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靈感認識論을 통한 바울의 靈性 考察

은바리라이프 2009. 9. 4. 19:02

靈感認識論을 통한 바울의 靈性 考察

I. 들어가는 말
근자(近者)에 들어 자주 언급되는 개념인 영성(靈性, spirituality)이 무엇을 가리키는가는 분명하게 정의가 되어있지 않다. 또한 신약 성경에는 이 '영성'이란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으며 그래서 영성은 현대적 개념이다. 기독교의 모체인 1세기 유대교의 사상적 골간은 흔히 경건(piety)과 의(義, righteousness)로 요약되는데 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후자는 인간과의 관계를 집약한다. 이는 예수께서 쉐마와 이웃사랑으로 온 계명을 요약한데서 잘 드러나 있듯이 (마 22:34-40, 막 12:28-34) 당시 유대교의 일반적 이해였고, 예수의 가르침을 좇는 기독교에 의해서 이것이 그대로 수용이 되었다. 우리가 현금에 언급하는 영성이란 넓은 의미에서 전자(前者),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하고, 고양하는 경건(敬虔)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 되어진다.

영성을 이렇게 이해할 때, 바울의 영성이란 주제는 이 제한된 지면으로 다루기에 너무 방대한 것이 된다. 따라서 영성의 측면을 현대적 개념에서 고대의 바울에게 적용하는 연역적 방법보다는 바울의 1세기가 표현하는 의미에서의 영성을 찾아내는 귀납적 방법의 일환으로서, 필자는 영성이란 단어가 나오게 된 바탕 개념인 '영(靈)' 또는 '성령(聖靈)'과 관련해서 바울의 생각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의 영성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시작되고, 이어지고, 종결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인간 개인이 그 복음을 이해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진입하는데 있어서의 초기적 인식(認識)과 각성(覺醒)의 단계에 초점을 두고 바울의 영성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영감(靈感)의 수용과 이성(理性)적 판단에 기초한 합리적 자기 사고를 조화시켜 건전한 영성을 보전하는가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II. 聖靈의 力動性
바울을 교리를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차가운 조직신학자로만 보는 것은 현존의 바울 서신으로만, 특히 로마서의 논리적 전개를 염두에 두고 그를 대하는 현대인의 편견이다. 바울은 한번도 스스로를 연구실 책상에 앉아있는 이론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가슴이 뜨거운 목회자였고 현장에서 자신을 불사르는 실천가였다. 점잖아야 할 공적 서신에서 욕과 (갈 3:1) 비아냥 (고전 3:1-2), 흥분 (고후 11:16-22), 저주와 외설(猥褻)을 (갈 5:12) 주저하지 않은 열정의 이념운동가였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영성을 논할 때도 평화롭고 한적한 어느 산 속에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고 있는 수도승의 영성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는 거리와 현장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공동체의 사람이었고, 그의 영성은 복잡한 인간들이 모여서 야기시키는 갈등과 혼돈과 싸움 속에서 형성되는 역동적(力動的)인 움직임이었다. 바울을 사로잡고 바울의 선교 현장에서 그의 사역을 주도했던 성령도 마음에 잔잔한 감동만 불러일으키는 정적(靜的)인 영이 아니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적(動的)인 영이었다.

