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사도 바울과 '하나님의 의'

은바리라이프 2010. 2. 8. 17:02

사도 바울과 '하나님의 의'
로마서 편지를 읽으며

 

 

로마 시민이면서 또한 유대 시민이었던 사도 바울, 그의 서신서들을 보면 그가 당대 대중 연설을 익히 배웠을 뿐 아니라 로마 언어(헬라어)나 히브리어에도 능통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이름이 들어간 대부분의 신약 서신서들은 바울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이 편지를 대서(즉, 주인을 대신하여 집필할 때 쓰는 단어)하는 나"(롬 16:22)라고 말하고 있는 '더디오'가 실제 집필자이다. 바울의 서신서 중 유명한 로마서에서도 역시 더디오가 대신 집필하고 바울은 그저 불러 주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마치 2004년작 영화 <알렉산더>에서 역사 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톨레미)가 역사를 회상하며 나열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대신 집필하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그런 대필 작업이 보편적인 일이었다.

   
 
 

▲ '하나님의 의'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출발하여 '믿음'으로 경과하고 '삶의 여정'으로 그 끝을 맺는다는 것이 바로 바울 사상의 핵심이자 결론이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 사도 바울 -

그의 서신들을 비춰 보면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낮추고, 우여곡절 끝에 '사도'로 칭함을 받는 데도 여러 비난을 감수했을 법한 격렬한 순간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가 그 어떤 것보다 제일로 삼는 '복음', 즉 '복된 소식'이라고 하는 그 소식은 다름 아닌 '예수그리스도'에 관련된 것이다. 육신으로서는 다윗의 혈통이라고 하였으며, 사도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이미 증거되고 있던 자, 영적으로는 죽은 자 되었지만 다시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살아나게 된 바로 그 예수그리스도를 순종하는 것을 제일 으뜸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모두가 "그들(이방인들) 중에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은 자"(롬 1:6)들이라 전하고 있다.

바울에게 빚이 있다면 그것은 곧 '복음'의 빚이다. 현대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에 부끄러워하는 것과 달리 그는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소식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임을 누구보다도 잘 통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복음은 또한 '하나님의 의'(롬 1:17)이다. 이 '의'라는 단어를 우리가 결코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구약이나 신약에 줄기차게 언급되고 있다. 그 '의'는 절대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출발하여 '믿음'으로 경과하고 '삶의 여정'으로 그 끝을 맺는다는 것이 바로 바울 사상의 핵심이자 결론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 '믿음' 그리고 '삶'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이 세 가지는 신앙생활에서 바울이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늘 놓치며 심지어 '자신의 의'로 오해한다. 바울은 이러한 무지에 경종을 울리며 우리의 신앙을 올바로 지탱해 주며 이 세 가지의 '삼각대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구약부터 출발한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인생 여정을 시작으로 다윗에 이르러 역동적인 파노라마가 펼쳐졌으며, 점점 고조되어 말라기 시대에 최고조에 이르고, 마침내 예수의 삶과 죽음이 곧 '하나님의 의'로 드러나는 마지막 최고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의'는 예수의 삶과 죽음의 핵심 열쇠였으며, 죽은 그가 살아남으로써 '믿음'은 곧 '삶'이자 또한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제공하는 '공기'의 역할을 하는 것임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 그 예수가 제공한 생명력이라는 '공기'가 살아 있어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생동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이 점을 잊지 않았다. 로마 감옥에서 영적 여정의 최고 절정에 이른 그가 하나님의 뜻 안에 숨겨 있는 좁은 길에서도 신령한 은사를 발휘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견고하게 하고, 나약한 믿음으로부터 일어서게 했다. 감옥에서조차 그는 '하나님의 의, 믿음, 삶'(삼각대 역할)이라는 복음의 핵심에 의거해 로마의 핍박에 흔들리는 당시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심지어 우리까지 '의인'이라 부르시는 그 부름으로 인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최고 공식을 제시했다.

