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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의 '거지 나사로' 노무현

은바리라이프 2009. 6. 3. 17:48

2009년 5월의 '거지 나사로' 노무현
'나사로' 노무현을 버려둔 '부자'는 뒤늦게 한탄한다


[뉴스앤조이] 2009년 05월 27일
 
1. 부자는 왜 지옥을 가게 되었을까?

예수님의 많은 비유 중,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누가복음 16:19~31)는 두 가지 면에서 무척 독특하다. 아마도 어지간한 신자라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구호를 이젠 좀 촌스럽다 여길 터인데, 실제 성경도 사후 천국과 지옥에 대한 가르침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압도적인 비중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더 많이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 부자와 거지 비유는 매우 드문, 게다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천국과 지옥의 극명한 대조 스케치이다. 이것은 지옥에 간 그 부자의 죄가 그만큼 무겁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라 보아도 무리없을 것이다.

또 하나의 독특한 포인트를 얘기하기 전에, 그렇다면 부자의 그 무거운 죄가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헌데 이 비유에는 부자가 왜 지옥을, 거지가 왜 천국을 갔는지에 대한 명시적인 설명이 없다. 그러니 우리는 본문을 근거로 그 이유를 최대한 추정해 보아야 한다.

우선 그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에 걸맞게 믿음(물론 아직은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겠다)이 없어서 지옥에 간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지옥에서도 천국의 아브라함을 보고 ‘아버지(조상님)’라 칭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24절) 또한 아브라함은, 부자의 형제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음으로 지옥을 면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29절), 이 역시 부자와 그 형제들이 모세와 예언자들로 대표되는 구약성경을 읽고 배우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유대 신앙인들임을 뒷받침해주는 부분이다.

하나님을 믿었음이 분명해 보이는 이 부자는, 그럼 왜 지옥으로 갔는가? 아브라함은 거지는 생전에 괴로움을, 부자는 생전에 호사를 누린 것이 지금의 결과라고 말한다. (25절) 그런데 이것이 납득이 가는 설명인가? 물론 예수님은, 또한 성경은 돈이 구원의 걸림돌이며 죄의 뿌리가 됨을 누누이 강조한다. 아무리 신앙의 선조들이 부유함을 누린 사례가 있다 하여도,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흡족하지는 않다. 사실 아브라함이야말로 사설 군대까지 거느린 거부였지 않은가? 생전의 부의 여부가 구원을 가른다는 것은 너무 단순한 흑백논리가 아닌가?

그러니 다시 한번 아브라함이 제시한 해법을 보아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면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똑똑히 말한다. 그런데 모세와 예언자들의 그 수많은 말 중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두 가지 큰 줄기로 나눠 요약하면, ‘우상숭배 금지’와 '사회정의 실현‘ 이라 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만을 경건히 섬길 것과 공평하고 정의로운 공동체가 될 것을 반복하여 가르쳤으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가벼이 여기고 우상을 마음껏 섬기며 공의를 파괴하고 ’고아와 과부‘를 괴롭혔다. 예언자들은 그 죄악들을 온몸으로 규탄하며 절규하였으나,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멸망과 포로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신구약 중간기에 유다 백성들은 격변을 통해 신앙을 각성하여, 우상숭배의 문제를 거의 타파하기에 이르렀다. 예수님 당시에는 오히려 동전의 가이사 황제 초상을 문제삼을 만큼 결벽증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예수님도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정의와 공의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비유속의 부자와 거지의 상황도 그러하다. 부자는 날마다 사치를 즐기지만 바로 그 집 앞의 거지는 헐어버린 몸을 개로부터도 지키지 못하며 음식 찌꺼기로 연명하는, 빈부간의 ‘건널 수 없는 큰 구렁’ 이 존재하는 것이다.

