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익하게 변화된 오네시모
빌레몬서는 신약의 여러 서신들 중에서 짧은 서신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 서신이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 이 책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아서 노예 해방운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작은 서신은 신약성경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이 서신이 바울의 여러 서신들 중에서 유일하게 보존된 서신이라는 점이다. 바울은 이 편지 말고도 많은 서신을 기록하여 활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서신은 없어지고 이 편지가 보존되어서 성경에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편지는 시작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바울의 다른 편지는 자신의 사도직의 권위로써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는 그 성질이 공적인 문서가 아니라 사적인 편지였기에 자신의 사도직을 들먹일 필요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거나 명령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호소하고 청원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네시모라는 종의 일이었다. 이 서신의 발신자는 바울이고 수신자는 빌레몬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오네시모(유익한 사람)라는 사람이었다.
오네시모는 골로새 지방의 가정교회를 지도하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종이었는데 주인의 금품을 도적질하여 도망을 갔던 것 같다. 많은 사람의 틈바구니에 자신을 숨겨서 살려고 로마로 갔다가 어떻게 해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바울을 만나게 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의 삶이 변화되어 바울에게 있어서 매우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를 곁에 두고 싶은 생각이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엄연히 주인은 빌레몬이기 때문에 돌려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를 받아들이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이기 때문에 바울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사회제도에서 노예는 주인의 도구에 불과하였다. 주인이 노예를 소유하게 된 후로는 그 노예의 생명이 주인의 손에 달려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노예를 십자가에 달아 죽일 수도 있었다. 유익이 전혀 없는 노예는 주인의 명령 한마디에 그냥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했다. 거기에는 재판의 절차는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변명이나 변호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큰 위험에 처한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에게 명령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하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자기 자신의 일로 이러한 부탁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나이가 많아서 감옥에 갇힌 자가 되어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부탁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몇 가지를 들어서 부탁을 한다.
첫째, 오네시모가 전에는 정말 무익한 종이었다는 것을 시인하고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영광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익한 사람을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 악한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분노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속된 사람을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사나운 사람을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기독교의 영광이다. 야만족이나 해적들을 변화시켜서 신사를 만들어낸다는 데 기독교의 영광이 있는 것이다. 창기를 변화시켜 거룩한 성녀를 만들어내고 세리를 변화시켜 사도를 만들어내고 깡패를 변화시켜 목사를 길러내는 것이다. 약하고 병든 자를 강건한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것이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은 '유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바울을 만나기 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야말로 이름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울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는 정말 이름처럼 '유익한 사람'이 된 것이다.
둘째, 바울이 낳은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제자를 마치 아들같이 여기고 있다. 고린도인들을 향해서도 같은 말을 쓰고 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4:14-16).
만약 바울의 아들을 빌레몬이 영접하려면 마치 바울을 영접하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듯이 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듯이 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낳은 아들이라면 빌레몬은 자기의 노예였다는 사실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네시모는 지금 옛날 도망한 노예, 도적질한 노예가 아니라 바울의 아들로 거듭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영접해야 한다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이 있다. 거듭났다고 해서 사람에게 빚진 것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옛사람의 빚진 것을 청산함으로써 온전한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오네시모의 빚진 것을 실제로 변상하겠다고 지불각서를 써서 보내는 것이다.
기독교는 변상없는 융서를 가르치지 않는다. 채주가 탕감의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의 덕만에 맡길 것이지만 채무자가 변상없는 용서를 주장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기독교는 죄에는 누군가가 대가를 대신이라도 지불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바울 자신의 죄를 대신 담당해주신 것처럼 바울은 오네시모의 죄를 자신이 담당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영접하여 달라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오네시모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오네시모가 노예이면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는 형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위대한 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형제가 되고 더 나아가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영광은 한 사람의 인격적인 변화와 아울러 관계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만약 나의 딸을 임금님이 아내로 맞아 황후를 삼았다고 하면 내 딸이 내게 '중전마마'가 되어 함부로 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종을 임금님이 양자를 삼았으면 나는 그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이다. 지금 오네시모는 그리스도께서 형제로, 하나님께서 자녀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빌레몬이 오네시모에 대하여 끝까지 육신적인 관계만을 고집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빌레몬서의 비밀과 가치가 있다. 물론 이러한 관계를 죄를 지었던 오네시모가 주장할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바울이 빌레몬에게 할 수 있는 부탁이었지 명령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을 들어서 펀지를 쓰는 바울은 빌레몬에게 저를 네게로 "돌려보낸다"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돌려보낸다는 용어는 법률적인 용어로서 '나는 이 사건을 너에게 맡긴다'는 뜻을 가진 말이라고 한다. 빌레몬은 이 사건을 자기 양심의 법정에서 판결하되 그리스도 앞에서 해야 할 사건이었던 것이다.
