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후 선택’, 모두의 책임이다 | ||||
| 김충렬 박사의 ‘살자’ (20)- 최후 수단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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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충렬 박사(한일장신대·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 ||||
| Ⅰ. 기독교인 자살의 심각성 Ⅱ. 자살의 역사적 이해 Ⅲ. 자살의 원인 Ⅳ. 자살의 유형-(6) 최후 수단성 자살 우리는 지난 주간 국가적으로 큰 일을 치뤘다.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장례를 국민장으로 치룬 사상 초유의 일이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을 자살의 유형에서 최후 수단으로서의 죽음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그 분의 죽음은 최후 수단적이기는 하나 여러 면에서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 우리의 정치사를 변혁하는 요청이요, 누구만의 책임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측면도 있다는 점에서 공범적 측면이 강하다. 검찰이 시퍼런 칼날을 휘둘러 범인을 사냥하듯 하고 언론은 그것을 연일 중계하다시피 보도하면서 분위기를 띄울 때 우리는 그 분이 힘들어 하는 얼굴의 고뇌를 읽고서도 도도한 물결을 이루며 막아주지 못했지 않은가 말이다. 수많은 국민이 가슴에 눈물로 말했던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는 이를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힘을 다해 살아있는 권력 앞에 저항하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오히려 모두 몸을 사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죄인으로 몰아가는 일에 일조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이 미안해 더욱 눈물로 통곡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분의 뜻을 기리고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비겁하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 분을 앞세우고, 또 정치적인 상황을 반전하려는 구실로 삼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것은 그 분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다만 가신 분의 뜻을 깊이 새겨 새로운 변혁을 시도하는 것은 우리 남은 자에게 남겨진 몫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최후 수단성 자살이란 더 이상 어떻게 할 힘이 없다고 판단될 때 죽음으로 대응하는 행동이다. 삶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해도 상황을 반전시키거나 자신의 정당성이 인정되거나 수용되지 않을 때 취하는 마지막 수단이다. 최근 일어난 전직 대통령의 죽음도 이런 관점에서 그다지 틀리지 않는다. 물론 성격상 복합적 측면이 있기에 단순화시킬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최후 수단적인 측면이 지배적이다. 이런 최후 수단성 자살에는 다음 유형이 있다. 1) 상황 반전으로서의 자살 상황 반전은 모든 인간이 꿈꾸는 심리다. 이런 경우는 자신이 불리하다고 느끼는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이 상황을 원하지 않고, 조금 다르게 됐으면 하는 상태는 매우 억울한 심리에 기초해 있다. 물론 그 상황은 자신이 잘못해 초래된 경우일 수 있고, 자신과는 상관없이 이뤄진 경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매우 불리해진 상황을 피하고 싶어 반전을 기대하는 것이다. 상황을 반전시켜 현실에서 운신의 폭을 안정되게 만들고 심리적으로 편안해지기를 기대한다. 그런 이유로 상황 반전은 자신이 매우 불리해진 경우 보다 정당한 가치로 평가받으려는 심리에 기초한다. 최근 우리는 학업 부담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이 성적을 비관, 자살하는 사례를 많이 접했다. 또 사업 실패자들이 자살사이트를 통해 동반 자살하는 사건도 경험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30명 이상이 자살을 시도하고 있어 이미 OECD 국가들 중 1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동반 자살에 유난히 관심을 보인 것이 특이하다. 인터넷에 중독된 청소년들이 자살하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상황을 반전시키려다 좌절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반전은 심리적인 원인이 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심리적 인식이 상황을 더 무겁고 힘들게 만든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인지심리학자인 바우마이스터(Baumaister)는 ‘자기로부터의 도피’로 규정한다. 상황을 반전시키려는 노력이 사실상 자신을 회피하려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우마이스터는 자살을 ‘자기로부터의 도피‘로 개념화하면서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기대와 현실의 괴리다. 개인이 이루고자 하는 기대 수준은 높지만 현실적인 상태가 그에 도달하지 못할 때 기대와 현실 간에 괴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둘째, 자기 비난과 부정적 평가의 결과다. 기대와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긴 이유를 자기 탓으로 돌려 자기 비난과 부정적인 자기 평가를 한다. 셋째, 고통스러운 자기 지각의 증가다. 주의 초점이 자신에게 돌려져 고통스러운 자기 지각이 커지고 자신을 더욱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넷째, 부정적 정서상태에 빠진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 상태가 초래된다. 다섯째, 인지적 몰락의 상태다. 고통스러운 생각과 감정을 없애줄 수 있는 수단을 갈구하게 돼 ’인지적 몰락(cognotive deconstruction)'상태가 된다. 여기서 인지적 몰락은 정신 기능이 협소화되는 상태로, 모든 것에 대한 의미부여를 거부하고 피상적이고 무가치하게 지각하고 해석하는 정신 상태다. 이러한 정신 상태는 자살을 가로막던 여러가지 내적 억제력을 약화시켜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한다고 봤다. 이는 바우마이스터의 이론이 절망 요인, 우울감과 같은 정서적 요인, 단기적 위험 요인과 자살과의 관계, 우울증을 포함한 다양한 병리 집단에서 나타나는 자살의 공통적 기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유다. 2) 명예회복으로서의 자살 명예회복으로서의 자살은 자신의 행동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 때 일어난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기를 원하지만, 때로 정반대되는 평가를 받는 경우도 있다.