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선교 : 종말론적 공동체에 참여하라는 초청
전 영 권 목사
1. 첫 선교사 : 첫 신학자
성서 학자들은 바울은 무엇보다도 선교사로서 또한 그의 서신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1899년에 바젤의 젊은 신약성서 학자인 Paul Wernle는 [이교도 선교사 바울]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간 했는데, 이는 바울의 소명과 사역의 관점으로 바울을 보려고 한 학문적인 첫 번째 시도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와서 바울에 관한 새로운 자각이 충분히 되었고 또한 적절하게 평가되었다. 바울이 첫선교사였기 때문에 첫 번째 기독교 신학자였다는 점이 오늘날 널리 인정되고 있다.(Hengel 1983 b: 53; cf Dahl 1977 A :70 ; Russell 1988)
바울 신학의 "삶의 자리"는 사도의 선교현장이다(Hengel 1983 b ; 50). 바울의 선교와 신학은 그의 선교가 그의 신학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면에서 "이론"과 "실제"가 관련이 있듯이 서로에 대한 관계가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의 신학이 선교신학이라는 것이다.(Hultgren 1985 :145) 그리고 선교가 그의 주체로 그와 같은 사상과는 완전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면에서 서로에 대해 밀접한 관계가 있다.
2. 바울의 개종과 소명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을 (cg. 갈1:4 빌3:4-5) 이방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도로, 초기 기독교 운동의 박해자들의 주 선봉자로, 예수를 사기꾼과 유대교의 위협으로 시작된 사람인 그를 생애에서 우주의 중심으로 포용한 사람으로 변화시켰던 것은 무엇인가? 바울 자신은 단지 한 가지 대답을 준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그의 서신들에서 바울은 세 경우(사건)에서 자신의 개종에 관하여 매우 자세하게 누가복음, 사도행전 즉 사도행전 9:1-19, 22:4-16, 26:9-19에서 그러하듯이 이 사건에 관해 결코 상술하지 않는다.
Stendahl 과 다른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일어났던 것에 대해 (그리고 암암리에 바울이 자신의 선교 사역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했던 것에 대해) "개종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언급하게 되었다. 우리는 바울의 "개종"대신에 차라리 그의 "소명"에 관해 말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경험"에 관해 전기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가 이방인에 대한 사도로 소명을 받은 것에 대해 신학적으로 언급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을 언급할 때마다 사도로써 소명을 받았고 임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적 소명들에 대한 정확한 암시를 들어 주장한다. 이들처럼 그의 소명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행위에서 비롯되었으며 계시와 비젼을 통해서 그에게 전달되었다.(갈 1:15f) 그의 개종의 경험으로써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의 사도적 소명의 보다 큰 현실에 의해 흡수된다.
바울의 소명에 관한 역설은 확실히 바울의 개종에 관한 전통적 이해에 대한 매우 중요한 수정이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에 관하여 그리고 율법의 구체적 가치에 관하여 자신의 지각의 근본적인 수정을 경험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변화가 없었던 자신의 세계관에 중요하면서도 많은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Gaventa가 그 증거의 매우 철저한 분석에서 보여 주듯이 그에게 일어난 것에 대해 "개종 (CONVERSION) 또는 적어도 전환(TRANSFORMATION)"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1986:17-51 cf, Senior & Stuhkmueller 1983:168). 사실상 그것은 원시적인 경험이며 바울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경험의 모범이 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었다(Gaventa 1986:38).
예수님과의 만남은 바울의 역사과정을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즉 예수가 메시야였던점은 사실상 한 유대인에게 마지막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을 의미할 수 있었던 것이다.(cf, (Senior & Stuhkmueller 1983:169)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이제 이방인의 세계에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 한다. 그의 경험에서 자신의 증언에 따라서 개종과 이방인 선교에 대한 자신의 소명은 일치한다(Zeller 1982:173)
여러 경우들에서 바울은 사실상 특히 세 개의 "기둥들"에서 표현되었듯이(갈 2:9) 예루살렘 교회와의 완전한 우정으로 남고 싶어하는 그의 정열적인 욕망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고전 15:11에서는 자신은 그들의 선교하는 거의 똑같은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Hengel 1971; 46-51; Dahl 1977 a:71f (Senior & Stuhkmueller 1983:164) 바울은 예수의 종교를 그리스도에 관한 종교로 전환시킨 사람 : 즉 기독교의 "제2의 창설자"가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로서 예수에 관한 복음을 고안하지 않았다. 그것을 전수했다.( Baker 1980:341)
바울의 사역은 첫 번째 사도들에 대한 충성과 한편으로는 그들의 메시지와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소명과 임명의 특유성에 관한 압도적인 인식, 독창적인 긴장 속에서 전개된다. "복음"과 "사도"라는 단어는 상관어로 이 둘은 선교 용어들인데 바울이 사용한 것과 나머지 사도들이 사용한 것이 다르다. 신약성서의 저자들 중에서 바울은 보편적인 기독교 선교의 비젼에 관하여 가장 심오하고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어떤 놀라움으로 다가와서는 안된다(Senior & Stuhkmueller 1983:161).
