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전승으로서의 바울의 복음
바울의 서신서 안에는 계시로서의 복음과 전승tradition으로서의 복음이 병행되어 있다.계시로서의 복음이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개인적으로 베푸신 계시나 하나님의 감추어진 목적에 대한 바울의 통찰과 해석에 관계되는데 비해,전승으로서의 복음은 눈으로 목격한 이들의 증언에 근거한 역사적 사실들에 관계된다.
달리 표현한다면,계시로서의 복음은 이 땅에서 자기 백성들과 부활의 생명을 함께 나누시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제 사역과 관께되는데 비해,전승으로서의 복ㅇㅁ은-만일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하여 그 일을 하고 계신 분이 한 분이며 동일한 에수이심을 전제한다면-예수의 지상 사역에 관계 된다.
전승으로서의 복음은 바울이 전승을 가리키는 기술적 용어-즉,"유전이란 명사 또는 관련 동사 "물려받다"와 "물려주다"-를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지식이나 교훈의 연결에 관하여 사용하는 본문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바울은 개종하기 전에도 이미 전승이란 개념을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제 개종한 그에게 대두된 것은 "무엇이 올바른 전승인가,이전에 받은 장로들의 유전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전승인가?"라는 문제였다.
바울이 자신은 이전에"조상의 유전"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할 때,그는 그 수장이었던 힐렐 학파 내에 전해져 내려오던 율법 해석을 포함하여 말했을 것이다.그러나 그는 회개한 이래 그 유전들을 그 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고 깨닫은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했다.바울은 바리새인등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된 유일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개종은 ,이방인등에게도 복음이 들어거ㅏㅆ다는 소식을 듣자"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률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15:5)고 반응한 다른 개종한 바리새인들이 겪은 것보다 훨씬 더 철저한 방향 재설정을 내포한 것이다.바울로서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률법"이 그의 말대로 "주께 받은 것"(고전 11:23)으로-즉,모세가 아닌 그리스도로부터 줄기가 벋어 나온 새로운 전승으로-대치되었다.
바울이 이 기독교 전승에 대해 말할 때,그것은 세 가지 주요 요소를 담고 있는데,중요성이 가중되는 순서대로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윤리적이며 관행적인 구례,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특별히 강조하는 기본적인 기독교 메시지.
윤리적이며 관행적인 규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쓴다:"형제들아 굳게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살후2:15).
그가 살후 3:6에서 "규모 없이 행하고 (게으르게 살고0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들에게서 더나라"고 말하는 것으로 판단해 보건대,이 유전들은 성격상 철저히 실천적인 것이었다.이런 관계하에서 볼 때,우리에게 받은 유전"은 바울이 명령하고 또 스스로 본을 보임으로써 전해진 것으로서,"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는 원칙적으로 요약된다.
한편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이렇게 친찬한다:"너희가 모든일에 나를 기억하고 도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고전11:2).아마 이것은 그들이 바울에게 보낸 편지에"저희 들이 매사에 당신을 기억하고 당신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유전을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 대해 바울이 답변한 것인 듯하다.바울은 이에 대해"너희를 칭찬하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칭찬에 바로 이어 그들의 자신 있는 말에도 불구하고 흡족해 할 수 없는 몇 가지 사항을 지적한다.이르테면,그들은 교회의 예배시 머리에 무엇을 쓰고 안 쓰는 문제에 있어서 바울의 교훈이나 다른 교회들의 관행을 모두 어겼다.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주이 만찬시 이기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긍휼이라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덕목에서 떠난 일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주의 만찬에 임한다는 일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바울은 이러한 그들에게"너희를 칭챤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 말한다(고전11:22).
이처럼 실천 교훈들이"유전"(전승)으로 표현되었는바,아마 교훈들은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받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직 자기가 교인들에게 전했다는 의미에서만 전승(유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전승은 반드시 그 근원지가 있기 마련이며,경우에 따라 그것은 바울 자신의 본과 가르침으로 시작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그런 경우에는 그 전승이 바울과 역사적 예수 사이에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뚜렸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그러나 그가 주의 만찬시 고린도 교인들이 보인 비우애적 행위를 책망할 때는 예수님으로부터 유래한 전승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
이 두번째 전승 형태는 역사적 예수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그 대표적인 예가 고전 11:23-25에서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정하신 주의 만찬깃이다.바울은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 기사를 처음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미"주께 받능 것"으로서 그들에게 전항 것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이다.여기서"주께 받은 것"이란 표현을 반드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하지만 그 말은 주께서 이 전승을 제정하신 분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지금 영광의 상태로 계시면서 성령으로 이 전승ㄹ 유지시시고 가납嘉納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본문에서 바울이 상기시키는 기사는,분명히 막14:22-24과 마태복음,누가복음 병행절의 배경이 된 동일한 자료로 거슬러 올라간다..이 기사의 대한 바울의 번역은 그 기록 형식에 있어서도 마가의 번역보다 10년을 앞선다.물런 그러더라도 마가의 번역은 좀더 원상에 가가운 면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러므로 막 4:25에 소개된 예수의 말씀("내가 포고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 하이라.")은 고전11:26에 소개된"오실 때가지"라는 바울 자신의 말로 의역 혹은 요약될 수 있다.한편,바울이 인용하는 예수님의 말씀 중 어떤 면은(이을테면,"이것을 행하여.....나를 기념하랴"는 본문)눅22:17-20의 긴 본문)과 유사한바,이 누가복음의 긴본문은 기존해 오던 독립되고 짧은 본문과 바울이 인용한 것과 관계되는 다른 본문을 합한 것인 듯하다.
