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수르의 역사
역사적으로 이들이 왕조를 이룬 확실한 증거는 B.C.2300년에서 2230년경의 사르곤 왕조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비옥한 토지와 빈번한 무역 통로에 있어서 상당히 번창하였다가
후에 강력한 철기로 무장한 헷(힛타이트, 가나안의 둘째 아들)족속의 세력이 아나톨리아로 이주해 옴으로써 앗수르의 무역은 막히게 되었다.
그 때부터 앗수르는 운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마침내 후르(Hur)제국의 속주로 전락하여 고대 앗수르 제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앗수르가 B.C.14세기경에 미타니 후르 제국이 약해지는 것을 기회로 다시 재기하여 두각을 두러내기 시작했다.
앗술 우발리트 1세 (Asshur-uballit, Ⅰ, B.C.1365-1330)는 애굽과 바벨론 등 주변의 열강들과 관계를 맺고 앗수르의 독립을 추진하였다.
그가 죽고 그의 자손 중 쿠리갈주 2세(Kurigalzu,Ⅱ)가 왕권을 회복하려고 애를 쓰다가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고
후에 살만에셀 1세(Salmaneser,Ⅰ,B.C.1274-1245)가 일어나 국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살만에셀은 정복한 땅의 국민들을 다 사로잡아다가 자기가 직접 다스리는 땅에 살게 하고
정복지에는 본국의 국민을 심는 철저한 식민 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전통은 북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로잡아 갔을 경우(B.C.721)에도 마찬가지였다.
"유다왕 아하스 십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지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올라와서 호세아를 친고로 호세아가 신복하여 조공을 드리더니
저기 애굽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 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의 배반함을 보고
저를 옥에 금고하여 두고 올라와서 그 온 땅에 두루 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삼년을 에워쌌더라
오세아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디아(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회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가만히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상을 세우고
또 여호와께서 저희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들이 그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으며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치 말라 명하신 일이라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랑레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일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하고 또 나의 종 선지자들로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그 목을 굳게 하기를 그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저희 열조의 목 같이 하여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 열조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좇아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하사 본받지 말라 하신 사면 이방사람을 본받아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자기를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노를 격발케 하였으미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왕하 17:1-18)
앗수르의 살만에셀 1세는 앗수르를 재건하는 일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서쪽으로 진출하여 영토를 확장하였고 북쪽으로는 우라르투(Urartu)왕국을 견제하면서 국권을 세워나갔다.
그리고 갈라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다.
살만에셀의 아들 투굴티 니누르타(Tukulti-Ninurta ,Ⅰ,B.C.1244-1208)는 바벨론을 정복하여 합병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앗수르는 국력에 비하여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려서 자원이나 군비가 분산됨으로 오히려 국력이 쇠퇴하게 되었다.
B.C.1100년에서 900년경의 앗수르는 국력이 쇠퇴하였고, 이러한 틈에 다윗과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융성하게 다스리게 되었던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시절에는 엘람이나 바벨론, 앗수르가 다 쇠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급기야는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는 때로부터
주변의 이방 앗수르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앗수르단(Assurdan,Ⅱ, B.C.934-912)과 아다드니라리(Adadnirari,Ⅱ, B.C.911-891) 등은 연례적으로 군대를 출정하여 영역을 넓혀갔다.
그러한 풍습은 이스라엘에도 있었던 것 같다.
전쟁을 장기간 계속하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서 아마도 일년 중 가장 편리한 계절을 택하여 군사를 일으켰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삼하 11:1)
앗수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가 국내적인 내분이 생길 기미가 보이면
오히려 전쟁을 일으켜서 국민들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게 하였다.
앗수르는 내부적으로 평안하지가 못하였다.
그래서 부지런히 전쟁을 도발하여 백성들과 군인들이 딴 생각을 품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한 현상은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마치고 개선장군이 로마에 입성하게 되면 로마의 정가는 언제나 술렁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로마는 군인들을 밖으로 내 몰아 계속하여 전쟁을 수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로마가 전쟁을 계속한 것은 전쟁에 이겨서 전리품을 가져오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그것이 정치적인 야심을 가진 군부의 인물들을 밖에서 죽게 하는 가장 유익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국내 정치가 오히려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군인들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은 큰 전쟁에서 승리하여 개선하는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대사에 나타나는 제국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현대사에도 흔히 있는 일이다.
니느웨를 수도로 발전했던 앗수르가 항상 이웃 나라를 침략하고 약탈을 일삼다가
결국은 완전히 패망하고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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