3. 바울의 선교 전략
1) 메트로 폴리스를 향한 선교
이미 언급한 선교의 바울적 이해의 특징들과 다른것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보다 나은 용어의 부족 때문에) 바울의 선교 전략이라고 불려진다. 초기 기독교 운동의 첫 수십년간은 일반적으로 세가지 주요한 유형들의 선교적 사업들이 있었다. (1) 유대인 땅에서 여러 곳을 이동하면서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한 순회 전도자들. (2) 박해로 인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던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예루살렘에서부터 안디옥까지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착수했던). (3) 고린도 후서와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자신들이 복음의 잘못된 해석으로 간주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미 존재하는 교회들간의 유대화한 기독교 전도자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거의 오로지 순례적인 선교사였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일부 장소들에서 그는 보다 오랜 기간(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 그리고 에베소에서 2-3년)동안 머물렀다는 사실에 비추어 옳지 않다. 그러므로 Zentrumsmission(중심지 선교) 어떤 전략 중심지들에서의 선교에 종사했다는 Ollrog(1979:125-129;158)와 함께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는 빈번하게 그의 전도가 여러 나라들과 지리적 지역들에 지향되어 있다고 말하곤 한다(갈1:17,21,롬15:19,23,26,28고후10:16)(Hultgren 1985:133).
이런 "거대한 도시"들은 통신, 문화, 상업, 정치 그리고 종교에 관한 한 주요 중심지들이다(Hass 1971:85). 바울이 국가들만큼 개개인의 이방인들의 주변에서 많이 생각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사실상 시대 착오이다. 바울은 인종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리적으로 생각하여 대표적인 특징을 가진 도시들을 선택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분명하게 전략적 중심지들로부터 복음이 주변의 시골과 소도시에 퍼져 나갈 것
이라는 희망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기반을 조성한다.
2) 바울과 그의 동료들
바울의 선교 여행에서 또다른 특징은 다양한 동료들을 이용한 방법이다. Ollrog 는 이런 남자들(그리고 브리스길라와 같은 여성들)이 바울이 보조관들 또는 부하들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그의 통료들이라는 견해에 찬성해 왔다(Ollrog 1979). Ollrog는 세 범주의 동료로 구별한다. 첫째는 바나바, 실라 특히 디모데로 구성되어 있는 가장 친한 집단(:92f), 둘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독립적인 동역자들( :94f), 그리고 세 번째이면서 아마 가장 중요한 집단인 에비브로디도, 에바브로, 아리스다고, 가이오, 그리고 야손과 같은 현지 교회들의 대표자들이다. 교회들은 이런 사람들을 제한된 기간들 동안 바울이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한다(:119-1125). 이것들을 통해서 교회들 자체들은 바울의 선교에서 대표되며 사역되며 사역에 대해 공동 책임을 지게 된다(:121).
3) 바울의 사도적 자아 의식
바울의 놀라운 자신감과 자아 의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장애물이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사역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겨 자랑하는가? 자랑하는 것은 기독교의 미덕인가? 그리고 인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모방" 하도록 감히 권하는가 ? 이것은 바울이 주장하는 권위는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복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는 특성들과 확실히 모순된다(Ollrog 1979:201). 그리고 그가 그 자신에 대해 하는 요구들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요구보다 훨씬 더 크다(Ollrog 1979:201). 내가 내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부담이 가지 않도록 그는 밤낮으로 일한다고 그는 데살로니가서에서 쓰고 있다(살전 2:9). 이 주장의 위치는 방금 언급한 구절의 마지막 부분에 있다. 그는 자신이 선포한 복음을 더욱 신뢰성 있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상실시킨다. 그는 고전 9:19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라고 주장했다(참조 Hass 1971:70-72). 바울에게 필요성이 부여된다. "내가 복음을 전하기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로라"(고전 9:16).
4. 바울의 선교 동기
1) 관심(A sense of Concern)
이교 신앙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바울은 그 당시의 유대교에 관한 견해들과 일치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판단은 특히 유대인이 이방인의 낮은 도덕성으로 간주한 것 때문에 부정적이다.
그레코 로마 세계에 만연한 우상 숭배에 대해서 바울은 사람들의 충성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오로지 주장하는 유일신의 비타협적인 메시지를 (그의 유대적 종교 근원들과 완전히 조화스럽게) 선포한다.
이것은 바울의 관심이 작용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밖의 인간은 지옥으로 가는 도중에 있으며(참조 고전 1:18 고후 2:15)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엡 2:12) 길을 잃은 사람으로 본다(롬 2:8). "진리를 따르지 않는"(롬 2;8) 사람들에 대한 절박한 판단의 개념은 바울에게 있어서 반복적인 주제가 된다. 면밀하게 언급하면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기분전환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분노로부터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살전 1:10). 그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하나님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을 통해서 길 잃은 자들에게 호소한다.
구원은 바울에게 유일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만남을 통한 넘치는 해방의 경험이다.(Walter 1979:430) 이것에 관하여 그가 사용하는 다른 표현들을 "아들들을 양자로 삼는 것" "우리 시체들의 회개" "자유로와지는 것" "치명적인 위험으로부터 구원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바울의 선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학적 관점은 그의 사역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 그의 선교를 통해서 세상 사람과 온 우주가 하나님을 찬양할 날을 준비시키고 있다(참조 Zeller 1982:186f; Beker 1984:57).
2) 책임감(A sense of Respensibility)
바울의 로마 제국 이방인에 대한 관심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깊은 인식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그에게 행해지는 비난으로 피할 수 없는 필요 악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고린도인들에 대한 두 번째 서신에서 바울은 자신이 진 "빚"에 대해 표현하기 위해서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
이 말씀들은 바울의 선교 방법들 보다 책임 의식에 관하여 보여 준다. 확실하게 바울의 복음 전도 방식이 "탄력적이고 난감하고 감정이입인 것"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Beker 1984:58). 선교는 유대인의 그리스도화를, 그리스인들의 유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Steiger 1980:64 Stegemann 1984:301f). 그러나 이것은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바울이 말하는 것에 대한 주변적인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본질적으로 두가지를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구별도 없이 모두에게 의도된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가능한한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하는 불가피한 빚(의무)을 지고 있다. 엄격하게 말하지면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우상들에게 제공된 고기를 먹든지 안먹는 경우든지 간에 불필요한 장애물로 인하여 장래의 개종자들이나 약한 신자들에게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고전 8-10장에서 주장한다(참조 Meeks 1983:69f 97-100 105).
