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 분별/성령과 악령

영계에서 벌어진 주제토론

은바리라이프 2009. 8. 26. 16:58

영계에서 벌어진 주제토론>

아래의 글은 1700년대에 쓰여진 글입니다. 차분히 읽어보시고 진리가 참으로 그러한가 아닌가를 판단하시면 좋을 듯 싶습니다. 설령 이 글이 진리라 할지라도 저는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 이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모두 자기 고유의 내적 시력이 있는 관계로 이를 강요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지배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악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고로 올릴 뿐이오니 신비적인 글이라고 거부감을 갖기 이전에 진리에 대한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89. 다섯 번째 영계 체험

한번은 영들의 사회에 천계로부터 한 서신이 전달되었다. 거기에는 감독(성직자) 두 분이 다른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함께 있었다. 그 서신은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셨던 것과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천지의 하나님으로 시인하라는 권고를 담고 있었고 아울러 <율법(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사람을 의롭다 하는 믿음> 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버릴 것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 서신은 몇 사람에 읽혀진 후 최종적으로 감독에게 의뢰되었지만 그들의 답변은 서로가 모순되었고 또 부정적이었다. 그들의 심중은 이미 지상에서의 삶 속에 고착되었던 비 진리들에 의하여 굳어져 있었으므로 짧은 협의 끝에 그들은 그 서신을 원래 그것이 전해졌던 천계로 돌려보내는 일을 저질렀다.

이렇게 되자 감독 하에 있던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잠깐 생각한 끝에 과거 감독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던 <믿음만으로 구원!> 이라는 교리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철회했다. 그때 돌연 이전에는 휘황하게 빛을 발하던 영적 사물에 대한 그들 판단의 빛이 꺼져버렸다. 그리고는 <믿음만으로 구원!> 이라는 교리를 추종하던 그 사회가 알 수 없는 지하 심연 속에 빠져 들어간 것을 보았다. 이것은 주님만을 예배하며 믿음만에 의한 칭의의 교리를 거부하고 혐오한 자들이 그곳에서 분리된(옮겨진) 것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에 나는 그 사회가 가라앉았던 낮은 땅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들어 주세요. 우리가 이상한 일들을 말하겠소. 우리가 가라앉았던 곳이 처음에는 늪처럼 되더니 곧 마른 땅이 되고 마침내 작은 도시처럼 되어서 우리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거처를 정하였다오.(참조 : 영적 세계에서는 내면의 변화에 따라 외부의 주변 사물도 달라진다) 다음 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서로 의논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두 감독들을 조용히 견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그 서신을 천계로 돌려보내서 이 재난이 우리 위에 닥쳤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독에게 갈 사람을 선임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저였습니다.

우리들 중 총명한 자가 감독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들 사이에 교회와 종교가 아주 번영하고 있다고 믿었소. 이는 가장 위대한 복음의 빛을 우리가 즐기고 있었다고 가르쳐졌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깨우침을 받았는데 그것은 영으로 사는 우리에게 진정한 종교가 없는 까닭에 저 지상의 기독교 세계 안에서도 오늘날 참 교회가 없다는 것이었소'라고 말하였습니다.(참조 : 영적 세계의 교회와 지상의 교회는 서로 한 몸처럼 이어져 있다)

그러자 감독들은 대답하였습니다 '뭐라고 말을 하는 거요? 성언이 읽혀지는 곳에 그리고 구주이신 그리스도가 시인되고 성례전이 행해지는 곳에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이 말에 우리의 친구는 '그것들이 진실로 교회를 구성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람 안에서 교회를 이루는 것이지 결코 사람 밖에서 교회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자, 세 신들이 예배되고 바울의 단 하나의 오해된 설명을 주님의 말씀보다 윗자리에 둔 교리에 기초를 세운 곳, 또 교회의 참 하나님이신 세상의 구주에게 나아가지 않는 곳에 어떤 교회가 있을 수 있습니까? 종교는 악을 경원하고 선을 행하는 데 존재합니다. 믿음만이 구원한다고 가르치고 인간의 인애는 다만 도덕이고 시민적이라고 가르치는 곳에 어떤 종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어느 누가 그러한 인애가 종교에 결해 있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믿음만으로는 이론적일 뿐 그 종교는 실제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느 국민이 인애의 선 즉 선한 행위가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시인하지 않습니까? 그 까닭은 선이 종교의 본질이고 선은 교회의 본질인 참된 교리에 의해서 가르쳐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천계로부터 보내져 왔던 서신의 내용을 받아들였다면 우리의 영광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감독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너무나 고조된 감정으로 말하고 있소. 우리를 충분히 의롭게 하고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라는 행위>로 된 믿음이며 이것이 교회를 구성합니다. 또 발출하고 완성하는 믿음의 상태에 있는 믿음이 종교룰 구성합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하오. 내 자녀들이어!'

