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1/28일자 태평로 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났다.
제목 : 아이티 국민 값, 북한 국민 값
박정훈 사회정책부장 jh-park@chosun.com
전문(全文)을 퍼 올릴 가치는 없다.
꼭 읽고 싶으면 다음 링크를 누르도록.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27/2010012701895.html?Dep0=chosunmain&Dep1=news&Dep2=headline1&Dep3=h1_05
훑어보다 보니 이런 내용이 눈에 뜨인다.
…..아이티는 자부심이 있는 나라였다.
제국주의가 절정이던 1806년, 아이티의 노예들이 봉기(蜂起)해
프랑스 군대와 백인 지주를 내쫓고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을 세웠다.
인류 역사상 흑인 노예의 혁명을 성공시킨 것은 아이티밖에 없다.
19세기 초만 해도 아이티는 세계의 설탕·커피를 절반 가까이 공급하던
부유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진흙 쿠키'로 배를 채우는 신세가 된 것은 결국 지도자
때문이다. 악명 높은 독재자 뒤발리에 부자(父子)가 29년간 집권하며
나라를 사물화(私物化)했고, 다른 지도자들도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좋은 리더를 못 만난 아이티 국민이 불운했다.
도입부-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을 세웠다는 부분,
인류 역사상 흑인 노예의 혁명을 성공시킨 나라 라는 이야기는 맞다.
그러나 '진흙 쿠키'로 배를 채우는 신세가 된 것이 지도자 때문 인가?
이에 아이티 근대사를 잠깐 들여다 본다.
지금은 카리브해가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신대륙을 처음 발견(?)할 때는 본토보다 카리브해 일대가 더 중요했다.
발견이라는 단어에는 무리가 있다.
원래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무슨 놈의 발견인가?
유럽인들이 아 거기도 땅 있고 사람 있구나 하고 깨달은 것에 불과하다.
1780년대까지 생 도밍그, 마르티니크, 과달루페 등 카리브 해
프랑스 식민지는 유럽이 소비하는 설탕과 커피의 1/2을 생산하여
프랑스 경제에 사활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다
혁명의 이상은 ‘자유’ 와 ‘평등’ 이었다.
이 말에 온 유럽의 지성계는 가슴을 설레었다.
그러나 그 ‘자유와 평등’은 프랑스 부르주아에만 해당할 뿐,
혁명의 지도자들은 다른나라나 같은 프랑스 내 무산계급, 유대인,
그리고 식민지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 프랑스 무산계급까지
혁명의 가치가 침투되기까지는 장구한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 자유와 평등의 본질을 깨닫는 데는 한참 걸리는 일로
처음에는 누구나 열광하지 않겠는가? 프랑스 식민지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다음은 강철구 이화여대 교수(서양사)가 ‘프레시안’에 연재 한
'세계사 다시 읽기’ <48> 프랑스 혁명과 세계사 ⑨ ( 2008-06-27) 중 일부다.
…카리브 지역에 혁명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1789년 9월 말이다.
그러면서 분위기가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당시에 식민지와 관련해 제기된 문제는 식민지 자치문제,
해방유색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문제, 노예해방 문제였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모두 매우 민감한 것으로 식민지와 노예제,
노예무역이 프랑스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함부로 다룰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민의회는 가능하면 문제를 회피하는 전략을 취했다.
식민지위원회를 따로 만들어 문제를 연구하도록 조치를 취한 것은
시간도 지연시키고 국민의회가 직접 관련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식민지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백인 식민자들은 진작에 식민지 관리들을 쫓아낸 후
자치의회를 만들 계획을 추진했다.
해방 유색인들은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다.
고통에 시달리는 흑인 노예들은 즉각적인 노예제 폐지를 요구했다.
1790년 3월에 식민지위원회 위원장인 앙트완느-삐에르 바르나브는
백인 농장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새 헌법을 식민지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노예제에 반대하는 폭동을 선동하는 자를 엄격히 단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식민지 체제가 억압적이기는 하나 그것이 수백 만 프랑스인에게 생계를
주므로 ' 식민지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수백만 프랑스인에게 생계를 주므로 포기할 수 없다 는 것은
1789년 당시 뿐 아니라, 20세기 중반 식민지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때 까지도 프랑스의 일관 된 입장이었다.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아니 모든 열강의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주의란
자국 국내에 해당할 뿐,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였다.
서구 열강의 민주주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는 결국 표리(表裏) 관계였다.
다시 아이티로 돌아간다.
1791년 8월 22일 대규모 노예반란이 터졌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카리브 주둔 프랑스 군은 바로 패퇴한다.
그러자 프랑스 농장주들은 인근 자메이카 주둔 영국군에 도움을 요청한다.
영국은 프랑스와 적국이나 자기들 계급의 이익이 어디까지나 먼저였다.
이런 프랑스 부르주아의 행태는 80년 뒤 보불전쟁-‘파리코뮌’에서
되풀이 될 것이었다.
영국의 간섭을 거쳐 1802년 나폴레옹이 군대를 파견하나 결국 패퇴하고,
생 도밍그는 아이티라는 이름을 가진 독립국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이처럼 식민지 해방이나 노예제, 노예무역 폐지에 관심을 가진 것은
프랑스 혁명주도세력이 아니라, 흑인노예들로 그들이 자신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아이티가 19세기 초 만해도 세계의 설탕·커피 절반을 공급했다는 것,
노예 혁명을 성공시켜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을 세웠다 는 것은
조선일보가 맞게 쓴 것이다.
그런데 그러던 나라가 과연 뒤발리에 때문에 망했나?
뒤발리에 부자가 구역질나는 인간들이었고,
그들 때문에 아이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데미지를 입은 것은 맞다.
그러나 아이티의 불행은 뒤발리에 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서구 열강과 맞서 역사상 처음으로 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끈
바로 그 때문에 아이티의 비극은 시작됐다.
열강 특히 미국은 노예해방에 공포감을 느낀다.
이에 미국은 아이티를 철저하게 해상봉쇄하고 무역제재를 가한다.
수출위주의 작물구조를 가진 아이티는 속수무책으로
빈곤과 저개발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부분 짤막하게 잘 정리한 것은
한겨레 신문 1월 26일자 제목 : 우리 곁의 좀비들,
글쓴이 곽병찬 이니 참고바란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01213.html
….열강은 노예해방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이티를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빈곤과 저개발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반문명, 야만 탓으로 돌렸다.
민속종교인 부두교에 식인·광기·음란 등의 낙인을 찍었고,
아이티인들 하면 좀비(살아있는 시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미국의 대표적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팻 로버트슨 목사가
아이티 지진참사에 대해 던진 한마디는 상징적이다.
“독립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아이티에 대한 신의 저주!”….
(곽병찬 씨 글 중 일부)
-그것도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전략 선상에
뒤발리에가 있는 것이지,
뒤발리에 혼자 말아먹은 것이 아니다.
또 부두교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런 역사적 배경-자기들이 저지른 일에는 눈감은채
뒤발리에나 부두교 탓이나 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시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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