3) 감사 의식(A sense of Gratitude)
바울에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길을 잃은 자에 대한 자신의 관심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감도 아니고 특권 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는 모든 나라들에 있는 사람들을 신앙과 순종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 이름 속에 임명권의 특권을 받았다고 말한다(롬 1:5,NEB). 롬15:15f에서 그는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라고 말한다. 특권, 은혜, 감사라는 용어들은 모두는 신약성서에서 그리스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들은 바울이 선교 사역들 언급할 때마다 사용하는 개념들이다. 로마서신들에서 그는 "은혜" 또는 "감사" "직무" 사이에 친밀한 관계를 수립한다.
달리 말하면 바울의 은혜의 인정을 감사 의식으로 직접 변화된다. 그가 느끼는 빚 또는 채무는 자신을 억제하는 부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빚의 인정을 감사하는 방법으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이어야 하는 것이다(참조 Kahler 1899, 1971:457). 바울은 그 자신과 동역자들의 감사의 빚을 표시하기 위해서 이 언어를 사용한다. 내가 이미 여러번 언급했던 로마서 5:16에서 자신을 이방인에 대한 일군으로, 선교에 관여하는 것을 "제사장의 직무"로 표현했다(참조 Schier 1971). 빌립보서 2:14에서 그는 이것을 thysia;Libation(헌신, 신주)과 Leitourgia (sacrifice:제사)로도 지명한다.
5. 선교와 하나님의 승리(Mission and The Triumpt of God)
1) 말세론적 바울
바울은 개종 전 유대교에 속하였었으며 그런 배경에서 바울 서신이 읽혀지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유대의 종말론적인 주 테마들을 바울에게서 탐지를 할 수 있다고 하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들은 네 가지 기본 특색들 "보복" "보편주의" "이원론" 그리고 "임박성"을 포함한다(Bekers 1984:30-54). 이 모든 것이 유대의 종말론에 적용하는 율법의 독특한 지각과 연관되어있다. 바울이 모든 연속성에 불구하고 유대의 종말론(묵시론)을 수정하는 심오한 방법을 고찰하기 전에, AD 70년후의 기간의 유대교가 그의 묵시론적 유산에 등을 돌렸듯이, 주류의 기독교의 대부분이 시대에 따라 계속적으로 종말론적바울을 받아 들이는 것이 거부되었다는 것을 내가 지적을 했다는 것이 흥미있는 일인지 모른다. 바울은 그가 마치 고전적인 랍비 유대교에 관하여 기독교의 해석에 반응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 되었다.
종말론자는 현제는 공허하다는 것과 모든 구원은 단지 미래에 있다는 가정(假定)의 특징을 가진다. 사람들이 현재에서 경험하는 절망과 좌절은 그들을 미래에 완전한 구원을 갈망하게 하기 때문에 임박하고 계산 될 수 있는 것으로 항상 이해된다.
2) 기독교회와 묵시론(The Christian Church and Apocalyptic)
교회는 여러 세기를 통해 내려오면서 묵시론에 대한 어떤 표명에 대해서도 격려하지는 않았지만, 자주 부정적으로 반응해 왔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기성의 교회에 의하여 침묵하거나 중립화되어서 장래의 종말론이 기독교 주류에서 밀려나 이단적인 탈선으로 밀려 들어가게 했다. 묵시론자들은 최소한 어떤 장래 시간에서 적시에 현실의 기본적인 재배열의 확신을 살아있게 해 준 반면에, 교회의 주요 체계는 곧 플라톤적 사고의 마법에 들어갔다. 특히 이것은 오리겐과 어거스틴의 영향하에서 여러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완성된 사건으로 간주되었고, 신자들의 장래 부활의 희망과는 단절되었다. 그리스도 사건 후에 기독교 역사는 그리스도에서 하나님의 한 번 뿐인 행동의 작용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 새 하늘과 새 땅의 기대는 정신적 의의로 해석되었다. 신자 개개인의 정신적 여행, 죽은자로부터 장래 부활 보다 오히려 죽은 후에 내세에 역점을 두었으며,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과 점점 동일시되었다.
3) 묵시론의 새로운 중심(Apocalyptic's New Center of Gravity)
그리스도의 사건은 종결 또는 완성된 사건이 아니며 또한 역사의 종말도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메시야가 오셨을지라도 오히려 그의 왕국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문제와 씨름을 한다(Beker 1980:345f). 예수의 메시야 지위에 역점이 있는 게 아니라 구원사적 전환점에 역점을 두고 잇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미래의 새로운 시대의 현재 옛 시대로의 침입을 표시한다(참조 Boer 1989:187 wntjr 17; Duff 11989:285-289). 이 사건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승리의 개축과 기대에 대한 전주곡이며 보장을 표시한다. 이것은 모든 장래의 징후들, 그리고 사실상 기독교의 희망의 성격을 결정짓기 때문에 결정적 표시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의 최종적 부활의 "첫 열매들" 또는 "많은 형제들 중에서 장자"로 지명할 수 있다(고전 15:20,23 롬 8:29).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미래 영광, 그리고 완성을 반드시 지적한다. 이것은 바울의 신학이 단일 초점적이 아니라 이중 초점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미래 행위를 향해 움직인다. 양 사건이 함께 존립하고 양자는 현재 기독교 생활에 수령한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절박성의 특색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강화된다. 그래서 신자들은 마라나타(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한다(고전 16:22 참조 고후 6:2).