그러나 우리의 슬기로운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으시오 교부님들! 당신들의 독단교리에 의하면 믿음이란 사람이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은 없이 나무 그루터기나 돌처럼 마냥 믿음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나무 그루터기나 돌이 생기를 얻어서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당신들의 관념으로는 상태로 있는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의 계속이고 진전인 것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독단교리들에 의하건대 믿음이 구원하는 전부의 힘이고 인애의 선은 아주 무력한 것이니 이 모든 것 안에 어디 종교가 있습니까?'

그때 감독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믿음만에 의한 칭의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소. 친구여! 그러므로 당신은 구원의 방식에 대한 내적인 지식이 없소. 당신의 방식은 너무나 외적이고 비속하오. 당신이 원하면 그 길로 가시오. 다만 이것만은 아시도록 하오.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사람에게서 오지 않소.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영적인 문제에 힘이 없다면 어떻게 그가 스스로 무슨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있겠소?' 이 말에 우리 친구는 노해서 대답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칭의의 신비를 당신 보다 더 잘 알고 있소. 내가 이제 그 교리 안에 단지 환각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을 쉽게 말해 드리겠소. 종교는 하나님을 시인하고 마귀로부터 놓여나서 그것을 미워하는 것에 존재합니다. 왜인고 하면 하나님은 선 자체이시고 마귀는 악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종교적인 사람이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에 존재합니다. 그 까닭은 선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마귀에게서 풀려나고 그것을 미워하는 것은 악을 멀리하는 것에 존재합니다. 그 까닭은 악이 마귀의 것이고 마귀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자 당신의 행동으로 된 믿음 또는 믿음만에 의한 칭의의 행동이 선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오는 선을 행하라고 사람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악은 마귀의 것이며 마귀에게서 오는 악을 멀리하라고 무엇을 가르칩니까? 조금도 안 그렇습니다. 그 까닭은 구원이 선을 행하는 것에나 악을 경원하는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당신들이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당신들이 발출하고 완성하는 믿음이라고 부르는 상태의 믿음이 행위에 의한 믿음과 동일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이 말하는 믿음의 신비라는 것은 사람 스스로가 하는 듯 사람에게서 오는 모든 선을 배제해버리는데 그것이 어떻게 완성되겠습니까?'

