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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문화속의 성극

은바리라이프 2009. 6. 25. 20:30

기독교 문화속의 성극
어린시절부터 주일학교를 다녀왔던 사람들 중에는 한번쯤 교회 연극을 해본 아련한 추억들을 마치 색바랜 흑백사진 마냥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도 드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소개되던 백여년전 빨간 벽돌의 근사한 서양 건축 양식인 정동교회(貞洞敎會- 1898년 건평 115평으로 건축된 최초의 본격적 신교 건물)가 들어 서자 그 소식은 온 장안의 화제가 되었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특별한 벼슬아치의 집이 아니고선 기껏해야 기왓집이 아니면 초가집이 전부였던 그시절에 반듯하면서도 세련된 모양의 건물이 들어섰으니 오죽이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을까?
심지어는 신기하고 이국적인 그 건물을 구경하러 지방에서 일부러 올라오는 사람도 있었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고향에 내려가 대단한 자랑거리로 삼았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건물이 국가기관의 건물이나 개인자본가의 건물이 아닌 바로 크리스찬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라는 점에서 일단 기독교는 일반 사람들에게 대단히 미래 지향적이며 문화적이라는 것으로 어필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그건물이 건축된지 백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하자없이 아름다운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초창기의 우리나라 기독교는 지극히 문화적이었으며 그 수준이 백여년을 앞서 있었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 아닐까요?
정동교회의 건물은 그저 한예에 불과 하지만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 왔던 초창기만 해도 한국의 기독교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이나 맹목적인 광신(狂言)과는 거리가 먼 의료사업으로 복음을 전파한다든가 교육사업으로 선교를 하는 생활속의 기독교로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는 기독교로 시작되었던것입니다.
        

하지만 굴곡의 현대사를 거쳐오면서 한국의 기독교는 부흥일변도와 양적팽창으로만 치달려 오느라 기독교 문화니 생활속의 선교니 하는 말은 고사(枯死)되어 버린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랜세월 간절히 기도해왔던 것처럼 교회가 부흥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초창기의 신앙의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의료기관을 설립하는 교회는 찾아 볼 수가 없고 다른 분야 역시 마찬가지 꼴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양하게 발전된 문화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여유와 아름다운 삶을 가꾼다고 하였는데 다양한 문화는 커녕 그 비슷한 것도 찾아 볼 수 없는 오늘날의 크리스찬들의 신앙생활이란 오죽이나 할까.
주일날 아침엔 교회에 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열심히 아멘 소리를 외쳤다가도 저녁엔 집에 돌아와 폭력비디오를 들여다 보고 있다던가 삼류 멜로드라마를 넋놓고 바라보며 눈물이나 찍어내는 이른바 신앙생활 따로 문화생활 따로의 절룩발이 크리스찬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크리스찬이라고 해서 즐겁게 놀지 말라는 법도 없을 텐데 이상하게도 건전한 놀이 문화는 다양하게 보급되지 못하고 발전되지를 못해서 정작 성도들끼리 모여서 즐거운 시간이라도 보낼라치면 무얼 해야 좋을지 몰라 오죽하면 서로 눈치나 보다가 기껏 윷놀이를 하거나 심하면 내숭(?)을 버리고 팔 걷어 부쳐 아예 고스톱으로 밤새워 친목을 도모하는 교회도 있을라고...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오로지 5백여장의 찬송가만이 크리스찬의 음악인냥 생각하고 있다 보니 예배시간이 아닌 친목장소에선 찬송가를 부르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유행가를 부를 수도 없어서 과연 무얼 불러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사례가 어디 남의 일이었던가?
거룩한 예배시간에야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당연 하지만 가정 주부가 빨래를 하거나 설겆이를 할때 흥겹게 흥얼 거릴 수 있는 복음성가와 청소년들이 교회의 친구를 만나 함께 손뼉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때에 부담없이 부를 수 있는 복음성가도 많이 있는데 어떤 목회자나 크리스챤은 찬송가 이외의 음악은 아예 사탄의 일종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니 음악 문화가 제대로 발달 할리가 있겠는가 말입니다.
이러한 기독교 문화의 부재속에서 유독 연극부문만이 활성해지기 만을 바란다는 것은 역시 무리일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일반 연극무대나 방송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연기자들의 데뷰무대가 바로 어린시절에 다니던 동네의 작은교회에서 경험했던 크리스마스 발표무대였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을 만큼 교회 무대는 이나라의 연극문화를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예로 들지 않아도 어린시절부터 주일학교를 다녀왔던 사람들 중에는 한번쯤 교회 연극을 해본 아련한 추억들을 마치 색바랜 흑백사진 마냥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도 드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의 기독교 연극은 일반연극에 버금 가도록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얼굴에 분칠을 하고 조명을 받으며 연기를 하는 광대는 천한 계층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도 큰 이유가 있습니다.
장인(匠人)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굳이 아랫것 정도로만 알려고 했던 그동안의 민족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목회자들이 성스러운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분칠을 한 연기자들이 강단에 올라가서 연기를 하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껏 인심을 쓴다는 것이 일년에 단한번 성탄절에만 그것을 허락함으로 간신히 명맥은 유지해오고 있지만 기독교 연극이 체계적으로 연구된다거나 기독교 연극 인구가 늘어나면서 다양해지는 것이 불가능해졌던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기독교 문화를 접하게 해준다거나 소개해주는 것엔 등한시하고 오로지 기복신앙만을 가르쳐 왔으며, 그리고 오락을 즐기고 여유를 누리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나태함이라고 가르쳐 왔고 성도들 조차 그렇게 알고 길들여졌기 때문에 문화적인 욕구를 표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뜻있는 기독교연극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에 의해 성극대본이 창작되어지고 선교극단이 조직되어 가뭄에 콩나듯이 대외공연을 시도하거나 아니면 고아원 시골교회등을 찾아 다니며 순회공연을 함으로써 그명맥을 유지해 왔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 기독교 문화속의 성극이라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답답할 정도로 한심스러운 기독교 문화속의 성극을 이야기 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못한 우리의 자화상을 들여다 보며 한숨만 쉬자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지적한 것들을 가슴에 새기고 그것들을 하나씩 극복해 나가면 분명히 크리스찬들은 더이상 성극에 대한 갈증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고 성극은 다양하게 발전해 나갈 수 있을리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