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바울의 율법과 의인사상 로마서 3장 19-31

은바리라이프 2009. 9. 4. 19:10

바울의 율법과 의인사상 로마서 3장 19-31

바울의 유대인의 율법 이해에 대한 비판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 이해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유대인은 율법(novmo")을 인간의 행위를 가하는 척도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가장 일차적인 대상이 율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자신들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준수해야 할 하나님의 계명으로 이해되었다. 이 두 가지의 율법 이해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가 채택한 방식은 율법의 형식주의적 재개념화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에 관한 단독성의 보편적 차원을 전제하는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인간의 행위를 교정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더 이상 죄를 가늠하는 척도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이러한 가치척도의 기능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일차적 대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바꾸었다. 하나님은 율법을 매개로 자신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분이시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만 우선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에게 하나님은 공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다:3:29­"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이것을 달리 말하면, 모든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성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부여한 모든 인간의 신성은 단순히 모든 인간이 신성을 공통적으로 부여받은 보편적 특성이 아니다. 이것은 각자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단독성을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에 대한 바울의 새로운 관념은 율법에 대한 형식화를 가능하게 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을 역사적 차원에서 재해석하려 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이 천사에 의해 매개되었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의 정신이 율법의 문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로마서에서 율법은 인간이 실존적인 결단을 할 수 있는 단독자로 이해되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 이해에 근거해서 새롭게 재해석된다. 이 단독자로서의 인간의 모형이 모세가 아니라 아브라함이다:"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믿는 행위가 모범이 되고, 이것으로 공동체 밖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계약을 기준으로 아브라함의 '행위'를 모방하게 된다. 여기서는 '행위'가 율법의 계약정신을 낳지, 율법이 '행위'의 모델이 되지 않는다. 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된다는 의미에서 '율법'이 될 수 있다. 이제 '율법'은 현실의 모세의 율법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율법'은 오히려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절대 타자'인 하나님과 인간과 교통하고, 다른 '타자'와 교통할 수 있는 선험적 형식으로 이해된다. 율법은 이제 자기 자신과 타자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형식이 된다. 결국 율법은 '행위'의 등가형태를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과 공동체 밖의 타자와 교통하는 수단의 기능을 갖게 된 것이다.

바울의 율법 이해에 대한 구조론적 해석: 모세의 율법/율법의 행위/율법/죄

로마서 3장 19-20절에서 바울은 '율법'과 '율법의 행위'를 둘 다 사용하여 율법의 소극적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3:19-20­"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유대인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구체적인 모세의 율법을 말하지만 바울은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려 한다. 여기에서 '율법'은 단순히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관념으로서의 율법을 암시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로마서 3장 23절이다:3: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 구절은 모세의 율법이 없더라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더군다나 이를 보다 명료히 드러내는 부분이 로마서 2장 14-15절이다:2:14-15­"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여기서는 이방인이 '율법의 일'을 행할 때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증거가 되는 자기의 양심에 따라 행하기 때문에 그들도 마음에 새긴 율법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에게 공통으로 제시될 수 있는 관념으로서의 율법은 이미 모세의 율법과 다른 형식으로서의 율법, 즉 한 구조의 단위로서의 /율법/이다.

