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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에 나타난 조폭문화의 영향과 현실인식

은바리라이프 2010. 3. 18. 14:02

영화속에 나타난 조폭문화의 영향과 현실인식

 

2000년 주유소습격사건을 필두로해서 2001년을 강타한 친구, 신라의 달밤, 킬러들의 수다, 조폭마누라, 달마야 놀자 그리고 두사부일체까지 소위 조폭 혹은 양아치영화가 우리 영화계의 흥행을 이끌고 있다. 최초로 우리 영화의 객석 점유율이 헐리우드를 제치고 49%를 기록한 것도 모두 조폭영화 때문이다. 조폭영화 흥행의 성공은 한국영화의 괄목한 성장인 것처럼, 혹은 우리의 영화수준이 높아진 것처럼 오해되기도 하지만 최근에 좋은 작가주의 영화들, 예를 들어 “고양이를 부탁해” “나비” “와이키키 브라더스”등이 흥행에 실패한 것은 영화의 수준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조폭이라고 하는 특별한 관심에서 벌어진 흥행 성공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지난 한 해는 온통 조폭이야기였고 지금도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매일경제신문은 2001년 10대뉴스로 조폭신드롬을 꼽았고 TV나 코미디에서도 조폭이 언제나 등장하고, 이미 뮤직비디오나 CF에는 조폭 마케팅으로 짭잘한 재미를 보고 있는등 온통 나라가 조폭 이야기 뿐이다.

자연스러운 조폭문화

결국 우리나라 전체가 조폭이라고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이미 몸에 맞는 옷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것같다. 이같은 현상은 일시적인 신드롬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사실 조금만 유의하여 보면 정치 경제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는 조폭문화에 익숙해 있다. 사실 가신정치라고 불리는 것도 알고 보면 조폭문화와 유사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미 정치가 조폭과 연계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경제와 정치가 만나는 것도 보스와 똘마니가 만나는 형태를 띄고 있으며 심지어 종교 자체도 보스와 부하의 관계로 맹목적 주종의 관계가 형성되고 이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월 14일자 아시아판 타임지는 “주먹들의 길” (the way of the fists)이란 기사에서 한국의 조폭문화가 이미 정치,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조폭” 영화의 성공은 “충성, 희생, 그리고 상급자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이 중시되었던 시절에 대한 향수“라고 매우 불쾌하게 분석하였다. 더욱이 타임지는 "갈취와 착취를 일삼는 조직폭력배들을 마치 영웅이라도 되는 양 떠받들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며 세계 어느 곳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진귀한 문화현상"이라고 비꼬듯이 글을 마무리하였다. 우리가 그렇게 아름답게 여기던 “충성”과 “희생”이 조폭문화의 일단으로 평가되어지는 비극적인 현실을 맞게 된 것이다. 그만큼 뿌리깊게 우리사회 속에 조폭문화가 자리잡았고 조폭과 관련된 영화등의 문화매체가 그 깊이를 더욱 강하게 자리매김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심각한 조폭 문화

