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나

성경 해석과 역사--시리아 설교 "요나와 니느웨인의 회개"를 중심으로

은바리라이프 2009. 9. 24. 13:14

성경 해석과 역사--시리아 설교 "요나와 니느웨인의 회개"를 중심으로
서원모 (장로회신학대학교 강사)

1. 들어가는 말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은퇴교수인 칼프리트 프뢸리히(Karlfried Froehlich)는 1977년 2월 23일에 행한 교수취임연설에서 교회사를 "성경주해사라는 해석학적 지평"에서 서술할 것을 제안했다. 프뢸리히는 게르하르트 에벨링(Gerhard Ebeling)의 유명한 명제인 "성경의 주해의 역사로서의 교회사"를 교회사 서술에 있어서 보다 전략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프뢸리히에 의하면 교회사를 성경해석의 관점에서 서술한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의 어느 구절에 대한 주석사나 성경해석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회사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의 역사 개념에서 출발해야 하며, 서양 문화에 포함된 그 어떤 것도 교회사가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프뢸리히는 교회사가는 성경을 서양역사에 대한 해석학적 지평으로 삼아 성경이 어떻게 인간의 삶과 행동을 형성해왔고 영향을 주었느냐는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필자는 프뢸리히의 교회사 방법론이 "성경적 기독교"로 특징지워지는 한국교회에도 적합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이러한 방법론에 입각한 많은 연구들이 한국 교회사 학계에서 쏟아져 나오기를 기대한다. 본고의 목적은 프뢸리히의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보여주는 것에 있다. 이를 위해 본고는 시리아 교회의 "요나와 니느웨인들의 회개"라는 설교를 분석하고자 한다. 이것은 "요나와 니느웨인들의 회개"란 설교가 이러한 방법론의 의미과 실제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요나와 니느웨인들의 회개"는 요나서를 다룬 시리아 교회의 설교다. 이 설교는 시리아 교회의 사순절 이전에 지켜졌던 "니느웨인들의 탄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금식주간에 읽혀졌던 설교였다. 이 설교의 시리아 본문전승은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아르메니아어, 희랍어, 라틴어, 이디오피아어, 그루지아어 등의 다양한 고대언어로 번역되어 언어와 지역을 초월해서 널리 영향을 주었다. 이 설교는 모두 2142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요나서 3장, 즉 요나가 바다에서 나와 니느웨성에서 회개를 설교하는 장면부터 시작되어, 요나서 마지막에 요나가 하나님과 쟁변하는 장면을 다룬다. 특이한 점은 성경에는 없지만 요나가 니느웨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방면을 부가한 점이다. 본 설교의 저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필사본에서 4세기 시리아 교부인 에프렘을 저자로 지목하고 있고, 또 설교의 형식, 문체와 표현 등이 에프렘과 유사하기 때문에 에프렘이 저작했다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이 설교가 보여주고 있는 시대상이 에프렘과 시대상과는 상이하기 때문에, 에프렘의 제자가 에프렘의 문학형식, 스타일과 표현을 모방해서 저작한 설교라는 주장도 있다. 에프렘의 저작이 아니더라도 이 설교의 저작 연대는 최고(最古) 필사본의 연대인 6세기,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5세기 전반부터 6세기라고 추정할 수 있다.

2. 형식적 특성들
1) 운율설교
교회사를 성경해석이란 관점에서 이해할 때 우리는 성경해석의 매체(medium)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경해석은 특정 귀절에 대한 주석형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설교형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또한 예술적 표현 양식--회화, 찬양, 시--으로 나타날 수 있다. "요나와 니느웨인들의 회개"는 요나서에 대한 설교이며, 7언 절구 두 개를 하나의 단위로 하여 7 7조로 이루어진 운율설교(메므라, memra)이다.
메므라는 마드라샤(madrasha)와 함께 시리아 기독교의 대표적인 문학형식이다. 마드라샤는 주로 에프렘이 즐겨 사용한 문학형식으로 찬양을 의미한다. 에프렘의 찬양은 4-7음절을 단위로 하여 이를 일정한 형식으로 배열하여 한 소절을 만들고, 각 소절이 끝난 다음에는 후렴구가 부르도록 만들어졌다. 에프렘은 50여개의 상이한 소절형식을 창안하여 수많은 찬양을 작곡했다. 에프렘의 찬양들은 곡조의 제목들은 전해내려 오지만, 곡조는 보전되지 않았다. 메므라는 마드라샤보다는 단순한 운율을 가지고 있는데, 에프렘은 7 7조의 가락을 주로 사용하였고, 이렇게 7 7조를 사용한 형식은 '에프렘의 가락'으로 알려져 있다. 메므라는 에프렘 이후의 시리아 설교가들에게도 계속 발전되었는데, 사룩의 야콥은 12 12조의 가락을 창안했으며 발라이(†435년 경)는 5 5조의 가락을 즐겨 사용했다. "요나와 니느웨인들의 회개"는 에프렘의 가락을 사용한 운율설교로, 이런 점에서 에프렘의 저작 혹은 최소한 에프렘의 영향을 받은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시리아 기독교에서는 에프렘의 가락으로 저작되고 에프렘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수십여편의 설교들이 존재하지만, 실제로 에프렘의 친저로 확인할 수 있는 설교는 그렇게 많지 않다. 아마도 후대의 작가들이 에프렘의 가락을 모방하여 7 7조의 운율설교들을 저작했고, 에프렘에 대한 존경심으로 자신의 설교를 에프렘의 저작이라고 칭하거나, 혹은 필사자들이 이러한 설교들을 에프렘의 가락이라는 의미로 에프렘의 설교라고 지칭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요나와 니느웨인들의 회개"가 에프렘의 가락을 사용했다는 바로 그 이유 만으로 에프렘의 저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설교를 이해할 때 이 설교가 이러한 운율을 가진 설교였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프뢸리히의 방법론과 관련해서 부연한다면, 이 설교는 운율설교 형식으로 저자의 성경해석이 표현되고 있다.

