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소선지서

연구 1 요나의 불순종과 고뇌(욘1,2장)

은바리라이프 2009. 3. 16. 18:05

연구 1 요나의 불순종과 고뇌(욘1,2장)  
본 서는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난 어느 선지자의 기적적인 이야기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충심에는 모든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확증시켜 주는 위대한 사상이 흐르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본 연구를 통해 니느웨로 가라는 명을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는 요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의 인위적 결정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살펴보자.

 

1. 다시스를 향한 요나(욘1:1-3)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는 명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간다. 요나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인가? 왜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여 다시스로 가고 있는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1) 잘못 인도된 애국열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일어나 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께서 가라는 곳으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달아나려고 곧바로 갔던 것이다(욘1:3).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를 깨우치라고 요나에게 명하셨다. 그런데 요나는 오히려 니느웨성이 회개하고 돌아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왜냐하면 니느웨 성을 그냥 두어 그들이 멸망한다면 그의 사랑하는 조국 이스라엘은 그 적국의 손에 의해 파멸될 염려가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요나는 깊은 애국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족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애국열은 오도된 것이었다.

 

2) 주의 낯을 피하여

이 말 속에는 놀라울 정도의 단순성이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 나타난 행위 속에는 놀랍게도 어린애 같은 순진성이 있다. 동쪽으로 가야 했던 요나는 서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곧바로 내려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그러나 어떤 장소를 옮겼다고 해서 그것이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낯을 벗어나게 할 수는 없다. 야곱은 벧엘에 있었을 때 비록 그가 그것을 몰랐으나 주도 그곳에도 계셨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 결국 주의 낯을 피하려는 노력은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게 되었다.

 

2. 배 위의 요나(욘1:4-1:16)

 

요나가 피하여 달아난 후 하나님께서는 즉시 역사하시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폭풍을 보내신 것이다. 그러나 바다 속에 던져진 요나는 오히려 하나님의 손에 잡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방법을 좇지 않을 때 어떤 이상한 방법을 통하여서라도 우리를 따르게 하신다. 자연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떤 것이가? 위기를 만난 선원들과 요나는 역경 속에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나?

 

1) 자연과 하나님

불신적인 선지자 요나를 징계한 '폭풍'(욘1:4)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속에는 히브리적인 직접성과 힘이 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여기에서 단지 자연 현상을 기술하는 시적이고 신학적인 표현을 본다고 말하는데 만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대단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무신론자는 자연은 실체이고 신은 하나님의 허구라고 생각한다. 합리적 종교적 견해를 가진 자들은 자연 안에서, 또한 자연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다.

 

2) 두려움, 제사 그리고 서원

역경의 때는 이따금 우리에게 신앙을 가져다 준다. 우리는 오히려 편안할 때에 감사하지 않는다. 폭풍이 그치자 선원들은 훌륭하게도 여호와를, 폭풍을 잠잠케 하신 자로 구원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종교적 실행의 3가지 양상을 볼 수 있다. 첫째, 경외심이다. 선원들의 행동과 감정에 미신적인 요소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영원자들 두려워하였으며 자신들이 바다를 잠잠케 하는 영원자의 능력에 사로잡혀 있다고 느꼈다. 둘째, 희생이다. 그들이 바친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감사 제물이었다. 그들이 신실하였을진대 이러한 제사는 그들의 전인격과 생애를 하나님께서 바치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셋째, 서원이다.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그들은 미래에도 그와 같은 자비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3. 요나의 회개(욘1:17-2:10)


요나는 바다에 던져진 후 곧 큰 물고기에 삼켜지게 된다. 그는 물고기 뱃 속에서 사흘을 지내면서 오히려 하나님께 구원을 감사하는 진실한 기도를 드렸다. 이제는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요나는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가 이미 받은 구원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요나가 물고기 뱃 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욘2:1)로 인식한 이유로 무엇인가? 고난중에 요나는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욘2:4)고 고백한 이유는 무엇인가?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

 

1) 그의 하나님

하나님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요나는 민족적인 계약과 개인적인 선택과 그의 예언적 소명과 헌신에 따라서 그분을 '그 하나님 여호와'(욘2:1)로 인식했다. 그는 여호와는 면전에서 도망치려고 했었는데도 하나님을 그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 그는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깨달았다. 그의 뒤이은 기도는 열심 있는 이스라엘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던 시편의 많은 회상의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 욘2:4에서 그는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솔로몬에게 한 약속을 알고 있었다(왕상8:38). 그는 성전과 언약궤의 궤의 뚜껑과 천사들의 그림자와 모세에게 약속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에서 네게 이르리라'(출25:22)는 말씀을 생각한다. 그는 이 말씀을 가지고 그 위에 그의 영혼을 세우며 그의 무섭던 환경들을 떨쳐버리고 평화로 들어간다.

 

2) 고난의 가치

우리는 요나의 기도 속에서 고난의 가치를 발견한다. 고난은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즉 영적인 자각에로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으로 데려다 준다. 큰 고난의 그림자에 쌓여 있을 때 영혼은 절망에 빠진다. 징계를 받을 때 그는 자신의 징계의 필요성을 느끼며 징계가 누구에게서 왔는지 비로소 깨닫는다.

 

요나가 피하여 달아난 후 하나님께서는 즉시 역사하시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방법을 좇지 않을 때 어떤 이상한 방법을 통하여서라도 따르게 하신다. 본 연구는 요나가 어떻게 자신의 무력함을 알게 되었는지 말해주고 있다. 오랜 기도 끝에 요나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구원은 여호와께 말미암나이다'라고 고백한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유롭게 해주셨다.