그런데 사실 진정한 문제의 심각성은 조폭문화가 우리 안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고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염려보다는 우리 영화의 흥행성공이라는 측면에서 삼페인을 터뜨리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유의하여 보면 이미 조폭영화등으로 더욱 점화된 조폭문화는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뿌리깊게 자리되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미 신문에서 접하였겠지만 작년 10월13일 오전 부산 모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수업 중 김모군(15)이 흉기로 급우 박모군(15)을 찔러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는 영화 “친구”를 40번이나 보면서 모방하였다고 시인하였다. 뿐만아니라 심심찮게 등장하는 청소년들의 패싸움에 대한 기사들... 한결같이 그들은 친구와 같은 조폭영화들을 소재로 하였고 멋있어 보인다고 입을 모았다. 정확하게 조폭영화가 우리 사회에 심각한 모방범죄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말이다.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 조폭은 매우 심각한 것이 사실이다. 장래 희망을 조폭이라고 쓰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벌어지는 등 초등학교까지 번지고 있는 조폭 동경 경향들, 그리고 이미 중, 고등학교 까지 스스로 조직폭력의 방식을 따라 조직을 만드는 모방도 하고, 일부 신문 보도에 의하면 조폭들이 세력을 고등학교까지 확대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폭영화들은 “살인교과서” “조폭조직 홍보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한 신문이 보도하기를 조폭들이 단체로 “친구”를 관람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쯤되면 조폭영화들을 예전 “장군의 아들” “초록물고기”를 보던 것처럼 단순히 처리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조폭영화가 아니라 조폭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 더욱 문제가 크다고 생각한다. 사실 영화는 트렌드를 타는 상품이다. 즉 그 시대의 문화적인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트렌드” “문화적인 흐름” 알고 보면 그 시대의 세계관과 매우 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조폭영화가 범람하고 있다는 것은 이 시대가 말하고 있는 영적인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더욱이 우리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이 얘기한 것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 바울은 문화(세상풍속)속에 시대를 흐르고 있는 악한 영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욱이 우리는 조폭영화들을 단순하게 볼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말은 조폭영화속에 숨겨져 있는 영성들을 점검하고 방향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조폭영화와 퓨전문화

문제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가 반영하고 있는 것들이 이 시대의 근저에 깔려 있는 영성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지금이 포스트모던 시대라는 점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시대를 특징지을 수 있는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퓨전일 것이다. 섞어놓는다는 것을 말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비튼다, 뒤집는다말로도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이같은 퓨전현상은 크게 세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하나는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이다. 이것을 조금더 비틀면 강력한 것에 대한 추구라고 정리할 수 있고 나머지 다른 하나는 재미있는 것에 대한 추구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하면 엽기와 상관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조폭문화가 엽기문화와 만나면서 퓨전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같은 포스트 모던시대의 퓨전현상을 사용하되 세가지 것을 혼합하여 새로운 모습의 조폭문화를 만드는데 있다. 그것이 조폭을 동경하게 하는 요소로 자리잡게 하였다. 결국 우리 사회속에서 건강하게 추구하여야 할 정신들을, 세계관을 왜곡시키므로 하위개념의 세계관으로 변질시켜버린 것이다. 타임지가 지적한 것과 같이 나라 전체가 조폭을 선호하고 향수에 빠져 있는 민족처럼 비취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조폭영화를 비롯한 매체들이 비틀고 섞어놓으므로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하위개념적 세계관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첫째 종교적 신비주의에 대한 욕구를 자극함으로 특정종교를 미화하거나 또 다른 종교를 천시하게 만드는 결과물을 낳았고 대신 엉뚱하게 조폭들을 신비스럽게 만들었다. 이것은 퓨전현상의 특징인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를 이용하여 벌어졌다. 사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은 종교적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는데, 이단이라할지라도 새롭고 신비적인 것에 집중하는 모습을 띄게 되었다. 그래서 조폭영화에 불교라는 요소를 결합하여 “깨진 항아리를 물로 채우기”라는 매우 선문답적인 접근을 한 “달마야 놀자”가 흥행몰이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접근 때문에 불교의 경우는 불교의 대중화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불교계는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한 조계종단의 지도층 인사들 전부가 이 영화를 관람하였고 법보신문에 실린 기사처럼 "대승적인 선택이 불교의 대중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분석하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불교계는 보이고 있다. 반면에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는 조폭들이 입버릇처럼 혹은 농담처럼 “할렐루야” “아멘”을 연발함으로 기독교를 경멸시하는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 사실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모습만을 중시하고 표현하는 감각적 영화를 표현하는 조폭영화의 특성상 진실은 감추어진 채 기독교의 본질은 왜곡되어지는 상황은 문제가 있고, 더욱이 불교등 인간중심적이거나 잘못된 종교들이 힘을 얻어가는 역할을 이런 경향의 영화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를 경멸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의 밑바닥에는 교회가 상실하고 있는 영성 혹은 신비적인 부분의 상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는 하다. 소위 부자세습, 정치와 종교의 결탁, 타락한 교회 선거문화, 낱낱이 파헤쳐지는 물질중심의 교회모습들, 일부 잘못된 기도원의 모습으로 인한 교회에 대한 실망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불교등 일부 종교들의 신비적인 묘사와 함께 영화속에 나타난 조폭들의 목숨을 버리는 의리의 모습들이 지나치게 신비적으로 묘사함으로 조폭문화를 동경화하게 한 측면에 상당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곡된 힘

