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요셉

창세기 061: 유다의 성공적인 변론(창 44:1-34)

은바리라이프 2009. 9. 12. 20:13

창세기 061: 유다의 성공적인 변론(창 44:1-34)


본문은 애급의 총리 요셉이 친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요구(42:20)를 들어준 형들에게 형제간의 우애를 시험하기 위하여 은잔시험을 실시하는 단락입니다. 그중 1-3절은 시험 준비를 끝낸 요셉이 형제들에게 귀가를 허용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4-9절은 요셉이 청지기를 보내 형제들을 뒤따라 잡은 후 없어진 은잔을 찾겠다고 추궁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10-13절은 베냐민의 자루에서 없어졌다던 은잔이 발견되고, 형제들이 방성대곡하며 요셉의 집으로 끌러오는 장면입니다. 아마 집으로 향하는 요셉 형제들의 2차 귀향은 시므온이 볼모로 잡혀 침울했던 1차 때와는 달리 모든 형제들이 함께 되돌아간다는 사실에 안도의 기쁨이 있었을 것입니다(42:24-25). 그러나 그것도 잠시 베냐민의 자루에서 애급 총리의 은잔이 나옴으로써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14-34절로써 요셉의 마음을 감동시킨 유다의 변론입니다. 학자들은 유다의 이 변론을 구약성서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사라고 극찬합니다. 유다가 행한 변론의 힘은 진실성에서 나왔습니다. 만일 그가 거짓을 말했거나 임기웅변의 방법을 취했더라면, 요셉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다가 행한 변론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16-26절로써 자신이 현재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과정을 상술하는 부분이고, 둘째는 27-34절까지로써 베냐민을 노예로 삼지 말고, 자신을 노예로 삼아 달라고 간청하는 부분입니다. 이 유다의 자기희생적 탄원이 요셉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고, 그로써 형제들은 요셉의 테스트를 모두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유다의 변론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몇 가지 점들을 살펴보고 교훈을 삼고자 합니다.

 

첫째, 진실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를 얻는 길이고, 사랑과 진실에 근거할 때, 말에 진정한 힘이 실릴 수 있으며, 그럴 때만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진실은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진실은 근본이 됩니다.

 

둘째, 진실한 참회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의 변론은 히브리 문학에서 손꼽히는 걸작 중의 하나로, 아우 베냐민을 위한 눈물겨운 호소가 그 핵심이지만 그에 앞서 등장하는 유다의 진실한 참회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요셉은 형들의 진실한 회개와 형제우애를 확인하기 위해서 은잔시험을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형들이 지난날의 과거를 진정으로 뉘우치고 있는지, 그 여부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베냐민의 곡식자루 속에 은잔을 숨기고 그에게 도둑의 누명을 씌웠던 것입니다.

 

인간은 어려운 일에 부딪치게 되면 속내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련은 인간들의 됨됨이를 속속들이 파헤쳐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면에서는 시련이 인간성을 바르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불로 연단한다는 말이 바로 불같은 시험을 통과할 때, 불순물이 걸러진 정금처럼 될 수도 있고, 잘 구워진 도자기처럼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요셉의 형제들은 그간의 시련과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고, 그 대가를 치른다는 뉘우침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자신들의 행위들을 변명하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하게 뉘우치는 자세를 보일 수 있었습니다.

 

 

16절에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라는 유다의 고백이 나오는데, 이 말은 그들이 일찍이 동생 요셉에게 행했던 못된 행실을 기억하고 뉘우칠 뿐 아니라, 당면한 현재의 고난이 바로 그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잘못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을 용서하고 형제우애를 회복하게 한 관계회복의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진실한 참회는 사람의 마음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진실한 참회는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셋째, 애틋한 효성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 야곱에 대한 유다의 애틋한 효성은 감동적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잃어버린 후 노년에 라헬에게서 얻은 막내아들 베냐민만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과, 막내아들을 야곱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면 야곱이 상심하여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베냐민을 애급에 보냈지만, 만일 그가 애급으로부터 무사귀환하지 못하면 연로한 야곱은 그 슬픔으로 틀림없이 생명에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과, 자신 또한 아버지에게 죄인이 되기 때문에 차라리 늙은 아버지를 위해서 베냐민 대신 자신이 그 죗값을 달게 받겠다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형들의 부모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20여 년 동안 타향살이와 노예살이와 옥살이를 하며 고향과 부모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으로 수많은 밤을 지새웠을 요셉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위치에 있어도 누구에게나 부모는 마음의 고향입니다. 부모에 대해 효성을 다하는 유다와 그 형제들의 태도는 정녕 지난 과오를 뉘우친 깨끗한 마음에서 나온 진심어린 것임을 하나님도 알고 요셉도 알고, 마음과 마음이 상통할 수 있고, 흩어졌던 마음들을 통합할 수 있는 그런 어떤 강한 힘이었습니다.  넷째, 희생적인 형제애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유다는 늙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받는 베냐민에 대해 ‘아우’, ‘노년에 얻은 아들 소년’, ‘그’, ‘말째 아우’, ‘아이’ 등 22번의 다양한 호칭으로 부릅니다. 이것은 베냐민이 늙은 아버지와 그 형제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애정의 대상이며, 가족의 강한 연대감으로 절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 결속의 확고함을 30절에서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냐민만을 은잔 도둑의 죄인으로 애급에 남겨 둔다는 것은 형제들, 특히 베냐민의 안전 귀가를 손꼽아 기다리는 가나안에 남겨진 연로한 아버지에게는 살인 행위와 다를 바 없으며, 더 나아가 동생의 안전 귀가를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책임지겠다고 선언한 유다 또한 아버지 앞에 거짓말쟁이요, 죄인이 된다는 것을 유다는 애급의 총리인 요셉에게 간곡히 설명합니다. 이런 유다의 모습에서 이전에 부모의 편애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류의 죄를 대속(代觸)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의 모습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연약한 성도를 위해 기도하며 애쓰는 신실하고 숭고한 신앙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죄악으로 물든 무지한 자들을 위해 순교의 길을 걸었던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 복음의 횃불을 들고 타국에서 일생을 보냈던 선교사들, 우리는 그들에게서 유다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유다의 희생적 사랑은 물질주의와 극단적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점철되어 자기희생과 사랑을 잃어 가는 사회에 특히 어두움에 빛을 비추고 죽음에 생명을 불어넣어야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라 생각되어집니다. 

 

 

진실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진실한 참회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애틋한 효성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희생적인 형제애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유다가 변론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산다는 것, 형제자매와 성도들과 이웃들로부터 마음을 얻고 산다는 것은 즐거움이고, 기쁨입니다. 이런 큰 축복이 우리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