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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에 대한 구속사적인 접근과 현재적 선취로서의 종말에 대하여

은바리라이프 2009. 3. 15. 19:34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인 접근과 현재적 선취로서의 종말에 대하여         

장경철 (서울여대 기독교학과)

 

 

1. 서론: 종말론에 대한 관심

2. 종말론의 중요성과 방향

3.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구속사(Heilsgeschichte)의 중심

4. 구속사적인 종말 이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전개된다.

5.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anticipation): 종말은 역사 속에서 현실을 개방화한다.

6. 결론

 

1. 서론: 종말론에 대한 관심

종말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되고 있다. 종말에 대한 논의처럼 사람들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갈라놓는 주제도 그리 많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주장하며 세상이 곧 멸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세기말의 시점을 맞이하면서 종말에 대한 불안과 호기심이 일부 사람들의 가슴속에 맴돌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등장했던 국내에서의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현상은 종말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간절하며 그 기대와 간절함이 어떻게 억압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다수의 사람들은 종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은 지금껏 살아왔듯이 계속 진행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그들의 생각 속에 들어 있다. 물론 우리 주변의 환경 문제, 핵 문제 등은 더 이상 낙관적인 분위기를 만들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에게 종말에 대한 논의는 하나의 공상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치열한 삶이지 막연한 미래에 대한 공상적 논의가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종말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종말에 대한 견해를 정립함에 있어서 우리가 취하고자 하는 입장은 세계의 종말을 하나님의 구속사, 곧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시작이나 과정에 대한 논의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마지막에 대한 논의도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시각에서 살펴질 때 그 전체적 윤곽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가운데 완성되는 인간과 세계의 종말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종말론의 중요성과 방향에 대해서 살펴본 뒤에, 구속사(救贖史)적인 시각에서의 시간 이해와 역사 이해를 고찰할 것이다. 그후에 구속사적 시각에서 역사의 목표로서 인식되는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인 성취 개념을 고찰한 뒤에, 구속사적 시각에서의 하나님 나라 이해가 어떠한 현실 이해를 잉태하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건강한 종말 이해는 언제나 건강한 과정 이해와 상응하며, 건강한 미래 이해는 건강한 현재 이해와 상응한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2. 종말론의 중요성과 방향

종말론의 중요성

종말론적 관심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기대하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의 종말이 올 것임을 믿으며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을 기대한다. 신앙인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마지막 날을 바라본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핵심에 있어서 종말론적이다. 몰트만(J. Moltmann)에 따르면, 종말론은 기독교 신학의 한 부록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전 부분을 관통하는 열쇠와 같다.

부록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독교는 종말론이며 희망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앞을 향해 보고,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기에 또한 현재를 혁명화하고 변혁하는 것이다. ... 따라서 종말론은 기독교 교리의 오직 한 부분만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종말론적인 전망은 모든 기독교 선포와, 모든 기독교 실존, 그리고 모든 교회의 특징이다.

만일 우리의 신앙적 관심이 오직 현재에만 집중되고 종말론의 차원을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신앙은 절름발이 신앙이 될 것이다. 사실상 종말론은 역사의 마지막에 대한 관심만은 아니다. 물론 종말론은 역사의 마지막에 대한 관심이지만, 역사의 마지막에 대한 관심은 곧 마지막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목표로서 이미 역사의 과정 속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현재의 역사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종말론적 관심은 피안적인 도피이기보다는 현재 역사의 핵심에서 움직이는 역동적인 힘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종말론에 대한 건강한 관심은 언제나 현재에 대한 영향력 있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역사의 흐름 속에 함몰되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므로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세계와 역사의 종말을 바라보는 가운데 시대와 역사를 새롭게 해 왔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살아 있던 시기는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본 시기였다. 교회가 세상적 적응을 위하여 종말의 소망을 잃어버렸을 때 교회는 세상의 인정도 잃어버렸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도 잃어버렸다. 교회가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회복했을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도 받았으며, 세상의 존경도 회복했다.

건강한 종말론의 방향: 구속사적인 접근

하지만 종말론에 대한 모든 관심이 건강한 방향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다. 종말론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언제나 두 가지 방향에서 종말론의 역사를 왜곡시켜 왔다. 우리는 서론에서 종말론에 대한 상반되는 입장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건강한 종말론을 정립하려는 기독교적 시도들은 언제나 이러한 두 가지의 극단적 입장에 의하여 어려움을 겪어 왔다.