그가 이방인들, 즉 그레코-로만 세계라는 커다란 문화권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개념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서 하는 '말씀'에 의존하는 전도와는 크게 차별성을 갖는 일이었다. 물론 신약성경이 형성되기 전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구약(舊約)인 히브리 성경 두루마리나 그것의 헬라 번역판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들을 개인적으로 소유하여 전도여행시 갖고 다닌다는 것은 그 부피상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고작 재력이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 비치된 두루마리를 펴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성경에 대한 의존의 전부였을 것이다. 더구나 유대를 잘 모르는 헬라문화권의 사람들에게 히브리 성경을 주해한다는 것 자체도 별반 의미가 없는 일이었고 '예수'라는 유대 이름이나 '그리스도'(메시아)라는 유대적 개념 조차 그들에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바울이 복음을 진리로 제시하여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비일상적인 또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그가 전하는 메시지에 수반(隨班)되어야 했고 이것을 바울은 성령의 능력이라 명했다. 이러한 성령의 능력에 대한 언급은 바울이 자신이 설립한 교회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할 때를 회상하는 구절들에 잘 드러나 있는데 이는 거의 모든 서신들에 나타나고 있다 (롬 15:18, 고전 2:4-5, 갈 3:2-5, 살전 1:5). 이러한 성령의 현상을 바울은 반복하여 '두나미스'(dynamis, power)라는 표현으로 기술하였다. 성령의 그 역동적인 성격은 성령을 불에 비유하여, "성령을 끄지 말라"는 데살로니가 전서 5:19의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III. 바울의 靈感認識論 - 고린도 전서 2:6-16
바울이 복음의 수용 과정에서 발생한 성령의 '두나미스'를 회상하는 것은 성령이 인간으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내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하는 계시의 매개가 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인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인간 구원의 길"이라는 내용이 일반인들에게는 수용하기 힘들고 잘 깨달아지지 않는 메시지였다 (고전 1:23). 그런데 이러한 복음이 개인에게 진리로 인식되는 과정의 중심에 성령의 역할이 놓여있고 이러한 영감인식론(靈感認識論)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고린도 전서 2:6-16이다. 복음 수용, 즉 진리 인식의 성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구절에 대해 다소의 기술적(技術的)인 주해(註解) 작업이 필요하다.

靈感認識論 提起의 背景
고린도 전서의 도입부를 벗어나면서 바로 바울은 1:10-17에서 교회의 분열 문제를 직접적으로 끄집어 낸다. 우리의 본문인 2:6-16을 바로 뒤잇는 3:1-9에서도 바울은 분열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운데 놓여 있는 1:18-2:16은 문제의 원인을 설명하고 목적한 권고를 위한 신학적 근거를 구축하는 큰 삽입단락(parenthesis)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삽입단락의 주제는 1:17에 응축(凝縮)되어 있는데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포와 '지혜의 말' 사이의 대립 관계를 설정, 그 대조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대조 내용은 1:18-25에서 구체적으로 상술된다. 그래서 뒤이어지는 1:26-31과 2:1-5는 그러한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두 예증(例證)으로 정의해도 무리가 없다. 지혜의 개념과 십자가의 복음 사이의 대조는 2:4-5에서 그 절정에 도달한다. "내 말과 재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로 이 절정의 시점에서 바울은 극적으로 문학적 Aufhebung, 즉 대립되던 '정(正)'과 '반(反)'을 용해시켜 역접사(逆接詞) de를 사용하면서 '합(合)'을 창조해 낸다. 이제 바울은 여태까지 공격을 가해 오던 '지혜(소피아)'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며 논의를 이끌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문학적 Aufhebung이 개념상의 합성물(合成物)을 생산해 내지는 않았다. 바울이 '소피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단어가 그레코-로만 세계에서 함축하고 있던 의미와 가치관을 그대로 담아온 것은 아니었다. 바울의 손에 넘어온 '소피아'의 실질적 내용물은 바울이 이제까지 주창해 온 '십자가의 메시지'이며 이전까지 진행되던 개념상의 대립은 문학적-수사학적 Aufhebung에도 불구하고 2:6-16에서 뚜렷하게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역동적인 전개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만 의존한다 했던 (2:4-5) '케리그마'를 일단 '소피아' 담론(談論)에 끌어넣는 바울을 발견하게 된다. '소피아'는 '지식'및 '이해'와 연관된 개념이기 때문에, 하마터면 영원히 숨겨질 수밖에 없었던 바울의 영감 인식론이 그의 구원론의 논쟁 가운데서 본문의 표면에 부상하게 된 것이다.

