롭게 그어졌다. 해안 지역에 있는 도시들은 독립하였다. 즉 하스모네어 왕국에 종속되었던 동부 요르단 땅의 헬라주의 도시들은 북부의 다마스쿠스에서 남부의 필라델피아(오늘의 암만)에 이르기까지 자유로운 도시 동맹으로 통합되었다. 데카폴리스라고 불리는 이 동맹은 - 즉 열 개의 도시들 -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신약성경에도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마르 5,20 ; 7,31 ; 마태4,25). 사마리아에도 독립이 주어졌다. 그래서 대제사장에게는 예루살렘 제의 공동체에 직접 소속하여 있는 지역, 즉 유대와 동부 요르단 땅의 갈릴래아와 베레아의 내륙 지역만이 남게 되었다. 시리아에 있던 로마의 식민지 총독 가비니우스(Gabinius)는 기원전 57년에 팔레스타인을 직접 식민지 총독에 예속되는 다섯 개 행정 구역으로 분할하였다. 유대는 예루살렘과 가자라(Gazara)와 여리고 구역으로 분할되었고, 갈릴래아는 세포리스(Sephoris) 구역으로, 베레아는 아만투스(Amanthus) 구역으로 정해졌다. 이러한 질서는 상당히 잘 고려된 것이어서 나라의 내부에서 계속되는 불안과 외부에서 오는 충돌이 새로운 동요를 심하게 야기하지 않는다면 평화로의 발전이 가능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불과 그의 아들들이 로마의 포로 상태에서 벗어나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한 후에 곧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에는 히르칸의 나약한 직무수행에 불만을 품고 그 때문에 아리스토불에게 동정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나 로마는 무력으로 그가 팔레스타인에서 그이 목적을 실현하지 못하게 저지하였다.
로마 제국의 극심한 권력 투쟁은 팔레스타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국의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폼페이우스의 통치하에 있던 히르칸과 그의 백성들은 폼페이우스와 시저(Caesar) 사이의 싸움에 휩쓸렸다. 그 후 시저가 승리하고 폼페이우스가 48년에 살해되자 히르칸과 안티파테르는 재빨리 그리고 운 좋게 승리한 쪽 파벌에 가담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시저를 위하여 이집트에 원군을 보내서 그의 호의를 샀다. 시저는 예루살렘 제의 공동체에 지금까지 누려오던 권리를 새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더 큰 특권을 부여하였다. 즉 욥페(Joppe) 시를 다시 대제사장의 통치 영역으로 편입시켰으며, 히르칸은 대제사장의 직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고 로마의 동맹자와 대공大公으로 불렸다. 안티파테르는 세습적인 로마 시민권을 받았으며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이렇게 하여 이 땅에서 로마 제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보증인으로서 로마에 충성하는 총독의 직위가 옛 부터 전해 오는 대제사장의 직위에 대항하게 되었다. 유대는 로마 군대를 월동시켜야 하는 의무에서 풀려 자유하게 되었다. 방해받지 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성전 공동체뿐만 아니라 제국 내에 있는 회당 공동체에도 보장되었다. 그래서 유대교는 이때부터 로마 제국의 보호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안티파테르는 이러한 조정을 통하여 강력한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는 파자엘(Phasael)에게 유대의 통치를 위임하고 헤로데(Herodes)에게는 갈릴래아의 통치를 위임함으로써 그의 이 두 아들들을 그의 세력에 참여시켰다. 헤로데는 갈릴래아에서 소위 도둑떼라 불리던 유대 민족주의 일파의 폭동을 진압시키고 본래 사형 판결에 대한 최고의 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던 예루살렘의 산헤드린과 상의도 없이 그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책임을 추궁하려 하자 그는 친위병들을 대동하고 산헤드린에 나타났다. 그래서 누구도 감히 그에 대한 논의를 하지 못하였다.