2) 이야기체와 극적인 형식
"요나와 니느웨인들의 회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 설교가 이야기체로 전개되고 있고 등장인물의 대사들을 곳곳에 삽입하여 극적인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설교는 요나서 3장부터 요나서 마지막까지 요나서의 내용을 이야기식으로 엮어가고 있다. 더욱이 이 설교의 마지막 606 (1491-2096)행은 성경에는 없지만 요나서의 후기라고 말할 수 있는 장면들을 서술한다. 본 설교의 결론 부분 (2097-2142)에는 요나서가 청중에게 주는 교훈을 다음과 같이 끌어낸다:
그들은 우리와 같지 않다. 우리는 거짓으로 회개한다.
우리는 잠시동안 두려워하나, [하나님의] 진노가 지나가면 망각한다.
진노의 처음에는 회개하나, 마지막엔 [하나님을] 거스려 대적한다.
우리는 [진노가] 지나간 듯 교만하고, 파멸이 다시는 오지 않을 듯,
지극히 높으신 분이 다시는 죄를 벌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듯,
오로지 분노하는 죄만이 하나님께 가증한 듯 교만하다.
형제들아, 다른 죄는 공의의 하나님이 미워하지 않는가?
형제들아, 참 회개한 자는 평화시에도 지극히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조금만 맞아도, [매가] 지나간 후에도, 날마다 징계를 기억한다.
주제넘은 하인은 과거의 채찍질을 날마다 망각한다.
니느웨인은 징계하나, 돌이켜 자비 베푼 분, 평화시에 경배했다.
온 성을 날마다 뒤흔든 분께, 온 성이 감사를 드렸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아버지를 기뻐한 무할례자와 아들을 괴롭힌 할례자로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광을 받으시길, 아멘, 아멘.
(2097-2120, 2139-2142)

즉, 이 설교는 요나서의 내용을 이야기체로 엮어 가면서, 결론 부분에 요나서가 청중에게 주는 교훈을 제시한다.
이 설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야기의 틀 안에서 등장인물의 대사들이 곳곳에 삽입되었다는 점이다. 이 대사들은 대화형식 보다는 독백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요나보다는 니느웨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설교에서 나타나는 대사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니느웨의 아이들이 부모에게 (261-276);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349-424); 니느웨왕이 백성에게 (513-532, 535-822); 왕의 사절들이 니느웨인들에게 (840-858); 니느웨인들이 요나에게 (1339-1388); 하나님이 요나에게 (1421-1450); 니느웨인들이 요나에게 (1615-1672); 요나가 니느웨인들에게 (1695-1710); 니느웨인들이 서로 서로에게 (1810-1952); 니느웨인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1959-2116).
종합하면, 이 설교는 이야기의 틀 안에서 대사들을 삽입함으로써 극적인 형식을 보여준다. 이렇게 극적인 형식으로 설교를 구성한 것은 시리아 교회의 운율설교에서 자주 나타나는 형식으로, 이 형식은 시리아 교회에서는 예배극으로까지 발전되지는 않았지만, 희랍교회와 라틴교회의 수난극의 발전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진다.
시리아 기독교 문학의 극적인 형식은 크게 다섯 가지 형태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 형태는 주로 찬양에서 많이 사용되는 방식으로, 한 연씩 대화를 주고 받아 대사의 분량이 동일하다면, 두 번째 형태는 연을 바꿔가며 대화를 주고 받는 형식에서 탈피하여 대사의 분량에 차이가 존재한다. 세 번째 형태는 대화가 주요 요소이지만, 이야기 형식이 도입되며, 주제적인 발전도 이루어져, 한 장면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가 다루어지며, 대화 상대자도 2명 이상이 된다. 네 번째 형태는 대사가 아니라 이야기가 중심이 되며, 이야기적 틀 안에서 대사들이 나타나는 경우로, 이러한 형식은 찬양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운율설교에서만 나타난다. 이 형식에서는 저자는 설교를 하기 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초점을 두며 서문 혹은 결론 부분에만 설교의 메시지가 나타난다. 다섯 번째 형태는 이러한 극적인 이야기체 형식에 저자의 도덕적인 권면, 주석작업, 혹은 등장 인물에 대한 논평들이 군데군데 삽입되는 형식으로 네 번째 형태와 같이 운율설교에서만 나타나며, 간혹 산문형식에서도 발견된다. 이렇게 볼 때 "요나와 니느웨인들의 회개"는 네 번째 형태에 해당하며, 다만 대화 형식이 아니라 독백 형식이 사용되고, 대화의 분량이 다른 설교들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특징이다.

3) 삶의 자리
이 설교는 시리아 교회의 "니느웨인들의 탄원"이라는 금식 절기에 읽혀졌다. 이 금식절은 사순절 이전에 지켜졌는데, 동시리아 교회에서는 이 절기 기간 중 화요일에 이 설교를 읽었고, 서시리아 교회에서는 월요일부터 목요일에 읽었다. 또한 서시리아 교회의 예식서에 나타난 설교는 순서가 뒤바뀌고 내용도 불완전한데, 이는 이 절기가 양 교회에서 다르게 기념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니느웨인들의 탄원"이란 금식 절기의 기원은 사료에 의하면 6세기 말까지 소급되며, 따라서 이 설교가 "니느웨인들의 탄원"이란 금식 절기보다 먼저 저작되었으며, 추후에 이 절기가 만들어지면서 이 절기에 적합한 설교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설교가 예식적인 금식절기에 맞추어 작성되었다는 증거가 존재한다. 요나의 설교를 들은 후 니느웨성의 회개를 묘사한 후, 저자는 이것을 당시 교회의 표면적 회개와 비교한다:
그 회개에 비하면, 우리 회개는 한낱 꿈 같도다.
그 간구에 비하면, 우리 간구는 그림자 같도다.
그 겸비에 비하면, 여기엔 겸비의 모양 뿐이다.
이 금식일에 빚 탕감 베푸는 자 없구나. (97-106)

또한 이 설교에는 요나를 기념하는 도시와 축일에 대해 언급하는 구절이 나온다. 니느웨인들은 요나에게 말한다:
보전된 그 도시를 송축하라. 이곳에서 당신은 기억되리.
요나여, 우리 도시를 송축하라. 이제부턴 당신 이름으로 불리우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이것은 그 사람을 대대로 기념하는 위대한 축일이다.
(1377-80, 1385-86)