無知의 問題
본문에는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의 구분선이 명확하게 그려져 있다. 이 시대의 관원이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기 때문에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2:8). 하나님의 지혜는 숨겨진 미스터리가 되며 (2:7), 멸망해가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 무엇인지 까맣게 모르고 있다 (2:9). 인간의 오감(五感)이나 (눈과 귀) 지성으로는 (마음) 도무지 그것을 알 수가 없다. '육에 속한 사람(푸쉬키코스 안쓰로포스)'은 하나님의 영의 일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2:14). 사실상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일을 알 수가 없다 한다 (2:11b). 도대체 누가 주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2:16)

이처럼 강한 바울의 회의론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소피스트 고기아스(Gorgias) 류의 지독한 불가지론과는 다르다. 바울의 전제에는 인간의 영이 인간의 일을 알 수 있다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다 (2:11a). 인간은 지력(知力)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인간의 영은 그러한 지성의 주체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며,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것이나 하나님께 귀속되어 있는 것들을 아는 지혜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의 무지는 본질상 인간됨과 신성(神性)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distance)'의 문제이다. 인간 무지는 하나님의 '미스터리'에 접근할 수 없음에 그 이유가 있으며 (2:7),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모르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2:11). 여기서 바울은 본 단락 이전의 글에서 그릇된 인간의 지혜에 대해 가했던 비판을 신학적 명제의 형태로 재론하고 있는 셈이다.

가장 지혜로운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가 없는데, 그것은 바로 신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이다 (1:21, 25). 역설적인 표현을 빌자면, '인간 지혜의 무지'가 너무 깊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메시지가 인간적 지혜를 사용하는 인간에게는 오히려 천치(天痴, 모리아) 같이, 또는 스캔들(스칸달론)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1:22-23). 그들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과 관련해서 실제적으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다. 알고보면 인간 지혜를 구사하는 자들은 자신이 자신에게 속고 있는 자들이다 (3:18). 이러한 혼동의 상황에서 바울은 판별력의 역전(逆戰)을 천명(闡明)한다. 저들은 자신들의 지혜의 기준으로 십자가의 메시지를 천치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2:6-16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자신들의 지혜에 갇힌 천치들이라고 생각하신다.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1:27).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데 인간의 지혜는 아무 쓸짝이 없다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처음 와서 그들과 복음으로 만났을 때 '인간의 지혜'보다는 '인간의 무지'를 택했다고 주장한다 - 그는 오히려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했었다 (2:2).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는 총체적 무지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아는 사람들
바울의 회의적(懷疑的) 인식론은 2:10a에서 정지된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주도적 개입에 의해 인간 무지의 상태가 유보(留保)된다고 할 수 있다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우리에게" 저들이 모르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도록 해 주셨다. '저들'의 무지와 '우리'의 앎이 현저하게 대조되고 있다. 반복되어 등장하는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고 (2: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있어서 (2:10) '알고' 있으며 (2:12), 아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2:13) 그리스도의 마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2:16). 보통 사람들과 구분되어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라는 범주로 분류된 일군(一群)의 사람들이란 말이다.

여기서 바울이 구분한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정의를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 6절에 있는 "온전한 자들"은 (teleioi) 바울이 아는 자들로 구분한 '우리'라기 보다는 3절의 "어린 아이들"에 대비되는 통칭의 지적, 도덕적 성숙함을 갖춘 막연한 대상으로서 수사학적 의미의 불특정 대화 상대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바울이 '텔레이오이'나 그 파생어들을 사용한 나머지 네 곳에서도 모두 이와 유사한 용례(用例)를 보이고 있다 (롬 12:2, 고전 13:10; 14:20, 빌 3:15). 바울이 '텔레이오이'라는 표현으로 대화 상대자를 끌어 들이며 발언한 6절의 뜻은 이렇게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정 고집한다면, '지혜'에 대해 한번 얘기를 해 봅시다. 그러나 이 말이 가져올지 모르는 오해에 대해서는 주의를 할 필요가 있지요. 우리 가운데 이미 이 점에 대해 오해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 모두 성숙한 사고자가 되어 한번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합시다."