시저가 암살됨으로써(기원전 44년) 로마 제국 안에 새로운 혼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히르칸과 안티파테르가 시저 암살자들의 편에 섰으나 그들의 지배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기원전 42년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필립비 전투에서 그들에게 승리하였다. 이 승리 후에 안토니우스는 제국의 동부를 통치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거주하였다. 안티파테르는 살해 음모에 희생되었다. 그러나 히르칸과 안티파테르의 두 아들들은 안토니우스에 의하여 그들의 지위가 보장되었다. 그 이후 히르칸은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헤로데와 파자엘은 그 땅을 다스렸다. 안토니우스는 언제나 이집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대하여 많이 돌아볼 수 없었다.
그때 파르테르 유목민이 동부에서 침입하여 왔다. 아리스토불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가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때까지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권력을 쥐려고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그는 그의 소원이었던 목표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파르테르 유목민은 히르칸과 파자엘을 사로잡았다. 파자엘은 자결하였으며 히르칸은 안티고누스에게 넘겨졌다. 안티고누스는 그의 큰아버지인 히르칸의 두 귀를 잘라 버렸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의 직위를 수행할 수 없는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안티고누스가 그를 대신하여 대제사장의 직위를 넘겨받았으며 파르테르 유목민은 그의 직위를 확고하게 해 주었다. 그는 3년 동안 그들의 도움을 받아 대제사장과 유대 왕으로 통치하였다(기원전 40-37년). 이렇게 하여 히르칸과 파자엘은 제거되고 헤로데만 남게 되었다.
헤로데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행동을 취하였다. 즉 그는 로마로 도망가서 로마의 도움과 보호로 안티고누스와 파르테르 유목민에 항거하였다. 기원전 40년에 그는 로마로 와서 거기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신뢰와 도움을 받았다. 원로원의 공식적인 결정으로 그는 유대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땅 없는 왕이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에는 그의 원수들이 있었으며 그들에게서 그 땅을 빼앗아야 하였기 때문이다. 로마가 파르테르 유목민을 몰아낼 수 있었던 시리아에서부터 그는 로마의 도움으로 팔레스타인에 진격하여 갔고 기원전 37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안티고누스는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이로써 지배권을 한 번 더 장악하려던 하스모네어의 마지막 시도는 분쇄되었다. 헤로데가 나라를 완전히 장악하고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였다.
헤로데는 로마의 지지 아래 권력을 다시 찾은 것처럼 로마의 도움으로 지위를 확고히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교활하고 잔인하였으나 과감한 결단을 하고 단호히 행동하는 대담하고 재치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에 그는 이집트에서 로마 제국의 동부를 다스리고 있던 안토니우스의 편을 들었다. 그래서 비록 자기의 이익에 어긋나더라도 그의 명령을 따랐다. 그래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간청으로 해변가의 도시들과 여리고를 그녀에게 주었을 때에도 싫어하는 기색을 띨 수가 없었다. 그는 영리하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로마 지배자의 지지를 얻는 것이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척하였다. 후에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굴복하자 헤로데는 가능한 한 빨리 제국의 이 새로운 지배자와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였다. 그는 로도스(Rhodos)에 머물고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가서 지금까지 안토니우스의 편에 가담했었음을 분명하게 자백하고 그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의 말과 행동들은 빗나가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헤로데를 유대의 왕으로 확정하여 주었으며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었던 도시들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이렇게 헤로데는 아우구스투스의 호의를 얻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를 교묘하게 유지시켜 나갔다. 아우구스투스 통치와 함께 로마 제국에 찾아온 평화는 팔레스타인에도 찾아왔다. 마침내 이 땅은 전쟁으로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헤로데는 우정이나 가족에 관계없이 그의 통치의 적들과 자기의 세력을 위태롭게 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였다. 