이렇게 볼 때 이 설교가 요나와 관련된 축일, 보다 구체적으로는 "니느웨인들의 탄원"이라는 금식절기와 처음부터 연관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금식절기의 연대에 대해서는 문헌적인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최소한 이 설교가 요나와 관련된 금식절기라는 삶의 자리에서 저술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듯 하다.
그렇다면 이 설교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차원, 즉 성경과 예배의 연결성을 보여준다. 시리아 교회는 요나서의 사건을 예전을 통해 기념하고 현재화시키려 하였다. 물론 이 설교는 요나와 관련된 금식절기가 어떻게 지켜졌는지 말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설교는 시리아 기독교가 이렇게 요나서를 기념하고 현재화시키는데 있어서 금식절에 부여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니느웨인들의 회개이며, 니느웨성과 같이 진실하게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 설교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구성한다 (참. 97-106, 2097-2116). 다시 말하면, 이 설교는 시리아 교회가 참된 회개란 관점에서 요나서를 전례를 통해 현재화시키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댓구, 대조
이 설교는 댓구, 대조를 즐겨 사용하였고, 이런 점에서 시리아 문학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댓구와 대조는 이 설교에 있어서 저자의 성경해석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몇 가지 예를 통해 저자가 댓구와 대조를 성경해석에 있어서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살펴보자. 이 설교는 요나가 바다에서 나온 장면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니느웨에서 요나가 설교했다. 유대인이 무할례자 가운데서.
요나는 강대한 도시로 들어갔다. 연약한 소리 그 도시를 떨게 했다.
이방인 도시 애통하고 슬퍼했다. 그 히브리인 설교자 때문에.
바다처럼 그 도시는 흔들렸다. 바다에서 올라온 요나 때문에.
바다로 내려가서 [바다를] 흔들었고, 육지에 올라와서 떨게 했다.
바다는 도망칠 때 요동했고, 육지는 설교할 때 움직였다.
잠잠해졌네, 바다물결, 간구 때문에; 잠잠해졌네, 마른 땅, 회개 때문에
보라 그가 기도하네, 큰 물고기 속에서, 니느웨인은 큰 성 안에서
기도 간구 요나를 구원하고 니느웨인은 부르짖음이 구원했다.
요나는 도망쳤네, 하나님 피해; 니느웨인은 순결을 피하여.
[하나님의] 공의는 양자 모두 유죄라고 판결했다.
양자 모두 그 분에게 회개드려 구원받았다. (1-26)

이 부분은 이 운율설교가 7언절구 두 개를 한 단위로 하여 서로 댓구와 대조를 이루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에선 요나와 니느웨 백성들, 바다와 육지를 소재로 하여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댓구와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대조와 댓구적 표현은 니느웨성의 회개가 유대인의 불신앙과 비교될 때 더욱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가 보니 니느웨인은 애통하나 시온은 방종했다.
앗수르를 바라보고, 자만에 찬 예루살렘을 더욱더 경멸했다.
그가 보니 음녀들은 정숙해지나, 자기 백성 딸들은 더럽혀졌다.
그가 보니 니느웨엔 신들린 자가 정신 돌아와 진리를 가르친다.
그가 보니 시온에선 거짓 예언자가 기만으로 가득찼다.
그가 보니 우상들이 이방인들 사이에선 공공연히 파괴되었다.
그가 또한 살펴 보니 자기 백성 내면은 우상숭배로 가득찼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그가 보니 이방인 딸들은 조상들의 우상들을 부인했다.
하지만 그는 탐무즈를 애곡하는 자기 백성 딸들 때문에 울었다.
그가 보니 니느웨엔 점장이, 술객과 점성가가 사라졌다.
그가 보니 유대땅엔 마법사와 갈대아인이 떠돌아 다녔다.
(1101-14, 1125-32)

마지막으로 한 가지 예만 더 들어보자. 이 설교는 요나가 니느웨성의 구원을 목도하며 하나님과 씨름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너 요나는 박넝쿨에게 자비베풀고, 난 그 성을 긍휼히 여긴다.
너 요나의 초막은 회개자의 도시에게 거울이 되리라.
너 요나는 오두막을 땅에 박지만, 도성은 뿌리채 뽑는구나.
미천한 초목은 보호하지만, 그 도성은 뒤집어 엎는구나.
그 도성과 박넝쿨을 차별하다니, 요나야 네겐 공의가 있느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요나가 얼마나 [하나님의] 공의가 유발되었나 알려주려 설교했다면,
스러진 식물은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가 화목시켰나 외쳤다.
(1431-40, 1477-80)

여기서도 요나의 편협성과 하나님의 자비가 박 넝쿨/초막과 니느웨성을 소재로 하여 대조와 댓구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3. 내용분석
"요나와 니느웨인들의 회개"는 기본적으로 요나서에 대한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요나서의 해석은 이야기체와 극적인 형식을 통해, 요나를 기념하는 금식절기라는 삶의 자리에서, 7 7조의 운율로 대조와 댓구의 형식을 통해 표현되었다. 내용적인 면에서 볼 때, 이 설교는 요나서를 이야기 식으로 다시 구성하는 과정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본문을 확대하며, 본문에 나타나지 않는 내용을 첨가, 보충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요나서 본문에 대한 일정한 해석을 매개했다.

1) 요나서의 재구성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설교는 요나서의 이야기를 다시 청중에게 들려준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저자가 어떻게 요나서를 재구성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저자의 요나서 해석을 이해할 수 있는 관건이 된다. 이 설교의 전체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서문: 물에서 나와 니느웨성에서 설교하는 요나 (1-36)
1. 니느웨성의 회개
1) 총체적이고 일치된 니느웨성의 회개 (37-250)
2) 심판을 걱정하는 아이들과 구원의 소망을 전하는 부모들 (251-424)
3) 니느웨왕의 권면과 회개 (425-900)
4) 유대백성의 불신앙에 대한 요나의 수치감 (901-920)
5) 니느웨성의 금식과 회개 (921-1052)
2. 니느웨성의 구원
1) 멸망을 기다리는 요나 (1053-1088)
2) 니느웨의 회개와 유대인의 불신앙 (1089-1163)
3) 심판날을 준비하는 니느웨 백성 (1165-1260)
4) 니느웨의 구원 (1261-1336)
5) 함께 기뻐하자는 니느웨인들의 요나에 대한 권면 (1337-1388)
6) 요나와 하나님의 씨름 (1389-1490)
3. 요나의 귀국
1) 니느웨의 요나 환영과 요나의 귀국 (1491-1568)
2) 니느웨 사절단과 요나의 이별 (1569-1712)
3) 사절단의 유대 백성 타락 목도 (1713-1952)
4) 사절단의 귀국과 감사 (1953-2096)
결론: 니느웨성의 회개가 주는 교훈 (2097-2142)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볼 때, 요나서에 대한 재해석 혹은 재구성은 설교의 뒷 부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나서 4장은 니느웨의 구원에 대한 요나의 불평 및 박넝쿨을 매개로 한 하나님과의 씨름을 묘사하며, 요나 뿐만 아니라 청중도 도전하는 질문형식으로 끝맺고 있다. 반면 이 설교는 요나가 니느웨 백성에게 환영받고 귀국하는 장면을 덧붙인다. 이것은 "니느웨성이 구원받은 뒤에 요나와 니느웨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 답변을 주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니느웨의 회개가 이 설교의 중심적인 내용이며, 이 설교의 주인공은 요나보다는 오히려 니느웨 백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설교에는 요나의 행적, 말보다도 요나의 설교에 대한 니느웨성의 반응이 중점적으로 묘사된다 (37-1052, 1175-1260). 요나에 대한 서술은 오히려 니느웨의 회개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며, 여기에서는 니느웨의 회개와 유대 백성의 타락이 날카롭게 대조된다 (901-920, 1089-1163). 또한 '요나서의 후기'라고 말할 수 있는 세 번째 부분에서도 요나가 아니라 니느웨 백성이 주체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이 설교는 요나서를 니느웨 백성의 관점에서 재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구체적인 내용들을 하나하나 검토해보자.

