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바울

바울과 예수/역사적 예수

은바리라이프 2009. 9. 4. 19:06

역사적 예수

바울은 글로써'역사적 예수'에 대해 다룬 최초의 저자이다.물런 그가 복음서 기자들만큼이나 역사적 예수에 관해 상세히 말하는 것은 아니다.다만 예수의 세상에 오심과 죽으심을 중심으로 한 사실들을 집중적으로 다룰 뿐이다.역사적 예수에 관해 바울이 언급하는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예수는 이스라엘인으로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탄생하셨고(갈3:16;롬1:3),유대인의 율법아래 사셨고(갈4:4),제자의 손에 배반당하셨으며,배반 당하시던 날 밤에 성차능ㄹ 제정하셨고(고전11:23이하),유대 지도자들의 모략으로 로마의 십자가 형벌을 받고 죽으셨으며(살전2:15;고전1:23;갈3:1,13;6:14등),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여러 곳에서 많은 증인들에게 보이시되,그중 한 경우에는 오백여 형제들에게 단번에 보이셨던바,그중 대다수가 25년 이후인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까지도 살아ㅏ있었다.(고전15:4이하),바울리 고전 15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제성을 보여 주는 증거를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보아 그는 자칫하면 신빙성 없는 주장으로 여겨질 수 있는 부활의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증인들의 목록을 일괄적으로 정리해 놓을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주의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에 관해 잘 알고 있어서,그중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라고 언급하며(갈2:9),주의 형제 야고보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응 사용한다.(갈1:19;2:9).그는 주의 형제들과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이 결혼했다고 알고 있는데(고전9:5)ㅇ리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셨다는 복음서 기사와 일치한다.(막1:30).

그는 때때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이르테면,혼인과 이혼에 관한 가르침이나(고전7:10이하)복음 전하는 자들이 필요한 물질을 공급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씀과(고전9:14)성찬 제정시 하신 말씀들(고전11:24)을 인용하는 부분들이 그 예이다.

바울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를 인용하지 않는 본문에서도,우리는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친숙히 깨닫고 있는가를 넉넉히 보게 된다.특히 믿는 자들의 삶을 위한 목음의 구체적 의미를 요약해서 가르치는 롬12:1-15:7을 산상 보훈과 비교해모면,그가 자기 주인의 가르침에 얼마나 철처히 젖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로마서 이외에도 바울이 다른 서신들에서 가르치는 윤리적 교훈의 요지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그리고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성격은 복음서에 묘사된 그분의 성격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바울이"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말하는 바로 그분의 모습이다(롬15:3).그리고 복음서에서 그리스도께서"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막8:34)고 가르치신 것과 동일한 기조에 서섯,사도도"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드의 당위로 가르친다(롬15:1)."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고 말씀하시며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분을 가르켜,바울은"종의 형제"를 지니셨던 분이라고 표현한다(빌2:7)

간단히 말해서,우리가 바울의 글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복음기사의 윤곽은 신약성경 다른 부분에서 보게 되는 윤곽과 일치하되 특히 네 복음서와 전격으로 일치한다. 바울 자신도 자기가 전한 복음이 다른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근본적으로 하나요 동일한 것임을 여러 모로 애서 지적하는자(고전15:11),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그가 예수님이나 원 사도들과 사귐을 가진 적이 없으며 게다가 자신의 사도성이 다른 사도들로부터 전격적으로 독립된 것임을 역설하는 사실들을 고려한다몀,이같은 지적은 매우 돋보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바울의 글은 큰 맥락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만,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서신들에서 복음서의 세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이르테면,예수께서 평소에 비유로 가르치신 방법이나 병자을 고치신 일,메시야로서의 여러"표적"을 보이신 일 등은 바울 서신들에 소개 되어 있지 않다.또한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와 시험,갈릴리에서 사역,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있었던 제자들의 고백과 그후 한 주일 뒤의 변화산 사건등도 역시 나타나지 않는다.그리고,예구께서 십자가에 목박히셨음은 바울의 글에 분명히 그리고 여러 번 되풀이하여 언급되어있지만,바로 그 십자가 사건을 재촉한 경과들은 설명되어 있지 않다.