당시 유대인의 종말론과 비교할 때 인간사에서 하나님이 절박한 개입에 관하여 바울의 기대는 강화된다. 그는 중간기간이 자신의 평생동안에 완성되기를 기대한다(참조 살전 4:15,17 고전7:29).
4) 그리스도안에서의 새로운 삶(New Life in Christ)
교회는 종말론적 범위(영역)를 가지며 하나님의 지배의 예상되는 표출로써 새로운 창조물의 발판이며 하나님의 신세계의 전위이며 옛 시대의 중간에서 나타나는 신시대의 징후이다(참조 Beker 1980:313; 1984:41). 동시에 정밀하게 이런 작고 약한 바울의 공동체들이 이미 얻은 승리를 위한 예배에 모임과, 한편으로는 그들이 믿는 것과 반면에 엄청난 모순에 관하여, 또한 그들이 살고 있는 긴장 즉 "이미"와 "아직 아닌" 사이의 긴장에 관해 인식하게 된다.
바울은 그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짊어지고(갈 6:17 참조 골 1:24) 몸 속에 예수의 죽음을 나르고 사는 동안에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있다(고후 4:104f 참조 Beker 1980:145f 360f; 1984:120).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위에 인용한 구절(고후 4:7-10)에서 보다 분명하게 설명된 교회의 선교의 본질적 성격은 없다고 Lesslie Newbigin은 언급 한다. 그것은 선교의 고전적 정의로써 보여져야 한다(1987:24). 더구나 이 구절은 분명하게 바울의 선교를 종말론적 사건으로 특정화한다. 따라서 종말의 기대의 영역 안에서 고난과 영광간의 긴장을 지속시킬 수 있다. 종말론적, 묵시론적, 집단들은 항상 분파적이고, 내향적이고, 배타적이며 자신들의 경계들을 지키는데 시기적이다. 더구나 절박한 종말의 기대는 어떤 대규모 선교 사역에도 여지가 없다. 바울의 공동체들은 배타적이지만 내향적이고 분파적이지는 않았다.
5) 국가들의 예루살렘으로의 순례
바울은 이사야서 66장의 예언에 관하여 현대 유대인의 해석을 완전 뒤엎어서, 또 다른 구약성서 예언 즉 시온(Zion)으로 국민들의 순례에 관한 예언으로 결합시켰다. 이것은 바울이 스페인에 가기를 너무 열망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고 Royer Aus는 말한다(롬 15:24). Aus는 스페인이 확실히 종말론적 예언 이사야서 66:19의 Tarshish 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서양에서 가장 먼 지점, 글자 그대로 "지구의 끝"을 나타낸다는 것을 매우 상세하게 주장한다. 단지 사 66:9에 언급된 모든 민족들 중에서 가장 멀리 있는 민족이 예루살렘에 그의 대표를 보낼 때 "이방인의 전-충만한 수"(롬 11:25)가 도착해서 구원의 시기가 오게 된 것이다(Aus 1979). 이런 점에서 Aus 또한 롬 15:16 "이방인의 제물"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히브리적 개념을 채용한다. 예루살렘에 온 이방인들은 구원된 인간의 첫 열매들이다. 그들은 전체 수확을 나타내며 그들을 통해서 모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공유한다(참조 Aus 1979:257-260 Hultgren 1985:135f). "이방인의 충만한 수"(롬 11:25)의 도래는 이스라엘의 구속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 일부지역들이 완고하게 되었다(롬 11:25)"고 말하지만 이방인들의 종을 통하여 유대인들이 시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 들일 수 있었다(롬 11:14). 바울은 이스라엘이 영원히 상실될 가능성을 한동안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담한 방식으로 이방인들의 개종 후에 그 결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도한다. 이방인들에 대한 그의 전도는 "이스라엘 구원에 대한 거대한 우회"임을 드러난다(케제만 1969 e:241).
이스라엘의 운명은 이방인 전도에 달려 있다. 이방인을 데려옴으로 바울은 이스라엘인에게 회개를 야기시키고 구원의 드라마에서 최종적인 행위를 촉진시킨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역사의 완성을 가져 올 것이다(참조 1982:189f Senior & Stuhkmueller 1983:183-185). 이방인 전도의 시간은 "단지 한 시간적 간격"이며 그 끝은 이스라엘이 구원 될 때 단지 올 수 있다(Stuhkmueller 1971:565). 그러나 전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전주곡으로 이방인 전도를 말하자면 종말론적 전도로 동전의 한쪽 면에 불과하다.
6) 바울의 보편적 구원론(Paul's universalism)
Engene Boring은 이 주제에 관해 지각적이고 시사적인 논문을 최초로 발표했다(1986:참조 Sunders 1983:57 주해 64).
그는 바울이 정말로 보편 구원론자라고 학자들 중 소수파가 주장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들은 보편 구원론적인 원문들에 특성인 은총론적 원문들을 종속시킨다. 과반수의 학자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특징인 은총론적 구절에 보편 구원론적인 구절을 종속시켜서 그들은 바울이 정말로 특정인 은총론자임을 결론으로 내리고 있다.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특정인 은총론"에서 "보편적 구원론"으로 바울의 점진적 발달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참조 Boring 1986:1781f). Boring은 바울에게서 갈등이 있는 언급들이 있다는 것과 그것들을 조화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상징적인 언급들 또는 명제들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그 문제는 풀리지 않은 채로 남을 뿐이다.
바울은 보편적 구원에 대한 어떤 확실한 단언도 삼가한다. 이런 개념에 대한 의도는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 책임과 복종에 대한 강조에 균형을 둔다. 하나님의 칭의의 선물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주장과 분리될 수 없다(Beker 1984:35-37).