'아는 사람들'로서의 '우리'는 2:15의 '프뉴마티코이'(신령한 자)로 정의된다. 이들은 성령을 소유한 자들로서 '푸쉬키코이 안쓰로포이'(육에 속한 자)와 (2:14) 구분이 되며 후자는 하나님의 영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반인들이다. 그러나 이 '프뉴마티코이'가 신앙 공동체 내에서 특별히 구분된 일부 특수 집단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프뉴마티코이'가 이 단락에서 '푸쉬키코이 안쓰로포이'와 대조가 되면서 정의가 되듯이 1:18-2:16에서는 이분법적 인간 구분이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의 맥락에서 볼 때 1:18의 "구원을 얻은 우리"는 '프뉴마티코이'와, "멸망하는 자들"은 '프쉬키코이 안쓰로포이'와 동일한 집단임이 확인된다. 바울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할 때도 이 용어를 사용했고 (갈 6:1), 그의 편지들 여러 곳에서 믿는 자들을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다 (롬 8:9, 14-16, 갈 3:2; 4:6, 빌 3:4, 살전 1:6; 5:19). 고린도 전서 3:1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풍자(sarcasm)에 의해 그 의미는 더 명확해 진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르키코이'(육신에 속한 자)나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프뉴마티코이'이지만 그렇게 대우하지 못하겠다고 비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당연시 하면서도 (3:16) 그에 부합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개탄하는 것이 3:1의 표현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일들을 알 수 있는 자들은 바로 '프뉴마티코이'이고 그래서 진리를 아는 일은 필연적으로 성령과 관련을 갖는다.


靈感認識論 構成
무지(無知)에서 인식(認識)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하나님의 영이 개입되어 있다. 바울의 경험과 사상이 계시에 의존하고 있음은 다른 여러 곳에서 보여지고 있지만 (롬 1:17-18; 8:18; 16:25, 고전 2:10, 고후 12:1f, 갈 1:12, 16; 2:2; 3:23, 빌 3:15), 하나님의 계시의 매개로서 성령의 역할이 언급된 곳은 고린도 전서 2:10 이하에서 뿐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 즉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신 일들을 (2:9)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이셨다 했다 (2:10). 성령은 모든 것을 꿰뚫어 찾아낼 수 있고, 하나님의 깊숙한 곳까지 알아낸다. 로마서 8:26에서는 하나님께서 '에루나오'(찾다)의 활동을 하시는 것으로 언급이 된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의식의 표면에서 모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의 마음 속을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접촉하여 우리의 마음을 알아 내신다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반면에 고린도 전서 2:10에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깊은 마음 속을 찾으실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우리'가 '프뉴마티코이'이고 그 성령 때문에 성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내적 인식의 과정이다. 이른바 영감인식론(pneumatic epistemology)이라고 명명(命名)할 수 있는 개념이다.

바울의 영감인식론은 '영감받은 수사학'과 '진리의 분변력(分辨力)'으로 확장된다. 우리 안에 있으면서 이러한 내적 관계를 형성하는 성령으로 인해서 깨달음의 인식뿐 아니라, 인식한 것을 전달하는 언어작용까지도 성령의 가르침을 통할 수 있게 된다 (2:13). 그래서 앞에서 바울이 선포한 것으로 언급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바로 성령이 가르쳐 준 언어의 표현임을 (성령의 가르치신 말씀) 암시하고 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성령이 가르쳐 준 언어적 표현인 복음의 메시지가 어리석은 것으로 (1:23) 보이고 인식이 되지 않는데,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만 분변(分辨)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2:14b). 여기까지 온 바울은 더욱 대담한 발언으로 이행한다. 성령을 가진 자, 즉 '프뉴마티코이'는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단언을 한다 (2:15a). 성령을 소유한 '우리'는 종국적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며 (2:16b) 그래서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는 올바른 진리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여기에는 바울이 지도자로서의 위치에 대해 도전을 받고 있는 고린도의 상황에서 그 자신의 진리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자기 변호의 논리가 담겨져 있다. 바울이 자신의 진리 주장을 성령의 소유와 연계시키는 전략은 7장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바울은 혼인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놓고 이렇게 말을 맺는다. "나 또한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영감인식론은 1) 근본적으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의 메시지를 깨닫게 되는 '마음의 인지적(認知的) 변형'에서 2) 내재한 성령이 성령을 소유한 자의 언어 표현을 주장하는 '수사학적 영감(靈感)'을 거쳐 3)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진리 주창(主唱)의 자격'으로까지 발전한다.

