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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과 노무현

은바리라이프 2009. 6. 3. 16:49

선한 사마리아인과 노무현
고 노무현 대통령 삶의 기독교적 의미를 기리며
[뉴스앤조이] 2009년 06월 02일
 
두 가지 극단적 평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그의 삶과 행적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그의 죽음을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자격 없던 지도자의 말로(末路) 정도로 평가절하 합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의 죽음이야 말로 자신이 평생 지켜왔던 참된 가치와 그를 따르던 이들을 지켜내기 위한 마지막 순교의 잔이었다고 높이 평가 합니다. 그러나 이런 양극단의 평가들은 그의 서거를 슬퍼하며 추모하는 많은 국민들을 비롯해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해 좀 더 건전한 평가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외면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삶과 행적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는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현재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고 노무현 대통령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서민들을 위해 애써 온 훌륭한 서민적 대통령이기는 하였지만, 결국 예수를 믿지 않았고 거기에 금기시하는 자살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였기에 근본적으로 어떤 기독교적인 교훈과 본을 삼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 기독교의 가르침은 모든 불신자들의 행위를 다 악한 것으로 보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겨야 할까요? 이 땅에서 정말 가치 있고 선하게 살았어도 믿음이 없다면, 아무 쓸 데 없고 무의미한 일이었을까요? 반대로 살면서 온갖 악행을 자행하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고 오히려 그 일 행한 것을 자랑하는 이가 믿음이 있고 게다가 교회의 지도자라면, 그는 무조건 훌륭하며 무엇을 해도 인정받아야 할까요?

성경 말씀 중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해답을 주는 특별한 본문을 찾았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0장 25절에서 37절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나오게 된 정황과 또 비유 속의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소위 하나님 백성에 들지 않은 "외인들"(불신자들)의 선행과 위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로써 하나님 백성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읽기

본문을 글자 그대로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좋지 않은 의도로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ekpeirazo)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에게는 다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의 대답에서 꼬투리를 잡아 정죄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의할 것은 이 질문에서 이 율법사는 이미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선민이라는 특권의식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질문은 문자적으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상속하리이까"(kleronomeo)입니다. 그에게 영생은 저 먼 곳에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유업으로 상속 받게 될 약속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비록, 좋지 않은 의도였지만, 예수는 그의 질문에 바른 답변이 필요함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이에 유대 랍비들의 전형적인 방식대로 질문을 통해 그를 논쟁의 핵심으로 이끄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가 주저치 않고 대답을 내놓습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러자, 예수는 곧 바로 이 율법사의 대답을 옳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예수는 그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해서, 옳게 말한 것까지 옳지 않다고 하시거나 거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대답은 예수에게 분명 바른(orthos: 옳은)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가 옳은 지식(orthodox: 정통가르침)에 그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정말로 영생을 상속하기를 원한다면, 한 가지가 더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레위기 18장 5절의 인용입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예수는 구약의 인용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영생을 상속하기 위해서는, 바른 지식(orthodox) 뿐만 아니라, 바른 행위(orthopraxis)를 가져야 함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dikaio: 정당화하려고) 다시 예수께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자기를 정당화하고 의롭게 보이고 싶어 물은 질문이었습니다. 즉, 자기가 이미 잘하고 있다고 여겼기에 확인 차 질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질문에 이르러 그에게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숨어 있음을 감지하셨던 것 같습니다. 곧 가고 오는 모든 세대에 그토록 큰 감동을 주었던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예수는 이 비유를 가르치신 후 율법사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한국말의 번역이 훌륭합니다. 단순히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who is...) 가 아니라, "누가…이웃이 되겠느냐"(gegonenai)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자기가 이미 사랑하고 있는 "이웃"들을 생각하고 그 "이웃 사랑"을 자랑하려 했지만, 예수는 그에게 "참된 이웃 사랑"이란 어느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거리에서 마주친 한 절박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하는 것이며, 그 강도 만난 자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은 분명 "이웃"이 되었음을 깨닫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그래서 더욱 준엄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정리 됩니다. 하나님나라의 영생을 상속하는 참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며, 이러한 영생의 상속자들은, 마치 비유 속의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자리로 가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와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신학적 논쟁점: 왜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하는가?