또한 3장 27절의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에서 '법'은 이미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나 다 적용되는 '원칙'이나 '원리'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행위로냐'는 '행위의 법'을 '행위'로 단순화시켰다고 볼 때, 행위의 법은 한 단위로서의 /율법/의 변형이다. 이와 같이 '율법'과 '행위'는 단위가 될 때 상호 교환적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 4장 2절에서도 '율법' 대신 '행위'가 사용되었다:"만일 아브라함이 행위(e!rgon)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그러므로 율법은 모든 행위를 죄로 규정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우리의 행위가 죄의 가치를 내재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죄의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가 공통 형식으로서의 율법을 매개로 적용되었기 때문에 죄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제 율법은 행위를 평가하는 잣대가 아니라, 화폐가 물품을 상품으로 만드는 것처럼 모든 종류의 행위들을 죄의 행위(죄들)로 만들고, 이번에는 이 죄의 행위는 적용될 수 있는 양이 더 많아진 잉여가치를 포괄한 율법으로 둔갑된다. 이 과정을 달리 보면, 율법을 적용하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각각의 행위는 율법에 의해 평가되지만, 모든 인간의 입장에서는 율법의 가치가 오히려 특정한 행위의 가치에 의해서 평가될 수도 있게 된다. 이러한 율법과 행위의 역전의 가능성 때문에, 마치 화폐 자체가 상품이 될 수 있듯이 /율법/은 /행위/ 자체가 된다. 위의 적용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면서, 마치 잉여가치를 가진 화폐의 축적이 자본이 되듯이, 그 잉여가치를 통해서 율법은 이제 자기 증식을 하는 독립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이 율법은 다시 '자기 차이화하는 형식체계'인 /죄/로서 등장한다(롬 5:12-14, 20-21). 이것이 한 요소로 시작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율법이 그 요소의 무한 집합으로서 이해되는 /율법/과 /죄/로 변형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위의 3장 27절에서 '행위'와 '믿음의 법'이 서로 상반되는 대립항으로 제시된다. 다시말해 '행위'가 지시하는 '무한 집합'으로서의 /율법/의 단위와 '무한 집합'으로서의 /믿음/의 단위가 서로 이항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이 '행위(의 법)'와 '믿음의 법'의 대립적 관계가 의미를 생산하는 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율법/과 /믿음/의 변별적인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법'을 매개로 가능하다. 여기에서 '제로기호'(십진법의 0의 역할)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이 '법'이 어떻게 '믿음'과 접합될 수 있는지 의문이 제시된다. 이것을 보다 분명하게 제시하는 구절이 3장 28절이다:3:28­"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여기서도 '믿음'은 '믿음의 행위'가 축약된 형태로 사용된다.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대조는 /율법/과 /믿음/의 이항대립적 관계의 변형이다. 그래서 단위로서의 /믿음/은 제로기호의 역할을 담당하는 숨겨진 '행위'의 매개로 단위로서의 /율법/과 변별적 차이를 드러내면서 우리의 의로움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 제시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연히 '믿음의 행위'나 '믿음의 법'이 아니라 왜 단순히 '믿음'이 쓰여졌는지 묻게 된다. 우리는 또한 어떻게 이 차이로서의 행위가 '믿음'과 접합되어 '믿음의 행위' 또는 '믿음의 법'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믿음'의 주체가 그리스도인지, 우리인지를 묻게된다.

위와 같은 질문들을 더 강하게 제시하는 것은 로마서 3장 31절이다:3:31­"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여기에서는 /율법/은 /믿음/과 이항대립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족관계로 제시된다. 이 구절을 로마서 3장 27-28절에 대한 위의 해석에 비추어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세의 율법은 폐지되지만, 또 다른 의미의 행위를 내포한 믿음은 형식으로서의 '율법' 자체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의로움의 구조론적 해석:믿음/하나님의 의로움/은혜/윤리