첫째 입장은 역사의 묵시론적 차원만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이는 역사의 어두운 측면을 부각시키며 세계가 곧 멸망할 것임을 주장하면서 인간의 책임을 외면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성경의 종말론적 선포를 종말 날짜 산정을 위한 자료로서 간주한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종말론이란 세계의 멸망이 오는 날짜를 예측하는 논의이다.

둘째 입장은 인간의 역사가 계속 진보하리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제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낙관적 역사 이해를 강조하는 입장은 많이 퇴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사회는 성경의 종말론적 희망을 하나의 공상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역사의 종말론적 차원을 부인한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도 이러한 근대 세계의 영향 아래, 종말론을 "기독교 교의학의 결론에 추가된 짧고, 전적으로 무해한 한 장(章)"으로 만들고 말았다.

위의 두 가지 입장에서 우리는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론 이해를 발견할 수 없다. 첫째 입장은 역사의 종말론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 대가로 비관적 운명론을 선택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은 사라지고 오직 미래에 대한 음침한 전망만이 남아 있다. 둘째 입장은 역사에 대한 현실적 책임을 강조하는 반면에 역사의 종말론적 차원을 외면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없이 계속 전개되는 역사 속에서 인간은 그 목표를 상실하고 있다. 종말에 대한 이와 같은 양극단적 이해는 언제나 인간의 역사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 시각의 종말 이해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히 구속사적인 종말 이해를 펼치고 있다. 예수께서는 종말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예수의 말씀 속에 암시된 종말에 대한 논의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구원의 틀에서 전개된다. 하나님은 역사의 마지막에 그 나라를 완성하지만 이미 그 나라의 성취 과정에도 동행하신다. 역사의 종말에 대한 관심은 역사의 과정에 대한 관심의 연속선상에서 펼쳐진다.

물론 현재 역사의 과정과 미래 역사 완성 사이에 연속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와 미래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있다. 아직 하나님의 주님 되심이 완전히 계시되고 증명되지 못한 현재 역사의 모호함과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계시될 미래의 종말 사이에 불연속성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역사의 과정과 역사의 종말 사이에는 불연속성뿐만 아니라 연속성도 있다. 이는 지금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종말에 영광을 받으실 바로 그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속의 하나님이 곧 역사 마지막에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실(고전 15:28) 영광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종말에 대한 논의는 역사의 과정에 대한 논의와 분리할 수 없다. 종말에 대한 고려 가운데 구속사, 곧 구속사(救贖史)적 접근 방법은 건강한 방법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구속사(Heilsgeschichte)의 중심

구속사(救贖史)란 인간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행위에 대한 역사를 의미한다. 구속사적인 접근은 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는 일관된 흐름이 있음을 강조하며, 인간의 역사가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흐름에 의하여 이해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구속사적 시각에서 볼 때, 창조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게 되는 인간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 포함된다.

넓은 의미에서 구속사적인 접근은 초기 교회의 이레네우스와 같은 신학자에게도 발견되며, 그 기원은 물론 성경 속에 있다. 구속사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벵겔로 알려지고 있다. 19세기 구속사 학파에 속한 신학자들은 벡, 호프만, 아우벨렌, 켈러가 있다. 그 가운데 구속사적 접근 방법을 가장 체계화한 신학자는 오스카 쿨만(O. Cullmann)이다.

성경 속에 나타나는 구속사를 설명하기 위하여 쿨만은 먼저 고대 그리스적인 시간 개념과 성서적인 시간 개념을 구분한다. 고대 그리스적인 시간 개념에 따르면 시간은 영원토록 순환하는 것이다. 모든 일들은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발생하기에, 오늘 일어나는 일들은 미래에 다시 반복된다. 이러한 순환론적 시간 이해 가운데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시간 이해는 곧바로 이원론적인 구원 이해를 낳는다. 시간이 무한정 순환하는 것이라면 구원이란 이러한 반복적 순환의 틀에서 자유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시간 속에서 ...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일어난다는 생각은 전혀 용납될 수도 ...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구원이란 단지 시간의 순환 과정에 속박된 존재로부터 ... 저 너머의 세계, 곧 피안의 세계 속으로 탈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하여 성경의 시간 이해는 직선적이다. 구속사적 시각은 역사를 직선적으로 이해한다. 역사에는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으며, 종말이 있다. 역사는 무한히 반복되고 영원히 순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마지막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성경의 기자들에 따르면 시간과 역사란 하나님의 목적을 지향하는 일종의 선적 운동(linear movement)이다. 시간이란 계속적인 반복이나 순환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지향하는 하나의 분명한 과정이다. 역사는 하나님이 설정한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며, 미래란 과거에 선포된 약속의 성취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역사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마당이며 무대가 된다.