본문을 따라 자연스럽게 읽은 후 생기는 의문이 있습니다. 왜 예수는 한 사마리아 사람을 참된 이웃 사랑의 모범으로 제시하셨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예수의 비유를 듣는 청중들이 유대인들이었음을 감안하면, 비유 속 사마리아인의 등장은 가히 충격과 경악의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래 유대의 주류 종교 사회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경건한 유대인 평신도"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심정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내에서 가장 신뢰하고 이웃으로 여기며 힘들고 어려울 때 자기들을 도와줄 진정한 이웃으로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 입니다. 그러므로 강도 만난 사람을 마땅히, 혹은 분명히 도와줄 사람들은 "제사장", "레위인"이 아니면 상식적으로는 경건한 "유대인"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강도 만난 한 사람 (어느 유대인)을 도운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의 통념을 깨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빵을 먹는 사람은 돼지의 맨 살을 먹는 것과 같다"는 말이 탈무드에 있습니다. 이들 사이의 악감은 정평이 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정치적으로, 혈연적으로, 종교적으로 혼혈이 되었다며 무시하고 경멸하였습니다. 또 사마리아인들도 이런 유대인들의 편협함과 근본주의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며 적대시 하였습니다. 예수 당시, 사마리아 인들은 공적으로 유대 회당에서 저주되었습니다. 그들이 결코 영원한 생명의 참여자가 되지 못하도록 간구하는 탄원의 기도가 매일 드려졌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 속에서 지금 그 저주 받을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비유를 듣던 유대 청중들뿐 아니라, 이 비유를 읽고 해석해 온 기독교회도 지난 2000년간 고민해 왔습니다. "왜, 예수는 참된 이웃 사랑의 표본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제시하셨는가? 사마리아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라 볼 수 없는 혼합된 우상 국가의 한 일원이 아닌가? 결국 이 사마리아 사람은 불신자요, 불택자의 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나라와 영생을 상속치 못할 사마리아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사랑을 실천하고 율법의 참 수종자처럼 높여질 수 있는가?"

이러한 신학적 문제를 감안하면서, 기독교회의 성경 해석 역사를 살펴보면, 몇 가지 해석이 설득력 있게 대두됩니다.

첫째, 비유 속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의 구원을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회의 아주 초기부터 이러한 풍유적 (allegorical) 해석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징적 해석에 의하면 여리고는 이 세상을 상징하고 예루살렘은 천성을 상징합니다. 강도는 우리의 영적 원수인 마귀를 상징하고, 강도 만난 사람은 세상에서 마귀와 죄에 거반 죽고 노무현 대통령 삶의 기독교적 의미를 기리며은 죄인들(우리들)을 상징합니다. 제사장은 율법을 상징하고, 레위인은 선지자들을 상징하는데, 그들은 거반 죽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가 우리의 참된 이웃으로서, 우리를 주막 즉 교회에 인도하여 포도주와 기름 즉 희생의 피와 성령으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며 치유가 될 때면 다시 돌아올 것 즉 재림을 약속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지난 2000년간 대다수 교회가 받아들인 성경 해석의 주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비유를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선례가 많고 (막 4장; 갈 4:21-31; 고전 5:6-8), 성경 전체의 구속사와 일치하기 때문에 무난하게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비유 속 사마리아인이 예수와 연계되는 문맥적 증거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는, "불쌍히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불쌍히 여겼다"는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예수에게만 적용되던 말입니다. 배고프고 고난에 눌려있던 백성들을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시고"(스플랑크니조마이) 오병이어로 먹이시고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그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해 느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유적 해석은 그 정통적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왜 사마리아인인가?"에 대한 해답은 주지 않습니다. 왜, 언약 백성의 일원이었던 "경건한 유대인"이나, 혹은 "또 다른 어떤 사람"일수도 있었는데, 굳이 "사마리아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둘째, 이러한 주류적 해석에 반동하며 비유의 가르침이 갖는 "사회·윤리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해석이 나타났습니다. 주로 1900년대 이후, 역사비평학의 발전과 함께 예수 당대의 사회상과 예수의 근원적 가르침에 천착하는 경향 속에서 나타난 해석입니다. 이 해석 속에서 사마리아인은 실제로 사마리아인입니다. 예수의 비유는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 "무엇이 진정한 이웃 사랑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외인 사마리아인의 도덕성을 극명하게 대조함으로써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사랑 없음을 드러내고 참 이웃 사랑의 윤리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 윤리적 해석은 비유가 담긴 문맥상의 정당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2000년간의 고민 속으로 다시 빠져 들고 맙니다. "어떻게 하나님나라의 외인이 율법의 진정한 수종자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불신, 불택자가 예수와 비견되는 사랑의 행위를 행할 수 있는가?" 물론 현대의 해석자들은 이러한 신학적 질문은 본문의 역사적·문맥적 정황 속에서는 없었던 질문이므로, 대답 자체를 거부합니다.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 "무엇이 진정한 이웃 사랑인가?"만을 물어야 할 뿐, "왜 사마리아인이었는가?"에 대한 신학적 질문은 답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비유의 신학적 의미

저는 충분히 신학적인 답변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교회의 해석들을 모두 고려하면서, 본문이 가지는 신학적 의미를 밝히는 것이 비유의 풍성함을 더욱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1. 하나님께 감동된 사마리아인: 불신자의 선행의 가능성