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지만 기왕이면 잘한 것으로 평가받고자 하는 심리가 작용한다. 그런데 반대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때 억울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일로든 실추된 자신의 이름과 이미지를 회복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노력이 힘에 부쳐 한계를 느끼고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마지막에 죽음으로 그 정당성 입증을 시도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명예회복으로서의 자살은 대개 남성들이 주로 시도한다. 일로 자신의 능력을 평가받으려 하는 심리 때문이다. 남성은 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 명예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명예를 위해 살고, 여자는 사랑을 위해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자신의 힘이 한계에 도달할 때, 그리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심리적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남성은 자살을 시도한다. 이런 점에서 명예회복으로서의 자살은 역사적으로 군인들이나 영웅들에게서 많이 일어났다. 전쟁에서 포로가 된 경우나 성공한 자리에서 치명적인 모욕을 당한 경우 등이다. 불명예스럽게 도망치거나,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군인의 특성이다. 그런 이유로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자살하는 것은 군인들 특유의 것이었다. 적의 손에 놀아나는 것은 군인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이기에 패배자가 되는 참혹함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사가 발레르 막심(Valere Maxime), 플루타르크(Plutarque), 플린느(Pline), 타키투스(Tacitus), 디오도레(Diodore)와 케사르(Cesar)를 비롯한 고대의 저술가들은 모두 사령관이나 당대의 명사, 또는 부대원 전부가 이러한 이유로 자살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전세계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서나 이런 일은 일어나고 있다. 평소 그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서도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명예회복을 시도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죽을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당당히 싸우다 죽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왕 크세르크세스로부터 텟살리아와 보이오티아 지방을 연결하는 협로를 지켜내는 임무를 부여받은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와 3백명의 스파르타 시민이 그런 경우다. 3) 정치적 위기로서의 자살 정치적 위기로서의 자살은 정권이 바뀌어 처형당해야 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일종의 정치적 보복으로, 전에 정권을 잡은 사람을 죄인 취급하려는 상황에서 일어난다. 그런 이유로 정치적 위기로서의 자살은 정치적으로 실패해 죽음을 당하는 정도의 상황에서 일어난다. 수만 명의 자살자를 낸 프랑스 혁명은 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전쟁의 와중에는 많은 죄수들이 교도소 생활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거나, 어차피 처형될 것이므로 미리 자살해버리는 일이 많았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는 다른 사조에 억눌리게 되고, 때로는 불의의 반계몽주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며 목숨을 끊어 자신들의 이상을 지키기도 한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은데다 믿고 있던 것이 모두 무너져버리면 사람들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살한다. 정치적으로 힘을 발휘하던 것과 달리 정권이 바뀌어 힘을 잃게 되면 새로운 권력으로부터 압박이 시작된다. 그 압박은 견디기 어려운 심리적 부담을 증가시킨다. 이는 그들이 추구하던 이상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 심리적 고통이 가중되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기 지롱드파에서 자살이 유행했던 것도 지롱드파가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신적 압박을 받은 원인이 더 컸다. 여기는 소비에트 혁명이 실패했을 때 나타났던 심리적 매커니즘을 들 수 있다. 혁명의 실패가 무조건 자살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혁명가 중에서도 번민에 잘 빠지고 쉽게 과격해지는 사람들이 자살하기 때문이다. 레닌이 죽은 후 소련 상황을 보면, 스탈린 전제 시대가 차차 확립돼 레닌 숭배자의 눈에는 이상이 무너진 것처럼 보였을 뿐 아니라 싸울 때도 공통의 척도 없이 공포로 추락하는 것처럼 생각됐다. 사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소련에서는 혁명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살이 유행했다. 1956년 헝가리 반공의거는 이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예속돼 있던 헝가리 국민들이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게 된 사건이었다. 이후 수백명이 자살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소련군에 의해 희망을 모두 빼앗긴 프라하의 봄에, 다른 해보다 자살률이 5배 높았다. 포르투갈에서도 카네이션 혁명 때 비폭력 혁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결과를 보였다. 프랑스에서는 1968년 파업과 데모가 확대됐던 5월, 파리의 자살률이 2배 증가했다. 4) 투쟁으로서의 자살 자살은 최후 투쟁의 의미를 갖는다. 자신의 죽음으로 마지막까지 항거하고 투쟁하는 행위다. 이런 점에서 투쟁으로서의 자살은 현재의 부당한 상황을 자신의 몸을 던져 막는 것이다. 몸을 던져 막는 것은 마지막 남은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힘이 없고 남은 것은 목숨 하나 뿐이므로 이것을 동원해 마지막으로 가하는 일종의 육탄공격인 셈이다. 이같은 경우는 비인간적인 대우나 모욕적인 삶이 자행되고 있다고 판단될 때 몸을 던져 투쟁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살다보면 때로는 비인간적인 삶,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모욕적인 굴욕을 당하는 때가 있다. 이런 상황을 잘 견뎌내야 하지만, 자신의 힘의 한계를 느끼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인간은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상황에 처할 때 자살 충동을 느낀다. 