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064: 애급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창 47:1-31)
창세기 47장은 애급에 이주한 야곱의 가족이 고센 땅에 정착하는 장면입니다. 특히 1-12절이 그렇습니다. 1-4절은 가족을 대표하여 다섯 형제들이 바로를 알현하여 요셉이 일러준 대로 고센 땅에 머물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고, 5-6절은 바로가 그들의 청을 들어주는 장면입니다. 7-10절은 바로를 알현한 야곱이 그에게 축복하는 장면이고, 11-12절은 요셉이 애급에 정착한 가족들을 돌보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비록 야곱의 가족은 7년 대흉년이 끝날 때까지만 애급에 머물기를 원했을는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출애급할 때까지 무려 최소 215년에서 최장 430년을 애급에 머물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족을 이스라엘 민족으로 키우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애급은 이스라엘 민족의 인큐베이터였습니다. 선민들의 삶은 그들만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위로로 진행된 삶이었던 것입니다.
13-26절은 요셉의 탁월한 정책에 힘입어 바로의 재물과 왕권이 더욱 견고해진 것을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서 13-19절은 요셉의 현명한 양곡정책을 설명하고 있고, 20-26절은 요셉이 새로운 토지법과 조세법을 확립하는 장면입니다.
애급에서 보디발의 노예로 시작한 삶이 발전하여 집사장이 되고, 결국엔 온 애급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탁월한 관리자로 현명한 정치를 수행하는 인물로 발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애급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요셉의 치적을 기억하게 하여 히브리인들을 멸시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애급은 종종 하나님의 선민들을 위한 도피처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애급이 축복 받은 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역사는 그 주인공이 선민들이지, 이방인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방인들이 선민들보다 정치경제 또는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다하더라도, 그들은 단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일 뿐이지, 중심세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 믿는 신앙인들이 많이 배우고 잘 먹고 잘사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열등감을 갖거나 주변부의식을 갖고 산다면, 역사관이 바르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은 우리 성도들이지, 결코 그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약소민족이라 할지라도,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은 언제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이지 주변의 강대국들이 아니란 점입니다.
27-31절은 파란만장한 생을 살아온 야곱이 죽음을 앞두고 요셉에게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당부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중 27-28절은 야곱이 애급으로 이주한 이래 17년의 세월을 보냈다는 기록이고, 29-31절은 이생의 삶이 얼마 남지 아니한 야곱이 요셉에게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가나안 땅 조상의 선영에 장사하도록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고센 땅에 정착한 지난 17년 동안 그의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언젠가는 자기 민족이 약속의 땅에 반드시 돌아가게 되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야곱은 그 때가 되면 자신의 뼈를 그곳에 가져가 묻도록 유언하였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확고하게 믿는 신앙인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와 같이 확고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야곱은 이 땅에서의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어떤 회한(悔恨)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요? 바로 앞에서 행한 짤막한 야곱의 고백을 보면 그가 자신의 생애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바로에게 세 가지를 고백했는데, 첫째는 자신의 생애가 조상들의 세월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생애가 나그네의 세월이었다는 것이며, 셋째는 자신의 삶이 험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자신들의 삶을 돌이켜 보면, 우리도 또한 야곱처럼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네 연세가 얼마뇨?”라고 묻는 바로에게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 이삭이 180세에 세상을 떴으니까, 147세를 산 야곱의 연수가 조상들의 연수보다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고백한 내용은 연수를 말하기보다는 신앙의 성숙도를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이 떨어지는 것처럼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과 그 짧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지 못했다는 회한이 담긴 고백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생애가 나그네 길의 세월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인생이 다 나그네의 길이라지만, 특히 유목민들의 삶이 현실적으로 더욱 그랬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은 말 그대로 떠돌이의 삶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3년 6개월도 떠돌이의 삶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성서는 모든 신앙인들의 삶이 가나안 복지, 곧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서 출발한 나그네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더 나은 본향을 찾는 나그네”란 표현을 썼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을 나그네의 길의 세월이었다고 표현한 야곱의 고백은 그를 포함한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거처가 이 땅이 아니요, 이 땅은 우리가 잠시 스쳐지나가는 나그네의 길일뿐이며, 우리의 시민권은 저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고백인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생애를 험악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떠돌이 인생이었고, 육체의 욕구들을 채우려고 앞만 보고 달려갔던 세월이었습니다.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고, 라헬을 얻기 위해서 14년간을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으며, 자기 몫의 재산을 형성하기 위해서,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습니다”(창 31:40).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다면”(창 31:42), 공수래공수거의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고백이 자신의 삶이 험악했었다고 한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바로 앞에 선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권을 가진 족장으로서 바로를 당당하게 축복하였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세상 사람에게 있을는지 몰라도, 영적인 축복권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 보여준 멋있는 장면입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모든 눈물을 우리의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축복의 세계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런 축복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남은 인생길을 주를 경외함과 성령님의 위로로 진행시켜 가도록 합시다.
'성극 > 요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셉의 환난 (0) | 2009.09.12 |
---|---|
요셉의 유년 시절 (0) | 2009.09.12 |
창세기 062: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안 요셉(창 45:1-28) (0) | 2009.09.12 |
창세기 061: 유다의 성공적인 변론(창 44:1-34) (0) | 2009.09.12 |
창세기 060: 하나님을 믿고 내린 결단(창 43:1-34) (0) | 2009.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