사도 바울은 좁은 길이라, 혹은 가고자 하는 길이 막혀 있다고 해서 실패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라는 단어가 팽배한 현대의 인생들에게 바로 이 삼각대 역할(하나님의 의, 믿음, 삶)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또한 감옥살이로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한이 있어도 결코 부끄럽게 굴지 않겠노라는 다짐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오롯이 로마서에 담겨 있으며, 그러한 그의 노력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하늘의 출발은 처음에는 좋았으나, 세상이 핑계치 못할 일을 초래한 한 최초의 부부(아담과 하와)에게서부터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결국 부부의 그러한 잘못된 행실의 첫 결과물인 '죽음과 임신'이 인간 역사에 서로 뒤엉켜 꼬이게 된다. 인간의 결과물인 '불의'와 하나님의 존재인 '의'가 한데 섞여 마치 모든 것이 '신'이라는 동일자의 소행에서 비롯된 것인 듯,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21세기 학자들이 즐비하다.

그 불의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구약에 대해 누군가가 '무협지를 방불케 하는 역사서'라고 하듯이, 구약에서는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진두지휘하는 유일신의 존재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신약에 와서는 이제 전면전에서 뒤로 물러나 예수를 앞세운다. 그러나 제2의 아담인 예수 역시 이 세상에 오래 있지 아니하고 우리 모두에게 남겨 둔 지상의 과제를 덤으로 쌓아 놓았다.

'하나님의 의'가 '신성'의 결정판이자 하나님 여호와의 필수품임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예수를 대신하여 유대인들을 비롯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의'라는 영향력을 집요하게 설득하고 파고들게 만든다. 또한 바울은 서신서를 통해, 우리의 잘못을 핑계치 못할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과 영화를 거부하고 믿지 못하는 사태를 제공한, 그래서 이미 그의 시대에 뻔뻔하게도 버젓이 불의를 저지르고 하나님이 보기에 미련하고 허망한 생각(롬 1:18)에 가득한 우리의 속마음을 마치 거울로 비추듯 훤히 드러낸다.

스스로 지혜 있는 자들이라 자처하는 철학자, 과학자, 계몽가, 역사가들이 자신 있는 마음으로 세상을 울리며 신의 존재를 비웃고 거부하고 망각하며 버젓이 활개 치고 다니고 있다. 오직 인간만이 방종이라는 더러움을 전유물이자 특권처럼 소유하고 있음을 그들은 잘 모른다. 이런 저주스런 인간은 스스로 역사를 쓰레기로 전락하게 하고 있음을 모른다.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나 진실은 없다고 그들은 말하는 것이다.

1463년 모데나의 미란돌라에서 태어난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는 아담에 대해 "나(창조자)는 너(아담)를 하늘의 존재로도 땅의 존재로도 창조하지 않았으며, 죽는 존재로도 죽지 않는 존재로도 창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다음 말이 재미를 한층 더한다. "너는 동물과 같은 천한 존재로 타락할 수도 있다.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신적인 존재로 고귀하게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고 유감없이 표현한다. 그는 인간 스스로 무언가 이룰 수 있는, 누구나 그 자체의 본질을 추구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피조물이 아닌 조물주의 창조설을 비꼰다. 마치 탐스러운 신성을 부러워하여 사과를 먹은 자들처럼.

창조주의 창조성을 짓밟는 표현들이 아무 가책 없이 세상을 역리하고 있다. 창조주에게 부끄러운 일을 서슴없이 진행하면서도 전혀 무관심한 듯 입으로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 부끄러운 욕심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거부하는 행위가 마음속에서 진행 중이라는 증거다. 빚을 진 자가 도리어 다른 빚진 자에게 탕감을 해 주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자신의 빚을 온통 다른 자에게 다 떠넘기고 자신은 빚이 없다고 즐거워하고 있는 세대가 지금 세대이다. 누가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