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부자와 한 가난한 과부 1/2
지난번에 돈에 대하여, 그리고 헌금에 대하여 논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심은 하나님께 그 물질이 필요하셔서가 아니라 드리는 자의 마음을 원하시기 때문이므로 우리의 마음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그래서 마음과 함께 드리는 헌금이, 그 마음이 가장 많이 들어간 헌금이 가장 많은 헌금임을 논하였다. 마가복음 12:41-44의 본문에 비추어 이 사상을 더욱 개진해 보도록 하자.
예수님께서는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셨다. 그렇게 앉으신 이유는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시기 위해서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헌금에 대한 교훈을 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연보에 대하여 가르치고자 하셨을까? 본문에 그 직접적인 이유가 제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이 교훈은 단지 헌금에 대한, 거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0절에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부자들)이 나오는데, 바로 이어서 나오는 내용이 41절의 '여러 부자'의 많은 헌금과 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생활비' 전부)이라면,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그저 연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돈과 소유'에 관한 보다 폭넓은 가르침이며, 그러한 가운데 헌금이 이야기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헌금에 대한 가르침에 대하여는 심한 거부반응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재물 드리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그뿐 아니라 재물 일반에 대한 바른 관(觀)을 배워야 한다. 재물(돈, 맘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중요한 자원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돈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하였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심판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대한 바른 가르침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또한 재물에 대한 가르침이 편중화하여 '복 받으라(부자가 되라)'는 내용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재물에 대한 바른 성경적인 개념을 비롯하여 재산을 모으는 바른 방법과 재산을 사용하는 바른 방법까지도 이야기되어져야 한다.
예수님이 보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예수님은 '여러 부자'가 '많이 넣는 것'과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한 고드란트)'을 넣는 것을 보셨다. 물론 이것은 눈에 보이는 단순한 '현상'에 불과했다. 또한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상적인 모습'에 대하여 누가 이의를 제기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많이 소유한 이들이 많이 드리고, 적게 가진 자가 적게 드리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상'을 그냥 그렇게 일반적인 유대인들처럼 당연시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이 현상에 이의(異議)를 제기하신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묵인되어온 순위를 역전시키신다. 누구나 다 부자들이 많이 드렸다고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과부가 더 많이 드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추적하기에 앞서 이 상황을 다시 살펴보자. 특별히 이미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40절의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과 관련하여 본문을 생각해보자. 물론 지금 두 렙돈을 드린 과부가 '가산을 삼키운' 그 과부였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당시에 일반적인 보습이 아니었던가! 그것이 매우 드문 일이었다고 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40절)에 대한 즉각적인 반대가 제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과부'가 그 '과부'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되, 그녀 역시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을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어거지만은 아니다.
당시 과부와 고아가 누구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는 이들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반인들보다 피해 대상이 되기가 쉬웠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보호를 받는 것도 힘들었다. 물론 '한 과부'가 '가난'하다는 것은 그 개인의 게으름이나 잘못 때문일 수도 있으나(그리고 이것은 과부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것에 더하여 구조적인 부분이 거의 막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과부'치고 잘 살 수 있었던 이들은 드물었다는 말이다. 삶의 터전도 잃고,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면 조금의 시간만 흐르면 가진 가산을 다 삼키우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던가!
***************
* 뒤에 나웬의 글...
* 과부와 고아를 돌아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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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웬에 대하여...
한 분이 나웬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고 물으셔서... <영혼의 양식> 겉 표지의 날개(겉 표지의 접혀들어간 부분을 '날개'라고 하지요. ^^;)에 있는 내용을 옮겨봅니다;
*****
예수회 사제이며 심리학자이다. 간결한 분량('문장'의 오타가 아닐까? 自由魂^^;)과 언어로 영혼을 맑게 울리는 그의 저서들은 세계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의 큰 호응을 얻어왔다. 또한 그의 책들이 세속적인 명예를 멀리한 채 그리스도적 사명감에 충실했던 삶의 과정에서 쓰여졌기에 현대 교회에 근본적인 도전을 준다.