2) 니느웨성의 회개
니느웨성의 회개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저자는 우선 니느웨인들의 회개가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빈부귀천, 신분고하, 남녀의 구별없이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참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제왕들 듣고 낮추었다; 왕관 벗어 겸비했다.
귀족들 듣고 근심했다; 옷 대신 베옷 입었다.
존귀한 원로들 듣고, 재로써 머리 덮었다.
부자들 듣고 빈자 앞에서 자기 창고 열었다.
채권자도 심지어 듣고 차용증서로 구제했다.
채무자도 바르게 들었다: 부채 숨겨선 안된다고.
채무자는 되갚고, 채권자는 빚 탕감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강도들 요나를 듣고 노략물을 돌려 주었다.
노략물 주인 눈감아주어 강도를 용서했다.
각자 스스로 판단하고 동료에겐 자비 베풀었다.
이웃 판단하는 자 없고 모두 자기만 판단했다.
모두 자기를 책망했다; 진노가 모두를 책망했기에.
살인자 듣고 고백했다; 판사 두려워하기를 소홀했다고
판사들 듣고 용서했다; 진노가 판사들을 침묵시켰기에.
엄정한 재판 꺼렸다; [하나님에게] 엄정히 재판받지 않도록.
모두 긍휼을 뿌렸고 구원 얻기를 원했다.
죄인들 요나를 듣고, 모두 지은 죄 고백했다.
증오의 도성 듣자마자 증오를 던져버렸다.
주인들 요나를 듣고, 노예를 해방했다.
노예들 요나를 바르게 듣고, 주인들을 존경했다.
귀부인, 요나 소리 듣고, 베 입고 자만심 내렸다.
(49-62, 69-96)

여기선 특히 회개의 사회적 차원이 강조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설교자는 "이 금식일에 빚 탕감 베푸는 자 없구나" (105-6)라고 말하며 당대 교회의 표면적 회개를 비판한다.
또한 저자는 죄와 회개, 구원의 관계를 의학적인 상징을 사용하여 질병과 치유란 관점에서 묘사하는데, 이는 시리아 기독교 문헌에서 흔히 나타난다:
무서운 의사, 병이 퍼진 도성에 파견되었다.
상자 열어, 진하고 강한 시약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은] 선하셔서 예언자를 조건적으로 파송하셨다:
도성을 파괴치 말고 도성을 치료해라.
그 설교자 니느웨인에게 회개하라 권치 않았다.
아픈 자가 끈질기게 도움요청하라 가르쳤다.
[병자] 앞에 문 닫아 수없이 두드리라 가르쳤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죄의 병은 의지의 병이며 속박의 병은 아니다.
무서운 소리, 마치 검을 휘두르듯 두렵게 했다.
완고한 자도 소스라쳐 죄로부터 치유되었다.
치유하러 왕림한 의사, 병자에게 검 빼어 보였다.
니느웨시 떨었다, 교수형 형리 서있는 듯.
병자들 놀라 넘어지고, 일어나 급히 회개했다.
요나 소리, 칼처럼 난치의 상처 베어냈다.
요난 약 대신 곤장으로 치유하는 의사였다.
(117-130, 137-152)

여기에선 회개를 수술장면과 연결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서, 요나 뿐만 아니라 니느웨성의 왕과 니느웨 백성 모두가 의사로 묘사된다:
병 걸린 사람들 탐욕병에서 치료받았다
각자 욕심을 나무랐고, 각자 의사가 되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니느웨왕 깊이 알았다, 진노 원인은 죄란 것을.
악의 원인 잘라내어, 곧 폭풍을 잘라냈다.
니느웨왕은 도시의 왕진의, 알맞는 명약 알아냈다.
강력한 명약, 금식으로 도시의 병을 치료했다.
(161-164, 917-924)

이 설교가 금식절기와 연관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니느웨성의 회개에 있어서 금식이 강조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저자는 금식이 니느웨성의 질병에 대한"강력한 명약"(921)이며 하나님의 사죄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하면서도, 요나는 이 사실을 니느웨인들에게 가르치기를 주저했다고 서술해 요나의 갈등을 묘사한다:
요나는 죄책 요구하나, 금식은 죄를 용서했다.
니느웨인 모여 어떻게 구원받나 의논했다.
백성 모두 하나님 기쁘도록 언약 맺었다.
니느웨인에게 누가 보였나, 하나님의 은밀한 상징,
금식이 심판에서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을?
요나는 침묵했다, 사죄를 두려워했기에.
니느웨인에게 요난 [오직] 전했다: 심판은 확고하다.
[그들은] 요나의 말 믿으며, 요나의 심판 주목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예언자는 강인한 것 보고, 하나님은 선한 것 알고,
강한 자에게 대들지 않고 인자하신 분과 화목했다.
(931-946, 951-954)

