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셉

용서와 화해(유다)3.유다의 인생

은바리라이프 2009. 9. 14. 17:07

용서와 화해(유다)3.유다의 인생

안정현 2008-09-17 21:18:08 주소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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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8:1-11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유다는 그의 형들과는 조금 다른 반응을 했습니다. 그는 좀더 이성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과거에 매여 자신을 음란함속에 방치하는 못난 사람도, 자신에게 상처 주는 사람에게 백배는 보복하는 그런 잔인한 사람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아둘람으로 갔습니다. 아둘람은 변방의 황무지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는, 문명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어들었던 곳도 아둘람이었습니다. 사울의 강력한 왕권까지도 미치지 못하던 아주 깡촌으로 유다는 들어간 것입니다. 유다는 아버지와 그의 믿음과 과거의 모든 상처와 작별하고 자신만의 인생을 찾아 새로운 시작을 한 것입니다.

유다는 그곳에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는 엘과 오난, 셀라의 세 아들을 낳았고 엘이 장성하자 다말이라는 여인을 며느리로 맞아들였습니다.

행복한 듯 보였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아버지 없이도, 그 아버지의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일 수 있을 것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에게 인생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불행이 유다의 가정에 들이 닥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내가 죽고, 첫째 아들 엘이 죽었습니다. 당시에는 큰 아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동침하여 아이를 낳고 형의 족보를 이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유다는 당시의 관습을 좇아 다말을 둘째 아들 오난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덜컥 둘째 아들 오난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기자의 통찰에 따르면 엘은 악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고, 둘째 아들 오난은 형의 아이를 낳아주기 싫어서 땅에다 설정했기 때문에 그 역시 소위가 악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오난은 형이 없으면 자신이 장자로서 재산과 가문의 대표권을 인정받지만 형의 아이를 낳아주면 그 모든 것이 없어진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역시 소위가 악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경기자와 같은 통찰을 가지지 못한 유다는 단지 재수가 없어서 두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그 이유가 ‘다말 때문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재수 없는 여자가 집에 들어와서 남편을 둘이나 잡아먹었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유다는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냅니다. 셀라가 아직 어리니 그가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그를 너에게 주겠다는 좋은 말로 달래서 당분간 친정에 가 있으라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다말은 오래도록 친정에서 기다렸습니다. 자기 안에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들과 싸우면서. 그리고 셀라가 성인식을 치를 시간이 되었지만 유다는 자신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다가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이 다말, 즉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명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말이 사고를 치게 됩니다.


창 38:12-18

유목민들에게 가장 큰 명절은 양털을 깎는 날입니다. 농사하는 사람들에게 가을걷이가 끝나는 날이 축제일이듯 유목민들 역시 양털 깎는 날을 성대히 지킵니다. 그날에는 사람들이 서로 초대하고, 술을 마시고, 오랜만에 노동으로부터 벗어나서 마음껏 즐기는 날입니다.

다말은 그러한 축제일에 창녀의 옷을 입고 유다가 잘 다니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다를 유혹하게 되고, 유다는 거리낌 없이 창녀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유다가 성적 도덕관념이 없다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매춘은 이방종교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습니다. 창녀들은 단순히 돈을 받고 성을 파는 여인들이라기보다는 신전에 고용된 신전창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의 신이 결합하여야 비가 오고, 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신이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땅에서 음란한 짓을 벌이는 게 제사장, 즉 신전 창녀들의 역할이었습니다.

다말은 신전창녀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유다가 그 창녀에게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아버지 집을 떠난 것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믿음, 즉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모든 부르심에 대해 완벽한 거역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유다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말은 유다를 통해 임신을 하게 됩니다. 그것도 쌍둥이를요.


창 38:24-26

여차저차하여 삼개월 뒤 다말의 배는 불러오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유다에게 다말이 간음하여 임신한 사실을 알려주게 됩니다. 유다는 그녀를 불러내 불에 태워 죽이라고 명합니다.

그 때 다말이 만인 앞에서 자신의 임신이 유다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게 되고 유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게 디죠. 자신이 장성한 셀라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말은 그런 행동을 한 것이고,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다말이 옳은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이 유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turning point, 즉 회개의 순간입니다. 회개란 헬라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 즉 ‘생각을 바꾸다’라는 의미입니다. 회개란 감정적인 돌이킴이 아니라 이성적인 돌이킴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길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 잘못을 인식하여 이제 그 길에서 돌이켜 다른 삶을 살기로 결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정직한 성찰입니다.  

이곳에서 유다는 처음으로 다말이라는 여인속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보게 됩니다. 다말은 유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셀라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러이러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요?

다말에게는 정말 그러한 대안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다말 역시 불쌍한 여인입니다. 그녀라고 남편을 둘이나 죽이고 싶었을까요? 그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악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그녀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편 잡아먹은 여자! 그것도 둘이나 잡아먹은 여자라는 딱지를 달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도 다른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그렇게 반응한다면 나는 이렇게 반응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죄짓기 경쟁을 하듯, 누가 더 큰 죄를 지을 수 있나 보자 하듯 말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그토록 대면하기 싫었던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형제들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아버지 때문에, 라헬 때문에, 요셉 때문에 자신들의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며 환경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보고자 한 유다의 방식은 그의 형들의 방식에 비해 조금도 나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단지 감추어져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또다른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다말을 통해 유다에게 무언가를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것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 말합니다.

‘네가 옳다. 네가 나보다 옳다.’

그것은 다말이 잘했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유다는 인생의 낭떠러지 끝에서, 도망가다 도망가다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는 그 지점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돌아왔습니다. 더 이상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똑바로 마주보는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는 인간’으로 그는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