하스모네어 가문의 출신인 마리암네(Mariamne)와의 결혼을 통하여 옛날 왕족과 유대를 맺었다. 그는 이두매 출신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동족으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염려로 늘 불안해하였다. 비참한 불구자가 되어 더 이상 대제사장의 직위에는 쓸모가 없게 된 늙은 히르칸은 살해되었다. 헤로데 자신은 제사장의 혈통이 아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에게 순종을 잘하는 사람을 대 제사장으로 임명하였으나 그 후 그의 장모와 하스모네어 가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간청에 못 이겨 그의 젊은 처남 아리스토불에게 대제사장의 직위를 주었다. 그러나 헤로데는 하스모네어가家가 그에게 위험스러우며 그를 몰아내려 할 것이라는 염려를 버리지 않았다. 1년 후에 아리스토불이 목욕탕에서 살해되었을 때 암살범은 헤로데가 고용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공개된 비밀이었다. 그러나 왕은 대중들 앞에서 대제사장의 죽음에 대하여 몹시 슬퍼하는 체 하였다. 하스모네어 가에 대한 그의 질투는 마침내 극에 달하여 그의 부인인 마리암네마저 죽여 버렸으며 그 얼마 후에는 그녀의 아들 알랙산더와 아리스토불도 죽여 버렸다. 그는 큰아들 안티파테르를 사랑하였으나 그가 죽기 직전 그 아들마저 배반자와 내란의 선동자라고 하여 죽여 버렸다. 헤로데의 행위는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베들레헴의 유아살해에 관한 신약성경의 이야기는 이러한 그의 성격의 모습과 일치한다(마태 2,16). 헤로데는 그의 지배가 어느 편으로든지 위협을 받을 때는 언제나 감시를 하였으며 가혹하고 포악한 조치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왕국에 적으로서 위험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헤로데의 왕국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 특히 옥타비아누스의 선물로 그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된 그 지역 안에 살던 이방인들도 속하였다. 헤로데는 이방인들을 강제로 유대교로 개종시켰던 하스모네어의 정책을 계속하지 않고 희랍인과 유대인을 서로 동등하게 취급하였으며 왕으로서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이, 희랍인들에게는 희랍인이 되려고 하였다. 그는 그의 주변을 교양 있는 헬라주의자들로 에워쌌으며 희랍 도시들 안에는 목욕탕, 극장, 체육관, 성전 등의 건축 활동을 장려하였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유대인 왕이 희랍인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사실에 격분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성전을 확장하고 개축하면서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하였다. 그래서 성전은 옛날 솔로몬 왕 시대에 가졌던 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다. 거대한 성전 건축에 있어서 왕은 율법에 따라 정확하게 건축되도록 배려하였다. 성소는 조심스럽게 덮여 있어서 아무도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디아스포라에게도 헤로데는 유대교의 보호자로 등장했으며 회당 공동체의 독립적인 생활을 장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하였다. 그의 엄격한 통치와 그를 반대하는 활동을 무너뜨리기 위한 테러로 말미암아 그는 수많은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에 반하여 그는 헬라주의화된 주민들에게서 유대인들에게서보다 훨씬 지지를 받았다. 파괴된 도시 사마리아 자리에 아우구스투스의 영예를 위하여 세바스테(Sebaste)라는 이름이 붙여진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희랍어 Sebastos = 라틴어 Augutus = 존엄자). 바닷가에는 항구가 건설되었다. 이 항구는 바다로 내뻗은 제방을 통하여 모래 더미를 보호할 수 있었다. 이 도시에는 많은 건축물들이 세워졌으며 그의 고귀한 은인의 이름을 따라 카이사레아(Caesarea)로 명명되었다. 온 나라가 튼튼한 성곽으로 둘러싸였다. 예루살렘에는 안토니아 성이 성전지역 바로 옆에 세워져서 헤로데는 늘 이곳에서 성소 주변과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감시할 수 있었다. 그는 사해死海의 서쪽 바닷가에 가장 튼튼한 요새를 구축하였다. 즉 마사다(Masada) 성은 거의 난공불락으로 산의 정상 위에 세워졌다. 헤로데는 여리고에 겨울에 머무를 수 있는 궁전을 세우게 하였다. 이러한 건축 활동의 증거들을 지금도 그 땅에서 볼 수 있다. 소위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건물이 헤로데 시대의 성전 건물로 남아 있고 안토니아 성의 기초가 지금도 남아 있다. 여리고, 카이사레아, 마사다와 그 외 다른 지역에서의 발굴로써 거대한 건축의 전체 규모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이러한 요새의 건축은 그의 지배를 안전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헤로데는 그의 영예를 위하여 건축을 할 수 있도록 외국인 도시들에 희사를 하면서 그의 명망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이교적 제의들을 장려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럼으로써 자기네들의 관용을 명백히 나타내고자 하였던 헬라주의 왕들의 선례를 따라서 행동하였다.