7) 종말론과 윤리학
기독교 공동체의 삶과 일은 우주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우주-역사적 계획과 긴밀히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의 지배의 가치들은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상 생활들 속에서 얼마나 진실하게 보여주는가가 중요하다. 미래의 힘들은 세상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으며 바울의 종말론은 하나님의 구속 의지로 적극적 참여에 대한 권유 의지이지 윤리적 수동성에 대한 권유가 아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가오는 세상의 영역을 확대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래서 엄밀하게 '궁극적 인 것'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는 끝에서 두 번째의 것에 전념한다. 그는 앞으로 존재할 것 보다 오히려 가까이에 있는 것에 관여한다. 그래서 진실한 종말론적 희망은 윤리적 중요성을 감소시킨다.
최근 연구들은 여성들이 현대 유대교에서 보다 바울의 공동체들에서 훨씬 더 높은 지위를 가졌음을 보여 주었다.(참조 Meeks 1983:81,220 주해 107과 108, 그리고 특히 Portefaia 1988:131-173)
노예들에 관한 사항은 보다 복잡한 것 같다. Segundo는 바울이 어릴 때 "애매하고 희미한 면에서"노예제도의 실질적이고 탈인간화적인 성격을 아마도 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1986:180) 동시에 바울은 그 문제에 민감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상주의자(유토피아적 몽상가)가 아니다. 그는 그가 바꿀 수 없는 상황들에 직면한다(:165). 그러나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중립적이지도 않았다. "그리스도에게 노예와 자유인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면" 각자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 행동하며 그들이 질에 어떤 종류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은 전사회 구조로써 노예제도의 폐지를 암시한다(165). 그래서 바울은 내부로부터 노예를 인간화시키기로 선택한다(164). 노예들의 지위는 "그들로 하여금 인간 적 성숙에 이르지 못하게 할 필요가 없다"(;180).
6. 율법, 이스라엘, 그리고 이방인(The Law, Israel, And The Gentiles)
1) 율법의 기능
바울은 어떤 정통 유대인이 바랄지라도 정말로 알 수 없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의도하든 안하든지 간에 율법은 구별의 상징이 되었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에 비연대성의 상징이 되었다. 집단들을 또 다른 집단들과 분리시키고 격리시킨다. 유대인의 특정인 은총론, 자기반성 그리고 집단 정체감의 구체화,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에 대한 경우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오는 "칭의"를 정말로 상징한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었으며, 그들이 그것을 인류 나머지 민족들과의 차별 영역으로 해석해 왔기에 "자신의 정의"로 변환시켰다(롬10:3).
그들은 자신의 성경을 오해했고(고후 3:15)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들의 역할을 오해했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민족 특권 헌장"을 제공했다(N.T.Wright Moo가 인용 1987:294 참조 Beker 1980:335f 344 Zeller 1982:177f). 바울이 거부하는 것은 이렇게 내적이며 분리적인 율법의 특성이다. 그는 이방인 개종자들의 "유대화"도 가장 명시적으로 부인한다. 사회적 지위와 성(性)의 모든 차이들은 사라졌다. 그러나 바울에게 취소된 가장 중요한 구별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다(참조 갈 3:28).
이 모든 것이 또 다른 방법으로 공식화될 때 해결했다고 언급했다. Sander는 바울이 곤경에서 해결될 때까지가 아니라 해결에서 곤경까지로 그의 선교 신학을 해결했다고 언급했다(1977:442-447). 환언하면, 바울이 경험한 특별한 곤경 때문에 율법의 부적당성을 발견해서 곤경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리스도에게 돌아갔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일어났다. 그와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재고하도록 했다. "해결책"(그리스도)은 그에게 "곤경"(율법이 구원에 대한 불충분)을 보여 주었다. 바울에게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실질적 상황은 "그 해결책"에 비추어 보면 명백해 진다(Hahn 1965:102 주해 1). 이것은 위에서 언급된 것을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정통 유대인도 율법을 바울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면 유대인은 바울이 보는 율법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이런 관점을 허락 받았다. 그는 인간적 개입을 통해서도 받지 않았고 그것에 대한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현시"로써 왔다(갈 1:12-17). 이 사건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임을 그에게 확신시켰다.
2) 무조건적인 수용(Unconditional Acceptance)
유대 전통으로는 이 혁명적인 인식에 대해 바울을 준비시키지 못했다. 그는 이제 모든 인간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원죄에서 하나님으로 이동하는 가능성을 받게 된 것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임을 안다.
십자가에서 예수의 대신 죽음이 하나님과의 화목에의 길을 열어 주었다. 하나님 자신은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바울의 선교 신학에 있어서 초석이다.
그러나 이 부정적인 판단은 긍정적 판단과 균형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롬 3:23f 갈 2:15-17). 복음은 사실상 신앙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권능이다(롬 1:16).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에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다(Senders 1983:172). "주께 의존한(고후 3:16)" 사람들만이 유대인들이든 이방인이든 지간에 아브라함의 약속을 받은 상속자들이다(; 174).
3)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문제(The Problem of Unrepentant Israel)
바울 시대에 이방 선교는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바울에게 그것은 "그의 친족의 과반수가 복음에 긴밀해졌던 그의 생애 가운데 가장 우울한 경험이었다"(Mussner 1982:11- 본인의 번역서). 이 쓰디쓴 경험은 그로 하여금 마음속 깊이 감동적으로 롬 9:1-3을 쓰게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구속-역사적 수선순위는 타당하게 남고 결코 무시될 수 없다. 유대인들의 나음(장점)은 신실성인데 그 이유는 약속을 그들에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우선 이런 약속들에 대한 대답이다. 바울이 선포한 복음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메시야 시대에 대한 이스라엘의 숙원에 대한 대답이다(참조 Beker 1980:343). 그래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의 종말론적 성취는 살아있는 희망으로 남는다. 이스라엘이 구원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약속에 대한 성실성은 무효화된다(:335).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고 바울은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애매하게 남는다(cf, Stegemann 1984:300).