허나 모세와 예언자들은 언제나 ‘고아와 과부’로 대변되는 약자들을 돌보고 억압하지 말라고 엄중히 가르쳤다. 자기 땅의 곡식조차 모조리 추수하지 말고, 자기 나무의 과일도 전부 따지 말고 남겨서, 가난한 자들의 양식이 되게 하라는, 너무도 섬세하고 눈물겨운 가르침까지도 그들은 말하였다. 이것은 심지어 세상의 끝날까지 지속되어야 할 교훈이다. 모세는 말한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명기 15:11)

비유는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함’이 ‘모세와 예언자들에게서 들어야 할 답’ 이라고 명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자와 거지의 대조가 의도적으로 배치된 것과, 이들의 사후 묘사가 부유함을 하나님의 복으로 믿던 당시(실은 지금도) 인식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임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결론은 이것이 되어야 하겠다. 부자는, 바로 집 앞의 단 한 사람에게조차 그 손을 펴지 않고, 곤란과 궁핍의 고통속에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다가, 죽어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2. 그 거지는 왜 이름을 가졌을까?

부자와 거지 비유가 가지는 또 하나의 독특함은, 예수님의 많은 비유 중 유일하게 등장인물이 이름을 가졌다는 점이다. 비유속의 거지는 나사로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거지 외에는 비유속 그 누구에게도 이름을 붙이지 않으셨다. 심지어 같이 등장하는 부자도 받지 못한 이름을, 대체 왜 이 거지만 특별히(?) 받은 것일까?

나는 오랫동안 이 점이 의문이었지만 지금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부자에게도 없는 이름이 거지에게는 있었다는 점이 청중들의 고정관념을 건드리는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 이를 통해 받은 충격만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 나는 라디오 설교를 무심히 듣다가 이 비유가 나오길래 잠시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에선 해당 본문이 낭독되었다.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이 본문 가운데 다음의 구절이 나의 마음을 강타했다.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나사로를 보내어…

나사로를 보내어…

그렇다. 부자는 “당신 품의 사람을” 보내 달라고도, “그 거지를” 보내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부자는 아브라함 품에 안긴 거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뿐 아니라,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인 것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한 때 부자가 거지의 존재를 몰랐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저택의 정문 한가운데로만 종들에 둘러싸여 다니면 구석에 쓰러져있는 거지를 못 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부자는 거지를 잘 알았다. 자기 집 앞에 거지가 있음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의 이름까지 훤히 알고 있다가, 그가 저 멀리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 단박에 “나사로”를 호명할 수 있었다. 이리도 잘 아는 거지가 가난과 질병으로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었으니, 부자가 어찌 지옥행을 면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작명 의도가 정확히 이것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굳이 거지에게 이름을 붙여 부자의 몰인정함을 알려주신 예수님의 이 세밀한 장치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3. 부자는 나사로를 알았는가?

그런데, 부자는 정말 “나사로”를 잘 알았던 것일까? 과연 그런가? 부자는 무엇을 알았는가? 나사로의 굶주림을 알았는가? 남이 먹다 버린 찌꺼기를 입에 넣는 비통함을 알았는가? 쉬지 않고 괴롭히는 헐어빠진 몸뚱이의 통증을 알았는가? 길거리의 개가 와서 상처를 핥아대는 참혹함을 알았는가? 인간적인 삶의 한조각도 누릴 수 없는 끔찍한 인생에 대해 부자는 대체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이것은 부자뿐 아니라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다. 우리의 대문 앞에는 쓰러진 거지가 없기에 우리는 편히 부자를 비난할 수 있다. 그리고 나름의 정성으로 ‘불우이웃’을 돕는다.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까?

우리는 ‘그들’을 안다. 우리의 집에, 직장에, 이웃에, 교회에, 모임에 있는 그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얼굴을 알고 목소리를 알고 옷차림을 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들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아는가? 그들의 숨은 고통은? 그들을 짓누르는 상처는? 그들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는가? 그들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4. 2009년 5월의 ‘거지 나사로’ 노무현

불과 얼마 전까지 제도 권력의 꼭대기에 서 있었던 노무현이란 사람, 그는 2009년 5월 한국의 거지 나사로가 되었다. 그가 언제 일용할 것이 떨어지기라도 했던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거지였다.

