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60: 하나님을 믿고 내린 결단(창 43:1-34)
창세기 42장에서 우리는 요셉의 형들이 시므온을 애급에 볼모로 잡혀 둔 채 양식을 사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온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후 야곱의 가족들은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애급으로가 시므온을 되찾고, 양식도 더 사야한다 라는 요구를 계속했을 것이고, 야곱은 요셉을 잃고 또 베냐민까지 잃게 되는 상황을 참을 수 없어 했을 것입니다. 이로써 집안분위기는 무거워지고 평온하지 못했을 것이며, 시므온 가족의 불안과 슬픔까지 더해져 어떤 식으로든 해결책이 나와야 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이런 일련의 일들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고, 또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서 일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족들이 힘을 모아 해결책을 내어놓는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7년 기근이 이제 겨우 2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야곱의 집안에는 애급에서 가져온 양식마저 다 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1-2절). 이 같은 상황은 야곱의 아들들이 또 다시 애급으로 식량을 구하러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시므온이 볼모로 잡혀 있고, 양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야곱으로서도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회의 때 유다가 설득에 나셨고, 간곡하게 야곱의 결단을 촉구하였습니다(3-10절).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함을 믿고 야곱은 아들들의 애급 행을 허가하였습니다(11-15절). 14절에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불평과 원망으로 분열양상을 띄웠던 집안에 일단 화해와 일치가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심각하게 어려운 문제가 있더라도 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함을 믿고 나가면 하나가 될 수 있고,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더욱 발전하여 갈 수 있습니다(행 9:31). 하나님을 믿고 내린 결단에는 후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야곱의 심경변화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시고 사랑하셨다는 사실(25:23; 말 1:2)에 대해서 당혹감을 느낍니다. 야곱의 초기 성격을 볼 때 그는 전혀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름에서 나타난 것처럼 야곱은 남의 발뒤꿈치를 잡은 자요(25:26), 남을 속이는 자(27:36)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야곱을 택하셨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하나님은 왜 우리와 같은 사람을 택하셨을까요? 라고 묻는 데서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건미달인 우리와 같은 자들을 택하시고, 오래 참으시면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체험을 통해서 압니다. 이것을 이루신 하나님의 열심(사 9:7)을 생각하면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2절을 보면, “그들이 애급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쓰인 ‘조금’이란 말은 야곱의 성품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듯이 보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볼 때, 야곱은 항상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을 원했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 그의 입에서 ‘조금’이라는 말이 나온 것을 보면,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야곱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이것은 6절에서 야곱의 이름이 갑자기 ‘이스라엘’로 바뀐 것에서도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야곱이 변해서 이스라엘이 되었듯이 욕심 많던 사람에서 분수를 아는 사람으로 성숙해진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3장에 나타난 특이한 사실 한 가지는 야곱의 이름이 ‘야곱’으로 나오지 않고 ‘이스라엘’로 나온다는 것이다(6,8,11절). 야곱은 변화되기 이전의 이름이요, 이스라엘은 변화된 이후의 이름입니다. 성경은 이 두개의 이름을 함께 쓰고 있지만, 특히 ‘야곱’은 ‘옛 성품’을 나타낼 때, ‘이스라엘’은 ‘새 성품’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신앙인격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필수 조건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32:27-28), 시몬이 베드로로(요 1:42), 사울이 바울로(행 13:9) 변화된 것 같이 우리 자신도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12절을 보면, “너희 손에 돈을 배나 가지고, 너희 자루 아귀에 도로 넣어 온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의 아들들을 애급으로 보내면서 이전에 가져 왔던 양식 값을 다시 가져가라고 시킨 것입니다. 이것 또한 야곱의 초기 성품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는 에서를 속였고(25:29-33), 아버지를 속였으며(27:18-30), 삼촌 라반을 속였습니다(30:31-43).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착오가 있었을 것을 염려한다는 것은 그에게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인격이 속이는 사람에서 정직한 사람으로 성숙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정직히 행하는 것, 이것은 신앙인의 고귀한 덕목입니다.
13-14절을 보면,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지나치리만큼 집착했던 베냐민을 포기하고, 그의 운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야곱은 자기 방법대로 살던 패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약속과 신실함을 믿고 중대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야곱의 이전 성품을 생각할 때 크게 진전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에는 이런 변화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16-17절은 긴 여행 끝에 다시금 요셉의 집에 다다른 형제들이 청지기의 인도를 받아 집안으로 안내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18-22절은 뜻밖의 환대에 당황한 형제들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지난날 자루 속에 든 돈 사건에 대하여 변명하는 장면입니다.
마지막으로 23-25절은 청지기가 형제들을 안심시키며 식사준비를 하는 장면입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형제들의 불안감은 첫 번째 여행 시의 돈 사건(42:26-28, 35)과 관련하여, 애급 총리가 간사한 계획을 세워 자신들을 재차 함정에 빠뜨려 노예로 삼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그들이 지난날 요셉에게 저지른 범죄를 자각하고,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42:21-22).
26-34절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실로 20여 년 만에 한자리에 다 모인 장면입니다. 그중 26-28절은 형들을 대면한 요셉이 다시금 아비 야곱의 안부를 묻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29-30절은 동생 베냐민을 본 요셉이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급히 안방에 들어가 울고 나오는 장면입니다. 마지막으로 31-34절은 요셉이 형제들을 그 나이순대로 앉힌 후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비록 형제들을 알고 외형상 모든 형제들이 한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다른 형제들은 요셉의 정체를 모를 뿐 아니라,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아직은 만남이 주는 의미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아시고, 또 그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신다 할지라도, 사람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면, ‘구원’이라는 극적인 의미를 갖는 ‘만남’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요셉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형제들이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식사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친절에 대해 긴장을 풀지 않았으며, 다소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였습니다(28절). 이들이 요셉을 자신의 형제로 알아보기에는 너무나도 오랜 세월이 흘렀으며 세상살이의 처세술에 짓눌려 진실에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은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표현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기 원하시며, 그들과 더불어 화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세상의 헛된 수단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 하기 때문에 그분의 진정한 성품을 알 수 없으며, 너무도 오랜 시간을 사단의 음모에 속고 살아왔기 때문에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마음의 문이 닫힌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베풀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님의 능력만을 의지할 때뿐입니다. 후일 재림하셔서 요셉의 경우(45:1)처럼 천국잔치를 배설하고 정체를 드러내실 때, 우리 성도들은 기쁨으로 그분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마 1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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