하지만 비록 금식이 강조된다 하더라도, 저자는 금식, 애통, 기도, 구제, 화목, 사랑, 진실이 모두 회개의 구성요소가 된다고 제시한다:
[그들은] 회개하며 매시간 새 눈물을 흘렸다.
모든 종류의 구제가 날마다 행해졌다.
모든 형태의 기도가 날마다 드려졌다.
모든 유용한 간구가 날마다 보여졌다.
모든 위로의 샘이 자비로 솟아났다.
지체없는 정절이 남녀를 에워쌌다.
요동없는 순결이 금식으로 보전되었다.
서로서로 화목으로 자신의 혀 순하게 했다.
조화와 평등으로 한 몸처럼 어우러졌다.
자비는 [자신을] 기울이고 긍휼이 그들 위에 나린다.
아이들 중엔 사랑이, 이웃과는 진실이
성낸 자 중엔 화목이, 나뉜 자 중엔 일치가
여인들 중엔 화평이, 또한 유익한 침묵이
노인들 중엔 화목이, 또한 유용한 충고가
청년들에겐 정절이, 처녀들에겐 순결이,
하녀들과 여주인 간엔 일치가 이루어졌다.
(1005-36)

저자는 니느웨성의 회개를 유대백성의 타락과 대조시켜 보다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요나는 니느웨성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할례와 안식일을 자랑하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자기 백성을 부끄러워한다:
요나는 보고 놀라움에 사로잡혔고, 자기 백성에게 수치를 느꼈다.
니느웨인에겐 승리를 보았지만, 아브라함 후손에 대해선 울었다.
그가 보니 가나안 후손은 올바르지만, 야곱 후손은 그릇되게 행했고
그가 보니 무할례자는 마음 할례받고, 할례자는 마음을 강퍅케 했다.
그가 보니 안식일은 지키지 않고, 계명들은 지키고 있었다.
안식일 없이 구원이 임하고, 할례없이 승리가 임했다.
요나는 안식일을 뽐내며 자랑하는 자기 백성을 경멸했다.
요나는 할례를 생사문제로 만드는 그들을 경멸했다.
(901-916)

이러한 유대인에 대한 맹렬한 비판은 세 군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901-916, 1089-1164, 1725-1914), 후반부에 갈수록 비판의 도가 깊어진다.
성경해석이란 관점에서 이 설교를 이해할 때 어떻게 요나서를 다른 성경본문으로 해석하느냐 하는 것도 분석의 중요한 내용이 될 것이다. 니느웨의 회개를 묘사하면서 저자는 아브라함의 이삭번제, 욥기, 노아 이야기와 연결시킨다. 먼저 저자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니느웨의 부모와 자녀 간의 대화와 연관시킨다. 니느웨의 아이들이 부모에게 언제 도성이 멸망당할 것이냐고 묻자, 부모들은 위로의 말을 주는데, 저자는 이를 이삭의 번제 사건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부모는 자녀에게 진실 밝히길 두려워 했다:
예언자 말처럼 그 날이 가까왔고 임박하다.
아브라함 같이 자녀들을 예언의 말로 위로했다.
제물에 대해 이삭이 물었다: "번제양은 어디 있어요?"
말하는 양이 말 못하는 양에 대해 물었다.
아브라함은 아들에게 네가 번제양이라 밝히지 않았다.
근심 어린 대답을 피해 번제물이 흠 없게 했다.
칼을 뽑기 전까지 달래며 외아들을 묶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질문 감당 못할 걸 알아
침묵지켜 아들을 슬프게 하지 않았고
고통을 밝혀 제물에 흠가지 않게 했다.
그는 어떻든 사랑하는 아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는] 드러난 사실 피하려다 감추인 상징 예언했고
드러내지 않으려 하다 드러난 진실 보여주었다.
너라고 하기 두려워 다른 것 있다 예언했다.
아브라함은 [제물은] 그라고 생각하나, 아니라 예언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나와 아이, 우리 올라가리" 하인에게 말했다.
"우리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거짓말이나 실은 예언이다.
그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진실 위해 씨름했기에.
도움 주려 고안된 그의 말은 예언되었다.
니느웨인도 자녀를 설득하려 구실 찾았고
울면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말했다:
"하나님은 자비, 온유해 창조한 형상 멸하지 않지.
화가는 그림 그린 후 정성 다해 보전하지.
선하신 분이 살아 말하는 형상을 더 보전하겠지?
아이들아, 도성도 우리 나라도 망하지 않아.
[선하신 분은] 멸망의 위협 사용해 회개를 선언하시고
커다란 진노 사용해 우릴 순결로 돌이키신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그들은 위로하려하나, 평화에 대해 예언했고
곧바로 회개하여 진실된 자로 예언했다.
(297-328, 337-360, 427-430)

이렇게 저자는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창 22:5)는 성경구절을 니느웨성의 회개와 연결시킨다.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부지 중에 예언했다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욥기를 회개를 영적인 전투로 제시할 때 인용한다. 이 설교에서 니느웨왕은 앗시리아가 이전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요나에게는 지고 있다고 말하며, 영적 전투에 죽기까지 싸울 것을 권면한다:
그들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자여, 한 두 전쟁에서
우리가 의례껏 나가 마음대로 승리했던가?
용사들도 앗수르 큰 이름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많은 족속 이겼지만, 한 히브리인이 우릴 이겼다.
소리로 제왕들 떨게 했으나, 그의 소리 우릴 흔든다.
허다한 도성 멸했으나, 이 도성에서 그는 이겼다.
용사들 어미, 니느웨, 연약한 자로 두려워했다.
암사자가 둥지에서 히브리인에게 놀랐다.
포효했네, 앗수르 피조계에서, 요난 앗수르서
. . . . . . . . . . . . . . . .. . . . . . . . . . . .
내 친히 권면하니 이제부터 약해지지 말라.
용사처럼 싸우자; 약한 자처럼 스러지지 않게.
연약한 자라면 용기 내고 담대하라.
죽으려면 장부답게, 살려면 승리자로.
죽으면 유명 남기고, 살면 우승자 이름 남긴다.
(513-530, 533-544)