넷째, 바울은 오네시모가 잠시 떠나게 되었던 이 일이 오히려 선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용서하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잠시 떠나왔기 때문에 변화되어 영원히 곁을 떠나지 않을 종으로 변화된 것이니 용서하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가 믿는 진리 중의 하나이다. 탕자가 집에 있었다면 항상 집 나갈 기회만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잠깐 나가서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옴으로써 영원히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을 아들로 변화된 것이었다. 사람이 어려서부터 성실 일변도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더없이 다행이지만 바람을 피울작시면 올바람으로 피우고 돌아와 마음잡고 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책은 기독교 윤리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종이라도 주 안에서는 한 형제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전에 무익하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익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여준다. 오네시모의 빚진 것을 바울이 갚아주겠다는 정신에서 우리는 구속의 도리를 깨닫는다. 주인집으로 돌아간 오네시모가 그후 어떠한 자세로 일했을까 하는 여운을 향기처럼 남기는 아름다운 서신이다. 이 편지 역시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기록한 것이다. 오네시모가 소아시아의 골로새에서 도망하여 로마까지 갔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인도로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바울의 전도를 인하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났다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과 유비(類比, analogy)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주인의 곁을 떠난 것은 깨닫고 돌아가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를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사건이다.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달아나는 것은 악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악을 선한 기회로 바꾸어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것이다. 이 책도 역시 두기고가 에베소서, 골로새서와 함께 오네시모를 대동하고 전달한 서신이다.
두기고는 오네시모를 데리고 빌레몬을 찾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울의 안부와 함께 이 편지를 전달했을 것이다. 빌레몬은 그 자리에서 바울의 간곡한 편지를 읽었을 것이다. 바울의 감옥생활과 거기서 오네시모를 유익한 사람으로 만들어 돌려보낸 일이며 거기 담긴 복음의 진리를 뜨겁게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두기고의 등 뒤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빌레몬의 아내 압비아와 그 아들 아킵보가 거기 함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이 부탁한 것 이상으로 오네시모에게 해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처에 대하여 오네시모는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주인 빌레몬에게 돌아가고 있다. 그 믿음이란 바울의 중보를 인하여 빌레몬이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중보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리라는 믿음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종들이 같은 신앙을 가진 주인에게 주 안에서 형제라는 이 사실을 마치 무슨 큰 권리나 되는 것처럼 주인에게 경솔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편지를 따로 써서 보내고 있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아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딤전 6:2).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엡 6:5-6).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골 3:22).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골 4:1).
바울이 만약 노예 해방운동 같은 것을 진리라고 무모하게 떠들어댔다면 그 많은 노예들을 단속하고 법령은 더 엄해지고 따라서 노예들의 해방도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노예들이 이판사판으로 뛰쳐나와 사회의 큰 혼란을 야기시키고 기독교는 배척되고 종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고, 따라서 주인들을 감독시켜서 로마를 기독교국이 되게 하는 사역을 감당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성도의 삶은 섬기는 삶이어야 한다면 종이 되어서 주인을 더 잘 섬김으로 주인을 감동시키는 것이 자신이 자유하게 되는 첩경이다. 자신의 주인이 주님을 알게 되어 같이 믿게 되는 길이 비록 더딘 것 같아도 그것이 바로 가장 확실하고 떳떳한 길이었던 것이다. 지금 로마에는 노예가 없다. 아니 전세계적으로 노예제도는 거의 없어졌다. 그것은 바로 이 오네시모의 회개와 빌레몬의 용서와 바울의 교훈과 중보, 무엇보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의 은혜로 이렇게 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힘으로써 주인의 금품을 도적질하여 도망친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만나 변화시키게 되었고 그 오네시모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노예제도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 오네시모를 빌레몬은 다시 바울을 섬기도록 바울에게 돌려보내주었고 그 후 오네시모는 바울을 모시고 배워서 훌륭한 주의 일꾼이 되어서 마침내 후일에 에베소교회의 감독이 되었으며 그 오네시모가 바울의 서신들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가진 바울서신들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 학설이 근거가 있는 것은 그후 약 50년 후에 안디옥교회 감독인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소환되어가면서 서머나에서 에베소교회의 감독에게 보낸 서신 중에 에베소교회의 감독이 오네시모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그 서신에서 이그나티우스는 에베소의 감독을 위대한 감독으로 존경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렇게 노예출신의 감독이 당시 세계교회의 선교적 중심교회의 감독이 되어 로마 판도 내의 모든 지역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종들을 잘 지도했기에 주를 믿는 노예들이 진실과 성실로 순종하여 주인들을 감동시켜 마침내 전세계가 기독교 세계가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오네시모야말로 인류 역사상 참으로 위대한 일을 한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할 사람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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