4) 로마서 9-11
바울은 두 개의 연속적인 논거들에서 롬9:1부터 그의 경우를 전제한다. 그 첫 번째 논조는 롬9:6부터 11:11-11:32까지 이른다(hopfius 1986:300-311). 11:25-27절은 정곡을 찌르는 문구를 형성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조 "전략"을 놀라운 불결같은 즉 요동치는 역동성으로 기술한다(Beker 1980:334). 이스라엘의 그리스도에 대한 완고함과 반대는 결국 이스라엘의 구원을 초래하는 이방인의 전도를 야기시킨 것이다(11:30f).
"완고(porosis)"는 "이스라엘의 지역에서"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롬 11:28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적들" 이라고 부른다. 동시에 그는 이스라엘이 "계몽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열정과 선한 의도들을 의심치 않는다.(롬 10:2)
바울이 "전 이스라엘인"의 "구원"을 어떻게 계획하시는가? 그는 이스라엘인의 메시야로의 개종을 예견했는가? 환언하면 이스라엘은 신앙속에서 그리스도를 포용할 것인가? 바울은 모든 유대인의 구원을 기대하는가?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복음전파를 어떤 필요성으로 보는가? 학자들은 이것들과 유사한 질문들에 대하여 대답들이 다르다.
바울에 따르면 모든 이스라엘이 신앙 속에서 그리스도를 포용할 때, 파루시아(parousia)의 순간에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Stendahl 1976:4; Steiger 1980; Mussner 1976;1982; Sanders 1983:189-198). 특히 Sanders는 이것이 일종의 "두 언약 신학"을 암시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고 두 언약 신학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한 성실성으로 말미암아 구원되고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구원될 뿐이다.
중요한 특징은(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스라엘의 완고함에 비추어 거만과 허풍에 대해서 로마에 있는 바울의 이방인 기독교 독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을 우리가 명심하면 롬9-11장에 의해 제기되는 성가신 문제들을 발견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감람 나무의 비유법을 이용하여 바울은 이방인 기독교도들이 가지들이 잘려나간 것은 그 자리에 우리를 접붙이기 위해서 아닙니까? 라고 외치려는 유혹을 받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 특징이 바울에게는 너무 중요해서 그것을 세가지 방법들로 반복해서 이방인 기독교도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적절한 자세를 충분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확신한다(참조 Mussner 1976:25f Steigemann 1984:306;Mofius 1986:308-310). 특히 로마서 11:25에서 "비밀"(mysterion)이라는 표현을 바울이 사용한 의미는 똑같은 방향을 지적한다. 그 비밀은 하나님과 이방인들 및 유대인들과의 관계들의 "상호 의존성" 즉 이방인의 불복종에서부터 자비를 받고 이방인을 경유해서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는 하나님에 이르는 과정을 말한다(롬 11:30-32). 그래서 바울의 견해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마지막 행위"는 이방인의 전도의 완성에 달려있으며(Senior & Stuhkmueller 1983:185) 유대인과 이방인의 취소할 수 없는 조정에 달려있다.
롬 9-11장은 또다른 방법으로 바울의 사상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간의 변증법적 상호관계를 확증한다.
7. 교회 : 중간기의 종말론적 공동체
1) 세상을 위해서
바울의 이런 이해로 교회는 "하나님을 복종하는 세계" 즉"구속되는 피조물"이다(케제만 1909 b:134). 세상에서 그의 주요 임무로 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생존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만 한다. 그러나 정밀하게 이것은 "외인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서 신자들은 외인들을 끌어들이거나 그들을 배격한다(liffert 1968:166f). 그들의 삶의 스타일은 매력적이거나 공경적이다. 그것은 매력적인 곳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외부로 나가지는 않지만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들인다.
교회가 의미하는 것은 내세적이 아니라 세상을 전도하는 것에 관련이 있다. 교회 내에서의 기독교인들의 메시아적 생활양식을 실천하지만 또한 세상의 가치들에 혁신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세상의 살육들로부터 보호되고 수목원으로 피신하지 않는다(베커 1980:318f).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 영혼과 외부 세계간에는 어떤 이원론도 있을 수 없다. "그는 사람들을 세상과 그의 권력구조의 맥락속에 놓고" 교회와 세상간의 "심호한 연대와 상호성"을 강조한다(베커 1984:36). 이것은 교회가 세상의 구원을 위해 탄식하고 분투하는 반면 희망의 공동체로 표시한다(:69). 교회는 세상속에서 세상을 위한 교회이며 교회가 창조된 질서와 제도들에 대한 활발한 소명과 직무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베커 1980:320F). 교회는 사람들과 일반 사회간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고 그리스도가 주님되심을 증언하는데 관여하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그는 어떤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주가 아니라 언제나 교회의 주님 또는 세상의 주님이시다. 그래서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교회는 그의 신학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천국으로 향해 그의 인종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예비 공동체이다. 결코 바울은 기독론적 종말론과 분리될 수 있는 교회학을 발달시키지는 않았다(베커 1980:303f ;1984:67).