이 경우 당사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생명을 스스로 버렸다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상황,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이 스스로 도울 수 있는 수단이라고 판단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힘에 의해 압박을 당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상황에서, 여기에 투쟁하던 중 힘이 다하는 경우 자살로 이를 막으려 하는 것이다. 자살은 성격상 지배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으로 상대방에게 침해를 가하고 꼼짝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 대해 살아 있는 사람이 무어라고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자살이 갖는 마지막 힘이기에 자살을 통해 모욕적인 상황을 끝내고 비인간적인 상황을 벗어나려 한다. 이런 경우 당사자는 어느 정도 자살을 통해 모욕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던진 행위는 그 사람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행위이기 때문이다. 투쟁으로서의 자살도 알고 보면 심리적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고통을 견딜 수만 있다면 자살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삶의 고통이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온다. 사람에 따라 고통이 찾아오는 시간과 내용이 다를 뿐 누구나 고통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심리적 고통이 자신의 명예를 완전히 훼손하는 경우나 가장 아끼는 가족의 고통이 동반되는 경우 더 참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 가중되고 만다. 협박하는 사람들이 가족을 해치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자신 때문에 가족이 고통당하고 그것이 빨리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되는 경우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절망감에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당사자를 압박하는 마지막 수단은 피붙이인 가족을 협박해 고통을 가하는 행위다. 그런 점에서 그 어떤 경우에도 견딜 수 없는 심리적 고통이 자살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자신과 타인의 잘못된 동일시로 인한 혼동이 자살에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살에 취약한 청소년은 사춘기의 변화로 인해 자신의 신체적인 경험에서 떨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을 종종 소외의 박해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때 새로운 삶과 부활에 대한 환상이 자살에서는 거의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내적인 초기 관계의 파생물을 둘러싸고 있는, 조직화됐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공격적 충동은 정신적인 통합의 발달과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압도하고 방해한다. 자살에 취약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조절할 수 없기에,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자신을 함께 통합하는 자기 대상의 영향을 받는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이 죽음을 통과해 새롭고 더 나은 세계로 갈 것이라는 변형의 환상에 의해 행동한다. 타인과 결합하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자살에 취약한 사람이 상실을 접할 때 고통을 호소하게 하고, 양가적인 자살 시도에 관련되게 하며, 자신이 희생양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설명하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쉬나이드먼(Shneidman)은 자살이 논리적이며 심리적인 현상이기는 하지만 합리적인 자살이란 있을 수 없고, 하나의 이론으로 자살을 이해하기보다는 현실의 고통과 괴로움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결론: 자주 실망하는 사람·이상적인 사람들 세심히 보살펴야 이상에서 최후 수단으로서의 자살에 대해 고찰했다. 자살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은 초기 어느 한 이론으로만 이해하려는 시도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자살과 관련된 행동이 정신과적 병력, 신경증, 외상적인 삶의 경험, 자살 행동에 대한 유전적 취약성, 사회문화적인 위험 요소와 보호 요소 등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는 어느 한 관점이나 방법만으로 자살과 관련된 행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다양하고 통합적인 방법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살은 우연히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실망을 잘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잘 일어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에 실망을 잘 느끼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상이 무너진 경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주 실망하면 자신이 가진 긍정적 에너지를 부정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자신의 이상이 무너지는 것을 자신의 무능력으로 느끼기 쉬운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상이 강한 사람일수록 실망하기 쉬운 성향을 이미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자살을 막기 위해서라도 현실에서 지나친 이상화를 경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우리에게는 어쩌면 직면하는 현실에 한발 한발 다가서는 우둔함이 오히려 필요하다. 우울증 및 자살관련 상담문의 한국생명의전화: 1588-9191, www.lifeline.or.kr 한국자살예방협회: 1588-9191, www.counselling.or.kr 한국상담치료연구소: 02-2202-3193, www.kocpt.com 수원시자살예방센터: 031-214-7942, www.csp.or.kr | ||||
| 이대웅 기자 dwlee@chtoday.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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