그는 계속 감독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독단 교리는 이렇습니다. 즉 구원이 거저 주시는 은총에 의한 것인데 어떻게 사람이 자신으로부터의 선행으로 구원될 수 있을까! 또 공적을 추구하는 것 같은 것이 아니고서 무슨 선이 사람에게서 오겠는가! 모든 공로는 그리스도에게만 속하지 않겠는가! 구원을 위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의롭다 하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교만이니 이것이 오히려 주님의 것을 가로채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성령께서 모든 것들을 완성하실 때 사람에게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으시는데 누가 선을 행할 수 있느냐! 만일 사람에게서 오는 선은 어떤 것이라도 그 자체가 선이 아닌데 사람 편에서 어떤 부속품 선이 있을 필요가 있느냐!' 이것들이 당신들의 신비가 아닙니까? 그러나 내 눈에는 그것들이 당신들의 믿음만! 이라는 이론을 설정하기 위해서 선행을 배제하고 인애의 선을 밀어낼 목적에서 무리하게 짜낸 핑계요 기교로밖에 안보입니다. 그러니 당신들이 사람을 나무 그루터기나 돌처럼 생각하듯 교회와 종교의 믿음과 모든 영적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해하고 의지하고 믿고 사랑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자기 스스로 하는 듯 자유로운 힘을 - 특히 영적인 것들에 있어서 -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영적인 것들 안에서 스스로 하는 듯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다면 성언이나 교회 그리고 종교와 예배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에 의해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인애임을 당신들은 압니다. 그러나 인애가 믿음의 혼이고 본질임을 모릅니다. 그러니 인애에서 분리된 믿음이 생명 없는 도깨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야고보가 선행이 없는 믿음이 죽었을 뿐 아니라 마귀의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감독들 중 하나가 자기의 믿음이 죽었고 마귀적이고 도깨비라는 말을 듣고 아주 화가 나서 자기 머리에서 감독 관모를 벗어서 책상 위에 던지며 말했습니다. '나는 우리 믿음의 원수들에게 복수할 때까지는 다시 이것들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겠다.' 하고 또 머리를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오, 야고보놈! 그 야고보놈!' 그 감독 관모 앞에는 얇은 차양이 있었는데 그 위에 '믿음만이 의롭게 한다' 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곰의 발을 가진 일곱 머리의 괴물이 땅에서 솟아 나타났습니다. 몸은 표범의 것이고 사자의 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꼭 묵시록에 서술된 짐승 같았습니다. 그 우상이 만들어지고 그것에게 경배를 했습니다. 이 괴물이 책상에서 감독 관모를 집어 올려 넓게 펴서 그 일곱 머리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땅이 그 발 밑에 열리고 그 놈이 땅 속에 가라앉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 감독은 '이거야 원 불법이다, 불법이야!' 하고 소리질렀습니다. 그 뒤 우리는 그들을 떠났습니다. 보라! 거기 천계가 보이는 데까지 올라가는 계단이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후 그곳 누군가가 말하기를 "현자 중의 현자들이 지금 형이상학적인 주제들을 놓고 토론하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 그는 단순한 믿음으로 이것을 말했다. 들어갈 수 있겠는가를 나는 물었는데 그는 내게 "당신이 아무 말을 하지 않겠다면 들어갈 수 있겠지요. 그 이유는 이교도들은 들어오되 나처럼 문간에 서 있도록만 허락을 받았으니까요." 하고 그는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들어갔더니 보라, 그것은 원형 극장이었고 그 가운데 강단이 있었으며 소위 수많은 지혜자들이 자신들의 믿음의 신비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그때 논의 주제는 "믿음에 의한 칭의의 상태에서 사람이 행한 선 또는 그 행위 후에 진행되는 상태에서 행하는 선이 종교의 선이냐 아니냐" 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종교의 선은 구원에 기여하는 바의 선이라고 정의하는데는 만장일치였다.

그 토론은 격렬했다. 그러나 인간이 행하는 선은 다만 도덕적 선에 지나지 않아서 그것이 실제로는 인간 세상을 번영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구원은 믿음만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에 구원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우세하였다.

이 견해를 그들은 다음과 같이 확실히 했다. "자발적인 선은 모두 무보수의 선과는 결합될 수 없다. 그 까닭은 구원이 거저 주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오는 선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결합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구원을 확보한다. 사람의 어떤 행동들도 성령의 그것과 결합될 수 없다. 성령은 모든 것을 사람의 도움 없이 행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곧 거저 주시는 은총, 그리스도의 공로, 그리고 성령의 활동만이 믿음에 의한 칭의의 행위 안에서 구원에 기여할 수 있다. 그것들만이 구원의 상태 또는 진전에 있어서 구원에 남아서 기여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 편에 부속되어 있는 선은 종교의 선이라고 일컬을 수 없으니 그것이 구원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구원을 안목에 두고 행해진다면 그것들 자신의 선을 공로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의지가 안겨 있으므로 오히려 종교의 악이라고 불려지지 않으면 안 된다."

두 사람의 이교도가 문지기와 함께 문간에 서서 이 논의를 듣고 있다가 그중 하나가 말했다. "이 사람들은 종교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는군! 이 사람들은 종교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데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가?"

391. 일곱 번째 영계 체험

한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자신이 두 사람의 교직자들을 만났는데 하나는 믿음이 인애와 분리된 자였고 다른 하나는 분리되지 않은 자였다고 하였다. 천사가 그중 첫 번째 믿음에서 인애를 분리한 자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당신은 누구요?/ 나는 개혁교회에 속한 기독교인이요./ 그러면 당신의 교리는 무엇이며 그 교리에 기초를 둔 당신의 종교는 어떠한 것이요?/ 믿음이지요./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은 무엇이요?/ 내 믿음은 하나님 아버지가 인류들에게 임할 저주를 그의 아들에서 두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보냈으며 그 결과로 우리가 구원된다는 것이오./ 그러면 당신은 구원에 대해서 무엇을 더 알고 있소?/ 구원이 그 믿음만에 의해서 이룩된다는 것이요./ 그러면 당신은 속량에 대해서는 무엇을 알고 있소?/ 이것 역시 그 믿음에 의해서 결과됩니다./ 사랑과 인애에 대해서는 무엇을 알고 있소?/ 그것들 역시 그 믿음에 포함되어 있지요./ 당신은 계명들과 성언의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소?/ 그것들 역시 상술한 믿음에 포함되어 있소./

그렇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 스스로는 현실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는 있소?/ 그것은 내가 결코 반문해 본 일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믿음을 가져야만 하오./ 당신은 구원에 대해서 더 이상 아는 것이 있소?/ 구원이 믿음을 통해서만 오는데 무엇을 더 알아야 하겠소?/ 당신은 거문고의 같은 줄만을 뜯고 있군요. 당신의 대답은 계속 믿음이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가서 당신의 친구들을 찾으시오."

