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주석강해/소선지서

연구 2 요나의 선포와 불평(욘3, 4장)

은바리라이프 2009. 3. 16. 18:11

 연구 2 요나의 선포와 불평(욘3, 4장)  
회개한 요나에게 하나님은 동일한 사명을 부여하신다. 직접적으로는 개인 요나에 대한, 간접적으로는 이방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본 연구를 통해 드러난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니느웨로 간 요나의 선포에 니느웨의 국가적 회개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대비시켜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에 대해 선민 사상에 젖어 있는 요나의 편협한 배타적 이기주의 하나님은 깨뜨리신다.

 

1. 니느웨로 간 요나(욘3장)


요나는 완전히 버림받았고 또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는 행동하기를 거절했으며 사실상 그의 임무를 상실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올바른 생각으로 돌아왔으며 그의 잃어버린 소명에 대한 또 한번의 부르심이 있었다. 요나의 재임무는 무엇인가?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했는가? 말씀에 대한 니느웨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1) 다시 부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욘3:2) 하셨다. 그러나 큰 성읍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치는 것은 요나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욘3:4). 요나가 전하는 말에는 자비로움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은 하였지만 그 마음속에는 여전히 니느웨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 차 있었다(욘4:1-3). 그러나 니느웨의 회개 운동은 매우 신속하였고 복잡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요나로 향한 목적을 성취하기가 더 어렵고 수고스러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신 명령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 돌이키시는 하나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한 요나의 외침을 듣고 니느웨 사람들은 백성으로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즉각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였다. 이들이 진정한 회개로 하나님을 향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진노를 돌이키시었다(욘3:9). "하나님을 믿고"(욘3:5)라는 구절에서 이전의 니느웨 백성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요나의 외침은 단순히 닥쳐올 재앙을 선언한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라'는 전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요나를 통해 하나님은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은 구원할 의도를 갖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2. 요나의 불평(욘4:1-3)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의 회개를 받아들여 재앙을 내리시지 않음을 보고 불평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요나는 니느웨가 재앙을 받지 않고 건재함을 볼 바에야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한다. 요나가 노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요나의 불평이 부적절한 이유는 무엇인가?

 

1) 요나의 불평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요나는 그 날짜까지 지칭하며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했다(욘3:4). 그러므로 자연히 그의 예언자로서의 신임도는 과연 그 사건이 이제 일어날 것이냐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의 예언은 잘못된 것이 되고 그의 선지자로서의 명성은 니느웨 백성과 그의 동족에게 있어 치명타를 입게 되는 것이다. 이런 그의 곤경에 처한 이기심의 추구로 말미암아 그는 니느웨가 멸명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여기서 니느웨의 회개는 이스라엘의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또한 많은 이방인들에게 북돋아 주고 장려하는 힘이 되었다. 이것은 요나의 편협한 선민 사상을 깨뜨리는 것이었으므로 요나의 불평의 극에 달하게 된다.

 

2) 요나의 기도

요나의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 하나님께서 낙담에 빠진 그를 어떻게 구원해 주실 것인가에 주의하지도 않고 구원을 청하지도 않은 채 다만 자기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할 뿐이었다. 때때로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 너무나 어렵게 생각될 때 우리는 실망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삶의 현장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위해 가장 좋은 가지고 계신다.

 

3. 하나님의 가르치심(욘4:4-11)


니느웨의 회개로 심히 괴로와한 요나는 성읍 동편 조그마한 산등성이에서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박넝쿨 그늘에 앉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것인지 시무룩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박넝쿨을 통해 가르치려고 하는가? 박넝쿨이 의미하는 바와 요나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1) 박넝쿨 교훈

전날 소명을 저버린 요나에게 하나님은 대자연을 동원하여 엄정한 재판장으로 나타나셨지만 이제 종교적 편견을 빠져 불평하는 요나에게는 박넝쿨을 소재로 실물 교육을 시키는 자애로운 부모와 교사로서 나타나신다. 하나님은 요나가 햇볕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고 박넝쿨을 준비하셨다. 하나님이 박넝쿨을 준비하신 것은 요나가 빠져 있는 악 속에서 그를 빼내려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나는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을 심히 싫어하여 화를 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악에 빠져 있는 요나를 깨우치기 위해 박넝쿨을 준비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준비한 박넝쿨을 니느웨 사람과 비교하신다. 식물 하나가 이렇게 소중한 것인데 하물며 니느웨에 있는 수천 면의 사람과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가르치신다. 여기서 하나님은 박넝쿨을 니느웨어 사는 어린이와 동물에 비교함을 통해 니느웨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요나에게 인식시키고 있다.

 

2) 요나의 상징

요나서에서 보여 주는 중요한 두가지 있다. 첫째로 요나는 그리스도의 모형이라는 사실이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 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는 신약성경의 인용을 통해 요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매장 그리고 그의 부활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로 요나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세계 강국에 의해 삼켜졌으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올려질 이스라엘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을 때 요나를 니느웨로 가는 것을 방해한 것은 그의 자존심과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이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던 요나와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귀한 교훈을 가지고 있다. 물고기 뱃 속은 이스라엘과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보여 주는 하나님의 채찍이다. 그러나 요나를 다시 살리시고 재임무를 주시며 그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귀한 사랑을 통해 오래 참으시는 그분의 사랑을 발견하다.