저자는 이러한 영적인 전투의 맥락에서 금식을 강조한다. 니느웨왕은 금식하는 요나를 보고, 니느웨인들도 금식하여 영적인 투쟁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욥기를 인증한다:
의인 요나 금식하니, 우린 죄인이니 금식하자.
의인 요나 간구하니, 베와 재로 우릴 낮추자.
거짓말쟁이로 비난 안 받으려, 금식, 기도에 열중하며,
자기 설교를 믿도록, 이 도성 멸하려 한다.
금식으로 그가 싸우면, 금식으로 그와 싸우자.
회개로써 이 예언자와 싸우는 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겐 잘못 없고, 우리 죄악이 잘못이다.
그 히브리인 말고 불법이 도성을 멸한다.
사랑하는 자여, 우리에겐 다른 숨겨진 원수가 있다.
그 원수와 남자답게 싸워야 마땅하다.
옛 사람, 의인 욥 이야기 전해진다.
욥 시험 나팔같이 땅의 승리 전했다.
조상들 이야기같이 사탄은 욥 참소했다.
그 악한 자 옛부터 의인들 참소했다면,
그의 입은 얼마나 죄인들 비난하겠나?
그의 악은 의인이나 죄인이나 마찬가지다.
의인은 박해해서 죄인으로 만들고,
죄인은 죽여서 회개 못하게 한다.
바로 그가 나가서 욥 아들 집 허물었고.
그들의 피를 포도주에, 몸을 컵에 섞었으며
기둥을 쳐서 사람들 위로 집채를 무너뜨렸다.
그가 우리 도성을 멸하려고 파견되었다.
전쟁에선 왕들 물리쳤으니, 금식으로 사탄 물리쳐라.
그와 더불어 싸우기 위해 너희 군단을 내보내라.
갑옷을 던지고, 그에 대항해 베로 무장하라.
화살을 꺾어버리고 기도로 옷입으라.
칼을 뽑아 던지고 승리의 금식 택하라.
금식의 칼로 우리 성의 숨겨진 죄악 베어라.
전쟁서 거둔 승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여기서 이긴다면, 어떤 승리보다 위대하리.
누구보다 전쟁, 사냥에 앞장서 나섰으니,
나 이 격렬한 전쟁에도 앞장서서 선봉되리라.
나와 같이 무장하라, 내 사랑하는 군사들아. (755-822)

여기서 욥기는 의인의 고난이라는 맥락보다는 시험에서의 승리라는 측면이 강조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노아 이야기를 예언과 심판이란 맥락에서 도입하고 있다. 우선 저자는 니느웨성의 회개를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긴장 관계로 조명하고, 니느웨왕의 입을 빌어 회개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사이에 위치하며, 회개와 간구가 무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선조들의 옛 전승에서 우리는 들었다:
하나님에겐 공의도 있고, 자비도 있다.
[하나님은] 공의로는 위협하고 자비로는 긍휼베푼다.
공의와 화목하고 자비는 더욱 높이자.
공의와 화목되면 자비는 우릴 도운다.
공의가 유발되어도 우리 간구 정죄없다.
화목하지 못하여도 간절한 탄원 책망없다.
공의와 자비 사이에서 회개는 인정된다. (555-570)

이어서 저자는 노아의 홍수를 인증하고, 노아의 예언을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렸음을 상기시킨다:
거울 세워 악한 일들 책망받게 하였다.
피조물에 징표 세워 보는 자들 닮게 했다.
하나님 자비 선포되어 듣는 자들 보게 했다.
회개[의 형상]가 땅에 이루어져 죄인들 보게 했다.
그 홍수에서 느낀 것 없는 자 누군가?
노아시대 홍수 이야긴 우리에게 가깝도다.
그 땐 공의 가까이 모든 인류가 거주했다.
분별없는 자 없고, 지식 어둔 자 없었다.
노아 세대엔 악인이 분별없이 살면 정죄되었다.
그 땐 다가올 홍수에 대한 예언말씀 있었다.
악인들 듣고 격분하고 예언 말씀 비웃었다.
도끼소리, 망치소리 홍수를 알렸다.
쓸근쓸근 톱질소리 홍수를 외쳤다.
[그들은] 도끼소리 비웃고 망치소리 조롱했다.
방주가 완성될 때 공의도 드러났다.
공의가 드러날 때 교만도 정죄되었다.
[깊음의] 샘이 터져 비웃던 악인들을 덮쳤다. (587-620)

이 맥락에서 저자는 참 예언자의 요나의 모습을 제시하고, 니느웨왕은 노아시대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듣지 않아 멸망했지만, 요나는 참 예언자이기 때문에 요나의 말을 듣자고 권면한다:
형제들아 히브리인 요나의 말 소홀히 말자.
경솔히 그 설교 다루는 건 잘못이다.
분별있게 말씀 살피고 요모조모 파악해 보자.
큰 걱정이 그 설교 때문에 나를 덮쳤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그는 놀라거나 두렴없고 꺼림, 흔들림도 없었다.
입 밖 나온 말 바꾸지 않고, 그 말 진리에 매여있다.
그의 말엔 헛된 것 없다; 생각이 확고하므로.
부추겨도 안 넘어가고, 위협도 무서워 않네.
재물 보이자 웃어넘겼고, 검 보이자 경멸했다.
그에겐 검이 생소하며, 그에겐 뇌물 낯설다.
보물에 넘어가는 자 있고, 검에 떠는 자 있다.
위협이 두렵게 하든지, 뇌물이 마음 움직인다.
아첨, 위협 사이에 이 히브리인 두었건만
양편에서 도망치고, 양편 모두 비웃었다.
재물 보이자 웃었고, 칼을 대자 혀 내밀었다.
재물욕을 극복하고, 죽음 공포 경멸했다.
요나의 말은 날카롭게 돌덩이를 잘랐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진노 전하는 예언자 거짓말쟁이라 할 자 누군가?
요나가 거짓말쟁이면 소리가 떨릴 것이다.
목소리가 강건하면 그 생각도 진실하다.
의사는 두렴 없어도 삯 때문에 굴복한다.
이 히브리인은 의사의 반열보다 더 위대하다.
빵 한 조각 우리 도성에선 먹지 않으려 했다.
우리에게 온 날부터 금식, 고통으로 보냈다.
이익도 없이 큰 진노를 전하라 누가 강요했나?
어떻게 두렴없이 우리 성에서 그 말씀 전했나?
(631-638, 651-676, 731-748)

저자는 니느웨성의 회개를 상세히 서술하면서, 요나서의 내용을 문학적인 상상력을 통해 확대시켰다. 저자는 니느웨성의 회개를 이야기체와 극적인 형식으로 묘사하면서, 회개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하고, 의학적인 이미지와 영적 전투의 맥락을 강조했다. 또한 이러한 틀 안에서 아브라함의 번제, 욥기, 노아의 홍수 등 성경의 이야기들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이 모든 것이 저자의 요나서 해석의 내용이 된다.