IV. 靈感認識論과 그레코-로만 修辭學
바울의 영감인식론은 고린도 교회의 '소피아' 개념과 대립하면서 표면화된 이론이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18-31에서 집요하게 모종의 '지혜'를 비판하였으며, 그 지혜의 방법의 대립 개념으로서 (antithesis) 성령의 능력을 설정하고 (2:1-5), 종국에는 우리의 본문에서 (2:6-16)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여 제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부각시키면서 성령과 지혜의 통합을 (synthesis) 구성해 내었다. 바울이 부정적 입장을 견지한 이 '소피아'라는 용어는 고린도 전서에서 인간이 진리의 이해에 도달하는데 있어서 사용된 인간적 방법 또는 수단을 지칭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 인간과 관계된 지혜라 하는 것은 복음 메시지의 이해와 수용에 이르게 할 능력이 없는 인간 사고의 과정을 가리킨다 (1:21; 2:6). 그래서 결국 이 지혜는 그 반의어(反意語)인 '모리아'(어리석음)로 불리워 져서 (1:20; 3:19) 진리 인식을 위해서는 실패한 방법이요 수단으로 전락된다. 여기서 바울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과정 자체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영성(靈性)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고린도 소피아의 背景
여기서 바울이 반대하는 것은 '이성적 사고의 과정'으로서의 지혜 그 자체가 아니라 모종의 수사학적 언변(言辯)과 연계가 되어 있는 '소피아'였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자신이 사명을 입은 복음의 선포가 "말의 지혜"에 의존한 것이 아님을 굳이 강조하고 있다 (1:17). 1:20의 수사학적 반어법에서도 "이 세대에 변사(辯士)가 어디 있느뇨?"라는 질문을 통해 고린도의 '지혜' 상황이 말과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지혜가 모종의 언어 표현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는 곳은 2:1-5이다. 2:1에서 그의 선포가 저들의 지혜와 대조되는 위치에 있는데,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는 언급은 고린도에서의 지혜의 개념이 언변의 탁월함과 연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2:14에서 가리키는 '바울의 말'은 케리그마인데 케리그마는 '설득하려는 지혜의 말'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바울이 자신의 케리그마를 지혜의 말에 의존하지 않는 것은 듣는 자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2:6-16의 영감 인식론은 '소피아'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고린도의 수사학적 상황에 반대하면서 구성된 개념임이 명료해진다.

지혜와 수사학의 관계에는 성격상의 친밀함이 있다. 어떤 현상이나 주제를 이해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언변을 구사하지 못하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분명한 이해' 없이 청중의 설득을 목적으로 어떤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한다는 것은 거의 가능치가 않은 일이다. "참된 능변은 소피아를 요구하며 반대로 표현해서 지혜롭지 않은 말은 능변일 수가 없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와 참된 지식을 얻는 방법으로서 수사학을 불신했지만, 그레코-로만 세계의 중요한 수사학 이론가들은 대부분 지혜를 수사학적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을 시켰다. 이소크라테스는 말의 기술이 바로 이해력을 훈련하는 길이며 지혜를 습득하는 수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수사학과 철학의 구분 자체를 엄격하게 하지 않았다. 나중에 키케로는 철학과 수사학이 서로 소원하게 되는 것을 개탄하면서 지혜와 웅변의 이상적 결합을 강하게 호소했다. 이성과 능변은 함께 인류를 "야만인으로부터 친절하고 고아한 종족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인간 기능이라고 했다. 유사하게 퀸틸리안도 수사학의 이상적 목표는 철학과의 연합이라고 생각했다. 고대의 고린도 시는 지혜로 인식되는 수사학적 전통이 강세를 보이는 헬라 도시들 중의 하나였음을 감안할 때, 바울이 갈등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고린도의 지혜는 수사학의 문제였음을 확실하게 한다. 여기에다가 고린도 공동체의 분열의 한 축으로 언급되는 아볼로를 사도행전에서는 수사학적 전통이 강한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행 18:24).