역사 진행으로 인한 관점의 변화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시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셨다(막1:14이하).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하심이라."고 기록한다(갈4:4이하0이 두 선언이 가리키는 실재는 동일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관점성의 변화가 담겨 있다.즉 선포자로 서서 말씀하던예수께서 선포되는 분으로 변한 것이다.싲자가의 고난과 부활이 그 사이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의 메시지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 믿음의 형식뿐만 아니라,부버의 말대로 구 가지 믿음의 시기를 구별해야 한다.

만일 예수께서 구약의 예언과 묵시의 메아리가 담긴 갈릴리 설교 형식으로써 고린도에 사는 이방인들을 가르치셨다면,그둘 아무도 그 설교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마찬가지로,바울이 고린도에서 설교하던 형식을 그대로 사용하여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 사람들에게 설교했다면,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엇을 것이다.이처럼,바울과 예수님의 설교 사이에는 시간의 흐림에 의한 형식의 차이가 있다.하지만 설교의 본질에는 그러한 차이가 없다.

시바이쩌는 이렇게 말했다."바울은 종말론적 세계관과 종말론적 기대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된 모든 내용을 예수님과 함께 공유한다.예수님과 바울 사이에 단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면,그것은 세계사라는 시계안에서 두 인물이 서 있던 위치의 차이다.이것을 좀 달리 표현하자면,두 인물은 모두 같은 산맥을 바라보았지만 예수님은 그 산맥 전체를 아직 오르지 않은 채 앞에 두고 있었던 반면,바울은 이미 첫번째 능선에 올라 언덕 하난를 뒤로 하고 있었던 셈이다.이러한 종말론적 요인을 인식하지 못하고는 예수님과 바울간의 진정한 관계를 파악하기 아려울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하나님의 나라는 천하 만민에게 복주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이 성취하면서 시작된다.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도래했다.하지만 그 나라의 능력이 그로써 충분히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예수께서는 그 때가 오기르 앞서 받아할 "세례:,즉 고난을 앞두고 계셨으며,그때가 오기까지 답답함을 느끼셨다(눈12:50).그러나

예수께서 친히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셨듯이,인자의 고난과 승리로 인해 그 답답함이 이로될 것이며그들 중 몇명은 죽지 ㅇ낳고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임하는 것을 볼 것이었다.(막9:1)
하지만 바울의 위치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상태였다.이미 예수님께서"성결의 영으로는 죽는 자 가운데서 부홯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롬1:4).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그 능력이 이제 그분의 내주하시는 영에 의해 믿는 자들 안에 전달되고 그 안에서 역사하고 계셨다.바로 그 영께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 자기를 죽음으로 내어 주신 일에 찬연히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그 백성들의 가슴 속에 부어 주고 계셨던 것이다.이로써 관점이 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왜냐하면 예수님의 지상 사역 동안에는 미래사였던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이 이제는 과거사,즉 하나님의 포괄적인 구원 사건 중 한 부분이 되었고,그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의 도도한 물결이 온 세상으로 흘러 나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이로써 하나님나라는 시작되었다.이제 그 나라가 완성되기가지 남아 있는 것은,이미 얻은 결정적 승리 이후의 소망 작전과 같은 성격을 띤다.
비록 지금 이 땅에서도 성령으로 인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은 부활의 은혜를 누리고 살지만,장차 그 적대 세력 중 최후의 원수인 사망이 타파되는 날 부활은 절정에 이를 것이다.어떤 이들에게는 장차 올 그 시대가 여전히 미래로 보일지 모르지만,그 시대는 이미 통텄다"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어떤 것은 지나갔으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경험으로 인한 관점의 변화

그렇다면,우리가 예수로부터 바울로 옮겨 갈 때 느끼게 되는 관점의 변화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이미 예기되었던 변화인 셈이다. 객관적인 견지에서 보면 그것은    A,D.30년을 전후한 세계사의 흐름 안에서 측정할 수 있는 시간적 변화이다.한편,경험적인(주ㅈ관적인)견지에서 보면,바울 자신도 그랬듯이 그것은,시간을 초월하여 각 개인이"그릿도 안에"있게 될 때 경험하게 되는 변화이다.그리고 그러한 경험적인 변화가 발생할 때 그것은 우리의 전 안목을 철저히 뒤바뀌어 놓는다."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 아무 사람도 세상 사람의 안목으로 알지 아니하노라.비록 우리가 그리스도 세상 사람의 안목으로 알았으나 이제 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