세계 역사의 모든 사건들 속에는 구원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이 구원의 역사는 세상 역사의 틀 안에서 전개되는 동시에, 세계의 모든 역사를 포괄하는 틀이 된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적 틀 안에서만 그 의미가 획득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은 만물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어 인간의 창조, 이스라엘의 선택과 남은 자의 구원을 거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구원의 흐름 속에서 폭은 점점 좁아지지만 구원의 흐름은 단절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역사적 계시와 구원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원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중심이 된다.

성경은 구원의 역사적 과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결정적인 사건으로 선포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결정적으로 계시하였고 결정적 구원의 사건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거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다시 확대되기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사도들의 선포를 거쳐서 교회의 형성으로 이어지며, 마지막에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상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도달하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끝날 또는 마지막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 시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적인 접근은 역사의 중심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서 발견하며, 이 중심점으로부터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해석한다. 구속사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세계 역사 해석의 중심점으로 보는 역사관이다. 쿨만에 따르면, "구속사(救贖史)란 구속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역이 구약성서에서부터 예수의 재림 때까지 연결되는 하나의 시간적 선의 중간점을 형성한다는 역사관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진행하는 구속 역사의 진정한 중심이며 축이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중심점이며, 이 중심점으로부터 볼 때 역사의 온전한 시각이 얻어진다. 이는 틸리히가 역사 이해는 단지 시간의 물리적 전개에 의하여 결정될 수 없으며, 역사의 중심으로부터 고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연상시킨다.

역사는 물리적 시작과 시간, 공간 안에서의 발전의 마무리에서 이해될 수 없다. 역사의 의미의 시각에서 역사는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작이나 마지막에서가 아니라 역사가 그 뜻을 계시하는 그 점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만약 우리가 이 점을 '역사의 중심점'이라고 부른다면, 또 다시 말할 수 있는 것은 시작과 마지막이 중심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중심이 역사 과정의 뜻에서 그 시작과 마지막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중심은 역사의 의의를 부여해 주는 원칙이 보이는 자리이다. 역사는 그 중심이 구성되는 그 사실에 의하여 구성된다. ... 그러한 중심에 의해서 시작과 종말이 결정된다.

정리하자면, 구속사적인 시각은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선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며, 하나님의 구속사는 창조로부터 그리스도의 사건을 거쳐서 미래의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흐름을 거친다는 것이다. 또한 구원사적 흐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의 중심점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부터 인간 역사의 모든 사건들이 해석된다는 것이다.

4. 구속사적인 종말 이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전개된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적인 시간 이해와 비교하는 가운데 구속사적인 역사 이해를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전개되고 있으며, 이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안에서 그 중심점을 가지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역사는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무대라는 것과 역사의 통일된 흐름은 피조물의 구원을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임을 고찰하였다.

피조물의 모든 역사는 마지막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우주적 역사의 목표는 창조된 우주를 하나님의 지배와 통제 아래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로 표상되는 역사의 목표는 피조물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드라마를 통하여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며 이 세계를 변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킨다.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를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하는 동시에 실현하면서 살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구속사적인 시각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는 기독교의 종말론은 적어도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인 접근은 역사의 결정적 사건이 이미 역사 가운데 일어났으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가운데 임재했음을 강조한다.

둘째,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인 접근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기다림을 강조한다. 이는 종말론적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한 것은 사실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상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궁극적으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인 접근은 역사의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재 가운데 앞당겨 다가와 있음을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마지막에만 머무는 실체가 아니라 이미 현재 가운데 그 빛을 비추는 역동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구속사적 시각에 전개되는 기독교 종말관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강림 속에서 이루어진 과거의 역사적 사건, 둘째 미래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 그리고 셋째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先取)로서의 종말론적인 삶에의 참여이다.

구속사적 시각에서 전개되는 이 세 가지 요소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며, 구속사의 완성과 하나님 나라의 성취라는 하나의 초점 아래 서로 연결된 것이다.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인 접근은 구속사의 완성, 곧 하나님 나라의 성취라는 하나님의 초점 아래서 세 가지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내용을 두 가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와 둘째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변증법적인 긴장 속에서 살펴질 수 있으며, 셋째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선취라는 개념으로 고찰될 수 있다. 이 단원에서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을 살펴보고, 다음 단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에 대해서 고찰하자.