둘째는 강력한 리더슆에 대한 요구대신에 부당하더라도 강력한 힘을 추구하는 관심으로 이어졌다. 조폭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집단무력감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집단무력감은 사회 전체에 횡횡하고 있는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두사부일체”는 실제로 존재하였던 상문고 재단비리를 의도적으로 패러디하였다. 그리고 학부모가 교사를 손찌검하고 학생이 선생을 고소하는 무너진 교육계가 반영된 것이다.

이미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이다. 타임지는 한 폭력배의 말을 인용하기를 ꡒ한국의 거물급 폭력배들은 정계 유명인사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고 전하면서, 동시에 "고상한 마피아 신화가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제 희미하게 사라졌지만 한국의 폭력배는 여전히 대중의 영웅같은 존재"라고 소개했다. 비극적이지만 현실인식은 그러하다.  매스컴에서 떠들던 벤처사업가, 조폭, 정치인, 경제인 할 것없이 서로 맞물려 있고, 공의를 수행해야 할 검찰을 비롯한 공적인 조직들은 허수아비가 되고 만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만 고통당하고 피해당하는 현실 앞에서 일반 민초들이 느끼고 있는 상실감과 박탈감이 극치에 달하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누가 좀 말려줘”라고 외쳤던 어느 코미디 대사처럼 사람들은 누군가가 강한 힘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그같은 강한 힘을 손쉽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길이 조직폭력배이고 그래서 거기에 집중하고 있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이같은 동경은 결국 자기비하 혹은 자기모멸감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이 시대의 비극이 있다.

그래서 그런가. 우습게도 역사상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대왕, 김구등을 제치고 박정희대통령이 선정되는 것은 힘에 대한 동경에서 나타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 등장하는 끈끈한 의리와 진실에 대한 동경을 조폭영화업자들은 마케팅적으로 접근하여 이용한 것이다. 그래서 “두사부일체”에서 부패한 사학재단의 횡포와 폭력앞에 계두식 조폭일당이 학교를 바라보면서 “이곳은 우리가 접수한다”고 외치는 장면앞에 사람들은 대리만족을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조폭들은 영화가 그려내는 것처럼 정의롭지 못하고 바른 힘을 가진 존재들이 아니다. 폭력과 갈취를 일삼는 부정적인 집단이다. 그런데 그 집단을 미화함으로 특히 청소년들에게 조폭을 동경하게 만든 것이다.