이긑은 고후 5:16의 내용은 바울의 예수께 대한 관계와 태도에 관한 많은 논쟁에서 중요한 관건이 되어 왔다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의 안목으로" 안다는 말이 무순 의미인가?(물런 이 구절이 영지주의적 해석의 일환이라는 슈미트알스의 주장)이 옳다면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겠으나,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에는 이전 세대만큼의 공감을 얻어 내지 못하는 해석으로서,이 구절을"바울은 사람들이 서로를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알았었다.즉 자기 눈으로 그분을 직접 보았다느."는 의미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다.바이스는 이러한 기조에 입각하여 존절을 좀더 확대 해석한다: "사실상 그 표현은 육안으로 보았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외모만이 아니라 인격을 대면하여 얻은 인상,즉 직접적인 인격적 대면을 통해서 얻은 인상을 의미한다. 바이스는,바울이 예수께서 입성하신 뒤 보낸 마즈막 주간 동안 그곳에서 그분을 보고 들었을 가증성이 매우 높으며,따라서 그가 본문에서 말하고 잇는 '앎'은 "성령으로 말미암아"지니게 된 예수께 대한 새로운 지시과는 대조적인 저급한 차원의 지식이라고 결론짓는다.

바울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그분을 보고 들었는지의 여부는 여기서 문제되지 않는다.아마 그는 그 당시 예수님을 보고 들었을 것이다.만일 유닉의 주장,즉 바울이 소년 시절을 보내며 자라난 곳은 예루살렘이었고 가말리엘 밑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곳도 그곳이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그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그러나 과연 고후5:16이 그러한 일을 언급하고 있는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따라서 볼트만 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고후 5:16에서 그(바울)가 심지어 예수님을 보고 그분에게서 어떤 인상을 받았다는 의미을 파악해 내는 것은 오직 상상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반면에,이 구절에 대한 볼트만 교수 자신의 해석도 먼저 그 해석이 본문에 부합된 것이어야만 용인될 수 있다.볼트만에게 있어서,바울이 저급하게 여겼던 그리스도에 관한 "육체대로"의 지식은 곧 역사적 예수에 관한 지식이었다.즉,바울은 그리스도를 역사상 존재하셨던 그분에 대한 지식으로 더 이상 알지 않겠다고 말한다는 것이다.볼트만은 이러한 주관적 전제하에 다음과 같이 바울을 비판한다: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자의식' '내면적 삶'혹은 '영웅 심리'등으로써 일종의 '역사화 된 예수'를 재구성하기 위해서  케리그마(-예수님께서 직접하신 설교)자체를 일종의 '자료'로 이용하여 그 이상의 의미를 도출해 내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만일일 그렇게 한다면 사람의사람의 안목으로 이해한 엉뚱한 그리스도가 될 것이며,그러한 그리스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진정한 주는 역사화된 예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선포된 그리스도이다.

볼트만의 입장에서는 역사에 대한 호소가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률적인 어떤 것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보다 우위에 놓는 거이며,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의 극거를 역사 연구과정에서 변하기 쉬운 어떤 것으로 삼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사실상 그가 예수의 생애와 복음서 기사에 대한 역사회의의주의를 부르짓는 것은,'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오직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케리그마 안에서 그의 도전 앞에 직면케 하는 그리스도 이다'라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겠다.그러나,만일 그의 주장대로 케리그마로 표현된 그리스도가 역사상으 예수와 다르다면,우리의 신앙은"교묘하게 조작된 신화"에 놓이게 될 위험에 처하는 셈이다.진정 역사 의식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이라면,자신들이 믿는 분의 역사에 관해 질문할 수 있고,또 마땅히 질문해야 한다.다라서 에밀 부르너가 초기 저작에 속하는 어떤 책에서 주장한 다음 내용을 마땅히 반격해야 한다:"나사렛 예수,랍비 예수 등 이른바 실제 예수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아무런 관심의 대상도 되지 않았으며,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역시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부르너와 볼트만이 제시하고 있는 관점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본문(고후5:16)을 놓고 정연한 논리로 자신들의 주장을 강변하고 있지만,그것이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관점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게다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의 의도는,현제 그가 성령 안에서 깨달은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기준 삼아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전에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체득한 지식을 업신여기려는 태도와는 전혀 무관하다.예수와 열 두 제자들간에 어떤 차이점을 있었는지,모두 "한 그리스도 안에"있고 모두 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바울이 앞장서서 주장하던 바였던 것이다.바울이 본문에서 대조하는 것은 그가 이전에 그리스도께 대해(또한 세상에 대해)지녔던 태도와
현재 그리스도께 대해 (또한 세상에 대해)지니고 있던 태도간의 대조로서,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있다는 사실이다.새 영어 성경은 이 점을 분명하게 옮긴다:"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브터는 각 사람을 평가할 때 세상에 표준으로 하지 아니하노라.비록 한때는 우리가 그리스도 그런 표준으로 평가하였으나"라고 헐 때 '육체대로'란 말은'그리스도'라는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구가 아니라'알았으나'라는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구인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구절의 자세한 의미를 파악하려면 좀더 깊은 주의가 팔요하다:바울이"그리스도 육체대로 알았으나"라는 말로써 가리키고자 했던 바는 무었이었을까?
지금은 예수님 안에서 메시야를 발견함으로써 철저히 뒤바꿘 그의 기존의 메시아 관인가?아니면 이제는 예수님께 대한 사도로서의 헌신과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 대한 형제애로 뒤바꿘,이전의 적대감인가?