교회의 완성은 구원하기 위하여 탄식하고 노래하는 희망의 공동체이다(베커 1980:360f). 그것은 단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교리"를 결코 구성하지 못한다. EKKLESIA는 아직도 강력한 이미지로 남아있다(베커 1980:360f). 교회는 예기적 현실이며 옛시대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의 징후, 그리고 그와 같은 하나님의 신세상의 전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종 승리시에 세상 변혁의 확실한 희망의 약속으로서 동시적으로 활동하고 그의 도래하는 운명에 대해 세상을 준비시키기 위한 모든 활동들에서 지나치게 노력하고 있다. 교회는 결국 "세상의 형상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과 지정된 시간이 매우 짧아져 왔음을 안다. - 고전 9:29-31
8. 바울의 선교 모형(The Pauline Missionary Paradigm)
우리가 바울을 단지 A.D. 1세기로만 국한한다면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우리의 탐구는 A.D.1 세기에 바울의 서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립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확립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 때와 현재의 격차를 메꾸어야 한다. 해석 과정은 역사적 및 신학적( 이 경우에는 보다 정밀하게 해석학적 및 선교학적) 이해들이 혼합되어 있는 통일성이다.( Beker 1984:63f)
1)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
바울의 선교 결과 존재케 된 교회들은 자신들이 문화적으로(헬라인 대 야만인들, 종교적으로(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경제적으로(부자와 가난한 자), 사회적으로(자유인과 노예), 분리된 세계속에 있음을 발견한다. 미숙한(특히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서 부조화와 언쟁이 증명 해주듯 파당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에 대해 결코 묵인하지 않았다. 모든 차이가 있음에 불구하고 하나의 몸(조직)의 통일에 전념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발견한다. 이 특징은 당파적 단편화에 대한 전략적 또는 실용적인 조처만이 아니다. 신학적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헬라인과 야만인 사이에 더 이상 분리는 있을리 없다. 이제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하나이다.(갈 3:27f) 우리는 이제 우리의 육신적 출생의 면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세례의)면에서 이해된다.(Breytenbach 1986:21) 사실상 우리의 통일은 비타협적이다. 교회는 새로운 창조물의 전위이며 반드시 하나님의 도래하는 세상의 가치들을 반영해야 만 한다. 이것에 비추어 교회에서 어떤 형태의 인종차별도 종교적, 인종적, 사회적 또는 어떤 것이든지 간에 바울을 이해하는데 복음의 거부이다.(Duff 1989:287-289)
화목과 의인은 신자들 사이에서 상호 의존성과 형제애에서 나타난다. 이것이 그 경우가 아닌 곳에서 어떤 것은 기본적으로 틀리고 바울이 그것에서 그것을 떠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새로운 공동체들의 일원들은 인종, 문화, 사회적 계급 또는 성별에서 보다 예수 그리스도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이 발견된다. 다시한번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가 되었다면 그가 그 둘에서 단하나의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냈고 단 하나의 몸으로 그것을 회복시켰다면 새로운 공동체느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엡 2:15f NEB)
2) 유대인들에 대한 전도?
교회와 이스라엘간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방금 논의된 점과 관계가 있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볼 때 특별한 경우다. 유대인들은 아마도 교회가 개종의 어떤 임무도 없는 세상에 있는 유일한 종교 집단인가? 본인과 여러학자들은 특히 롬 9-11장에 관한 해석에 기초해서 결론에 이르렀다고 언급해 왔다. 교회는 불신하는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그리고 세상에 있는 유대인의 평화를 수호하는 것 이외에 유대인들에 대한 어떤 다른 "전도"더 없다고 Steiger는 말한다(1980:206f ; Beker 1980:338f).
심지어 롬 9-11장(특히 11:25-32)은 바울이 더 이상의 유대인들에 대한 전도활동을 언급하지 않는 면에서 해석된다 할지라도 Steiger 와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문제는 남는다. 그 한가지로서 실제적 사건들이 여기에서 정열적으로 표현된 바울의 기대를 추월했는지 물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단 하나의 구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약 성서 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에서도 다른 진술을 무시하지는 않는가?(Kivk 1986:248) 셋째 유대인의 견해들과 염원들에 대한 현대적 민감성의 대부분이 유대인 생존의 신성한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한 요구들과 더불어(J.T. Pawlikowski ; Kirk 1986:250에 의한 인용) 대학살 후 특히 서구 기독교도들의 나쁜 양심에서 기인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가?
이것들과 유사한 질문들에 비추어서 논의되고 있는 주제에 관하여 몇 개의 언급의 위험성을 무릅써 보자 :
첫째, 이방인 기독교도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의 매트릭스(모형) 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약 속의 연속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둘째, 이방인 기독교들은 이스라엘 집에서 손님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집 밖에서 잠겨져 있고 열쇠는 버려졌다.(Fr. Daniel, Kirk 1986:253에서 인용)
셋째, 이방인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 간의 중대한 대회는 극히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진공속에서가 아니라 보다 특별하게 대학살의 비극사의 그늘 속에서 만난다.
넷째, 이스라엘과의 어떤 신학적 대화와 논의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이스라엘의 위치와 이스라엘의 현대 국가나 민족을 구별해야 한다.
다섯째, 유대인들에 대한 연속적인 복음 전도의 문제는 교회의 협의 사항으로서 마무리 되지 않는 한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마지막으로, "교회와 이스라엘"에 관한 바울의 성찰들을 마가와 누가의 성찰들과 현저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그것들 모두가 동일한 일반적인 패러다임에 속한다. 그러나 또한 세 저자들 간에는 유의한 차이점들이 있다. 특히 바울의 성찰들은 거의 견딜 수 없고 독창적인 긴장을 특징으로 가진다.
3) 하나님이 임박한 승리의 맥락에서의 전도
본인은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의 범위 내에서 바울의 전도에 관한 이해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바울이 기대가 실현되지 않고 세상의 임박한 종말을 선포한지 19세기 이상이 오고 갔다.