분명 비유 속, 한 사마리아인은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이 아니었고, 영생을 상속할 수 있는 약속의 자녀도 아니었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불택자 가운데 하나로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 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마리안인도 하나님의 마음,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스플랑크니조마이)에 감동될 때, 한 영혼을 향한 깊은 동정과 자비로서, 자신의 것을 온전히 희생하여 돕고 섬기는 참된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신자들 혹은 불택자들 가운데서도 선한 일을 이루십니까? 물론입니다. 심지어는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예수의 사랑에 비견할 만큼 숭고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이시며, 모든 불신자들 가운데서 나타나는 참되고 선한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가능합니다. 중세 가톨릭 신학자들 중, 아퀴나스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providentia)로 설명하며, 혹은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 안에 선을 남겨 놓으신 하나님의 역사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후 특별히 칼빈은 인간 안에 어떤 선이 남았다는 것에 적극 반대하면서 불신자에게 나타나는 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구원을 주시는 특별한 은혜(special grace)가 아니라, 인간을 보존하시고 악을 억제하시고 하나님의 선함이 나타나도록 역사하시는 은혜로서 일반 은총 (common grace)라 말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적 공통분모는, "하나님께서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상당한 선행을 가능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불신자들 혹은 불택자들을 사용하여 당신의 선하신 일을 이루실 때, 그들의 행위를 의롭다 하시고 결국 구원하십니까? 아닙니다. 기독교의 가르침 속에서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집니다. 불신자가 아무리 선행 행위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물론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남은 본성 혹은 은혜로 가능했지만 그가 예수 안에 있지 않다면, 그 선한 행위는 그의 의로움이나 영생을 위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유 속 사마리아인은 그 상태로는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을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2. 선한 사마리아인의 의미: 하나님이 불신자를 사용하시는 이유

그러면 하나님은 왜 불신자인 사마리아인을 통해 당신의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들답게 영생을 상속할 자녀들답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고난을 당한 이웃들을 사랑하며 하나님 통치를 보여주며 성취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정통하여 알고, 영생을 당연히 상속할 것으로 믿고 있는 약속의 백성들이, 저 위의 지도자부터 저 아래 평민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실천하며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주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강도 만난 자들은 늘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주 노골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십니다. 너희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칭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이웃을 멸시할 때, 하나님은 저 사마리아의 불신자를 들어서, 당신의 말씀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저 사마리아인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당신의 친 백성을 부끄럽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니, 엄중한 심판을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영생을 얻지 못하고 멸망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며 고난당한 이웃을 멸시하고도 당신의 친 백성이라 자처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더 크고 엄중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3. 너희 행위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보다 낫지 아니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배워야 할 진리가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의 한 불신자가 구주 예수의 사랑에 버금가는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면, 예수를 진정 믿고 성령을 부음 받은 신자들은 얼마나 확실하게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습니까?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재발견했던 개혁자 루터는 주장하기를, 진정한 기독교인의 믿음이란 사랑으로 역사는 믿음" (갈 5:6)이며,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두 가지 근본적 기초 위에 세워진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이 둘이 없으면 "참된 크리스천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한 세대 후, 종교개혁자 칼빈은, 루터의 주장을 더욱 섬세히 다듬어서 참된 크리스천의 삶은, "칭의와 성화"로 구성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한 은혜의 두 측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해 나눌 수 없듯이 이 두 가지도 떼어놓을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그 분 안에서 칭의와 성화를 한꺼번에 받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III.11.6.) 라고 말합니다. 루터나 칼빈에게 있어서, 이웃 사랑과 성화의 열매가 없는 크리스천은 참 크리스천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들 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바로 이런 이름뿐인 크리스천에게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작품이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너희 행위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더 낫지 아니하면…“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마 23:13).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 노무현

저는 고 노무현 대통령을 우리 시대의 한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생을 바쳐 가난하고 힘없고, 무시 받고 강도 만난 자들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분명 하나님이 주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희망을 보았고, 위로를 얻었고, 치유를 얻었습니다. 많은 서민들이 그가 있어서 행복해 했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그를 보며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진시로 노동자, 농민, 그리고 가난한 백성들의 "이웃"이 되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자신들의 "진정한 이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이러한 삶과 행적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에게서 예수의 그림자를 찾기도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이 입혀질 수 있다면, 고 노무현 대통령의 행적에서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찾는 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과연 고 노무현 대통령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이 백성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칭 하나님의 백성, 영생을 상속할 자라 칭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진노를 나타내고 계십니다.

물론,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죽음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그가 여전히 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남아 있었음을 나타내는 반증으로 읽혀집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지만, 하나님 백성의 모습으로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일까지 다 무가치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비유 속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적이, 가고 오는 세대에 영원히 기릴 진정한 이웃 사랑, 율법의 정신을 실천한 모범으로 높여지듯이,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민적이고 이웃이 되어주는 지도력이야말로, 가고 오는 한국의 위정자들 (특별히 한껏 교만하게 저 높은 자리에 안주하여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 에게 진정으로 따라야 할 모범으로 세워지기를 바래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노무현

고마웠어요,
우리의 이웃이 되어줘서!
행복했어요,
당신이 많은 이들의 선한 목자이었기에
그리고 미안해요,
당신이 그 지경에 이르기 전에 좀 더 일찍 기도하며 도와주지 못해서

신동수 / 목사·시카고 한인 서부교회 교육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