그렇다면 바울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을 정죄하면서 수사학을 평가절하(平價切下)하는 자세로 복음과 능변을 절대 대립의 관계에서 보고 있는 것일까? 바울 자신이 그의 복음 선포에서 수사학적 노력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고전 1:17, 2:1-5) 스스로를 "말에 졸"하다 했으나 (고후 11:6) 그러한 발언들이 그의 서신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에 꼭 부합하는 것만은 아니다. 바울이 지혜를 부인하고 이론을 파한다고 하지만, 그 자신이 매우 영교(靈巧)한 방식으로 주장과 이론을 전개하고 있으며, 우리가 읽고 있는 그의 편지들 자체가 다름아닌 '지혜 안에서의 이성적 논쟁'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수사학에 대한 강한 부정이 담겨 있는 고린도 전서 1-2장만 보아도, "대조법 (1:17), 수구반복(首句反復)과 곡언법(曲言法) (1:26), 역용논법(逆用論法) (1:26-28), 누적법(累積法) (2:1-5) 등의 사고와 담화의 수사(修辭)로 흩뿌려져 있다." 비록 바울의 서신들을 특정의 수사학적 교범서의 규격에 짜 맞추어 넣으려는 시도들은 상당히 주관적인 경향이 있지만, 그러한 시도들을 이끌어내는 수사학적 요소들이 그의 편지들 내에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귄터 보른캄도 바울이 지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언급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편지를 통해 강력한 합리적 논쟁을 구사하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분명히 바울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에 호소를 하며 그 자신 부인할 수 없는 수사학적 테크닉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여러 곳에서 그의 공동체들에게 진리와 실천의 문제에 있어 사려깊게 합리적 사고를 할 것을 요구한다.