헤로데는 나라를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였지만 유대인들로부터는 소외되었다. 백성들은 그에게 복종해야 하였지만 백성들의 사유思惟와 행동에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바리사이들이었다. 이들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변화에 대한 희망을 북돋아 주기는 하였으나 그 어떤 폭력적인 혁명도 권하지는 않았다. 헤로데의 말년에 세례자 요한과 나자렛 예수가 태어났다.(마태2,1 ; 루카 1,5) 교묘하고 교활한 정책으로 오랜 통치 기간 동안에 그의 지배권을 지켜온 그는 죽기 전에 후계자를 정하려고 하였다. 후계자라고 생각되었던 세 아들들은 이미 그가 죽여 버렸었다. 왕이 죽기 직전에 한 유언에서 나라를 세 명의 아들, 즉 아르케라우스, 헤로데 안티파스, 필립푸스에게 분할하여 주었다. 아르케라우스는 왕이 되어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이두매를 다스렸으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동부 요르단에 있는 베레아를, 그리고 필립푸스는 나라의 북부에 있는 동부 요르단 지역을 다스렸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로마의 필요한 확인을 받아야만 법적으로 효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헤로데가 죽은 후(기원전 4년) 세 명의 아들들은 각기 더 많은 지역을 얻어 내려는 생각으로 세계의 수도 로마로 갔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헤로데의 아들들의 지배권을 제거하고 제의 공동체의 독립성을 회복시켜 줄 것을 간청하는 사절단을 로마에 파견하였다. 이러한 사건에 대하여 루카 복음 19장 12-14절의 비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소망을 들어주지 않고 헤로데의 유언에 따라서 원칙적으로 처리하였다. 안티파스와 필립푸스는 분봉 왕으로, 즉 소 영주라고 불렸다. 아르켈라우스는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한 미미한 대공大公이라고만 불렀다. 물론 백성들에게는 이러한 칭호의 차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지배자들은 백성들에게는 왕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아르켈라오스(마태2,22)도 헤로데 안티파스(마르 6,14.26 ; 마태 14,9)도 왕으로 언급되었다. 헤로데의 세 아들이 로마에 머물러 있는 동안 이 나라에는 소요가 일어났다. 그래서 시리아의 총독인 크빈티리우스의 지휘 하에 있던 로마 군대가 개입하여 안정과 질서를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로마 군대의 가혹하고 엄격한 처리로 인하여 백성들 사이에서는 반로마적인 풍조가 일어났다. 이 때 세 영주들이 로마에서 돌아와 그들에게 약속된 지역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매우 전제적이고 포악하게 통치하던 아르켈라오스는 백성들에게서 가장 미움을 받았다(참조 마태2,22). 그래서 억압받던 신하들이 아우구스투스에게 한 번 더 사절단을 보내 그들의 고통을 간절하게 호소하였고 그는 이 호소를 받아들였다. 아르켈라오스는 기원 6년에 그의 지위에서 밀려나 갈릴래아로 추방되었다. 그가 다스리던 지역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백성들로부터 일반적인 존경을 받고 있던 로마 총독에게 예속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 시대에는 갈릴래아와 동 요르단 북부 지역의 땅은 유대인 영주의 지배하에 있었고 반면에 사마리아와 유대, 그리고 이두매아는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았다(루카 3,1).