하나님의 도래하는 승리에서 삶의 모순들과 고난들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을 기대해야 한다. 기독교인들로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의 승리에 관한 확실한 지식에 정착할 때 실질적이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15:19)" 우리는 하나님의 이 승리가 그의 수중에 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연대기적인 사유들과 예기들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고 고백한다. 그리고 정밀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확실한 승리의 도래를 향해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순응하기를 거부한다. 차라리 우리는 우리의 마음들이 개조되고 우리의 전 본질이 초월되기를 허용한다(롬12:2). 세상에서 우리의 전도가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업적들이 어느날 하나님에 의해 완성된 것이라 확실한 지식에서 기도되면 그것은 이치에 닿는다. 여기에서 지금 신자들은 종말론적 희망의 대체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기다리는 기다림에 따라 우리는 내향적으로 신음(탄식)하고 그 희망을 살아있게 하는 것으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들을 가진다.(롬8:23)
4) 전도와 사회의 변환
바울의 종말론에 관한 논의는 교회와 세상간의 관계에 관한 문제와 묵시론적 종말론이 그 사회에서 교회의 소명에 관하여 말할 게 있는지의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을 고찰할 때 우리는 바울시대에 미숙한 기독교 운동이 사회에 주변적이고 크기에 관한 한 전체적으로 하잖은 실체이고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의 생존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우리 자신들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이런 요인들은 로마 제국에 대한 그의 기본적으로 긍적적인 태도(롬13장) 뿐만 아니라 바울에서 (노예제도와 같은) 불공정한 사회적 구조들의 설득력있는 비평의 부재를 최소한 어느정도로 설명한다. (롬13장) 즉 이것은 충분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은 바울을 두 개의 상호적으로 모순된 신학상의 해석들, 즉 순수한 종말론(묵시론)과 열절을 거부하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5) 연약성 가운데 하는 선교
바울은 그리스도가 이미 최종적인 승리를 얻었다는 열심당들의 선포에 의해 현재 시간의 고난, 약함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환상적 탈피를 그의 독자들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독자들은 종말론자들과 함께 그들이 다행히도 그렇게 오래 지속하지 않는 현재의 사악의 시대에 하나님의 부재의 증거로 만나게 되는 고통과 비참함을 해석한다(Buff 1972:167). 차라리 바울의 "모든 가치들의 재평가"는 이것이 사실상 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이미 수여된 기독교 삶의 독창적 긴장에서 뿌리들을 가진다. 본인은 바울의 "가까운 비젼"은 하나님과 죽음의 세력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도록 도와준다. 그의"먼 비젼"도 그로 하여금 그 전쟁의 결과를 보고 즐기게 할 수 있다(롬8:18). 특히 고린도인들에 대한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바울은 그의 먼 비젼과 가까운 비젼 사이에 변증법적 긴장을 구체화시킨다. 그는 일련의 한 개념들 - 약함, 봉사, 슬픔, 고통 - 과 완전히 반대되
는 일련의 개념을 - 권력, 즐거움, 자랑 - 연계시킴으로 놀라운 방식으로 전개한다. 이 변증법은 전체 서신에 뻗어 있지만 제 12:3f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나다라고 빈번하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도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득과 반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했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6) 전도의 목적
로마인들에 대한 그의 서신 첫 행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목적을 간략하게 공식화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복음의 사역을 위해 떨어져 있으며 모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복종케 하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임명의 톡권을 받았다(롬1:5,15 NEB) 하나님이 그자신과 또한 사람들간에 화목을 실현했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보내진다. 이 과업은 지중해 세계의 테두리 둘레를 둘러보게 한다. 거기에서 그는 시간이 짧고 과업이 긴급하기에 다른 사람들의 토대에 건축하기를 거부한다(Senio & Stuhkmueller 1983:182). 그가 도착할 때마다 그는 아담이 쓰러졌고 그리고 죽음 이외의 세상의 권능들이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 상태로 이제 복귀되는 새로운 창조의 표출이라고 기대되는 교회, 즉 에클레시아를 세운다(Kasemann 1969b:134). 교회가 중요할지라도 바울에게 그것은 선교의 최종적 목적이다. 기독교 공동체의 삶과 일은 세상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우주적 - 역사적 계획과 긴밀하게 관계되어 있다.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은 교회뿐만 아니라 세계를 그자신과 화목케 했다. (고후5:19) 복음의 보편성은 사도의 과업의 보편성 즉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하나님으 구원적 승리를 알리는 과업으로 보편성과 일치된다.(Beker 1987:7)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부활되었고 "천국에서, 지상에서, 그리고 지하에서" 이름이 주어졌다. (몬2:9-11)왜냐하면 그는 죽은자로부터 부활했으며 전능한 행위에 위해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 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구원은 그래서 모든 민족들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함이 결국 흘러 나온다(Zeller 1983:186f).
선교에 관한 바울의 우주적 이해의 주요 근간은 세상의 구세주로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신념이다. 그것을 선언하는 것은 "예수에게 성가신 것이고 이방인에게 우
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전1:23f). 그러나 부름 받은 사람들 즉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그는 "하나님의 권능이고 하나님의 지혜이며"(고전1:23f)라는 제휴 속으로 그들은 부름을 받았다(고전1:9).
바울의 전도는 Sanders가 제시했듯이 공경이 아닌 해결을 기초로 해서 실시된다. 회고한다면 그리스도없는 삶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그는 알수 있을 것이다. 단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에 비추어서 그는 "그가 그리스도가 없을 경우에 떨어졌을 어둠의 무서운 심연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데살로니가전서1:4,10에 쓰는 것은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발표가 아니라 예수 속에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고백이다(Boring 1986:270f).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울타리밖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에 관해 숙고하지 않는다. 그것은 "곤경"의 시작일 것이다. 차라리 그가 전해야만 하는 복음은 무조건적 사랑과 부당한 은총의 하나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복음전도는 그래서 긍정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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