피스티스와 聖靈과 두나미스
만일 바울이 수사학적 관행이나 이성적 사고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의 수사학적 지혜가 기초하고 있는 모종의 전제(前提)에 대해 문제를 삼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수사학은 능변의 문제이고 앎은 인식의 문제로서 서로 다른 영역인데, 바울이 고린도 전서 1-2장에서나 고린도 후서 10-11장에서 굳이 고린도의 수사학적 지혜에 도전할 때마다 '인식론'을 그 대립의 위치에 배치하는 점은 (고전 2:1-5, 고후 10:5; 11:6) 바울의 복음과 고린도의 수사학적 관행과의 갈등이 양자가 기초하고 있는 '인식론적 전제들' 사이의 긴장관계, 양자의 바탕에 깔려있는 영성의 갈등관계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번역된 헬라 단어 '피스티스'가 바울의 영감 인식론과 그레코-로만 수사학, 양자 모두에 있어 중요한 개념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린도 전서 2:6-16에서 논한 '앎'의 문제는 결국 2:5에서 말하는 '피스티스'의 문제이고 바울이 말하는 종류의 지식은 결국 '피스티스'이다. 그는 빌 3:8-9에서도 '피스티스'를 "예수를 아는 지식"이라 표현했다. 고린도 후서 10:5와 11:6에서 수사학적 관행과의 대립으로 언급된 '지식'이 함축하고 있는 것도 결국 '피스티스'이다 (고후 10:15). 그런데, 그레코-로만 수사학의 근본적 목적은 청중의 마음에 '피스티스'를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사학은 '본질적으로' 설득의 예술"이라 할 수 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소피스트들의 수사학을 싫어했지만 철학적 진리를 전달하는 기능으로서의 수사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두 철학자 모두 인식론적 측면에서 수사학은 철학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수사학은 오직 개연성(蓋然性)만을 달성할 수 있지 진리의 확실성에는 도달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수사학의 목적은 인간의 영혼 안에 믿음을 발생시키는 것이라 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피스티스'는 의견이나 개연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인식론 상 열등한 위치에 놓인 단계의 지식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플라톤 류의 절대적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소피스트들에게 있어서는 애초부터 '피스티스'가 그러한 부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비록 당대의 소피스트들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참된 수사학을 제시하려 했던 이소크라테스(Isocrates)도 인간이 존재의 절대적 본질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이 설득 가능한 지식을 존중하면서 '피스티스'를 건전한 지식의 위치로 올려놓았다. 그에게 있어서 수사학은 그저 말을 그럴듯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이었다. 이소크라테스의 수사학파의 영향때문이었는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비해 과학에 절대적 확실성의 진리를 적용하려는 이상주의를 완화하여 '피스티스'의 범위에서 작용하는 과학과 예술의 영역들을 허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피스티스'는 "설득," "증명," "믿음"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 '피스티스'는 설득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설득의 과정이기도 하다. '피스티스'는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기술"일뿐 아니라 그로 인해 "결과된 마음의 확신 상태"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고 후대에 의해 받아들여졌던 수사학의 이론적 틀은 바울의 지식으로서의 '피스티스' 개념과 이를 성령의 능력에 돌리는 점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주로 설득의 수단인 '피스티스'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이 '피스티스'들이 바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에토스, 파토스 그리고 로고스이다. 변사는 이 세가지 '피스티스'를 잘 구사하면 듣는 사람에게서 '피스티스'가 발생하게 되며 그때 그의 연설은 성공한 것이 된다. 우리가 '피스티스'를 "증명(proof)" 또는 "논쟁(argument)"으로 번역하는 고전적 관행을 접어둔다면, 에토스, 파토스 또는 로고스의 형태로 전달자 안에 내재해 있던 '피스티스'가 언어행위를 통해 듣는 사람의 마음 속의 '피스티스'로 전이되는 것이 수사학적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청중에게 믿음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두나미스'로 (재능, 능력) 정의를 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수사학은 "일종의 논증법의 한 부분 또는 그와 유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어느 특정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단지 논쟁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두나미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사학은 가능한 설득의 수단들을 발견하는 '두나미스'로 정의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리고 그의 체계를 거의 변동 없이 전승받은 1세기 그레코-로만 이론가들에게 있어서, 수사학은 청중이 특정 주제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피스티스'들을 잘 조직할 수 있는 '두나미스'이다. 반면에 바울은 '두나미스'를 하나님과 성령에게로 돌리고 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두나미스)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두나미스)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4-5). 바울에게는 '피스티스'가 수사학적 '두나미스'나 "말의 지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두나미스' 안에 놓여 있으며, 그 '피스티스'는 신자들 마음 속에 있는 믿음(피스티스)으로 전이된다. 이렇게 해서 고린도 상황의 '말의 지혜'에 대한 바울의 저항은 수사학적 기교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고린도에 영향을 미친 그레코 로만 수사학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인식론적 전제에 대한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바울은 '피스티스'의 발생을 인간 변사의 '두나미스'에 두는 것을 거부하며 성령의 '두나미스'에 둠으로써, 인간의 진리 인식을 근본적으로 영성(靈性)의 문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는 성령의 '두나미스'가 인간의 영 속에 발생시키는 '피스티스'이지, 인간의 '두나미스'에 기초한 인간적 동의(同議)로서의 '피스티스'가 아니라는 말이다.