우리는 위에서 첫째 요소와 둘째 요소를 함께 강조함으로써 얼핏 보기에 모순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예수 안에서 도래했다고 말하며, 다른 한 편으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성취는 아직 미래에 과제로 남겨져 있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만일 모순이 아니라면 이 두 가지를 연결하는 논리는 무엇인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의 마지막 시대가 이미 도래하였다.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역사 가운데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역의 초기에 이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였고, 따라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옛 시대는 가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가르침은 신약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도래하게 된 새 시대의 전파자였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절정에 도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하는 역사적 전환점이다.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체는 이 위대한 역사적, 구속적 계시의 신비와 중심점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었기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옛 세계는 끝나고 새 세계가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이후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방향에 대해서 미궁에 빠져 있지 않다. 이는 역사의 종말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앞당겨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성경은 역사의 최종적 완성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역사 안에서 시작된 결정적 사건은 약속의 성격을 띄고 있기에 그 약속이 성취될 최후 순간을 요청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대망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역설적 주장을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는가?

오스카 쿨만은 이러한 역설적 긴장을 결전의 날(D-day)과 승리의 날(V-day)을 구분함으로써 설명한다. 쿨만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결전의 날(D-day)과 승리의 날(V-day)사이에 살고 있다.

전쟁에 있어서 비교적 초기에 결정적인 싸움이 일어났으나 싸움은 계속될 수 있다. 그 싸움의 결정적 효과가 모든 사람에 의해서 인식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이미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전쟁은 불확실하지만 '승리의 날'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신약성서가 시간의 새 구분을 인정한 결과로 의식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계시는,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사건이 곧 뒤따르던 부활과 함께 이미 끝난 결정적 싸움이었다는 그 선포의 사실 안에 확실히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 속에서 원수는 결정적으로 패망하였다. 세계대전에 비유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사건으로서 전쟁에 있어서 결정적 승리의 사건이다. 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종전의 날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전쟁은 한쪽으로 분명히 기울었다. 하지만 아직 최후 승리의 날은 도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결정된 승리를 희망하면서, 마지막을 향하여 진군하는 병사와 같다는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전의 날을 통하여 확정되었다. 하지만 "아직" 승리의 날은 오직 않았다. 쿨만에 따르면 바로 이러한 "이미"와 "아직"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에 기독교 신앙에 나타나는 새로운 종말론적 통찰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일방적으로 미래만 바라보는 종말론도 아니며 이제 종말은 과거의 사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종말론도 아니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종말론적 미래란 그리스도와 성령 속에서 이미 존재했던 것을 ... 전개하며 완성시킴을 의미한다. 구속사적 시각의 종말론은 시작된 종말론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종말론 사이의 건강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현재와 미래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미 성취된 역사의 운명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역사의 종국 사이의 건강한 긴장이 기독교 종말론의 특징이다.

5.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anticipation): 종말은 역사 속에서 현실을 개방화한다.

구속사적인 종말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서 승리를 쟁취하였다. 비록 아직 마지막 승리의 날이 오지 않았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승리에 동참할 수 있다. 새 시대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동터 올랐고 교회는 그 시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뢰비트(Löwith)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에 담겨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모든 것이 '이미'와 '아직' 사이에 일어나는 역사적 성취의 심오한 모호성 가운데 있고, 이로 인하여 신자는 현재와 미래의 급진적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소망한다. ... 이 때문에 그는 기다리는 것과 추구하려고 하는 것을 이미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적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인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취(先取)를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하나님 나라의 선포, 성령의 강림은 종말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 가운데 임재해 있고, 그리스도인은 그 나라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새 시대 속에 살고 있으므로 성경은 교회를 종말론적 공동체로 간주한다. 신약성경의 교회는 종말론적 사건을 선포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를 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성령의 능력 속에서 체험된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는 현재의 세계를 미래를 향하여 개방시킨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를 가져오는 데 있어서 예수 사건과 아울러 성령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속에서 성취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합하는 사람 또는 현실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미래적 나라가 이미 현재 가운데 영향을 미친다고 할 때 그 가능성은 사람이나 피조물 안에 있지 않으며,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다. 미래의 영광은 이미 그리스도인을 비추고 있는 바, 이것을 인식하게 만들고 향유하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장차 올 시대의 축복을 미리 맛보고 있다.