성경은 가난 못지않게 재판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재판을 반드시 공평하게 할 것을 끊임없이 경고한다. 약자들을 돌보는 ‘정의’와 함께 공정히 판결하는 ‘공의’를 언제나 강조한다. 예수님조차 불의한 재판의 희생물로 죽음을 마주하셨을 만큼, 재판의 공정성은 중대한 과제였기에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현대 재판의 출발점인 수사에서부터 노무현은 극도로 억압적인 불공정과 불의에 짓눌려 있었다. 검찰의 칼날은 그의 주변 사람들을 사돈의 팔촌의 옆집의 이십촌까지도 마구잡이로 들쑤시고 괴롭혀, 사람을 아끼는 그의 숨통을 옥죄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확증이라곤 한 톨도 나오지 않았지만, 법으로 엄정하게 금지한 혐의 사실은 날이면 날마다 쏟아져나와, 그는 어느새 부패한 시정잡배의 몰골이 되었고, 급기야 실질적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만신창이가 된 노무현은 국민들의 집 대문 앞에 쓰러져 신음했다. 누군가는 먹을 것을 나눠 주었고 누군가는 약을 발라 주었다. 그러나 충분치 못했다. 그는 결국 거지 나사로의 모습으로 이 땅을 떠났다.  

5. ‘나사로’ 노무현을 버려둔 ‘부자’는 한탄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담한 죽음 앞에서, 나는 나사로를 버려둔 부자가 바로 나임을 깨닫고 가슴을 친다. 나는 그를 잘 알았다. 그의 이름과 얼굴과 목소리를 알았다. 현실 권력을 놓은 지금도 여전히 이 땅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았다. 그가 행했던 일들을 알았고,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며 빨간펜을 그었다. 시골집에서 농부가 되어가는 그를 알았고, 사람이 들끓고 웃음꽃이 만발하던 그의 집이 적막강산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를 몰랐다. 그가 고통과 공포와 통한속에 하루하루 목이 졸려가고 있는 것을 몰랐다. 권좌에 앉아있던 내내 돌팔매와 조롱과 거짓말에 시달리다, 이제 겨우 편히 웃으며 땅을 일구던 그가, 다시금 쏟아지는 거짓과 기만의 돌덩이에 쓰러지며 절망으로 빠져드는 심정을 나는 몰랐다. 그저 얼핏 봐도 무리하기 짝이 없는 수사에 혀나 끌끌 차고, 그러게 왜 빌미를 줬냐고 투덜거리며, 무심히 넘겼을 뿐이다.

족벌언론은 물론 독립언론도 검찰의 나발 불기에 장단을 맞추었으니 언론을 탓할까? 인터넷 활발하기론 세계 최고인 나라에 살면서 그게 무슨 핑계가 되겠는가? 나에게 부족했던 것이 관심 말고 도대체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예수님은 부자가 나사로를 약탈해서 거지로 만들었다고 하시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나사로는 그 집 앞에 머물 수 없었을 터. 지옥불을 댓가로 치른 부자의 죄는 거지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단지 그대로 내버려둔 것이었다. 나는 청와대도 검찰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류와 실책은 있었을지언정 국민을 팔아 제 뱃속을 채우려 탐욕부린 적 없는 사람이 헌데를 앓으며 고통하는 것을 그저 내버려둔 사람이다. 나는 지옥과 영원한 불이라는 원색적이고 촌스러운 상징을, 상징이 아닌 실제로 맞닥뜨리며 참회의 자리에 엎드린다.  

6. 뒤늦은 기도로 그 분을 보낸다

이제와 나는 뒤늦은 기도를 한다. 그가 궁핍할 때 그를 위해 기도하며 그의 억울함을 알려야 했다. 그가 가버린 지금, 그 때 했어야 할 기도를 이제서야 한다. 그리고, 이 땅에서 언제까지나 그치지 않고 나타날, 그를 닮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힘써 기도해야 한다. 움켜쥐었던 손을 펴 그들의 허기를 조금이라도 채워줘야 한다.

나와 같은 한탄을 하고 있는 당신들에게 부탁하노니, 다시 힘내어 같이 기도해 달라. 떠나간 나사로가 못다 이룬 꿈이 이뤄지도록. 아직 우리 곁에 있는 나사로들에게 양식과 위로가 전해지도록. 더이상 가련한 나사로가 나오지 않도록. 더이상 억압과 기만을 일삼는 자들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날마다 깊이 뿌리를 내려가도록. 그리고, 우리의 손이 나사로들의 곤란과 궁핍앞에 서슴없이 펼쳐질 수 있도록.
신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