2) 니느웨성의 구원
이 부분은 요나가 성밖에서 오두막을 짓고 니느웨성의 멸망을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요나가 하나님과 씨름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서술한다. 여기서도 니느웨성의 회개와 대조되어 유대 백성의 불신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나타나고 있다 (1089-1164).
심판을 기다리는 니느웨인들의 공포를 묘사하면서, 저자는 죽음, 두려움, 어둠, 애통의 이미지를 강조한다:
거긴 날마다 각종 통곡소리 드높았다.
거긴 날마다 각종 고통의 신음소리 일어났다.
각종 형태의 부르짖음이 그들 모두에게 들렸다.
각종 양태의 소란으로 도시 전체가 요란스러웠다.
공포에 떠는 소동으로 전 도시가 두려워했다.
덤불에 걸린 새처럼 성은 공포 중에 앉았다.
바람에 흔들린 갈대처럼 도시는 떨고 흔들렸다.
밝아지면 그 날이 지나가리라 생각 못했다.
어두워지면 아침이 밝으리라 생각 못했다.
죽음 문턱에 선 듯 백성 모두 떨면서 섰다.
음부의 문을 전 도시가 모두 함께 두드렸다. (1053-74)

더 나아가서 저자는 천둥과 번개, 지진 등 자연현상도 심판을 예고했다고 묘사한다:
모두가 먼지 뿌려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모두가 재를 머금고 기도로 간구했다.
탄식소리 드높았고, 통곡이 사무쳤다.
성벽은 비통한 재 뿌린 베옷으로 뒤덮였다.
낮에도 베옷으로 어둠이 짙었다.
공기도 떨었고 하늘도 흔들렸다.
구름이 안개와 덮여, 어둠 짙고 두터웠다.
굉음이 굉음 치며, 천둥과 천둥 부딪쳤다.
번개가 번개 따르고, 공포가 마음 짓눌렀다.
모두가 땅을 보고 뒤집히리라 생각했다.
서로서로 갑자기 죽을 자처럼 통곡했다. (1229-50)

따라서 니느웨성의 구원은 자연의 변화와 연결되고 죽은 자의 부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망하리라 생각했던 때 갑자기 구원 임했다.
모두 이웃과 기뻐했고, 사랑하는 자와 인사했다.
사십일 동안 땅바닥은 흔들리길 멈추지 않았다.
멀찍이 서서 요난 거짓말쟁이 되길 두려워했다.
희망 끊어진 그 순간 지진, 진동 멈췄다.
긍휼 소식 주어졌고, 은혜 표지 보았다.
번개, 천둥 고요해졌고, 귀와 눈이 기뻐했다.
눈물 굽어보신 자비자, 생명 불쌍히 여기셨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요나가 멸망하리라 생각했던 그 때,
바로 그 날 그 순간 멸망에서 구원받았다.
구름 안개 갑자기 걷혔고 사라졌다.
잠잠하고 소망 넘치며, 사망에서 부활했다. (1281-98, 1319-26)

이렇게 저자는 니느웨성의 구원을 죽음과 부활이란 관점에서 이해했고 이를 피조세계의 변화와도 연결시켰다.
요나의 영적인 씨름이 묘사된 부분(1389-1490)은 이 설교에서 요나서 재해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저자는 심판의 예언과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공의와 선 등 요나서의 긴장을 요나서 본문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소한다. 우선 성경 본문과는 달리 이 설교에서는 요나의 씨름이 니느웨인들 앞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니느웨인들은 성 밖에 앉아있는 요나에게 와서 함께 기뻐하자고 권유한다 (1337-88). 그때 그들은 요나가 성령에 의해 자기 자신과 하나님 두 역할을 감당하며 논쟁하는 것을 목도한다:
도시 밖에 요난 앉았고, 전 도성이 다가갔다.
요나가 묻고 대답하는 걸 그들은 들었다.
성령은 그 입과 쟁론해 그 입으로 대적하고
하나님과 예언자 두 인격이 입에서 소리를 냈다.
전 도성이 예언자가 말할 때 들었다:
박넝쿨과 자신에 대해, 주인과 도성에 대해.
도시문제로 그가 주인과 논쟁하는 걸 들었다.
요나 입에서 그들은 양 편 대화를 엿들었다.
그 히브리인 변론가, 양 편 역할 담당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예언자 소릴 들었고
자기들 말로 하나님에게 말하는 걸 들었다.
낙망한 요나, 박넝쿨이 스러지자 죽음 청했다.
성령은 이 문제로 입에서 요나와 싸웠다.
요나 혀는 하나님 인격 대신 요나와 싸웠다.
하나님이 혀로 성을 변호하는 걸 그들은 들었다.
(1391-1420)

니느웨인들이 목도한 요나와 하나님과의 영적인 씨름의 실제적인 내용은 성경 본문에 가깝다. 여기서 하나님은 박넝쿨을 니느웨 백성보다 소중히 여기는 요나를 책망한다:
"요나야, 넌 천한 박넝쿨로 근심한다.
수고도 않고, 기르지 않고, 하룻밤에 피고 지는 건데.
스러진 박넝쿨과 구원된 도시를 비교하거라.
박넝쿨이 네겐 스승되니, 명철을 배우거라.
천한 박넝쿨로 긍휼이 어떠한지 맛보거라.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음식거리인 박넝쿨이 먹는 자보다 네겐 귀하구나.
스러질 풀이 네겐 회개자보다 소중하구나
박넝쿨 잎을 말하는 사람보다 크게 여기고
풀의 싹, 꽃을 철부지 아이보다 크게 여긴다."
(1421-30, 1443-50)

하지만 이 설교에서는 요나와 하나님과의 영적인 씨름은 요나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니느웨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 니느웨 백성은 요나의 씨름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배워야 했다:
그 도시 듣고, 목소리 높여 하나님 찬양했다.
하나님은 그들 위해 판결했고, 싸웠으며
원고였던 예언자를 변호사로 만들었다.
재판정은 원고에게 그 뜻과 달리 승리했다.
[하나님은] 성 주민 구원받도록 요나 말 거짓되게 했다.
요나는 거짓 없는 하나님께 형리가 되었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 회개에 실망않는다.
요나도 죄인들 회개에 근심없으나
구실 만들어, 어떻게든 성이 구원을 듣게 했다.
가증스런 일이다: 요나가 성급히 떠나
회개자들 모른다면--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하나님은] 공의론 진노하나, 자비론 긍휼내리는지를. (1451-74)

이렇게 볼 때 저자는 요나의 영적 싸움을 니느웨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로 제시한다. 요나가 두 인격으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은 니느웨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게 하는 문학적 장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요나서를 니느웨성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 이 설교의 요나서 해석의 핵심이었다.