그 다음으로 천사는 인애에서 믿음을 분리하지 않은 영에게 말했다. "친구여! 당신은 누구요?/ 나는 개혁교회의 기독교인이오./ 당신의 교리와 그 교리에서 파생된 종교는 무엇입니까?/ 믿음과 인애요./ 이것들이 둘입니까?/ 그것들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믿음이요?/ 성언이 가르치는 바를 믿는 것이오./ 그러면 인애는 무엇이요?/ 성언이 가르치는 바를 행하는 것이요./ 당신은 성언에서 읽은 것을 다만 믿었을 뿐입니까 또는 그것들에 따라서 행했습니까?/ 나는 믿는 대로 행했습니다./ 내 친구여! 와서 우리와 함께 삽시다."

385. 첫 번째 영계 체험

전에 한 천사가 내게 '만일 그대가 믿음과 인애의 성질을 명료하게 이해하여 믿음이 인애로부터 분리될 때에 어떻고 또 믿음이 인애와 결합될 때에 어떤가를 알고자 원하면 내가 그대를 위해서 그것을 명백하게 해드리겠소'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렇게 해주시오' 하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는 말했다. '믿음과 인애를 생각하는 대신에 빛과 볕의 관계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확연해질 것입니다. 믿음은 그 본질에 있어서 지혜의 진리이고 인애는 그 본질에 있어서 사랑의 애정입니다. 천계에서는 지혜의 진리가 빛이고 사랑의 애정은 볕입니다. 천사들이 그 안에 거하고 있는 빛과 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당신은 인애로부터 분리된 믿음의 성질을 분명히 알 것이고 인애에 결합되어 있는 믿음의 성질 또한 밝히 알 것입니다. 인애로부터 분리된 믿음은 겨울철의 볕과 같고 인애에 결합된 믿음은 봄철의 볕과 같습니다.

볕은 없고 빛만 있는 겨울철의 찬 빛은 나무들에게서 잎새들을 발가벗기고 초목들을 죽이고 땅을 꽁꽁 얼게 하고 물을 얼게 하지만 볕과 결합된 봄철의 빛은 나무들에게 잎들과 꽃들 그리고 열매까지도 내게 하지요. 그 빛은 땅을 해빙시키고 부드럽게 해서 초목들과 푸성귀, 꽃들 그리고 관목들을 자라게 합니다. 그것은 또 얼음을 녹이고 샘에서 물이 솟아오르게 합니다. 그것은 믿음과 인애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인애에서 분리된 믿음은 모든 것들에게 죽음을 가져오지만 인애와 결합된 믿음은 생명을 공급하지요. 이것을 우리들의 영계 안의 생활에서 볼 수 있는데 영계에서는 믿음이 빛이고 인애가 볕이기 때문에 믿음이 인애와 결합되어 있는 곳에서는 아름다운 동산들, 꽃밭들 그리고 각종 열매들이 그 결합의 정도에 비례해서 있게 되지만 인애에서 분리된 믿음이 있는 곳에는 풀까지도 자라지 않고 다만 가시와 찔레들만 자라나게 합니다.'

우리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는 어떤 교직자들이 서 있었는데 천사들은 그들이 믿음만에 의한 칭의와 성화를 주장하는 자들이며 신비한 것들을 장사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 우리들은 그들에게 인애와 믿음에 관한 진리들을 시각적인 증거까지 보여주며 반복하여 들려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동의하지 않았으며 등을 돌리고 '우리는 듣지 않았소!'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 더 들으시오!' 라고 했더니 그때 그들은 귀를 막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듣기를 원하지 않소!'