V. 맺는 말과 適用
그렇다면 바울의 영감인식론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나 언어적 노력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합리적 사고와 언어적 노력을 구사하되, 긍국적으로 올바른 영적 진리를 분별하는 최종적 힘을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교감에서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 교회가 취해야 할 진리의 '영성(靈性)'이 '이성(理性)'에 입각한 깊은 사고와 '성령'의 영감에 의존하는 신비추구의 지혜로운 조화를 필요로 함을 배운다. 인간의 이성에만 의존하여 인본주의의 오만으로 흐르는 경향은 필연적으로 '천치됨'(天痴, 모리아)을 면할 길이 없다. 반면에 상식적 합리성에 기초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고포기(思考抛棄)'의 열광주의에서만 발견하는 경향은 공동체의 파괴와 건전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왜곡을 가져온다. '연구'와 '기도'는 올바른 영성(靈性)의 양 수레바퀴와 같다.

또한 여기서는 지면의 한계로 인해 더 깊이 다룰수 없었지만, '피스티스', 즉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이방 선교의 현장에서 인식과 동의를 요청하는 수사학적 '피스티스'와 유대적 의미의 '신실함'을 통합한 개념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행위의 열매를 수반하지 않는 믿음은 결국 야고보의 지적대로 죽은 믿음으로 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회심의 순간에 작용하는 믿음은 수사학적 의미의 '피스티스'가 지배적이나, 삶 속에서의 믿음은 유대적 의미의 '신실함'이 지배적이다. 바울이 로마서 1:17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으로 복음의 성격을 규정했듯이, 올바른 영성의 전개 과정은 받아 들이는 믿음에서 변화되고 실천하여 열매를 맺는 충성과 헌신의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덧붙이는 말 (결론과 적용의 첨가)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의 양자 비판에도 그의 균형 감각이 드러나 있다.

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바울에게서 유래된 프뉴매틱(성령주의자들)과 아볼로에게서 유래된 소피아(수사학적 이성주의자들)로 단순화될 수 있다. 바울의 목회상 관심은 분열과 혼동 속에서 어지러워진 고린도 교회를 자신의 사도적 권위 아래 통일시키려는 것이다. 1-4장은 후자에 대한 견책, 12-14장은 전자에 대한 통제로 보아도 무방하다.

나) 1-4장에서는 소피아로 인한 분열을 "성령"의 능력으로 견제한다. 여기서는 끈질기게 수사학적 지혜를 물고 늘어진다 (1:17, 19, 20, 27; 2:4).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인본주의에 입각한 이성주의는 진리에도 영성에도 도달치 못함을 천명하고, 4:18-19에서는 그 "교만"한 자들에 대해 경고한다.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로고스)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인간의 언어적 사고작용(로고스)에 의존하는 이성주의에 분명한 일침을 가하고, 진리에 도달하는 지성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교감에 의한 영성의 문제임을 확실하게 한다.

다) 반면에 12-14장에서는 바울 자신 쪽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통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분위기를 보인다. 이들이 강조하는 "신령한 것"(프뉴마티콘)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 가면서 (12:1-3) 2:6-16에서 언급했던 것, 즉 '성령으로만 인식되어지는 예수의 주되심'을 다시 상기시킨다 (12:3).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분열에 이들도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아는 바울은, 그들이 주장하는 성령이 여럿이 아닌 한 성령임을 강조하여 (12:13) 사랑을 호소한다. 그래서 제일 큰 은사로서 13장의 사랑을 얘기하고, 14:1에서 그들이 구하는 신령한 것들을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14:1) 명한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명령이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열광주의에 의해 혼란을 일으키는 이들에게 "질서"를 요구하고, 엑스타시의 방언보다는 사고를 수반하는 "예언"에 무게를 두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14:6-9에서는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와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것이라" 권면함으로써, 지성과 판단에 입각한 의사소통의 작용을 강조한다. 14:14에서 방언이 마음에 열매를 맺지 못하기에 15절에서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겠다고 말한다. 20절에는 1-4장에서 그렇게 공격했던 지혜의 개념을 다시 끄집어 내어 이르기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성령-열광주의자들을 오히려 지혜의 개념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9절에는 "분변하라," 즉 생각을 바로하라는 권고를 하고 결국 40절에서 "모든 것을 적당히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권고로 14장을 마감한다.

라) 1-4장이나, 12-14장이나 영성은 "성숙"과 "사랑"의 윤리적 귀결로 이어지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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