각 사본들을 비교 연구해 보면 성찬의 기원에 대해서 몇 가지 흥미로운 결론들을 얻어 낼 수 있겠으나,이것이 지금 여기서 다루어야 할 과제가 아니다.본문에서 바울이 인용하는 말씀은 그가 처음 그리스도인로서 사궘을 가졌던 공동체들 내에서 사용되고 있던 자료였을 것이다.이처럼 그것은"주 예수께서"제자글에게 전한 전승이었다.이 기사(고전11:25)는 다은 절에 소개되는"주의 죽으심을.....전하는 것이니라."는 바울의 부연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교회의 모임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 기사를 상기하면서 덕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마다 항상 반복되었기 때문에 그 기사의 골잔ㄴ 거의 변하지 않은 채 보존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기본적인 기독교 메시지
그리스도 고난 기사 자체는 성찬식 때뿐만 아니라 복음 선포의 한 부분으로도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가닭에 곧 두렸한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기독교 메시지의 근보은 ㄱ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특별히 강조점을 두고 있기때문이다.바울의 말을 빌자면,복음이 선포될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목박히신것"이 밝히 묘사되며(갈3:1),또한 그럴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도 함께 전파된다.(고전15:12).
고전15:3-11을 보면 시자가에 목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가 바울이 다른 사도들과 함께 공유하는 전승에 속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그 본문에서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고린도 교회의 어떤 이들은 훈계하기 위해 자신이 그 도시를 처읍 방문했을 때 그들에게 전했던 복음을 다시 상기시킨다""내가 받은 것을 먼저(즉,가장 중요하게 여겨)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를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을 위하여 죽으시고 잔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보셨느니라."
바울은 이 글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이 있는 후 25년이 채 넘지 않은 A.D.55년경에 고린도 교회에서 보냈다.그러나 5년 전에도 비록 구전으로나마 이 "전승"의 내용을 그들에게 전했던 것이 분명하다.만일 본문에서 바울 개인과 관련된 사항(이르테면,8절의 "맨 나중에...내게도 보이셨느니라.")을 빼 놓고 본다면,남는 것은 그가 고린도 교회에 본문의 내용을 가르치기 수년 전에 다른 사람들로부터"받은"전승의 내용이다.
바울은 물런 개종하기 전에도 예수님의 죽의심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부활하신 주께서 다메섹으로 가던 그에게 직접 나타나 주셔서 진정으로 그분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그가 본문에 소개하고 있는 것과 같은 초기 메시지의 골자는 먼저 믿는 자들이 그에게 전해 줌으로써 그들과 공유하고 있던 것이였으며,더 나아가 그 메시지의 어떤 역사 자료들의 경우에는 바울이 처음 받은 것이었다.학자들은 바울이 다메색이나 안디옥 등,처음 개종할 당시 사귐을 갖던 교회들 중 어느 한 교회에서 그 복음의 골자를 배웠다고 주장해 왔다.하지만 지금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해 말고리를 돌릴 필요는 없다.
바울 자신이 소개하고 있는 그 복음의 골자를 대할 때 그에게 그것을 전해 준 주요 인물들이 누구엿는지 곧 소상히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이 소개하는 복음의 공자는 다음 네 가지로 구분되는데,각각 관계대명사 호티로 시작되어 본동사'전하였으니'의 목적어가 된다.
ⅰ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
ⅱ장사지낸 바 되신 것
ⅲ살아나신 것
ⅳ사람들에게 보이신 것
본문은 바울 자신이 복음 내용을 간결하게 압축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중 네번째 부분은 길게 서술된다.(바로이 부분이 바울이 복음을 요약하여 소개하는 목적과 관계되는 것이 분ㅁ명하다.)
하지만 버울이 실제로 그들을 가르쳤을 때는 한 항목 한 항목을 충분하고도 상세히 설명했음을 의심의 여지가 없다.위의 네 항목 중 대체로 첫번째와 세번째 항목("그리스도께서.....죽으시고 ....살아나사")은 중요도에 있어서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반면,두번째와 네번째 항목은 각각 첫번째와 세번째 항목에 귀속된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그리스도께서....줏으시고....장사지낸 바 되었다가";"다시 살아나사.....보이셨나니").그러나 네번째 항목을 길게 서술하는 바울의 시각에서 볼 때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ⅰ)바울이 소개하는 첫번째 복음의 골자는"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란 내용이다.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이 구절 자체가 전승에 속하는 가,아니면 전승에 대한 바울의 해석도 그 안에 담겨 있는가?란 것이다.이 구절 앞에 나오는 "성경대로"라는 말을 틀림없이 복음서에서 강조하고 잇는 점을 반연하고 있다.즉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최초의 복음서 형태는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마가는 구약 예언의 인용과 함게"복음의 시작"을 알리며,예수께서 잡히시게 된 경위를"이는 성경을 이루려함이니라"고 말한다(14:149).만일 본문이 "성경대로"란 말이 제 4이사야의 고난의 종에 관한 노래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면,우리는종의 생명이 속죄 제물로 드려졌다는 사실과 그분이"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는데(사53:10-12).
