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비극적 죽음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 ||||
| 김충렬 박사의 ‘살자’ (19)- 보복성 자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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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 ||||
| Ⅰ.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Ⅱ. 자살의 역사적 이해 Ⅲ. 자살의 원인 Ⅳ. 자살의 유형-(5) 보복성 자살 우리는 지금 사상 초유의 사건에 직면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다. 온 국민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신 분 앞에 애도하며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자살을 선택했을까?” 이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애도 기간에 걸맞는 태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비극적 죽음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5. 보복성 자살 보복성 자살은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에게 보복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자살이 어떻게 보복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의아심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자살은 때로 그렇게 보복적인 성격으로 시도되기도 한다.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해 충분히 타인을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보복성 자살은 스스로를 파괴하면서 실제로는 타인을 공격하고 타인을 벌주려는 가해적 성격을 담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심각하게 침해를 주려는 목적으로 시행되는 자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보복성 자살은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을 죽이는 일종의 반전살인(反轉殺人)으로 설명된다. 보복성 자살은 어떤 형태든 간에 상당히 복합적인 측면이 있다. 겉으로는 단순히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복하려는 의도로 죽음이라는 강력한 수단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 입증, 완벽한 지배력 실현, 그리고 타인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히는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완벽하게 지배하려는 목적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뿐 아니라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여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어렵게 만든다. 보복성 자살은 성격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1) 항의성 자살 항의성 자살은 죽음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경우다. 자신을 강력히 변호하고자 하지만 힘이 미약하다고 생각할 때 시도된다. 사회적 배경이나 힘을 행사할 수 없을 때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항의적 자살이 보복적이면서도 자신을 강력하게 변호하려는 목적을 갖는 이유다. 항의성 자살은 어떤 사실에 대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이를 입증하려는 방법으로 극단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래서 항의성 자살은 대개 소심하거나 부정성이 많은 사람들이 시도한다. 자신의 정당성을 곧바로 입증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죽음으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7년 10월 15일 C백화점 3층 화장실에서 여자 손님의 가방이 분실됐다. 이때 중3 남학생 강모 군이 용의자로 지목됐다. 강 군은 부모가 사건 조사에 참여하기 위해 외출한 사이 부모에게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아파트 13층에서 삶을 마감했다. 18일 백화점 CCTV를 통해 확인한 결과 그는 범인이 아니었음이 확인됐다. 그는 우연히 억울한 누명을 썼고,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지도 못한 채 자살이라는 방식을 택했다. 너무 억울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백화점 CCTV를 통해 즉시 확인했더라면 누명이 벗겨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욕적이고 억울한 상황을 조금만 견뎠더라면 죽을 필요가 없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항의성 자살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자 칼 메닝거(Karl Menninger)가 말한 자살의 구성요소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는 자살에는 세 가지 구성요소, 즉 죽이고 싶은 욕망, 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망, 죽고 싶은 욕망 등이 있다고 말했다. 같은 정신분석학자인 멜라니 클라인은 이런 요소들이 고도로 복합적이며 애매모호해서 서로 분리시키기 어렵다고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어떤 속성을 제거해 다른 속성을 해방시킬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빠져 그 속성만을 죽여 없애고 싶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항의성 자살은 죽이고 싶기도 하고 죽임 당하고도 싶은 욕망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면 죽음 그 자체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손상된 부분을 회복시키고 건전하게 생장시켜 주는 점이 더 중요하다. 