우리는 위의 토론에서 변별적 이항대립항인 /율법/과 /믿음/의 변이, 그리고 이것들과 제로기호로서 '법'과 '행위'가 접합 또는 이접하는 방식과 그 근거에 대해서 검토함으로써 의로움의 의미의 구조론적 해석의 기초작업을 제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아직 설명되지 않은 질문들이 도출되었다. 우리는 이제 위의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바울의 의로움에 관한 직접적인 주장들을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는 믿음이 율법을 폐지할 수 없는 이유를 하나님의 의(dikaiosuvnh)가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질 때 우리에게 새로운 '율법' 또는 믿음의 법, 즉 '윤리'를 요청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이를 토대로 이 단락에서는 믿음과 의로움, 그리고 은혜와 윤리와의 역동적인 관계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로마서 3장 22절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는 번역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반복되어 다소 어색하다. 앞의 명사 '믿음'(pivsti")은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뒤의 '믿는'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3장 25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에서 '믿음'이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나타낼 수 있다:3: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것은 우리가 의롭게 되기 전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처음 나타나는 모양이다(롬 3:21).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은 헬레니즘 문화권의 '숭고한 죽음'의 전통과 신화와 연관된다. 이 전통에 의하면, 왕이나, 장군, 운동선수, 철학자들이 포악자의 손에 그들의 숭고한 정신 때문에 죽게 되지만 죽음 이후에 그들의 운명과 대의(大義)가 신원(伸寃)되거나 보상받게 된다. 예를 들면 마카비 4서에서 순교자는 죽기까지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야훼 하나님께 복종하여 자신의 율법(torah)에 대한 신실함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외국의 압제자들을 물리치고 그의 죽음을 신원하시고 그에게 영원한 삶을 주신다. 그리고 순교자의 신실함의 대의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그 이스라엘 공동체를 새로운 공동체로 형성하시고 이스라엘 땅을 청결하게 한다. 위의 숭고한 죽음의 전통에 비추어보면, 그리스도의 신실함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인간에게 나타나게 되는 종말론적 사건의 원인이 된다. 하나님은 위의 마카비 4서의 순교자의 경우처럼 부활의 영원한 삶으로 예수의 죽음을 보상해 주시고, 이 영생을 함께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신앙공동체(교회)를 형성시킴으로써 그의 대의를 신원하신다. 이제 그의 신실함은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교회 형성의 초석이 된다.

더군다나 3장 26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의롭게 되는 의로움의 나타나심은 예수의 신실함을 통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를 믿는 자는 예수의 신실함에 참여하게 되어 자신이 의롭게 됨을 얻게 된다:3:26­"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때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지 못한 우리를 값없이 의롭게 하시기 때문이다:3: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런데 예수의 신실함이 하나님의 의로움의 나타남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대칭관계가 성립된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결단이 숨어있다. 반면 하나님과 다른 인간들 사이에는 인간이 예수와 같은 행동을 아직 행하지 않았지만 미리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받게 된다. 여기에서는 인간이 의롭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고 인정되기 때문에 비대칭관계가 성립된다. 이번에는, 이 비대칭관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게 직접 행할 수 있는 것이나, 같은 공동체 안에서 대칭관계를 맺고 있는 '동일자'에게 일차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해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행하는 것과 예수의 신실한 행동을 본받아 비대칭관계에 놓인 '타자'에 대해 우선적으로 윤리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실한 행동을 하시는 그리스도나 의롭지 못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타자로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수의 신실함은 하나님과 예수의 대칭관계와 하나님과 인간의 비대칭관계 사이의 차이를 형성하면서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한 인간의 믿음의 결단과 타자 인간에 대한 윤리적 행동을 요청하게 된다. 변별적 단위들이 차이화되는 운동의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제로기호 때문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타자 인간 사이에는 구조론적 관계가 형성된다.

이와 같은 구조론적 관계를 극명하게 나타내 보이는 성경구절이 로마서 1장 17절이다:"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처음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의미하는 제로기호이다. 앞의 '하나님의 의'는 예수의 신실함을 의롭게 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하나님과 예수의 대칭적 관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다음의 '의인'은 하나님이 의롭지 못한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역설을 드러낸다. 그리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과 예수의 대칭적 관계를 형성하는 예수의 신실함을 따르겠다는 약속을 각각 의미한다. 하나님 편의 하나님의 역설적인 의로움과 인간 편의 은혜의 비대칭관계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제 윤리적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을 뜻하는 것이 마지막 부분의 '살리라'이다.

김 덕 기 (대전신학교 교수 / 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