총독은 카이사리아에 거주하였으며 때때로 예루살렘에 올라왔는데 대체로 유대인들의 대 축제일에 예루살렘으로 왔다. 축제일 때는 수많은 유대인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어 많은 군중들이 선동적인 행동으로 급격히 번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때에는 예루살렘에 총독이 머무는 것이 좋았다. 제의 공동체의 독립적인 생활이나 사제단과 산헤드린의 활동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성전 안에는 어떠한 황제의 초상화도 걸려 있지 않았으며 로마 군대는 그들의 군기軍旗없이 예루살렘에 들어왔다. 최고의 법적 권력은 총독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헤드린은 예루살렘 제의 공동체의 용무만을 처리할 수 있었고 사형 선고나 집행을 할 수는 없었다(요한 18,31). 안토니아 성에는 로마군 소대만 주둔하고 있었고 대축제 때나 소란의 위험이 있을 때에는 증강되었다. 군인들은 그 땅의 비유대인 주민들 가운데서만 징집되었다. 그래서 사도행전 10장 1절에는 카이사리아, 즉 총독의 소재지에서 근무하던 이방인 장교 코르넬리우스가 언급되고 있다. 바오로도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후 거기에서 그의 사건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사도23,23.33).
예수님 시대에는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 총독으로 있었다(기원26-36).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는 그의 직무 수행은 "뇌물, 폭력, 약탈, 불법, 무례, 재판 없는 사형 집행, 계속적이고 견디기 어려운 잔학"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도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어느 날 밤 황제의 초상을 단 로마의 군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훼손시키느니보다는 기꺼이 죽음을 감수한다고 선언하자 비로소 군기를 다시 도시에서 가져가도록 명령하였다.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수도 설비를 하여 주려고 성전 금고에서 돈을 사용하였을 때 커다란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빌라도는 확산되려는 항거를 폭력으로 막았다. 한 사마리아 예언자가 모세의 시대에 그리짐에 거룩한 기구들을 매장하여 놓았을 것이라고 선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산 위에 모여들었을 때 빌라도는 군인들을 진격시켜서 사람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도록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체포되었으며 나머지는 도망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분노는 매우 컸다. 그들은 로마의 특사로서 시리아에 머물고 있던 비텔리우스에게 가서 빌라도에 대한 불평을 호소하였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해명하도록 로마로 소환 명령을 받게 되었다.
본디오 빌라도에 대한 그 당시의 소식이 전해 주는 모습은 신약성경을 통하여 확인된다. 한 번은 갈릴래아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희생 제물을 드리려고 했을 때 그는 이들을 학살하였다(루카 13,1). 그는 혁명의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체포하여 죽였다(마르15,7.27). 포악하고 난폭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는 산헤드린이 정치적으로 의심스러운 사람이라고 그에게 넘겨준 한 유대인을 잠깐 동안 심문을 하고 나서 십자가의 사형을 선고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자렛 예수는 예루살렘의 성문 앞에서 로마 총독에 의하여 고대 세계가 알고 있었던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에 맡겨져 죽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에서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통치하였다. 그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수도를 건설하여 통치자 황제의 영예를 위하여 이름을 티베리아(Tiberias)라고 붙였다(참조 요한 6,1.23; 21,1). 이 도시는 옛날에 묘지였던 지대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율법에 의하면 정결하지 못한 곳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율법에 엄격한 유대인들은 그 도시에서 살 것을 거부하였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그것에 대하여서는 별로 개의하지 않고 자기 좋은 대로 생활하였다. 처음에 그는 다마스쿠스 왕의 공주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그의 이복 동생 -별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는 헤로데- 의 아내 헤로디아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이로써 이혼은 허용하지만(신명24,1-4) 형제의 부인을 빼앗는 것을 금지하는(레위 18,16,20 ; 21)율법을 어겼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왕과 마리암네의 손녀, 즉 헤로데 왕이 그의 어머니처럼 처형하였던 아리스토불의 딸이었다. 공명심과 명예욕이 강한 여자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아내가 되었다. 헤로데는 그의 첫 번째 부인을 버리고 다마스쿠스 왕국의 그녀의 아버지께로 돌려보냈다. 새로운 결혼에서 딸 살로메가 태어났다. 이 사건에 대해서 마르코복음 6장 17-29절이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는 실수로 헤로디아의 첫 번째 남편으로 필립푸스가 언급되어 있다. 세례 요한은 영주의 불의를 적나라하게 밝혔기 때문에 체포되었으며 헤로디아의 포악한 적대감으로 박대를 계속 받다가 결국 처형되었다.