저질 하위문화의 일반화

셋째 포스트모던 시대의 관심은 어느 것이 나에게 유익한가? 즉 어떤 것이 더 재미있는가하는 것에 관심을 나타나게 되는데, 조폭영화는 이런 욕구에 편승하여 과거 폭력영화와는 다르게 엽기적인 폭소들을 대거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엽기적인 폭소들은 조폭영화에서 천박함으로 무장시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것들이 저질 하위문화를 일반화시키는 측면을 발생시켰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말초적 즐거움으로만 접근하게 만들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최근의 좋은 작가주의 영화들이 흥행에 고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좋고 생각하게 하는 영화보다 재미있고 말초적인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약하고 궁상맞은 것은 싫고 재미있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같이 재미있는 것의 추구는 지극한 천박함이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독선적 이기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모든 폭력영화에는 거친 폭력과 지저분한 쌍욕과 무식함, 자기 독선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소위 모든 종류의 하위문화들을 전부 끌어다가 영화속에 자리잡게 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조폭영화속에 등장하는 하위문화의 대표들은 언어에서 알 수 있다. 영화 친구에 등장했던 유명한 “내가 니 씨다바리 가”라는 대사 뿐만아니라 “깍두기” “대가리” “행님” “똘마니” “회뜬다” “쪼사버린다” “접수한다”등 수없는 속어들과 쌍씨옷 발음으로 등장하는 거친 언어들이 우리 청소년들 사이에서 일상화되어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실상 더욱 위험한 것은 “시다바리”라는 표현에서 느끼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자학하는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극단적으로 힘에 대하여 대항하지 못하면 똘마니로 살아야 하는 체념적 세계관을 우리 안에 깊이 자리잡게 만든 것에 있을 것이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릭 프롬은 그의 책 “자유에로의 도피”에서 무자비한 폭력과 인종우월주의를 장착한 나치즘이 독일을 지배하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독일 국민들이 스스로 “자유로부터 도피”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나와 자유하게 되었지만 그들이 뜨거운 태양과 풍족하지 못한 생활환경을 만나고 어려움을 당하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노예생활을 하겠다고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강력한 힘 아래서 노예생활을 하고, 제한된 범위에서 자유를 가지고 살겠다는 노예근성이 핵심인 것이다. 사실 조폭 신드롬 앞에서 걱정하는 것은 조폭의 위험성과 함께 이처럼 스스로를 자학하고 제한함으로 희망없이 강력한 힘에 의지하겠다고 하는 자유로부터 도피를 선택하겠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에 대한 우려이다. 단순히 강한 힘에 순응하고 그 강한 힘에 순응하면서 말초적인 즐거움만 준다면 고개를 숙이고 살아가는 것에 익숙한 동물적인 삶에 길들여져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교육현장에서는 진정한 인성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사회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것같은 모습을 보고 있다. 영화를 비롯한 문화체계는 철저히 상업논리에 의해서만 움직여지고 종교는 교권싸움과 물질적 관심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 모습을 보고 있다. 진정한 힘들, 사랑의 힘, 공동체의 힘, 아름다운 희생과 헌신 그리고 겸양의 힘들은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천시되어지고 왜곡되고 있으며, 강한 힘만이, 엽기적이고 추잡하여도 재미있기만 하면 모든 것이 용납되어지는 시대에 접어든 것이 사실이다. 선하게 살고자 하는 자유, 아름다움과 정의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자유 앞에서 이미 도피를 시작한 우리들의 모습이 오늘 조폭문화시대의 근저에 깔려있는 우리들이 진정한 자화상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드는 것이다.

이같은 시대인식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답은 바른 교회와 바른 크리스천의 회복에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진정하고 바른 강력한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고, 그 힘아래 “시다바리” “똘마니” “행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과 희생이라는 아름다움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화평론가 김소희씨는 조폭영화의 성공을 “젊은 남성들 사이의 유사혈연 공동체”(pseudo-family-bond) 의식을 자극한 결과물이라고 결론지었는데, 결국 이 말은 새로운 공동체를 찾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안에서 참된 형제애를 나누는 교회의 원래 모습을 찾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만날 수 있는 중요한 길이고, 지금 유행하고 있는 조폭문화를 한순간 흘러 지나가는 신드롬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영화 "두사부일체“에 나오는 것처럼 조폭들이 단순하고 무식하지만 정말로 진실하고 그 옛날 정의로운 임꺽정이나 홍길동처럼 변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서 열심히 공부하고, ”조폭마누라“에서 나오는 것처럼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힘을 지니고... 그런 세상을 생각해본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까?

 

하정완 (꿈이있는교회 담임목사, “영화에서 주님을 만나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