3) 요나의 귀국
이 설교의 세 번째 부분은 니느웨인들이 요나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이 두 장면 사이에는 요나의 귀국 장면이 서술되는데, 여기서도 초점은 요나보다는 니느웨 백성에게 있으며, 니느웨 백성의 진실된 회개와 유대 백성의 타락을 대조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요나의 귀국을 서술하기 전까지는 저자는 요나가 니느웨 백성의 참 회개의 모습을 보고 자기 백성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으로 유대 백성의 타락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니느웨 백성은 직접 유대 백성의 죄악을 목도하고 스스로 자신들과 유대 백성을 비교한다. 니느웨인들의 눈에 비친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음란이 넘치는 불법의 땅이었다:
[그들은] 두려워 하며 무서워했다; 공포가 사로잡았다.
산 위에는 제단들이, 고지에는 단들이
나무에는 이방종교가, 나무사이엔 부정한 것이
문 에는 우상들 있어, 들락날락 배역하네
우상은 무수하고, 사제도 셀 수 없네.
샘물에는 세정식이, 냇물엔 정결식이
지붕 위엔 과자가, 정원에는 운명신이
광장엔 술객이, 길거리엔 점장이가
. . . . . . . . . . . . . . . . . . . . . . .
보았네, 소돔 죄악, 고모라의 악과 타락
말씀처럼 부자(父子) 모두 한 음녀에게 다니며 (암 2:7)
어미, 며느리, 딸이 모두 길에 뱀처럼 서 있었다.
(1737-48, 1781-86)

이제 니느웨와 이스라엘의 대조는 니느웨 백성의 입을 통해 "우리-그들"의 형식으로 표출된다:
서로서로 말했다: "우리가 꿈이라도 보는 것이 아닌가?"
이 땅이 약속의 땅인가, 아니면 소돔을 보는가?
이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귀신들이 우리에게 왔는가?
우리가 사람을 보는가, 그림자같은 영들을 보는가?
우리 땅에서 도망친 죄악이 여기로 이전해 왔는가?
우리는 우상을 부수었는데 여기선 만들어지고 있는가?
우리가 파괴한 제단들이 날개달고 날아서 왔는가?
우리 땅에서 사라진 탐무즈를 어떻게 여기선 애곡하는가?
우리가 부인한 금성을 어떻게 여기선 예배하는가?
우리 땅에서 약해진 술객이 여기선 큰 광장을 차지한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우리 땅엔 점치는 뱀에게 전제하거나 경배하지 않았다.
이 백성 안에는 옛 뱀의 저주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살아있는 뱀처럼 그들은 저주하고, 죽은 뱀에게 전제드린다.
우리는 귀신에게 아이를 주지 않았으나, 여기선 도륙된다.
우리는 짐승이 제물이었는데, 여기선 딸들이 제물이다.
이러한 구원자들 가진 백성이 삶에서 그토록 사악하다니!
순수한 율법 가진 백성이 행실이 그토록 더럽다니!
이러한 조상 가진 백성이 자신의 양육을 저주하다니!
이러한 하나님 가진 백성이 우상들의 근원이 되다니!
창조주를 하나만 가진 백성이 우상을 만들어 팔다니!
(1809-28, 1853-72)

이러한 유대 백성에 대한 비판이 단순히 과거의 사건 만 아니라 현존하는 유대교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는 증거가 존재한다. 여기서 저자는 아브라함의 후손, 할례, 율법에 대한 자랑을 특히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에겐 아브라함 이름이 아브라함 행실보다 더 위대하고
그들에겐 할례가 아브라함 신앙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이 그들에겐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다.
하나님이 율법을 파기하면 심지어 하나님도 비난한다.
그들은 율법을 제정한 분에게 율법을 부여한다.
자신들은 율법없이 살지만 하나님은 율법 아래 둔다.
그들에겐 율법이 율법을 제정한 분보다 더 위대한다:
율법준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주신 자를 비난하려고.
(1889-1904)

이러한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유대교와 경쟁적 관계에 있던 시리아 기독교 문헌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요소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도 저자의 요나서 해석은 니느웨 백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저자가 요나서에 없는 장면을 삽입하고, 니느웨 백성과 유대 백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이를 통해 니느웨 백성의 감사를 더욱 현실감있게 제시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4. 나가는 말
"요나와 니느웨인들의 회개"라는 시리아 설교는 성경과 교회역사를 연관시키는 프뢸리히의 방법론을 예시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된다. 이 설교는 전체적으로 볼 때 성경의 요나서를 기초로 이를 확대시키며 보충하는 요나서 해석 혹은 재구성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7 7조의 운율과 대조와 댓구의 광범한 활용, 이야기적인 틀과 극적인 구성은 교회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성경해석의 매체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적어도 교회사가는 시리아 교회에서는 이러한 양식으로 대중들이 성경해석을 접했을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설교의 삶의 자리는 요나서의 사건을 기념하는 금식절로 이는 성경과 예배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밝혀준다. 예배는 성경의 사건을 현재화시키는 하나의 틀이었으며, 일반 대중에게는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내용적으로 볼 때 이 설교는 요나서를 요나가 아닌 니느웨 백성을 중심으로 해석한 것을 보여준다. 시리아 기독교권 안에 니느웨가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요나서 해석이 단지 우연 만은 아닌 듯 싶다. 이 설교는 니느웨 백성의 회개를 이상화하고 당대의 표면적인 회개와 대비시킴으로써 진실되게 회개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기서 두드러진 특징은 회개의 사회적 차원이 계속해서 강조된다는 것이다. 또한 여러 곳에서 니느웨성의 회개가 유대인의 불신앙과 대조시키는데 이는 당대의 경쟁관계에 있던 유대교에 대한 논쟁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었다.
"요나와 니느웨인들의 회개"는 프뢸리히의 방법론을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우리는 서양사의 모든 내용에 대해 성경과의 관련성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과 교회역사를 연관시키는 프뢸리히의 방법론은 한국 교회사학계에도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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