어느 경우든 이제 바울에게 예수와 메시야는 동인 인물이며,만일 그가 회개치 않았드라면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을 그 두 인물에 관한 구분이 이제는 의미 없게 되었다.더 나아가 그는 본문의 선언으로써 이전에 자기가 지니고 있덩 메시야 관이'세상적'이며 이미 잘못된 것이었음을 시사해 준다.본문의 의미가 이와 같다면,브레데가 바울 연구서에서 내린 결론만큼이나 본의에서 빗나간 해석은 다시 없을 것이다.그는 벨하우젠,하르낙,그리고 그와 동시대 사람들이 바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사실대로 이해했던 사람이었다고 주자아하던 바를 전격으로 배격했다.브레데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전혀 당치 않은 주장이었다;"바울은 역사적 예수와 그분의  신빙성 있는 메시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그것을 자신이 오래전부터 품어 오던 메시야 관의 형태로 철저히 재구성했다.그 메시야 관은 유대 묵시 문학이 묘사하고 있는'땅에 임하기 전에 하늘에 거하고 있는 한 선택의 인물'의 상을 부분적으로 포함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브레데는 그러한 입장에 서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만일 그렇지 않다면'역사 속에 존재했던 인격'으로서의 예수와,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던 '천상적이며 신적인 존재'간의'엄청난 간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그의 주장은 이렇게 계속된다:"(바울이 소개하는)그리스도의 상은 예수의 인격과 대면하여 얻은 인상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즉 바울은 그러한 인상을"결코 받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그는 오히려 그 상이 애초부터 바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주장한다:"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에 이미 그러한 천상적인 존재 즉 신적인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다."그렇다면"바울은 회개할 순간에,즉 예수께서 그 부활하신 몸의 찬란한 영광으로 그 앞에 나타나셨을때,그분을 이미 자신이 믿고 있던 그리스도와 동일시했으며,이전에 천상적 존재에 관해 지니고 있던 모든 개념들을 예수에게 즉시 적용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이다.영화롭게 된 예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순간 그는 즉시 예수께서 주이심을 깨달았던 바,그런 상황에서 과거에 그가 지니고 있던 그리스도 개념을 수정함 없이 예수님에게 적용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본문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셈이다:"그리스도는 내가 이전에 생각하던 그런 인물이 아니다.참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영화롭게 된 예수이시다.그러므로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이전에 '세상적'생각으로 알고 있던 그 그리스도로 알지 아니한다."

이처럼 바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았다면 바울의 예수께 대한 모든 태도나 그의 메시야 관도 철저히 변했음은 물론이다.아그립바 왕 앞에서 말한 대로 그는 한때"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범사를 행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었으나(행26:9),이제는 눈이 밝아져 그 이름을 위하여"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게 되었다(롬1:5).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나타나 그의 전 안목을 바꾸어 놓으신 후 몇 년 안 되어,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안에서 예비해 놓으신 바가 바울의 생애 안에 성령으로 효과 있게 발휘되기에 이른 것이다.바울은,부활하신 예수께서 자기에게 임하신 일에 호소하여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했다(고전9:1).
그는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자기에게 나타내기를 기뻐하신 일로 여기고,그것을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소명과 권위를 받은 근거로 삼았다(갈1:15이하),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자신이 전해야 할 복음 자체를 받은 기원도 바로 그 사건 안에 둔다.


 부르스의 지음= 바울과 예수

다음은 계시로의 바울의 복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