헤로디아와의 결혼은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불행을 가져왔다. 분노한 다마스쿠스 왕은 과거의 사위를 공격하여 그에게 참혹한 패배를 안겨 주었다. 이에 관하여 요세푸스는 많은 유대인들은 신이 세례자 요한을 위하여 헤로데에게 정당한 형벌을 내린 것이기 때문에 헤로데 군대의 패배가 신의 섭리라고 생각하였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 기록은 이렇게 계속된다 - 헤로데는 처형하였다. 영혼은 이미 의로운 삶을 통하여 정결하여졌기 때문에 세례를 죄악의 도발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육체의 성화를 위하여 받는다면 세례는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될 거이라고 그는 외쳤다. 그때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으며 이러한 그의 말로 인하여 그들은 고양된 자각을 하였기 때문에 헤로데는 이러한 충고로 모든 사람들을 지도하여 가는 이 사람의 영향이 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위험이 일어나기 전에 해결하기 힘든 사건이 되어 후회하는 것보다는 그를 제거하는 것이 더 상책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혐의를 받아 요한은 체포되었으며 마케루스(Macharus) 축제에 보내져...거기에서 목이 잘렸다"(Judische Altertumer XVIII, 116-119) 이러한 표현 속에서 세례자의 선포가 헬라주의적인 도덕 설교의 의미에서 기록되어지기는 하였으니 그의 선포에 의하여 자극된 영향력은 그래도 적절하였다고 보여 지고 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님이 살았던 지역의 영주였다. 그가 예수님의 출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가 처형한 세례자 요한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였다.(마르6,14-16) 그는 이 기적의 사람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루카 9,9)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여우라고 불렀으며(루카 13,32) 예루살렘으로 갔다. 루카복음에만 빌라도가 처음 심문을 한 후 예수님을 유월절 축제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와 있던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보내어 그의 입장을 알아보려 했다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루카 23,6-16). 그러나 이러한 수난 사화의 부연은 본래는 매우 짧은 형태였고 로마 총독에 의한 예수님의 심문 이야기에 대한 전설적인 형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시편 2편 1-2절에 따르면 지상의 왕들이 야훼와 그의 기름부은 자에게 반항하고 세상의 주인들이 서로서로 담합하여 대적하는 것과 같이, 루카의 묘사에는 로마인 주인과 유대인 영주는 날뛰는 백성들이 그의 심판을 독촉하는 동안 예수님이 그들 앞에 서 있는 심판자들로 표현되어 있다.
그의 부인 헤로디아가 그에게 왕위를 부여하여 달라고 칼리굴라에게 힘써 보라는 제촉은 끝내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불운을 가져왔다. 영주의 이러한 노력은 실패하엿으며, 칼리굴라는 그를 의심하게 되어 갈릴래아로 추방하여 버렸다(기원전 39년).
필립푸스는 북부의 동 요르단 땅을 다스렸다. 그는 카이사리아 필리피라고 이름 지은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다.(마르 8,27) 게네사렛 호수가 그의 지역과 헤로데 안티파스의 지역과 경계를 이루었으며 이 경계는 요르단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졌다. 가파르나움에는 작은 국경 정류장과 요르단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졌다. 가파르나움에는 작은 국경 정류장과 세관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안티파스의 위병대가 주둔하였다. 이들의 장교에 대한 언급이 마태오 복음 8장 5-13절과 루카 복음 7장 1-10절의 이야기에 언급되었다. 필립푸스는 로마 황제의 초상화를 새긴 화폐를 주조하게 하였던 첫 번째 유대인 군주였다. 그가 다스리던 백성들 가운데서 유대인은 소수였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초상도 세우지 않는다는 유대인의 생각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필립푸스는 기원 34년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팔레스타인은 잠깐 동안 한 번 더 유대인 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헤로데 왕의 손자인 아그립파(Agrippa)는 로마에 체재하면서 거기에서 칼리굴라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 칼리굴라는 기원 37년 그에게 필립푸스가 다스리던 지역을 주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추방된 헤로데 안티파스의 지역을 이두매아에 대한 통치권도 그에게 주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할아버지가 다스리던 전 지역을 다시 한 번 그의 왕권 밑에 통합하였다. 이때에 커다란 충돌이 일어날 위협이 있었다. 칼리굴라가 예루살렘 성전 안에 그의 입상立像을 세우도록 요구했을 때 유대인들 사이에는 폭력적인 자극이 일어났다. 이미 사람들은 성소를 황폐케 하는 가증한 것이 세워지는 것을 알았다(마르13,14). 그 무렵 기원 41년에는 칼리굴라가 암살되었고 후계자인 클라우디우스는 유대인들의 성전에서 그가 신적으로 경배되어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지 않았다.