그렇다면 본문이"우리 죄를 위하여"란 구절도 역시 전승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니는 대속적 양상이 현저하게 표현되지 않았으나,그것은 바울이 설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바울 자신이"받은"전승에서도 중심에 속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예레미아스와 그외 사람들이 제기한 "과연 이 구절이 셈족 기조를 지니고 잇는가'라는 회의적인 질문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그들이 주장하는 바 "성경대로"라는 헬라어 구절에 해당하는 아람어 동의어가 없다는 말에 대해서,우리는 그러한 사상을 아람어로 표현하는 일이 실제로 불가능했겠는가라는 의문을 얼나든지 데기할 수 잇을 것이다.그리고 어느 경우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바울은 그의 개종자들에게 헬라어로 복음의 글자를 전해 주었다.그리고 그가 그것을 아람어로"전해 받았다"고 하더라도 꼭 문자적 번역에 얽매어 그것을 전해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셈족 기조에 관한 존쟁의 한 면을 본문에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헬라어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는 점에 집중된다.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본문에 그리스도라는 단어 자체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본문과 같은 복음의 골자를 소개하는 문맥에서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사도들이 제일 먼저 선포한 메시지가 ㅇ{수께서 바로 그 메시야이셨다는 것이었음을 생각하게 만든다,만일 어떤 이방인이 "그리스도가 죽었다"고 말했다면(이를테면,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실제로 그러했듯이)그는 단지 사건에 대한 일방적인 진술을 하려는의 도에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그 이방인에게 있어서"그리스도"는 예구의 또 다른 른 이름 이상의 의미를 띠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바울이나 그 보다 먼저 믿은 유대인ㄴ들에게 있어서는,"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라는 말은 사실에 대한 일방적인 진술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그것은 죽으신 그에 대한 평가,즉 그가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야이셨다는 화ㅏㄱ신을 담고 있는 말이다.ㄱ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라는 구절 안에는 다음 세 가지 신학적 전제가 담겨 있는 셈이다.
(a)죽으신 그는 메시야 셨다.
(b)그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죽임을 당하셨다.
(c)그는 죽음은 구약 성경대로 이루어졌다.
(ⅱ)바울이 소개하는 두번째ㅐ 복음의 골자는 그리스도께서"장사 지낸 바 되셨다"는 것이다.그리스도께서 장사되신 일을 복음의 한 항목으로 따로 취급함이 의아할 수도 있겠으나,이 사실은 ㄱ그것이 전승에서 하나의 독립된 골자를 이루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그렇다면 이 구절을 다로 언급한 의미는 무엇인가?
물런 장례는 때때로 죽음의 실제성을 확증하고 그것에 최종적인 종지부를 찍기 위해 죽음에 덧붙여 언급되는 일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베드로가 오순절에 한 다음 언급이 그 한 예이다:"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행2:29).
그러나 본문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었다느 말 앞에 다른 구절과 마찬가지로 대명사 "호티"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다음 절에 언급되는 그분의 부활이 장사라는 절망의 상태를 전적으로 반전시켜 놓은 사건이었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하지만 다음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빈 무덤 자체가 곧 부활의 증거라는 뜻이 아니다)"바울이ㅏ 고전 15장에서 예수의 부활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가 주님의 몸이 무덤에 남아 있다고 믿지 않았음이 분명해진다.그러나 그가 그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가 빈 무덤을 부활의 증거로 여기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그 당시 예수의 시체가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가지고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하지만,만일 그가 살아나지 않으셨다는 충분한 증거가 되었을 것이다.
(ⅲ)바울이 소개하는 세번째 복음의 골자는"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는 내용이다.이 구절 중 어느 정도가 바울의 원래 받은 전승에 속하는가-이 구절 전체인가 아니면 다만 일부인가?
예언에 성취되었다는 언급은 사도들의 십자가 설교뿐 아니라 부활에 관한 설교에서도 항상 붙어 다닌다.그리고 사도들의 설교에서 부활의 시점이 거론될 때 그것은 언제나 제삼일로 언급된다.그러나 우리의 생각에는,사도들의 설교 그 어느 부분에서도 구약의 선지자가 제삼일을 부활의 날로 지적한다는 언급하지 않는다.그렇다면 본문의 "성경대로 사흘 만에"라는 언급은 과연 구약 선지서 본문을 근거로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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