이 일 후에 나는 그 천사와 믿음만! 이라는 것에 대해서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나는 믿음이 겨울날 빛 같음을 산 경험에 의해 배웠다는 것과 수년간에 걸쳐 각종의 신념들을 지닌 영들이 내 앞을 지나간 것에 대해 회상하며 들려주었다. 그리고 인애로부터 분리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 내 가까이 올 때는 언제나 아주 냉랭한 한기가 내 발을 엄습했고 점점 내 허리와 가슴에까지 올라왔으며 그 정도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고 말해주었다. 만일 주님께서 오셔서 그들을 몰아내시고 나를 구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정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영들 자신은 그 냉기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또 그러한 영들은 빙하에서 떨어져 나와 대양에 떠도는 빙산들에 비할 수 있겠다. 이것들이 배 가까이 접근할 때에는 배 위에 있는 자들은 추위 때문에 모두 떤다고 들었다. 성언은 인애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지금 그 죽음의 원인을 본다. 그것은 추운 겨울날 새가 추위 때문에 죽는 것과 같으니 처음에는 그 눈이 얼어서 동작하지 못하게 되고 그 다음에 날개, 그리고 폐가 얼어서 마지막에는 나무에서 떨어져 눈 속에 묻히게 되는 것과 같다.

387. 세 번째 영계 체험

천계에서 들은 내용 중에서..

'선용의 선이 없는 사랑과 지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이 선용 안에 나타나기까지는 그것들은 다만 관념적인 실체에 지나지 않을 뿐 현실적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 지혜 그리고 선용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만일 분리된다면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지혜없이 아무 것도 아니기에 그것은 오직 지혜에 의해서만 선용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지혜에 의해서 선용 안에 나타내어질 때 그것은 현실적인 무언가로 나타납니다. 목적과 원인 그리고 결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은 원인이라는 방편에 의해서 결과에 이르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만일 이 셋 중에 하나가 결여된다면 다른 둘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은 인애와 믿음 그리고 행실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믿음 없는 인애는 아무 것도 아니고 인애 없는 믿음도 그러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인애와 믿음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함으로 나타날 때 그 행함의 선용에 의해서 무엇인가 유용한 것이 됩니다. 이는 또 이해와 의지 그리고 활동에 있어서도 같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해가 없는 의지는 시각이 없는 눈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동이 없는 이해와 의지는 몸이 없는 마음과 같습니다.

행위 없이 사람이 인애와 믿음을 가지는 것은 관념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로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행동하려고 애쓰던가 의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의지 또는 노력 그 자체가 행위이기도 한 것은 그것들은 속에 있는 것을 계속 외적 형태로 표현하려는 애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자는 간혹 의지를 행위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노력과 의지는 하나의 내적 행동이며 기회가 주어져 그것이 행해질 수 있을 때에는 외적인 행동과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수용되어 집니다.'

388. 네 번째 영계 체험

이 일 후에 나는 용의 추종자들이 어떤 도시를 점령하려고 가까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도시는 천사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성벽으로 둘려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계교를 꾸며 그 도시를 취하자. 검은 것을 희게 하고 흰 것을 검게 보이게 하여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어떤 색이든 만들어 내는 궤변에 능한 자를 보내자" 라고 말하고서 궤변가를 찾은 바 그는 현실보다 형이상학적 용어를 대신 사용하고 유식한 공식 아래 현실을 감추며 먹이를 쥔 독수리가 날아가는 듯한 교활한 자였다. 그리고 그가 그 도성 시민들에게 자기들도 같은 종교를 가졌으니 성안에 들어가기를 원한다고 말하도록 교사했다.

그는 안으로 인도되어 이렇게 말하였다. "내 형제들이 성문 밖에서 들어오기를 간청하고 있소. 그들은 당신들의 종교와 동일한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당신들과 우리들은 믿음과 인애가 종교의 두 요소임을 믿소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신들은 인애가 일차적이고 믿음은 그 파생이라고 하나 우리는 믿음이 일차적이고 인애가 그 파생이라고 하는 것뿐이오. 그러나 그것이 만일 우리가 둘을 믿는다고 한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소?"

그 성의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우리끼리만 이야기하지 말고 조정자나 판단자로 행동할 사람을 참석시킵시다. 안 그러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없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용의 추종자가 밖으로 나가 동류의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이윽고 다른 파견자가 도착하자 도시의 현자가 먼저 용 추종자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말하기를 어떤 교회와 종교이든 인애와 믿음 이 두 가지로 구성되기만 한다면 그 두 요소 중 어느 것이 교회의 첫째 요소이건 아니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마는 그 차이는 분명히 있는 바 이는 선행하는 것과 뒤에 오는 것, 또 원인과 결과, 원천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 또 본질적인 것과 형식적인 것 사이에 있는 차이와 동일합니다.