1. 니느웨에 대한 회개의 선포와 그 결과

 

1) 당시 앗수르인들의 종교관

히브리인 요나의 회개 선포에 대해 왕과 온 국민들이 회개했다. 그 이유는 죄악을 돌이키지 않으면 40일 후에 멸망당하리라는 선고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방 앗수르인들이 이스라엘 선지자의 선포에 대한 응답과 회개는 가능한 것일까? 그들의 종교관을 살펴보자면 그들은 여러가지 신들을 우상으로 섬겼다. 특히 바벨론으로부터 전수받은 태양신(사마스), 달신(신), 우뢰의 신(아달), 여성의 신(이스달)들을 섬겼다. 그러나 그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신은 '앗수르'라고 불리는 군신(軍神)이다. 군대의 신, 전쟁의 신으로서 그 신의 명칭이 앗수르 국가의 명칭이 된 것이다. 그들은 그 '앗수르' 신을 팔레스틴이나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어떤 신들보다 강한 존재로 자랑했었다(사10:10). 그렇다면 생면부지 이스라엘의 한 선지자의 전언에 온 나라가 회개한 요인은 무엇일까? 먼저 베옷을 입고 온 날 사람들과 왕까지 심지어는 가축들까지 금식하며 회개하는 풍습은 비단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회개 풍습이 아니다. 그대 동양인들이 국가의 큰 재난이나 재앙이 닥치면 행했던 신게 대한 제사 의식 중 한 가지이다. 그 다음 그들은 특이한 신적 존재에 대해 경외심을 나타내는 풍습이 있었다. 앗수르에는 신탁을 받은 술사들이 종종 예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갑자기 당돌하게 나타나 담대하게 앗수르의 운명을 선포하는 요나에게 어떤 강한 인상과 두려움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앗수르인들의 회개는 요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돌멩이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원의 능력이 요나의 선포 속에서 나타났기에 완악한 니느웨 사람들도 그 죄악을 회개했을 것이다.

2) 하나님 뜻이 변혁되는 예

요나는 하나님께서 애초에 니느웨를 멸망시키실 뜻을 돌이키신 사실에 심한 의문과 불만을 나타냈다. 과연 하나님께서 원래 정하신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신가? 그 경우는 어떤 때이며 그와 같은 일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와 조화를 이루는 일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니느웨에 대한 멸망을 선고하신 후 그 뜻을 돌이키신 예는 유일한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예는 하나님의 섭리에 여러 번 발견된다.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의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렘18:8)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는 그 예가 수없이 많다(시78:38 ; 대하12:12). 이와 같은 하나님의 처사는 그 절대적 구속과 심판의 섭리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절대적인 계획의 일환이 된다.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이미 악인들이 돌이켜 회개할 사실까지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신30:2, 3).

 

2. 요나의 불만

 

1) 섭리에 대한 인식의 한계

요나는 대단한 불만을 나타냈다. '심히 싫어하고'라는 말은 정서적으로 혼란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불만의 감정을 지니게 됐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반드시 심판하사 멸망시키실 것을 크게 기대했던 것이 분명하며 니느웨 민족이 그가 선포한 회개 명령을 불복종하므로써 심판당할 것을 바랐을 것이다. 그와 같은 기대와 상반된 결과를 하나님께서 이행하신고로 극한 불만에 쌓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요나의 불만은 당시 율법의 '인과응보' 법칙에 물든 유대인들의 편협된 의식을 발로다. 우리는 '악인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하신다'는 의식을 욥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의인은 흥하고 악인은 반드시 망한다는 원리는 맞는 이치다. 그러나 악인도 회개만하면 망하지 않는다는 삼차원적인 원리를 하나님의 용서의 섭리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악인만이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다.

2) 사랑에 대한 이해부족

요나의 불만 요인은 더 적극적인 요소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외에 이방인이자 원수인 앗수르 민족이게도 관심을 지니고 계신다는 점이 요나의 불만의 핵심이다. 니느웨 사람들을 아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이 그야말로 당시 요나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처사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 선민들만 사랑하시고 이방민족들은 미워하셔야만 했다. 아니 아예 관심을 보이시지 않아야 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관심을 두시고 더 나아가 그들을 당신의 창조와 통치와 구원의 은혜 안에 포함시키려고 하신다는 사실에 경악과 거부감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불만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선민특권 사상, 또는 이방 민족 배타 사상의 발로다. 그리스도 예수는 마20:1-16의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유대 민족의 편협성을 잘 지적했다. 인자한 포도원 주인이 늦게 온 자들로 부터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20:15)고 물은 예와 같다. 하나님의 한없는 초월적인 사랑은 유대인이든 앗수르인이든 차별없이 적용된다는 진리를 요나는 이해치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