헤로데 아그립파는 스스로 율법을 정확하게 따르는 경건한 사람으로 언명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로부터 매우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그의 태도를 유대인들에게만 취하였고 그의 나라의 헬라주의적인 영주로서 행동하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바리사이들을 위하여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박해하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를 처형하였으며 베드로를 체포하였다(사도12,1-3).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헬라주의적인 주위 사람들에게는 신이 보내신 영주로서 충성을 받으려고 하였으며, 군주에게 명백한 신적인 숭배를 받으려고 하였다(사도 12,21-23). 그가 죽자 지배권이 그의 아들 아그립파에게 넘겨진 것이 아니라 온 나라가 시리아의 식민지로 떨어져서 시리아에 있는 총독에 예속된 지방 총독들에 의하여 통치되었고 그들의 관청 소재지는 카이사레아에 있었다.
아그립파 2세는 몇 년 후에 전에 필립푸스가 다스리던 지역을 받았다. 그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을 감독하는 권한도 주어졌다. 그는 이러한 권리를 이용하여 마치 그에게 어울리는 것처럼 대제사장의 직위에 올랐다. 그것 때문에 예루살렘 주민들의 불만을 자극하였다. 그는 또한 그의 누이 베르니케를 언제나 그의 곁에 둠으로써 감정을 자극하였다(사도25,13). 백성들 사이에는 이 오누이가 근친상간의 관계를 맺으며 산다고 하는 소문이 퍼졌다.
나라 안에서는 로마인에 대한 증오가 증대되었으며 항상 소란이 일어났다. 혁명당원의 그룹은 폭력으로 타국의 지배권을 무너뜨리려고 하였으며, 지각없고 악의에 찬 로마인들의 태도로 인하여 계속하여 도전하려는 주민들에게서는 이들에 대한 동조가 증대하여 갔다. 이때 팔레스타인을 다스렸던 많은 로마의 지방 총독들 가운데 두 사람의 이름이 신약성경에 언급되고 있다. 기원 52년부터 펠릭스(Felrix)가 총독의 직위에 있었다. 그는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으로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호의를 얻어 이러한 높은 지위에 올랐다. 타키투스(Tacitus)가 그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는 "온갖 포학과 욕심으로 노예의 성정에서 왕의 권리를 손아귀에 잡았다"라고 하였다. 그의 세 부인 중에서 두 번째 부인은 아그립파 1세의 딸인 유대인 공주 드루실라(Drusilla)였다. 그는 그녀의 남편에게서 그녀를 빼앗았다. 사도행전 24장 24절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오로는 그가 카이사레아에 구금되어 있는 동안 펠릭스와 두르실라 앞에서 변호해야 했다. 펠릭스는 - 아마도 기원 60년에 그러나 그보다 더 이전일 수도 있다 - 명문 출신인 페스투스(Festus)와 교체되었다. 비록 페스투스는 그의 전임자들보다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지만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의 팽배한 긴장을 감소시키지 못하였다. 기원 62년에 그가 죽음으로써 끝난 그의 재직 기간 동안은 바오로의 재판이 로마에서 판결되어야 했던 구금의 마지막 때였다(사도 24,27-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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