내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까닭은 당신들이 발뺌하는 기술이라고도 부르고 마술적 기교라고도 부르는 학문적인 궤변에 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 용어들을 쓰지 맙시다. 당신들이 쓰는 이런 표현은 이 세상의 보다 높은 영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어울릴 뿐 낮은 영역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인애와 믿음의 개념에 합의하도록 하십시다. 인애는 하나님과 구원과 영생 때문에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과 구원 그리고 영생에 대한 신뢰에서 생기는 사고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조정자가 이의를 달았다 "나는 하나님 때문에 선을 행하는 그런 사랑이 인애임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믿음 또한 당신과 같은 개념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생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선행으로 구원에 들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부분적인 합의를 끝냈을 때 그 성의 총명한 자가 다시 말했다. "사랑이 일차적이고 사고는 그로부터 파생되는 후차적인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용의 추종자는 "나는 그것을 부정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다른 자가 용의 추종자에게 자기의 생각한 것을 설명하였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사랑에서 사고하지 않습니까? 사랑을 제거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가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언어에서 소리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말할 수 있겠소? 소리는 사랑과 관계를 가지고 언어는 사고와 관계를 가집니다. 즉 사랑이 음색을 주고 사고가 낱말들을 공급합니다. 그것은 또 불꽃과 빛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만일 불꽃이 제거되면 빛은 사라지게 됩니다.

인애가 사랑과 관계되고 믿음이 사고와 관계되는 고로 이것은 인애와 믿음의 관계에 있어서도 동일합니다. 당신은 일차적이 것이 이차적인 것의 모든 것의 모든 것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꽃과 빛의 관계와 같습니다. 만일 당신이 일차적인 것을 첫째 자리에 두지 않는다면 이차적인 것은 사라지고 맙니다. 같은 식으로 당신이 만일 믿음을 둘째 자리에 두지 않고 첫째 위치에 둔다면 천계의 모든 것들이 당신의 눈에는 거꾸로 뒤집혀 나타날 것입니다. 이는 마치 거리의 협잡꾼이 물구나무서기로 걷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런 연유로 당신의 인애는 영적이 아니고 자연적입니다. 그 까닭은 뒤집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추종자는 이것을 이해했다. 왜인고 하면 악에 속한 영도 진리를 들을 때 그 진리를 이해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그것을 보존할 수 없을 뿐인데 왜냐하면 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생겨져서 진리의 사고를 좇아버리기 때문이다. 그 뒤에 그 성의 총명한 자는 인애가 아닌 믿음이 종교의 주된 요소라고 인정될 때 어떤 성질의 것이 되는가를 깊게 설명하고 이와 같이 주종이 뒤바뀐 상태에서는 영적 생명이 있을 수 없기에 그것은 다만 자연적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입증하였다. 그리고는 참 믿음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여기까지 듣던 용의 추종자는 마침내 화가 나서 그 성에서 나와 자기 패거리들에게 모든 것을 보고했다. 그러자 그들은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인애라는 설명을 듣고 이렇게 외쳤다. '거짓말이다.!' 전체 사회가 따라 아우성을 쳤다. '이 무슨 범죄인고! 만일 인애의 선행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단지 그것은 공적 추구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는 서로 말하기를 "우리 동무들을 더 부르자 그리고 그 성을 점령하고 인애의 옹호자들을 추방하자!"

지은이 : 스베덴보리(신비가)
책이름 : 순정기독교
참고 : 이 책은 1700년대에 쓰여진 것입니다.

선입견을 풀기 위하여 스베덴보리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저명한 분들을 여기 소개해봅니다. 헬렌 켈러, 괴테, 칸트, 윌리엄 블레이크(영국의 시인), 랄프 왈도 에멀슨(수필가이며 목회자), 토마스 칼라일, 루우즈벨트(전 미국 대통령), 김필례 여사(전 수피아 여중고 교장), 사두 썬다싱, 칼롶삼, 엘버트 허버드, 헨리 워드 비쳐, 엘리자베드 B. 브로우닝, 사무엘 테일러 골릿지(사상가), 필립스 부룩스(설교자), 요한 조셉 본 게레스(로마카톨릭 신학교수), 잉거솔(성경비평가), 제임스 마훠트(성경번역가), 아나레 드 발자크(프랑스작가), 에드윈 마아캄(시인)... 등입니다.

연약한 믿음 탈출하기 http://cafe.daum.net/talchulha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