1932년 네덜란드의 니케르크(Nijkerk)에서 태어난 헨리 나웬은 1957년 예수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그 뒤 다시 6년간 심리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신학과 심리학을 통합하여 연구하였고, 마침내 삼십대에 노틀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971년부터는 예일대학 신학 교수로 재직했다.
1981년 헨리 나웬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 강단을 떠나 페루의 빈민가로 가서 민중들과 함께 하는 삶을 시작했다. 그의 동기는 자신의 풍요로움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었다. 그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에서 강의를 했지만 그 곳에서도 영혼의 안식을 느끼지 못했다. 마침내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정신박약장애자 공동체 라쉐(L'Arche, '라르쉬'가 더 정확한 번역임. 自由魂)의 캐나다 토론토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Daybreak)에서 1996년 9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해 왔다.
그의 저서는 20여권이 넘으며, 그 가운데 잘 알려진 책으로는 <제네시 일기(The Genesee Diary - 이건 나웬이 라르쉬/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가면서 적응해 가는 과정을 기록한 일기입니다. 自由魂)>,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고(Making All Things New)>, <새벽으로 가는 길(The Road to Daybreak)>,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이상 분도 출판사 역간). <영적 발돋움(Reaching Out)>(두란노 역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Life of My Beloved)>(IVP 역간) 등이 있다.
헨리 나웬의 책들이 복음주의자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두 가지 큰 이유는 첫째, 그의 삶의 행적과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신앙 고백이 선명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자리에 대한 추구에 충실했으며, 그 삶의 진통 속에서 묵상과 명상의 기록들이 나왔다. 둘째, 그는 신학자이자 심리학자로서 그가 현대 사회의 문제와 현대인들의 절망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사제로서 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치유책을 제하였다.
***
그 외에 나웬에 대하여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분은 요단출판사에서 '나웬'에 대한 책(나웬이 쓴 책이 아니라...)이 나왔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난번에 돈에 대하여, 그리고 헌금에 대하여 논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심은 하나님께 그 물질이 필요하셔서가 아니라 드리는 자의 마음을 원하시기 때문이므로 우리의 마음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그래서 마음과 함께 드리는 헌금이, 그 마음이 가장 많이 들어간 헌금이 가장 많은 헌금임을 논하였다. 마가복음 12:41-44의 본문에 비추어 이 사상을 더욱 개진해 보도록 하자.
예수님께서는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셨다. 그렇게 앉으신 이유는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시기 위해서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헌금에 대한 교훈을 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연보에 대하여 가르치고자 하셨을까? 본문에 그 직접적인 이유가 제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이 교훈은 단지 헌금에 대한, 거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다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0절에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부자들)이 나오는데, 바로 이어서 나오는 내용이 41절의 '여러 부자'의 많은 헌금과 한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생활비' 전부)이라면,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그저 연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돈과 소유'에 관한 보다 폭넓은 가르침이며, 그러한 가운데 헌금이 이야기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헌금에 대한 가르침에 대하여는 심한 거부반응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재물 드리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그뿐 아니라 재물 일반에 대한 바른 관(觀)을 배워야 한다. 재물(돈, 맘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중요한 자원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돈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하였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심판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대한 바른 가르침은 계속되어져야 한다. 또한 재물에 대한 가르침이 편중화하여 '복 받으라(부자가 되라)'는 내용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재물에 대한 바른 성경적인 개념을 비롯하여 재산을 모으는 바른 방법과 재산을 사용하는 바른 방법까지도 이야기되어져야 한다.