1. 요나의 불순종과 고뇌

 

1) 당시 앗수르 니느웨의 위용

고대 희랍인들과 로마인들은 니느웨를 세계에서 가장 큰 성읍으로 불렀었다. 그들은 니느웨를 '니노스'(Ninos) 또는 '니누스'(Ninus)라고 불렀는데, 그 규모를 살펴보려면 약 3일에 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트라보(Strabo)에 의하면 니느웨는 아투리아스(Atourias)라를 벌판에 위치했는데 그 규모는 바벨론보다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바에 의하면 그 둘레가 약 19km나 된다고 한다. 내용적으로는 네 군데의 위성 성읍으로 구성되었는데 티그리스, 고슬, 가슬이라 불리는 강줄기 가운데 있으며 한쪽 방향에 큰산들이 있어서 인위적으로 댐을 만들어서 지하 수로를 통해 성안으로 물을 공급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수로의 거리만 해도 50km가 넘는다. 앗수르의 사르곤 2세 때(B.C. 722-705) 앗수르 제국의 서울이 되었고, 산헤립(B.C. 705-681)과 그 아들 에살할든(B.C. 681-669), 손자 아술바니팔(B.C. 669-626) 등에 의해 더욱 웅대한 성읍으로 발전했다. 각국에서 끌려온 전쟁 포로들과 조공들이 줄을 이루었고(왕하15:20 ; 렘50:17 ; 호10:6) 22,000장의 토판 문서를 소장한 거대한 도서관도 있었다고 한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때는 아마도 앗수르단 3세(B.C. 771-754)가 다스리고 있었을 때가 아닌가 추정된다.

2) 요나의 불순종의 이유

앗수르 제국은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 두렵고 혐오스러운 침략자들이요, 이교도들이었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처음 침공한 때는 요나 시대 때보다 거의 100년 전쯤인 B.C. 850년대였다. 살만에셀 3세가 하맏으로 진군하여 다메섹을 비록해 이스라엘까지 침공하려고 했을 때 아합 왕이 연합군으로 참여하여 살만에셀을 격퇴시킨 일이 앗수르와의 첫 싸움이었다(왕상20:36). 그 후 842년 살만에셀의 재침공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으며, B.C. 745년 디글랏 빌레셀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점령당했으며, 살만에셀 4세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요나는 그와 같은 앗수르 침략기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이다. 물론 당연한 것이지만 개인적인 감정으로도 요나가 앗수르 제국의 부흥보다 멸망을 더 원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요나의 불순종과 고뇌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의 고뇌였을 것이다. 앗수르의 부흥은 이스라엘의 패망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루터(Luter)는 요나서 주석에서 말하기를 "율법도 예배도 선지자도 없는 원수 국가인 앗수르 제국에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전하는 것보다 요나는 죽기를 택했을 것"이라고 했다. 요나 시대로부터 700여년이 흐른 A.D. 1세기경 초대 교회 시대의 사도 베드로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 사실만봐도(행10장) 당시 요나의 입장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처럼 요나는 하나님의 은총이 이스라엘을 떠나 당시 세계의 실권을 쥐고 있는 앗수르로 옮겨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고뇌한 끝에 명령을 어기는 쪽을 부득불 택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2. 큰 물고기와 관련된 문제들

 

1) 큰 물고기의 정체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보내신 큰 물고기에 의해 삼키우게 됐다. 그 사건은 오히려 요나에게 구원이 된다. 즉 풍랑이 심한 바다에서의 익사에서 보존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큰 물고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흔히 고래라고 생각하는데 칠십인역에 번역된 kh'to"(케토스)는 정체가 불분명한 '바다 괴물'(창1:21 ; 욥7:12 ; 시74:13)을 뜻한다. 고래는 지중해에서는 보기가 드물며 그 목구멍으로는 작은 프랑크톤이나 새우의 무리만 삼킬 수 있다. 즉 사람을 삼킬 수가 없는 것이 고래의 식도 구조가 없는 것이 고래의 식도 구조다. 그러므로 산 사람을 통체로 삼킬 수 있는 바다 생물은 상어나 바다개 정도이다. 특히 상어는 물개, 사람, 다랑어 등 닥치는 대로 삼키는데 기록에 의하면 소화되지 않은 20여 마리의 큰 다랑어(1마리당 20-30kg의 무게를 지님)를 삼킨 상어를 잡은 사실도 있고 말 한 마리를 삼킨 상어를 잡은 기록도 있다고 한다.

2) 큰 물고기 뱃 속에서 살아날 가능성

과연 요나처럼 삼일 낮밤을 물고기 뱃 속에 있다가 살아날 가능성은 과학적으로 있을 수 있을까? 기록에 의하면 1750년대 프랑스 서부 해안에서 폭풍우로 인해 한 선원이 군함에서 바다로 추락한 사고가 벌어졌을때 금시 상어가 삼켰다고 한다. 이에 선장의 명령으로 그 상어를 추적하여 대포로 사격을 가하자 상어는 그 삼킨 선원을 토해냈는데 약간의 상처만 입고 무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3일간씩 물고기 뱃 속에서 지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요나와 관련된 사건들은 단순한 사고가 아닌 그리스도의 표현대로 '요나의 기적'으로 봐야 한다.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의 한가지로서 과학으로 규명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요나의 기적을 사실로 인용하셨으며, 그 기적을 무덤에서의 부활 기적의 한 모형으로 말씀하셨음을 유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