단순히 자신의 항의 의도가 전달되면 된다. 그러기에 이런 자살은 결국 바르게 살려다 생을 포기하게 되는 꼴이 된다. 2) 결백성 자살 결백성 자살은 자신의 무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고 자살하는 것은 자기 변호적인 성격이 있지만, 정당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항의성 자살은 자기를 변호함에 있어 항의적인 측면이라면, 결백성 자살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무게를 둔다. 항의성 자살이 힘에 무게를 둔다면, 결백성 자살은 혐의에 중심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어떤 사건이나 사실에 대해 억울하다는 점과 그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점에서 같다. 죽음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완벽하게 지배하려는 목적을 갖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방편으로 죽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실제 사소한 일이 발단이 돼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문방구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오후 4시경 김모 양은 친구 2명과 귀가하던 중 13단지에 있는 문방구에서 1백원짜리 아이스크림 2개를 구입하고 2백원을 지불했지만, 주인은 1백원밖에 받지 않았다고 해 시비가 벌어졌다. 주인이 학생들의 말을 믿지 않고 욕까지 하자 김 양도 화가 나서 욕을 했고, 급기야 주인은 김 양의 멱살을 잡고 150m 떨어진 학교 교장실까지 그들을 끌고 갔다. 이후 이들은 5시경 집으로 귀가했고, 김 양은 이들과 헤어져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6시경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단돈 1백원 때문에 귀중한 생명이 희생되고 무남독녀 외동딸이 희생된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김 양은 평소 밝고 활동적이며 인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문방구 주인으로부터 크게 모욕을 당한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는 마음에서 극단적인 방식을 택했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볼 수 없다. 이런 작은 일로 죽음을 선택한 데는 그동안 쌓여온 김 양의 부정성이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겉으로는 활달해 보이고 문제가 없어 보여도 속으로는 부정성이 쌓였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과 달리 타인에게는 전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김 양에게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과는 달리 부정성이 많이 축적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부정성은 그 특성상 분노를 유발하고, 그것이 심해지면서 지나치게 쌓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폭발하게 된다. 이 부정성에는 반드시 두 가지 특성이 함께하는데, 억울하다는 것과 복수하겠다는 것이다. 작은 일을 발단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비인간적인 삶,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모욕적인 삶을 견뎌내야 할 경우가 생긴다. 이런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상황에 처할 때 자살 충동을 느낀다는 사실은 오늘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3) 자기 변호성 자살 자기 변호성 자살은 죽음으로 타인에게서 자신을 변호하려는 경우다. 이는 자신이 너무나 미약하다는 차원에서 일종의 절망적 수단으로 선택된다. 자기 변호성 자살은 힘이 약하거나 내면이 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선택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에서 얼마든지 여러 수단을 동원해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 가해적으로 복수할 수 있는데도 죽음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 변호성 자살은 매우 절망적인 자살이다. 원시 사회에서는 복수의 심리적 과정이 매우 간단했다. 자살자의 망령이 그를 박해했던 사람을 파멸시키거나, 그의 자살 행위에 어쩔 수 없이 이끌려 친척들이 그 일을 대신하거나, 혹은 그 부족의 냉혹한 규율이 자살자의 원수로 하여금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자살하도록 강요했다. 나라의 관습에 따라 다르지만, 그러한 상황에서의 자살은 이상할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자살자 자신이 진짜 죽지는 않을 거라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자살을 시도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자살자는 복합적이지만 신비한 의식(儀式)으로 시작하여 원수의 죽음으로 끝나는 주술적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자기 변호성 자살은 ‘죽음의 성향(the death trend)’에서 이해할 수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비탄의 과정은 상실한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이 비탄에 빠진 사람의 자아 내부에서 되찾아졌을 때 끝나게 된다. 그러나 상실을 경험하게 되면 투사의 완만한 과정이 한결 어려워지고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른다. 