예수님이 보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예수님은 '여러 부자'가 '많이 넣는 것'과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한 고드란트)'을 넣는 것을 보셨다. 물론 이것은 눈에 보이는 단순한 '현상'에 불과했다. 또한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상적인 모습'에 대하여 누가 이의를 제기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많이 소유한 이들이 많이 드리고, 적게 가진 자가 적게 드리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상'을 그냥 그렇게 일반적인 유대인들처럼 당연시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이 현상에 이의(異議)를 제기하신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묵인되어온 순위를 역전시키신다. 누구나 다 부자들이 많이 드렸다고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과부가 더 많이 드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추적하기에 앞서 이 상황을 다시 살펴보자. 특별히 이미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40절의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과 관련하여 본문을 생각해보자. 물론 지금 두 렙돈을 드린 과부가 '가산을 삼키운' 그 과부였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당시에 일반적인 보습이 아니었던가! 그것이 매우 드문 일이었다고 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40절)에 대한 즉각적인 반대가 제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과부'가 그 '과부'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되, 그녀 역시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을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은 어거지만은 아니다.
당시 과부와 고아가 누구에게도 보호받을 수 없는 이들이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반인들보다 피해 대상이 되기가 쉬웠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보호를 받는 것도 힘들었다. 물론 '한 과부'가 '가난'하다는 것은 그 개인의 게으름이나 잘못 때문일 수도 있으나(그리고 이것은 과부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것에 더하여 구조적인 부분이 거의 막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과부'치고 잘 살 수 있었던 이들은 드물었다는 말이다. 삶의 터전도 잃고,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면 조금의 시간만 흐르면 가진 가산을 다 삼키우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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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에 나웬의 글...
* 과부와 고아를 돌아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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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웬에 대하여...
한 분이 나웬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고 물으셔서... <영혼의 양식> 겉 표지의 날개(겉 표지의 접혀들어간 부분을 '날개'라고 하지요. ^^;)에 있는 내용을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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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사제이며 심리학자이다. 간결한 분량('문장'의 오타가 아닐까? 自由魂^^;)과 언어로 영혼을 맑게 울리는 그의 저서들은 세계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의 큰 호응을 얻어왔다. 또한 그의 책들이 세속적인 명예를 멀리한 채 그리스도적 사명감에 충실했던 삶의 과정에서 쓰여졌기에 현대 교회에 근본적인 도전을 준다.
1932년 네덜란드의 니케르크(Nijkerk)에서 태어난 헨리 나웬은 1957년 예수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그 뒤 다시 6년간 심리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신학과 심리학을 통합하여 연구하였고, 마침내 삼십대에 노틀담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971년부터는 예일대학 신학 교수로 재직했다.
1981년 헨리 나웬은 중대한 결심을 하고 강단을 떠나 페루의 빈민가로 가서 민중들과 함께 하는 삶을 시작했다. 그의 동기는 자신의 풍요로움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었다. 그 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에서 강의를 했지만 그 곳에서도 영혼의 안식을 느끼지 못했다. 마침내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정신박약장애자 공동체 라쉐(L'Arche, '라르쉬'가 더 정확한 번역임. 自由魂)의 캐나다 토론토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Daybreak)에서 1996년 9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해 왔다.
그의 저서는 20여권이 넘으며, 그 가운데 잘 알려진 책으로는 <제네시 일기(The Genesee Diary - 이건 나웬이 라르쉬/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가면서 적응해 가는 과정을 기록한 일기입니다. 自由魂)>,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고(Making All Things New)>, <새벽으로 가는 길(The Road to Daybreak)>, <상처받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이상 분도 출판사 역간). <영적 발돋움(Reaching Out)>(두란노 역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Life of My Beloved)>(IVP 역간) 등이 있다.
헨리 나웬의 책들이 복음주의자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두 가지 큰 이유는 첫째, 그의 삶의 행적과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신앙 고백이 선명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자리에 대한 추구에 충실했으며, 그 삶의 진통 속에서 묵상과 명상의 기록들이 나왔다. 둘째, 그는 신학자이자 심리학자로서 그가 현대 사회의 문제와 현대인들의 절망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사제로서 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치유책을 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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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나웬에 대하여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분은 요단출판사에서 '나웬'에 대한 책(나웬이 쓴 책이 아니라...)이 나왔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자유혼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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