이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선물이며 새 시대의 계시자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 존재를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인도하며, 동시에 우리의 역사를 종말의 새 역사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미 미래의 열매를 맛보고 있다. 하지만 이 열매는 첫 열매에 불과하다. 우리는 미래 완성의 열매를 맛보면서 최종적 완성의 날을 갈망한다. 첫 열매란 장차 올 대추수의 첫 시작을 암시한다. 성령의 임재는 장차 올 최종적 완성의 맛보기(foretaste)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 나라의 능력에 참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세상 질서 속에 침투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최후 승리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며 고난받을 수 있다. 신앙인들은 이미 예수와 성령 안에서 역사 마지막에 일어날 사건들의 놀라운 감격들을 누리고 전파할 수 있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는 현재의 세계를 미래를 향하여 개방하며, 오늘의 삶을 역사화시킨다.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가운데 이미 그 빛을 드리운다는 것은 현재의 역사가 미래를 향해 움직여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상 기독교 신앙의 종말론은 이 땅과 무관한 하늘의 추상적인 영원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종말 이해는 현재의 역사를 과거의 결정적인 사건에 근거하면서 미래로 인도하는 종말론이다.

구속사적 시각에서의 종말 이해는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땅의 미래를 인식한다. 종말에 대한 건강한 기대는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희망하는 가운데 그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책임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몰트만은 종말론적 희망 속에 담긴 역사의 추진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신앙이 희망으로 전개될 때 신앙은 조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게 되고, 참게 되는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하게 된다. ...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자는 주어진 세계와 타협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세계로 인하여 고난을 받기 시작하며 이 세계와 모순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이 세계와의 불평화를 뜻한다.

하나님 나라의 선취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며, 그 기대와 희망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향한 삶의 촉진제가 된다. 하나님 나라의 선취를 맛보는 것은 땅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여 하늘의 삶을 구하게 하며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게 한다. 종말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데 부지런하다. "종말론적 동기, 주님의 재림이 아주 가까이 온 것으로 의식하는 것 등은 현재의 삶에 부정적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기대는 이생에 대한 책임을 상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진시킨다."

6.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 접근의 대략적 모습을 개괄해 보았다. 종말에 대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전적으로 새로운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시작 또는 과정에 대한 논의와 마찬가지로 종말에 대한 논의도 역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라는 틀에서 다루어질 때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하였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종말론의 주제는 기독교 창조론, 구원론 및 섭리론의 주제와 상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 구원, 종말 등과 같은 주제들을 다룰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주제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동일한 하나님의 사역을 여러 측면에서 살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나님이 피조물과 맺으시는 관계가 시작의 측면에서 살펴질 때 그것은 창조론이 된다. 피조물을 역사 속에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역사 과정의 측면에서 살펴질 때 그것은 섭리론이 된다. 이 세계 가운데 선한 일을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완성하실 하나님의 사역을 마지막(종말)의 시각에서 살필 때 그것은 종말론이 된다.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창조, 섭리 및 구원에 관한 가르침과 일치하며, 믿음에 대한 가르침은 희망에 대한 가르침과 일치한다.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인 접근은 곧 구원 사건에 대한 종말론적 접근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속에서 이미 계시된 진리를 "신앙으로" 굳게 붙드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가운데 종말적으로 실현될 영광을 "희망으로" 바라보며 나아간다. 칼빈은 이미 기독교 강요에서 신앙과 희망 사이의 이러한 건강한 긴장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희망은 신앙이 이미 하나님의 참된 약속이라고 믿은 것들을 기대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이 참된 분임을 믿고, 희망은 이 진리가 계시될 그 때를 기다린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믿고, 희망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아버지 되심을 보여주실 것을 고대한다. 신앙은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믿고, 희망은 언젠가 그 사실이 계시될 것을 기대한다. 신앙은 희망의 기초가 되며, 희망은 신앙을 양육하며 지탱한다.

그리스도의 삶과 소명(召命)의 핵심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건강한 긴장 속에 있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과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에 대한 희망으로 이루어진다. 역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대망하는 가운데 미래의 완성을 지향하는 점진적 진행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지금"의 시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결정적으로 계시된 종말의 시기인 동시에 미래를 향하여 계속 전진하는 시기이다.