부모나 부모와 마찬가지로 열렬히 따르던 사람을 여읜 아동은 죄의식과 분노, 그리고 극심한 자포자기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고한 아동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그의 자연 발생적 슬픔은 내면의 고통이 된다. 까닭을 알 수 없고 당치도 않은 이 적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동은 그 적의를 자신의 내부에서 분리시켜 죽은 사람에게 투사시킨다. 그 결과 공상을 통한 동일시는 제어할 수 없는 온갖 공포심을 수반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는 가슴 깊은 곳에 살의를 품은 사자(死者)를 간직하며, 만족을 모르는 그 ‘분신(Doppelgaenger)’은 결코 진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를 소리쳐 알리며,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자기 변호성 자살은 아마도 ‘죽음의 성향’이 생의 만년에 많은 자살자들의 이상하리만큼 확고부동한 성격과 위로할 수 없는 완고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다. 몽유병자나 신들린 경험이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이들의 움직임은 어둡고 보이지 않는 중심부로부터 조종받는다. 그들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목적은 그들의 목숨을 저버릴 적당한 구실을 찾아내려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그 자살 행위는 자살이라는 최종 행위의 직접적 이유라든가 상당한 보상, 맹목적인 충동 등이 아무리 그럴싸한 것들이라도 근본적으로는 악귀를 쫒아내려는 시도다. 4) 공격성 자살 공격성 자살은 타인을 벌주려는 의도에서 시도하는 죽음이다. 자살로 타인을 심각하게 공격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다. 심각한 공격이란 자신에게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는 타인에게 앙갚음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음으로 엄청나게 공격하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공격성 자살은 알고 보면 타인을 공격하기 위해 자신이 죽는 결과를 초래한다. 타인에게 공격을 가하기 위한 분노를 자살로 표출하는 것으로, 해석에 있어서는 전술한 결백성 자살과 흡사하다. 부정성을 많이 축적해 분노하게 되고 그것이 공격성으로 표출돼 마침내 자신을 파괴하는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심리적으로 ‘역설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타인을 공격하려다 자신을 죽이는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공격성이 가장 노골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흔히 심리적 이중성이 나타난다. “죽어버릴테야. 내가 죽으면 속이 상하겠지”라고 부모에게 말하는 화난 사람은 단지 앙갚음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식과 분노를 그의 삶을 통제하는 사람들에게 투사시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는 투사에 의한 동일시 기제에 의해, 즉 자신은 희생자요 그들은 가해자라는 심리과정에 의해 적대감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한다. 그들은 분노 때문에 보복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부정성에 의해 불살라지는 꼴이다. 내부의 부정적 요소들을 더 이상 감내할 수가 없다고 느껴, 자신의 생명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막강한 방법을 통해 자신의 파괴과정 요소들을 떨침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죄의식과 당혹감을 갖게 만든다. 공격성 자살 하면 고결하게 체면을 지키려 했던 로마인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신조와 명성을 위해 침착하게 칼 위에 몸을 덮쳐 자살하기도 했다. 그들은 죽음으로 순화되고 이상화된 자신의 이미지가 남아 있기를 바랬다. 이처럼 로마인과 같은 고상한 이상이 없을 경우 자살은 단지 자신이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것을 확인하는 가장 극단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 뒤에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다시 살아 남으리라는 믿음, 즉 일종의 사후 재생 문제와 관계가 있다. 마치 천국이 격렬하게 전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했던 원시 전사들의 사고 방식과도 흡사하다. 이 전사들은 내세의 지복을 영영 얻을 수 없게 만드는 질병이나 노쇠에 의한 불명예스러운 자연사를 예방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모를 일이다. 5) 결론: 보복성 자살은 청소년들에게 나타나기 쉽다 이상에서 우리는 보복성 자살에 대하여 다루었다. 보복성 자살은 매우 감정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에게 나타나기 쉬운 자살이다. 사례에 든 것도 모두 청소년들이었다. 아직 전두엽의 발달이 이뤄지지 못해 이성적 판단이 약한 청소년들은 순간의 감정에 휘둘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청소년들에게 심한 모욕이 담긴 자극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를 들어 ‘누구는 1등 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는 부모의 꾸중, ‘돈을 네가 훔쳤지?’ 하는 의심의 추궁이 일어날 경우 청소년들은 반발이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이때 그들에게는 ‘내가 죽음으로써 너희도 고통을 받아라’는 보복적 심리가 작용하기 쉽다. 보복성 자살이 가족 내 갈등이 많은 청소년에게서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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